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Temptation of the Iceworld RAW novel - Chapter 1
-프롤로그-
“……그리고 아기 돼지 삼형제는 오래오래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책을 읽던 남자의 손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목소리가 잦아들자 반짝거리던 눈 한쌍이 일시에 아쉬운 빛을 발했다.
“자. 약속대로 이게 마지막 책이다. 이젠 자야지?”
“하나만 더요.”
침대 위에 누워 아버지가 읽어주는 동화를 듣던 여자아이는 못내 아쉬운 듯 아버지를 다시 조르기 시작했다.
“안 돼. 이제 그만. 약속했지?”
“….네에…”
여자아이의 풀 죽은 표정에 아이의 아버지는 순간 마음이 약해졌지만 한 권을 읽어줘도 다시 또 다른 동화를 읽어달라고 할 것이 분명하므로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일 또 읽자.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그래도 아쉬운 듯 해 보이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머리맡에 있는 작은 스탠드 불빛만을 남기고 방의 불을 껐다.
“잘 자요. 공주님.”
“네.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아이의 아버지가 문을 닫고 나가자 아이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기돼지 동화 후에 읽으려고 준비했던 동화책이 생각나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아이는 눈을 번쩍 뜨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예쁜 분홍빛 책상 위에 놓여있는 동화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펼친 아이는 한글을 뗀지 얼마 되지 않은 서투른 솜씨로 글을 읽어나갔지만 글자를 읽는 것에만 신경이 쓰여 이야기에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책의 내용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아이는 잠깐 고민하다 방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빠는 분명 오빠들이 자는지 한번 확인한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아이는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노란색 잠옷 위로 늘어트린 채 작은 거실을 지나쳐 곧장 오빠들의 방문 앞에 섰다. 하지만 쉽게 방문을 열지는 못했다. 오빠들은 분명 잠이 들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들의 방에 여동생이 불쑥 들어오는 것을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런 늦은 시간에.
우선 아이는 작은 인기척을 냈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고 살그머니 돌렸다. 그러자 안에서 다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아빠가 다시 돌아오신 줄 알고 오빠들이 다시 침대로 뛰어들고 있을 것이다.
동화책을 가슴에 꼭 안은 여자아이는 용기를 내어 방문을 열고 살며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빠들이 자신을 발견하기를 기다렸다.
“뭐야? 아빠 아니잖아.”
작은오빠의 목소리였다.
“너 여기 왜 왔어?”
큰오빠다. 그래도 큰오빠의 목소리가 좀 더 부드러웠다.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지만.
“큰오빠. 나 동화책 하나만 읽어줘.”
“아. 진짜.”
짜증스러워하는 작은오빠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그가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잠이나 자. 책은 무슨.”
그리고는 문 앞에 선 여동생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자신의 책상 앞으로 가 컴퓨터를 켰다.
“너 때문에 놀라서 컴퓨터도 그냥 껐잖아. 형, 빨리 와.”
작은오빠의 시근덕거림에 아이의 표정은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큰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가서 자.”
드디어 아이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무시하고 게임에 빠져드는 두 오빠들을 노려보았다.
“안 읽어주면 아빠한테 이를 거야.”
울먹이는 여동생의 말에 두 남자아이의 눈이 동시에 여동생을 향했다.
“뭐?너는? 너두 지금 안 자잖아.”
작은오빠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그녀를 향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몰라. 책 안 읽어주면 지금 울 거야. 크게!”
여동생의 엄포에 두 남자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동생이 울면 혼이 나는 사람은 분명 두 남자아이들이었다. 물론 여동생도 잠을 자지 않고 오빠들 방에 들어온 잘못이 있지만 여동생은 부모님에게 마냥 귀여운 아기였다. 그러니 그런 귀여운 아기를 울린 오빠들에게 모든 비난이 날아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은 지금 이라는 규칙을 어기는 중이었다. 이라는 규칙을 분명히 지키기로 약속했지만 그들은 이 규칙을 어기고 밤이 늦도록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여동생을 울린 문제를 떠나 된통 혼쭐이 날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규칙을 어긴 벌로 용돈을 깍이는 것까지.
여자아이는 오빠들끼리 주고받는 시선에서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현수야, 책 한 권만 읽어주면 자러 갈 거야?”
거봐.
“응. 현호 오빠.”
큰오빠, 현호의 질문에 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말 없기다. 딱 한 권이야!”
작은오빠의 확인하는 질문에 아이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맹세해!”
“맹세.”
여자아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맹세’라는 단어를 명확히 발음했다.
“줘봐.”
큰오빠의 말에 아이는 자신의 가슴에 꼭 안고 있던 동화책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얼음공주? 큭큭큭. 공주? 아이고 배야.”
책의 제목과 표지에 그려진 얼음공주의 그림을 본 작은오빠는 자신의 침대에 엎어지며 소리죽여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큰오빠 또한 눈살을 찌푸리며 정말 읽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말고 없어?”
“응. 이거 읽어줘.”
고집스러운 여동생의 얼굴을 흘끗 바라본 현호는 자신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더니 건성으로 제목을 읽어내렸다.
“얼음공주.”
“우웩!”
작은오빠의 이상한 소리에 여자아이는 눈에 힘을 주며 그를 노려보았다.
“야. 현규 너. 그만해. 빨리빨리 읽어주고 보내야지.”
현호의 목소리에 침대에 누워있던 현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현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숨죽여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래서 마녀의 저주로 아름다운 공주는 얼음성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공주님 이름이 뭐야?”
현호는 빠르게 글을 읽어가던 중 불쑥 물어오는 여동생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반만 더 읽으면 끝인데 이렇게 불쑥 질문을 하니 맥이 끊겼다. 그러니 자연 불퉁한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뭐?”
“공주님 이름이 뭐야?”
“야. 공주 이름이 뭐가 중요해? 얼음공주라잖아. 그냥 빨리빨리 읽어.”
여동생의 질문에 황당한 표정으로 있던 현호 대신 현규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중요해. 얼음공주는 이름 아냐.”
“좋아. 좋아. 가만 있어봐…..이름은 없는데?”
현규와 여동생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현호는 얼른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책장을 몇 장 더 넘기며 여동생이 원하는 공주의 이름을 찾았지만 동화책 어디에도 공주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오로라!”
그때 현규의 목소리가 현호를 살렸다. 현규는 언젠가 과학동화에서 본 적이 있는 추운 나라의 오로라 현상을 떠올렸다. 어차피 얼음성이니 추운 나라에 있겠지.
“오로라? 오로라 공주……좋아.”
현호와 현규는 공주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는 여동생의 허락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마음에 안 든다고 우기면 또 시간이 얼마나 흐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남자아이들은 얼른 동화책을 읽어주고 여동생을 떼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빠른 속도로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자는 얼음궁전에 갇혀있던 공주를…..”
“오로라 공주님.”
현호는 또다시 공주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은 자신의 실수를 상기시키는 여동생을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동화를 읽는 동안 어느새 침대에 드러누운 여동생이 눈을 감는지를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읽기 속도가 조금이라도 느려질라치면 여동생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이번처럼 공주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어김없이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왕자는 얼음궁전에 갇혀있던 오로라 공주를 구해….”
한동안 현호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동화책의 거의 마지막을 읽고 있던 현호의 목소리를 중지시킨 것은 현규였다.
“형. 쟤 잔다.”
현호는 현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으로 잠든 여동생이 보였다.
“씨. 여기서 자면 어떡하냐?”
“놔둬 형. 내일 아침 일찍 깨워서 보내자.”
현규의 말에 현호는 잠시 망설이다 현규가 앉아있는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큰오빠의 침대에 누운 여자아이는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이는 아름다운 얼음성과 그 성에 갇힌 공주님을 구하는 멋진 왕자님의 꿈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자신이 오로라 공주였고 그런 자신을 구하러 온 왕자님의 멋진 모습에 여자아이는 황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꿈속에서 여섯 살 귀여운 여자아이, 현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