Silver Eyes Under Black Feet RAW novel - chapter 181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오르티스는 지체 없이 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폐하. 그곳은 대륙이라기보다 여러 섬들이 모인 군도에 가깝지요. 사람이 충분히 살 만큼 커다란 섬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섬도 있답니다. 그러나 모든 섬이 서로 비할 바 없이 아름답지요.”
“이곳에서 가깝나요?”
“예, 전하. 거리는 가깝지만 유속이 매우 빠르고 험하여 많은 뱃사람들이 군도에 닿지도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답니다.”
“저런.”
릴리는 안타까운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섬나라들은 모두 매우 풍요로워 무사히 닿기만 한다면 온갖 진귀한 것들을 사들여 올 수 있지요.”
그러며 오르티스가 손짓했다. 그와 함께 온 시종 하나가 비단에 싸인 것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오르티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쟁반에서 비단을 걷어 냈다.
“아마 이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실 겁니다, 전하.”
릴리가 궁금하여 목을 길게 뺐다. 아내의 낯빛은 이제야 환해졌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게 뭐죠, 오르티스?”
“그들은 이것을 석양의 열매라고 하더군요.”
오르티스가 다가와 릴리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주먹보다 작고 동그라며 붉은 빛을 띠었으나 빛이 닿는 곳마다 황금빛이 반짝였다. 꼭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릴리는 ‘와’ 하는 감탄사를 뱉었다.
“이 빛깔 좀 보세요, 칼.”
릴리는 ‘페하’라는 존칭도 잊은 채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가, 핀을 비롯해 저 멀리 연회장 구석구석을 지키는 근위병까지 순간 움찔 놀라며 발투만 왕을 바라보았다.
뭐? 방금 왕비 전하께서 뭐라고 하셨지? 칼? 칼이라고? 누가 칼이야? 설마 설마 하지만 그런 애칭을 지닐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릴리가 제 손에 든 열매를 이리저리 돌리며 보여 주는 이. 그걸 아주 기꺼이 바라보는 이. 카르낙 발투만밖에 없었다.
“이런 건 처음 봐요. 열매라면, 이건 먹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전하. 한입 베어 물어 보시지요. 아주 달고 맛나답니다.”
릴리가 눈을 빛내며 카르낙에게 그것을 권했다.
“드셔 보세요. 맛있대요.”
그러나 카르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먹어 봐.”
궁금하고 신기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는 그대 같으니.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열매를 갈무리하려 하자 카르낙이 불현듯 그것을 저지했다.
“아니, 잠깐.”
그러더니 제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카르낙은 열매를 아주 작게 도려내 오르티스에게 내밀었다.
“알다시피 오르티스, 내가 리오의 상인에게 크게 데인 적이 있어서 말이야.”
오르티스는 카르낙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알아들었을 뿐 아니라 매우 잘 이해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제가 먼저 먹어 보겠습니다.”
그는 공손한 두 손으로 열매 조각을 받아 제 입에 밀어 넣어 꼭꼭 씹은 다음 꿀꺽 삼켰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에게 별다른 변화가 없자 그제야 카르낙은 열매를 릴리에게 건넸다. 겉은 그토록 붉은데 열매의 속은 황금색과 비슷한 진한 노란색이었다.
껍질의 붉은 기가 스며들어 정말로 석양의 빛깔과 꼭 닮아 있었다. 릴리는 신이 나 열매를 베어 먹었다. 달짝지근한 과즙이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손등으로 그것을 훔치며 환히 얼굴을 빛냈다.
“맛있어요! 정말이에요. 정말 달아요!”
그러며 그것을 카르낙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이 맛을 나누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듯 독촉했다.
“어서요!”
카르낙은 하는 수 없이 릴리가 건넨 열매를 한입 베어 물었다. 과연 달고 부드러웠으며 과즙은 풍부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어때요? 맛있죠?”
릴리가 흥분하여 묻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르티스, 하나만 더 주겠어요?”
“아, 예. 물론입니다, 전하.”
오르티스의 시종이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릴리는 에이가에게 다가가 선뜻 열매를 건넸다.
“먹어 봐요, 에이가.”
“…예?”
그러더니 쟁반에서 하나를 더 집어 핀에게 건넸다.
“여기요.”
“…….”
“정말 맛있어요.”
또 하나를 집어 이번엔 세일린에게 건넸다.
“자요, 먹어 봐요. 정말 달아요.”
“…….”
거침없이 과일을 나누어 주는 왕비의 모습에 오르티스는 당황했다.
@Ninga
석양의 열매는 왕과 왕비를 위한 진상품이었다. 금은보화보다 값비싼 것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은 오로지 왕과 왕비에게만 있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발투만 왕비는 이 귀하디귀한 열매를 저보다 하찮은 이들의 손에 쥐어 주며 그것을 먹어 보라 권하고 있었다. 그것도 당신은 오로지 딱 한입만 베어 드셨으면서 제 신하들에게는 열매 하나를 통째로 내주는 것이다.
아깝지도 않은가. 그렇게 다 나누어 주면 또 언제 맛볼 수 있을지 모르는 귀한 것인데. 오르티스는 감히 나서서 왕비를 말려야 하는지, 아니면 잠자코 쟁반 위의 열매가 모두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것은 과일을 손에 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왕비가 제 손에 들려 준 이 금보다 귀한 열매를 과연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영 혼란스러운 듯싶었다.
“오르티스.”
카르낙이 그를 불렀다. 어서 먹어 보라며 닦달을 해 대는 파니릴리를 넋 놓고 쳐다보던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왕의 부름에 대답했다.
“예, 예! 폐하!”
“왕비가 네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꽤 신이 난 걸 보니.”
릴리는 에이가의 입에 열매를 넣지 못해 안달이었다. 성화에 못 이겨 에이가가 열매를 한입 베어 물자 릴리의 얼굴이 달처럼 환해졌다. 그것을 보는 카르낙의 얼굴에도 어렴풋 미소 같은 것이 어렸다. 한결 부드러워진 왕의 얼굴에 오르티스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리오에 대한 그의 분노를 풀어 버릴 수만 있다면 왕비가 금괴를 나누어 준다 한들 무엇이 대수겠는가. 그보다 더한 것을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왕과 왕비에게 바친 조공품이니 그것을 어떻게 쓰든 그들의 마음 아니겠는가. 더 내놓으라 엄한 곳에 떼를 쓰지만 않으면 된다.
“저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폐하. 리오의 모든 형제들은 언제까지고 발투만 왕가의 충직한 아군임을 부디 알아주십시오.”
카르낙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네 형제들 중에 배신자가 있었다, 오르티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 다시 또 네 형제들 중 하나가 내 목을 노리지 않는다고 너는 내게 맹세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폐하. 반역을 저지른 반스 이드위너는 리오로 송환된 뒤 돌팔매질 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시신은 반역자라는 팻말을 달고 여전히 광장에 효수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형틀을 내릴 계획이 없습니다. 그것은 리오의 시민 모두가 동의한 바, 모두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을 겁니다.”
“…….”
왕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채 오르티스는 말을 이었다.
“리오의 시민들에게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리오의 자유를 허락해 주신 유일한 왕이시며 또한 폭풍으로 인한 기근에 시달리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당신의 식량을 내주신 성군이십니다. 그런 분께 우리가 어떻게 칼을 겨눌 수 있겠습니까. 반스 이드위너 같은 자가 또다시 나타난다면 그땐 리오의 모든 시민을 죽여 주십시오. 도시를 모두 불태워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하여도 마땅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허나 부디 이 간곡한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부디 리오의 시민들을 다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받아주십시오. 그것을 위해 저는 리오를 대표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내놓겠습니다.”
목숨을 내놓겠다… 라. 카르낙은 제 손에 든 단도를 굴렸다. 이것을 던져 주고 증명해 보이라고 해 볼까. 그러면 오르티스는 과연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러나 한껏 들떠 있는 릴리를 생각했다. 여기서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할까. 그게 옳은 걸까.
왕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오르티스뿐이 아니었다. 에이가의 곁에 서 있는 릴리 역시 그의 답을 기다렸다. 여전히 활기를 띤 채 눈을 반짝이며 말이다.
“그럴 필요 없다, 오르티스.”
단검을 품 안에 집어넣는 카르낙의 시선이 릴리에게 닿았다.
“너의 충정은 이미 증명된 것 같으니.”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감격에 겨운 오르티스가 벅찬 마음을 억누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리오의 형제들 모두가 기뻐할 것입니다.”
“언젠가 내가 리오로 향할 것이다. 네 말처럼 반스 이드위너의 시체가 광장에 효수되어 있는지 확인하러 말이야.”
“물론입니다, 폐하. 부디 가까운 시일 내에 리오에 방문해 주십시오. 리오의 모든 시민들은 기꺼이 두 분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며 온 마음을 다해 극진히 모실 것입니다.”
“자.”
하고 카르낙이 제 손에 든 열매를 그에게 던졌다. 오르티스는 엉겁결에 날아온 것을 품에 받아 들었다. 왕과 왕비가 베어 문 자국이 고스란히 찍힌 석양의 열매.
“이 방의 모두가 열매를 맛보는 것 같으니 네 몫이다.”
가득하던 쟁반 위는 텅 비었다. 핀은 제 손에 들린 열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건배라도 하듯 그것을 치켜들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잘 먹겠다, 오르티스.”
그러고는 핀은 크게 열매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주저하던 이들이 하나둘 열매를 맛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릴리는 마침내 모두와 제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뻐 환하게 웃었다.
오르티스는 제 손에 든 열매를 소중히 품으로 갈무리했다. 아마 감히 이것에는 입도 대지 못할 것이다. 그저 이 은혜로운 열매가 영원히 썩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꼭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카르낙은 각 영지를 상징하는 깃발을 단 작은 나무토막들을 테이블 한편으로 쓸었다. 커다란 테이블을 모두 차지한 엘버그의 지도 위에 캘던성 보수 공사를 위한 단면도가 펼쳐졌다.
“성벽을 좀 더 증축해야겠어. 만약 적이 안뜰로 들어올 때를 대비해 탑도 재정비해야 돼. 성이 완전히 함락되지 않게 하려면 탑으로 통하는 문의 수를 줄여야 해. 물론 개패도 가능해야 하지. 다행히 리오에서 일찍 빚을 갚아 준 덕에 저장고는 꽉꽉 들어차겠는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카르낙이 단면도에 열중하다 도저히 못 참겠는지 핀을 향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르티스가 리오로 돌아간 다음부터 핀은 입은 꼭 다문 채 눈으로 집요하게 카르낙을 쫓아다녔다. 어찌나 빤히 쳐다보는지 얼굴이 뚫릴 지경이었다.
“내 얼굴 하루 이틀 봐? 아니면 새삼스레 반하기라도 했어?”
“지랄은.”
핀이 더럽다는 듯 욕을 지껄였다.
“그러면 그만 좀 쳐다보시지. 괜한 오해 사기 전에.”
핀은 자세를 고치며 팔짱을 끼었다. 그의 얼굴은 훨씬 집요해졌다. 카르낙은 더욱 짜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