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Temptation of the Iceworld RAW novel - Chapter 18
17장. O Sole Mio(나의 태양이여)
“출발!”
월동대 대장 장영진 박사의 출발신호와 함께 두 대의 설상차와 세 대의 스노모빌이 일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얗게 덮인 눈밭을 가로지르며 그들이 지난 자리에는 하얀 눈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설원 위를 가로지르는 스쿠터 형태의 스노모빌 세 대에는 월동대 부대장 강태훈 박사와 이승규 연구원, 유원호 통신원이 각각 바람을 가르고 달리고 있었다. 맨 선두에서 달리는 강태훈 박사의 스노모빌이 지나간 자리를 나머지 대원들이 나누어 탄 설상차 두 대가 뒤따르고 있었고, 그 뒤로 나머지 두 대의 스노모빌이 달리고 있었다.
오늘은 세종기지의 공식적인 휴무일이었고 발전담당 김수한 씨와 영숙만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 모두가 펭귄마을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젠투펭귄의 대이동이 있을 때였고 운이 좋으면 오늘 하얀 눈밭을 가로지르는 젠투펭귄의 행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수는 설상차 차창으로 보이는 온통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제발 오늘 그 유명한 펭귄 행렬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녀에게는 단 한 번뿐인 기회였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올테고 그리고 다시 여름이 돌아오면 자신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언제 다시 남극을 방문하게 될지 알 수 없었더. 어쩌면 영원히 못 올 수도 있었다. 그녀는 눈길을 돌려 자신이 탄 설상차 앞에서 길을 트고 달리고 있는 스노모빌을 바라보았다. 그가 탄 스노모빌 주변으로 뿌연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며 현수는 만약 이 겨울이 끝나고 여름이 온다면 그와의 사랑도 끝나지 않을까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랑? …..그를 사랑하는 걸까? 현수는 갑자기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랑이라는 단어에 당황했다. 명운 선배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을 때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리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강태훈, 그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리고 마치 그 단어와 그가 한덩어리인 듯 자연스러웠다.
현수는 오른손을 들어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가슴 한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사랑일 것이다. 아니, 사랑이었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그와 함께 있고 싶고, 보고 있어도 그가 그리운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닐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바라던 진정한 사랑이었다. 현수는 바랐다. 제발 내게 처음 찾아온 이 사랑이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아!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연방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펭귄마을에 가까워지자 모두들 타고 있던 스노모빌과 설상차에서 내려 걸어서 움직였다. 평화로운 펭귄마을에 시끄러운 기계음을 울려 펭귄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는 장 박사의 명령이었다. 한두 명씩 무리를 지어 사진도 찍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그들은 펭귀마을에 가까워질 즈음 이 멋진 광경에 걸음도 멈추고 모든 동작을 멈춘 채 감격에 젖고 말았다.
7월의 추위에 언 바다 위를 일렬종대로 행진하는 수많은 펭귄의 행렬은 신비한 동물의 세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연의 섭리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맨 앞, 선두에서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는 펭귄의 대장이 걸음을 멈추면 그 긴 행렬이 차례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대장이 움직이면 그 행렬도 서서히 대장의 움직임에 맞추어 다시 행진하고 있었다. 행렬에서 빠지지 않으려 얼음 위를 뒤뚱거리던 어린 펭귄이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지는 장면에서부터 행렬에서 이탈하는 반항적인 어린 펭귄에게 소리를 지르는 어미펭귄까지. 저 아름다운 행렬이 주는 감동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멍하게 펭귄행렬을 구경하던 대원들은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더욱더 가까이서 구경하고자 자리를 옮기는 사람, 또 멀리서 이 장면을 한 눈에 담으려고 위치를 잡는 사람 등으로 나뉘어 제각각 흩어지고 있었다. 물론 처음 기지에서 출발할 때 강 박사의 주의 사항을 숙지한 터라 펭귄마을에 설치된 대피소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만 움직였다. 혹시 날씨가 갑자기 험악해져 눈 돌풍이 불기라도 한다면 즉각 대피소로 피하기 위함이었다. 펭귄마을에 세워진 두 군데의 대피소는 직사각형의 컨테이너 박스로 지어져 있었고 잠시 지나는 눈 돌풍을 피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현수는 흩어진 대원들처럼 자신도 사진기를 꺼내어 이 진귀한 광경을 한 컷에 담을 위치를 물색했다. 그리고 약간은 높은 바위 위로 기어올라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기의 줌 기능을 이용해 특색 있는 펭귄의 귀여운 모양도 찍고 반쯤 언 바다를 배경으로도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들을 현상해 한국에 있는 작은오빠에게 보여준다면 아마도 현규 오빠는 남극에 오려고 할지도 모른다. 사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여기 있었군.”
현수는 뒤쪽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올라있는 바위 아래서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잔뜩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한 그의 눈빛에 그녀의 눈빛도 흔들렸다.
“거기 얼마나 더 있을 거지?”
“음….글쎄요. 좀 오래 있을까 해요.”
그녀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그의 표정이 못마땅하다는 듯 슬쩍 틀어졌다.
“그건 좀 곤란한데.”
현수는 그의 곤란하다는 말에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내가 그 바위 위로 올라가 당신한테 키스하면 다들 사람들이 다 볼 것 아냐.”
맙소사! 현수는 그의 뻔뻔스러운 말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바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겪어본 바로는 그의 저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땅으로 발을 내리려 하자 그가 갑자기 그녀를 막아섰다.
“왜 이래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여기선 안보여.”
“그래도 안 돼요. 빨리 비켜요.”
현수는 그의 어깨를 힘껏 밀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저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더욱 몸을 붙여왔다.
“정말! 강태훈 박사님. 체통을 좀 지켜요.”
“난 그런 거 없는데.”
그리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을 듯 가까워지자 그녀는 고개를 젖히며 그의 입술을 피했다. 그리고 재빨리 속삭였다.
“안 된다니까.”
“돼.”
그녀가 내려오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아선 그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곧바로 그녀의 입술에 부딪쳐왔다.
“흡.”
그녀는 그의 어깨를 때리며 반항했지만 그의 입술은 사정없이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있었다. 현수는 그의 어깨너머로 혹시 대원들이 보일까 두려워 계속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자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의 혀가 그녀의 혀를 빨아들여 그의 입안으로 끌어당기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의 밀어붙이는 힘에 밀려 바위 위에 비스듬히 기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반응하고 있었다.
“하아…”
둘의 입술이 크게 열리고 서로의 혀를 빨아들이며 삼키는 그들의 키스로 주변은 뜨거운 열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연방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이 주변의 공기와 섞이고 그 열기가 희미한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놓아주고 바위 뒤로 움직이는 폼에 긴장이 묻어 있었다. 그와의 키스에 열중한 채 정신이 아득해져있던 현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바위 뒤를 살피던 그가 재빨리 그녀에게 돌어오더니 그녀를 바위에서 번쩍 안아 내렸다.
“갑시다. 돌풍이야.”
돌풍? 무슨? 현수는 돌풍이라는 말에 당황했다. 설마 갑자기 나타난다던 눈 돌풍을 말하는 것인가. 급히 바위를 도는 그의 발검음에 그녀도 덩달아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서 커다란 바람소리와 세찬 소용돌이 바람이 보이자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돌풍이 부는 주변으로 날리는 눈보라가 과연 위협적이었다.
현수는 그가 움직이는 방향을 보며 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짐작했다. 제1대피소. 분명 그가 움직이는 곳은 펭귄마을의 제1대피소일 것이다. 아마도 다른 대원들도 이미 두 개의 대피소 어느 곳이든 몸을 피했을 것이다.
드디어 제1대피소에 도착한 태훈은 문을 열고 그녀를 먼저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도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급히 무전기를 작동시켰다.
“장 박사님. 응답하세요.”
[치익. 장 박사다. 우리는 모두 제2대피소에 있다. 현재 인원 파악하라.]
“여기는 제1대피소입니다. 윤현수 선생과 저, 둘입니다. 거기 인원은 어떻게 됩니까?”
[젠장. 같은 크기의 대피소가 둘인데 거긴 둘이고 여긴 열명이야. 복잡해.]
장 박사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현수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려 애를 써야했다. 좀 고르게 피할 것이지 하필 대피소 하나에 모두 집중되었으니 저런 투덜거림이 나올 만했다. 그녀가 웃음을 참으며 미소를 머금자 태훈은 무전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곧장 그녀를 안았다.
“풋. 뭐하는 거예요?”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그의 느물거리는 표정에 현수는 더욱 큰 미소를 지었다.
“정말!”
“정말 뭐?”
그러며 다가온 그의 입술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조금 전 바위 위에서 못 다한 입맞춤을 마저 하려는지 그의 입술은 다시 조금 전의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들이 대피해있는 대피소 문이 덜컹거리자 현수는 재빨리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끼익.
문이 열리고 차가운 바람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이승규 연구원이었다.
그의 등장에 놀란 사람은 그녀와 태훈만은 아니었다. 승규는 갑작스러운 돌풍에 놀라 무작정 뛰어든 대피소 안에 윤 선생과 태훈, 단 둘만이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산통 한번 제대로 깨는구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두 사람의 애틋한 열기로 가득한 대피소 안에 뛰어든 자신이 못마땅한데 저 두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말이다. 벌써 자신을 향해 못마땅함이 잔뜩 묻은 눈길을 보내는 태훈을 봐도 알 수 있었다.
태훈은 젠장. 하는 욕설과 함께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이승규 연구원은 여기 있습니다.”
태훈의 응답에 한동안 무전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잠시 후 장 박사의 웃음기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승규 대원에게 건투를 빈다고 전해 달라.] 승규는 ‘끙’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이놈의 돌풍이 빨리 지나야 강 선배의 저 칼날 같은 눈빛에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현수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대피소 안의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실 두 사람만 있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그렇다고 이승규 대원을 내쫓을 수도 없는 일이니 그냥 현실을 받아들여 세 사람이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며 시간을 보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승규 연구원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레이저 광선이라도 쏘는 듯 못마땅하다는 눈빛이었고 그런 그의 눈빛에 주눅이 들어 괜한 헛기침만 하는 승규를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살벌한 분위기에 현수는 좌불안석이었다. 두 사람만 대피소에 있으면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는데 이승규 씨가 합류해줘 어쩌면 더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하던 현수는 도대체 이 두 사람이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저보고 어쩌라고요!”
갑자기 승규가 조용한 침묵을 깨고 태훈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태훈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뭘?”
“전 정말 몰랐다고요. 제가 지금 저 바람 부는 밖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까?”
“나가고 싶으면 나가든가.”
승규의 말에 대답하는 태훈의 목소리에는 심술이 잔뜩 묻어있었다. 현수는 태훈과 승규의 대화에 영문을 모른 채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두 분 왜 그래요? 싸우는 거예요?”
“아니.”
“아닙니다.”
그녀의 질문에 동시에 부정하는 그들의 대답에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현수는 그런 둘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지만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태훈은 일찌감치 침대에 들어 잠을 청했지만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현재 기지 내 대원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하루 네 시간 정도를 제외하고는 암흑에 둘러싸인 기지 내부에서만 생활하다보니 자연히 활동량도 줄어들고 더불어 기분까지 저조해지고 있어싿. 하지만 매일 아침 하는 회의를 건너뛰지 않았고 되도록 모든 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매일 한두 시간씩은 대원들이 모여 운동을 즐겼고 취미활동을 할 수 있도록 권장했으며 남는 시간은 책을 읽도록 하고 있었다. 그래도 저조해지는 기분을 단번에 끌어올리기는 힘이 들었다.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공기의 중요함을 모른다고 했던가. 빛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는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 햇빛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사이가 없었다.하지만 남극의 겨울은 달랐다. 하루 종일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자신의 머릿속도 어두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불어 주고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면 남극의 겨울은 악몽이 된다. 한마디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대원들이 이 어둡고 기나긴 겨울을 무사히 지내게 하기 위해 장 박사와 강 박사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팀별 탁구대회도 정기적으로 개최했고, 어쩌다 날이 맑으면 설상축구를 한바탕 거하게 즐기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햇빛이 비치는 날은 그렇지 않은 날에 비해 턱없이 적었고 대원들의 사기는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태훈은 그런 것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욕구불만이었다. 여자가 없는 생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극 월동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여자가 그립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자로 인해 고민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윤현수, 그녀가 자신의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태훈의 말 못할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입술을 맛보고 그녀의 일부를 느끼면서 그의 욕구불만은 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대체가 두 사람만의 완벽한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놈의 기지 안, 어느 곳에서도 두 사람만의 공간은 없었다. 기지 안에 공간이 없다면 밖으로 나가면 되지만 밖은 지금 영하2,3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그녀의 맨살을 하나라도 느끼려 옷깃이라도 들추다가는 얼어 죽을 각오를 해야 할 판이었다. 태훈은 그녀와의 키스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더한 것을 원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녀를 온전히 가지고 싶었다. 그 상상만으로도 자신의 몸 일부가 뻐근한 불편함을 내보이고 있었다. 지금처럼.
태훈은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젠장. 한겨울에 냉수욕을 하고 싶게 만드는 자신의 처지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태훈은 침대에서 내려서 파카를 걸쳤다. 맥주라도 한잔 해야 할 것 같았다. 며칠 전 들어온 맥주를 한잔 마신다면 그나마 잠이라도 잘 수 있을 듯 싶었다.
태훈은 본관으로 들어가 식당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던 태훈은 휴게실에서 흘러나오는 TV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휴게실 문을 열어보았다.
“안 자요?”
태훈의 질문에 영숙이 TV에서 눈을 떼고 그를 돌아보았다.
“안 잤어?”
“네. 영화 보는 겁니까?”
“음. 역시 로마의 휴일은 봐도, 봐도 재밌어.”
태훈은 영숙의 표정에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덩치는 저래도 속은 여린 여자였다.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에 감동받고, 길에 버려진 개 한 마리 그냥 보내지 못하는 누이였다. 태훈은 그런 누이를 보다 몸을 돌렸다.
“조금만 보고 들어가 자요.”
“난 오늘, 밤 샐 거야.”
그녀의 말에 태훈은 미소를 지으며 휴게실을 나섰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다 문든 멈추고 그녀가 있을 숙소동으로 눈길을 주었다. 뭘 하고 있을까? 이미 잠들었을까? 태훈은 침대에 누워 있을 그녀을 상상하다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자신이 마치 그녀를 안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발정 난 수캐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녀가 혼자 있다. 여자들의 숙소라고 정해준 숙소 건물에 그녀 혼자 있을 것이다. 갑자기 그 사실만이 태훈의 뇌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태훈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욕망 하나 참아내지 못해 그녀의 방으로 몰래 숨어들다니, 그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녀를 가지게 되는 순간은 여유롭고 아늑한, 그런 시간과 공간이어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 그 사실을 되뇌며 걸음을 옮기던 태훈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젠장, 젠장이었다.
현수는 책상 앞에 앉아 정말 오랜만에 편지를 쓰고 있었다. 손으로 직접 편지를 써내려가는 일은 고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컴퓨터가 있어 이메일을 많이 이용했지만 그 땐 편지지에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이 왠지 낭만적이란 생각에 가끔 친구에게나 군대 가 있는 오빠에게 편지를 보내고는 했었다. 쿡. 그러고 보니 정성들여 쓴 편지에 선물까지 한아름 준비해 그 당시 좋아했던 연예인에게 보낸 일도 꽤 되었던 것 같았다. 가만있자. 그 당시에 좋아했던 연예인이 누구였더라? 현수는 들고 있던 볼펜 뒤꼭지를 입에 물며 얼마 지나지 않은 옛 시간을 추억했다.
오영빈, 차현빈, 강설태…..많기도 많았네. 그 중 그녀가 가장 빠져들었던 연예인은 강설태였다. 키가 크고 단단한 몸에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표정으로 여고생들이 빠져들기에는 충분한 조건이었다. 게다가 그 우수에 젖은 눈빛…..가만, 그러고 보니 이름도 그렇고 이미지도 그렇고 그와 비슷하네. 강태훈, 현재 그녀가 빠져있는 남자. 여고시절의 단순한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만지고 느끼고 입 맞출수 있는 남자. 현수는 그를 생각하며 입술에 살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행복했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떨리게 행복했다. 연애라는 것이 이렇듯 충만한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예전에는 몰랐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는 척, 거부하는 척 했지만 다가오는 그가 좋았다. 그녀만 보면 만지고 싶어 하고 입 맞추고 싶어 하는 그의 행동으로 더욱 행복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누군가에게 원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현수는 행복한 웃음을 짓고는 다시 눈길을 내려 쓰던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부치지 못할 편지지만 이곳에서 썼던 편지가 후에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쓰는, 자신만의 편지였다.
똑똑.
현수는 문득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방문을 바라보았다. 영숙언닌가? 아까 영화 본다고 했던 것 같은데 돌아왔나?
“언니?”
현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문 앞으로 가며 영숙 언니인지 확인하듯 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방문 손잡이에 손을 대는 순간까지도 밖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현수는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 한 채 무심코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방문 앞에 서있는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왜? 지금 시간에 그가 왜?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는 것인지 궁금한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의문의 표정을 지어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 아주 심각하다는 듯, 아니, 아주 큰 결심이라도 한 듯, 그의 눈빛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원하지 않으면 문 닫아.”
“….”
현수는 처음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떠오르는 하나의 예감에 놀란 숨을 들이켰다.
현수는 무엇을 어찌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방으로 들이고 싶은 마음 반, 이대로 문을 닫아버리고 싶은 마음 반.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한꺼번에 헤집고 있었다. 이대로 그저 그와 예쁜 연애만 하고 싶었다.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도 두려웠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영숙 언니도 걱정이 되었고, 또 무엇보다 그와 사랑은 나눈 후 다시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까봐 두려웠다. 만약, 아주 만약에 그와의 연애에 실패한다면 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구멍 하나는 만들어두고 싶었다.
현수는 방문 손잡이를 꼭 쥐었다. 손안에 든 손잡이가 마치 미끄러운 공이라도 되는 듯 잡기가 쉽지 않았다. 현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문을 밀었다. 탁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나기를 기대하며 힘껏 밀었다. 하지만 그녀가 예상했던 문 닫히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문은 무언가에 걸린 듯 더이상 닫히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눈을 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문짝과 문틀 사이에 끼어있는 커다란 운동화가 보였다. 현수는 다시 눈길을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을 원해. 미치게.”
현수는 차라리 그의 눈을 보지말걸 하고 후회했다. 그의 애원하는 표정도 보지 말고, 그의 낮고 관능적인 목소리도 듣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그냥 문 사이에 끼어있는 그의 발을 냅다 차버리고 문을 닫아버릴걸 하고 후회했다…..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이미 그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그녀를 원하는 그의 마음까지 모두 보아버렸다.
현수는 그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 살짝 뒷걸음질 쳤다. 한 걸음이 두 걸음이 되고, 어느새 그가 방안으로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작은 방안으로 들어와 문을 살며시 닫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야 문 닫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그와 그녀를 한 방에 둔 채 문은 닫히고 말았다. 이젠 정말 그와 단 둘 뿐이었다. 별일이 없다면 영숙 언니도 내일 아침까지는 그녀의 방문을 두드릴 일이 없을 것이고, 다른 대원들이 들어올 공공장소도 아니었다.
현수는 그가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코앞에 다가온 그가 그녀의 얼굴을 잡고 들어올렸다. 살며시 내려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자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현수도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손길에 반응하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현수는 그의 입술을 맞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비록 내일 아침에 지금의 행동을 후회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현수는 그의 성급한 입맞춤에 반응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입술에 똑같은 키스를 되돌리고 있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티셔츠 아래로 들어와 가슴을 움켜쥐자 그녀는 은밀한 신음 내뱉으며 뒷걸음질 쳤다. 좁은 방안에서 그들의 거친 숨결이 가득 울리고 있었다. 현수는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그의 힘에 밀려 뒷걸음질 치다 책상모서리에 엉덩이를 부딪치고 말았다.
“아!”
그녀의 목선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트리던 그가 그녀의 아픈 비명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미안.”
그녀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살짝 인상을 쓰자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픈 엉덩이에 관심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사과 한마디 후 곧바로 다시 그녀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대는 폼이 무척 성급했다. 이번엔 그녀가 다치지 않게 허리를 바싹 끌어당겨 안는 그의 커다란 손이 포근했다. 그러다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올려 책상 위에 앉혔다. 그리고 곧장 그녀의 입술에 깊은 입맞춤을 시작했다.
책상 위에 앉아 더욱 가까워진 그의 입술에 빠져있던 현수는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단단한 그의 몸을 느끼자 자신의 몸속에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에 달뜬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턱으로 그리고 목으로 입술을 미끄러트리는 그에게 고개를 젖혀 온전히 자신의 목을 내어주자 그의 손이 그녀의 티셔츠를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하아.”
순식간에 티셔츠를 벗겨 책상 아래로 떨어트리고 그녀의 브래지어 선을 따라 그의 입술이 거친 숨결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 선에 느껴지는 그 입술의 뜨거움에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쥔 채 호흡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 골짜기를 음미하자 현수는 그 낯선 느낌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뒤로 한껏 젖혔다. 젖혀진 그녀의 몸 위로 그녀의 가슴이 더욱 도드라지게 부풀어 올랐고 태훈은 그런 그녀의 자태에 거친 숨을 들이켰다.
현수는 마치 자신의 몸을 짓누르기라도 하듯 덮쳐오는 그의 입술에 밀려 더욱 몸을 뒤로 젖혔고 그러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책꽂이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야!”
두 번째로 그녀의 아픈 비명소리가 들리자 태훈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깊게 어두운 두 눈은 이미 활활 타오르는 정열로 가득했다. 그녀가 손을 올려 그녀의 뒷머리를 문지르고 있자 그의 입술을 가르고 낮은 신음소리 같은 사과의 말이 들려왔다.
“젠장. 미안.”
이번에도 별로 미안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딱히 따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지금은 누가 누구에게 사과하고 그런 것보다 그들의 속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욕망에 더 신경이 가 있었다.
이젠 안 되겠는지 그의 손길이 빨라졌다. 자신의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곧바로 그녀를 안아 침대 위로 눕혔다. 그리고 자신의 바지와 속옷마저 벗어던지고는 그녀가 미처 그를 쳐다보기도 전에 그녀에게 몸을 겹쳤다.
“이젠 어디 부딪치지 말고 제대로 하자고.”
그녀가 하고픈 말이었다. 사랑 한 번 나누는데 이렇게 매순간 부딪친다면 사랑이 끝났을 때 몸이 온전하겠는가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정말 그의 말대로 본격적인 애무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돌려 브래지어 호크를 풀어버리고 곧장 드러난 맨가슴에 입술을 가져가 한 입 가득 젖가슴을 배어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그녀의 납작한 배를 지나 긴장으로 잔뜩 굳은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현수는 입고 있던 트레이닝 바지 위로 그의 손길이 느껴지자 힘껏 다리를 붙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다 다시 엉덩이를 쓰다듬고, 다시 허리선을 훑는 느낌이 그녀에게 긴장감을 주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손이 바지허리선 아래로 슬며시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릎을 세워 더욱 힘껏 힘을 주며 긴장했다. 가슴에 느껴지는 그의 입술과 허리선을 어루만지는 손길로 정신이 없었다. 가슴의 돌기를 물고 어르는 그의 입술의 감촉에 그녀는 미칠 듯한 흥분으로 그의 머리칼을 잔뜩 움켜쥐고 있었고 허리선 아래로 침투해 점점 그녀의 깊은 곳으로 다가가는 그의 팔도 꼭 움켜쥐었다.
그녀의 긴장을 눈치 챈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입술에 입맞춤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희롱하며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정신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현수는 그의 깊은 키스에 무심코 두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키스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혀를 감아올리는 그의 혀와 함께 움직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혀를 그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가 했던 것처럼 그의 입안을 훑기 시작했다. 그와의 키스에 한참 빠져있던 현수는 엉덩이 부근에 갑자기 서늘한 공기를 느꼈다. 어느새 그의 손이 그녀의 바지를 벗기고 있었다. 바지를 밀어내며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자 현수는 그의 귓가에 거침 숨결을 내뱉었다.
어느새 바지마저 벗어버린 그녀의 몸 위로 그의 몸은 더욱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허벅지를 쓸어 올리고 엉덩이를 움켜쥐며 가슴으로 다시 입술을 내리는 그의 행동에 현수는 몽롱한 정신으로 그저 눈만 감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그저 그의 머리만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손이 그녀의 깊은 곳을 쓰다듬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두 다리를 꼭 붙여 더 이상의 손길을 거부했다.
하지만 태훈은 그녀가 그를 거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의 돌기를 입속에 넣고 굴리며 빨아들였다. 그녀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무슨 짓이라도 할 참이었다. 아니, 이미 그녀의 몸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결심하지 못한 채 겁을 먹고 있는 그녀를 배려해서였다.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었다. 현수의 긴장을 풀어주어 그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도록 그녀의 온몸을 배회하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손길에, 그의 입술에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긴장했던 것과 달리 거북스러운 손길은 없었다. 그저 은근한 흥분과 몽롱한 기분뿐이었다. 가끔 그의 입술이 일으키는 불꽃이 뜨거웠지만 그마저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좋았다. 그의 손길, 입술, 모든 것이 좋았다. 이 은근한 흥분도, 이 알 수 없는 몽롱함도 모두 좋았다. 너무 좋아 그의 손길이 자신의 몸에서 멀어지면 섭섭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였다. 긴장을 풀고 힘없이 그의 손길에 나른해져있던 그녀의 몸으로 낯선 감각이 침투했다. 그녀의 은밀한 곳을 파고드는 그의 손길에 그녀는 격한 신음을 내뱉었다.
“아!”
그의 팔을 꼭 잡으며 온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드러난 목에 입술을 묻고 단단한 몸을 그녀의 허벅지에 밀착시켜 그녀에게 자신의 흥분을 고스란히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속에 담근 그의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앞으로, 뒤로, 천천히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손의 움직임에 어느새 그녀는 달뜬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처음에 자신의 몸속에 침범한 낯선 느낌에 대한 거부감도 잠시 그의 손이 움직이는 규칙적인 움직임에 그녀의 몸속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중심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그녀의 온 몸 구석구석 전달되었고 그 알 수 없는 미칠 듯한 감각에 숨조차 쉬기가 힘들었다.
태훈은 현수의 뜨거운 호흡을 느끼며 자신의 손길에 묻어나는 그녀의 젖은 욕망의 흔적에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고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짙은 욕망으로 어두워진 그녀의 눈은 몽롱함을 담아 그를 향하고 있었고 입술에서는 연신 거친 호흡이 새어져 나오고 있었다. 태훈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임을. 그녀와 하나가 될 가장 알맞은 때임을.
현수는 자신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대로 그와 눈을 맞춘 채 서서희 그의 몸이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아…”
서서히 밀려오는 거친 파도가 그녀를 삼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쪼개지듯 느껴지는 격렬한 아픔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고 그런 그녀를 달래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핥고 있엇다. 저도 모르게 닫히려는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그의 뜨거운 몸이 느껴졌다. 그녀의 몸을 가득 채운 채 그는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뚝 하고 떨어지는 땀 한 방울이 그의 지금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고 그녀의 양옆으로 우뚝 서있는 그의 두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의 아픔이 어느 정도 가시자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몹시 힘든 그의 표정을 보며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목뒤로 손을 돌려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로 끌어당겼다. 그 손길을 시작으로 태훈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속을 들고 나며 스치듯 느껴지는 깊은 정열에 그의 몸은 타오를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점점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몸은 그동안 눌러두었던 욕망을 한꺼번에 분출시키고 있었다.
띠. 띠. 띠.
태훈은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손목시계가 작은 신호음을 내자 눈을 떴다. 좁은 1인용 침대에서 그녀를 안고 잠든 그의 몸은 작은 움직임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하지만 긴 팔을 뻗어 여전히 신호음을 울리고 있는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어젯밤 그녀와 두 번째 사랑을 나누기 전 맞춰두었던 알람이었다. 새벽 다섯 시.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이었다. 아직도 해가 뜨려면 일곱 시간 정도가 더 있어야했지만 오전 여섯 시쯤이면 대원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한다.
태훈은 눈길을 돌려 자신의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빠져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쌕쌕거리며 잠든 그녀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승규에게 내기장부를 만들라고 한 순간만 해도 그녀와의 결혼은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단어가 그의 귀를 통해 전달되자 그녀와의 결혼만큼 확실한 감정이 없을 듯 싶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에 대한 감정의 정도가 깊어졌고 그녀가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녀와 결혼할 것이다. 이 여자를 미치게 원하고, 이렇게 소중한데 이 여자와 결혼을 않는다면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가.
하지만 태훈은 문득 그녀와의 미래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자신은 앞으로 최소 2년 이상은 남극에 머물러야 한다. 1년 후에는 쇄빙선이 도입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은 가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남극 깊숙한 곳의 생물들도 연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몇 년 후면 남극점에 가까운 대륙 안에 제2세종기지가 건설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2세종기지의 첫 번째 월동대에 자신이 참가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본격적으로 제2세종기지가 건설되기 전에 임시건물도 생길 것이고 지금의 기지에서 지원해주어야 할 일도 무수히 많았다. 남극의 경험이 많고, 월동대 경험이 많은 장 박사와 자신이 큰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었다.
그녀가 기다릴까? 아니, 내가 그녀 없이 몇 년을 떨어져 지낼 수 있을까? 태훈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생각조차 거칠게 털어버렸다. 지금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품안에 든 그녀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처럼 그녀를 데리고 월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년까지는 남극의 월동대원으로 함께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의 일은 그때 생각하고 싶었다.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이상. 오늘도 활기차게 지내는 것 잊지 말고 모두 자기 맡은 바 임무 잘 하고.”
“네. 알겠습니다.”
장 박사의 아침회의 종료를 알리는 마지막 멘트에 휴게실에 모인 대원들은 일제히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는 의미로 크게 대답을 했다. 그 중 유달리 크고 기분 좋은 대답을 하는 강태훈 박사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몰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침 식사 때부터 싱글거리며 다니는 폼이 수상했는데 오전회의를 하기 위해 휴게실로 들어서던 그의 입에서 즐거운 휘파람 소리가 나왔을 때는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윤 선생과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항상 기분은 좋았지만 오늘은 그 정도를 넘어서 있었다. 특히 요 며칠 동안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투덜거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괜한 심술을 부리던 사람이 단 하룻밤 만에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울 뿐이었다.
“강 박사, 뭐 좋은 일 있나?”
장 박사 또한 오늘 아침 태훈의 기분을 이상히 여기던 터였다. 6월에 접어들면서부터 해를 보는 시간이 극히 짧아져 모든 대원의 기분이 저조한 상태였다. 월동대 대장으로서 해가 짧은 몇 개월간의 남극겨울은 대원들의 사기충전을 극히 신경 써야 할 시기였다. 그런데 월동대 부대장인 태훈은 어찌된 영문인지 기분이 저조하기는커녕 저 차가운 바다로 발가벗고 뛰어들기라도 할 만큼 좋아보였다. 물론 그가 연애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만 윤 선생과 연애를 시작한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왜 갑자기 저렇게 기분이 좋아진 것이란 말인가.
“글쎄요. 하하하하.”
애매한 대답으로 말을 줄이고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행동에 대원들은 더욱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태훈의 행동에 현수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저러다 세종기지의 전 대원들이 그와 그녀의 관계를 알 것 같았다. 사귀는 것도 비밀로 하라고 그렇게 다짐을 줬는데 이젠 아예 전날 밤 그녀의 방에 들었던 것까지 광고라도 할 참인지 그의 행동은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수를 써야만 했다. 저렇게 그냥 두다가는 조만간 그와 그녀의 사이를 두고 대원들이 의심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거 참. 좋은 일 있으면 혼자만 알지 말고 우리 다 같이 좀 웃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영숙이 시선은 현수를 향한 채 태훈을 향해 불만스럽다는 듯 말을 툭 내뱉었다.
“그래. 얘기 좀 해봐. 무슨 일인데?”
장 박사도 영숙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태훈을 닦달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주일 후에 있을 탁구 시합 이야기나 하죠.”
장 박사와 영순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을 돌리는 태훈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말 안하면 모를 줄 알고? 무언가 진도가 더 나갔겠지. 비록 둘만의 깊은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태훈이 저렇게 기분이 좋은 것은 윤 선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장 박사 또한 영숙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식당에서 이승규 연구원이 제안한 새로운 내기장부를 만드는데 동참했다.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태훈과 윤 선생의 결혼에 돈을 걸었다. 하지만 다른 대원들은 또다시 갈등하고 있었다. 남녀가 사귄다고 해서 다 결혼에 골인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결혼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 게다가 남극이라는 이렇게 제한된 장소라는 점도 문제였다. 젊은 아가씨라고는 윤현수 선생뿐인 이곳에서 태훈이 순간적인 감정을 가져 연애를 할 수는 있지만 결혼은 이야기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대원들이 더 많았다. 그러니 K&Y 결혼 내기는 아직 결혼은 ‘아니다’라는 쪽에 더 비중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태훈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장 박사와 영숙은 확신했다. 강태훈,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는 것을.
회의를 마치고 휴게실을 나온 현수는 곧장 의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도대체가 강태훈,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비밀연애라는 것에 동의해 놓고 하는 행동은 전혀 동의한 사람이 아니었다. 현수는 불안했다. 그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 그들의 사이를 아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아니, 그와 정해진 무언가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하게 의무실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명운 선배와의 헤어짐이 이렇듯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가? 명운 선배에 대한 감정이라도 남아서 이런 것이 아니었다. 태훈과 연애를 하면서부터 느낀 한 가지는 명운 선배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훈을 사랑하듯, 그를 원하듯, 그런 강렬한 감정은 명운 선배에게 단 한 번도 느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명운 선배가 그녀에게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남겼다. 연애에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 그 후의 생활을 대비해 둘 것.
태훈과의 연애가 실패할 것은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자꾸만 두려웠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그녀의 의지로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남극에서의 생활을 끝으로 그와의 꿈같은 사랑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진다면….? 지금 이 행복이 끝이 정해져있는 그저 시한부적인 행복이라면? 한국으로 돌아가 현실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만약, 정말 이 행복이 꿈이라면 증인은 두고 싶지 않았다. 둘만의 행복으로 두고 싶었다. 다른 누군가 그들의 행복을 지켜보고 또 불행을 지켜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행복이 하룻밤의 꿈처럼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면 그녀의 기억 속에만 남겨두고 싶었다. 다른 누구의 입에도 오르지 않고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녀만 기억하고 싶었다. 그와의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를 사랑했던 것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영숙은 맞은편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는 태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얼마 전 승규가 새로운 내기장부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승규의 뒤에 태훈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승규처럼 잔머리 굴릴 줄 모르고 정도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 놈이 감히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강태훈과 윤현수의 결혼 내기라니. 승규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었다.
결혼이라…..태훈이 드디어 결혼까지 생각할 여자가 생긴 건 좋았지만 과연 그가 원하던 미래를 포기할 수 있을까?
“윤 선생이 너하고 결혼한다니?”
태훈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허공에 딱 멈추고 영숙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훗.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난 못 속이지. 너 기저귀 달고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보아온 사람이 나다. 게다가 내가 승규를 안지가 얼만데. 너희들이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백년 묵은 여우 같으니라고! 하여튼 눈치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태훈은 그 어떤 동요된 표정도 보여주지 않았다. 누이가 백년 묵은 여우라면 난 이백년 묵은 능구렁이거든.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태훈은 영숙을 향해 무심하게 내뱉고는 다시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결혼하면 당분간 월동대원으로 오지는 못하겠지?”
태훈의 시치미에도 영숙은 여전히 그녀의 생각만 말했다. 지금은 결혼내기를 그가 주도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영숙은 전도유망한 실력 있는 과학자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녀의 외사촌 동생이기도 한 그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왜요?”
영숙은 태훈이 갑자기 숟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따지듯 묻자 눈살을 찌푸렸다.
“몰라서 물어?”
“네. 몰라서 묻습니다. 결혼하면 왜 월동대원으로 오지 못합니까?”
태훈은 이제 영숙과의 심리전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자신에게도 확실한 답변을 주지 못한 민감한 문제였다. 그저 윤현수, 그녀만을 바랐기에 다른 모든 부수적인 문제는 뒤로 밀춰뒀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영숙이 직접적으로 꺼내 든 것이다.
“그럼 넌 결혼하고도 월동대에 참가하겠다는 거야? 윤 선생은 어쩌고?”
“내년엔 다시 그녀와 함께 월동대에 참가하면 되고, 내후년엔 제2세종기지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그때 1년만 떨어져 있으면 돼요. 또 떨어져있기 뭐하면 그녀도 함께 월동대에 참여하면 되고.”
영숙은 태훈의 말에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저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다니.
“그건 너만의 생각이냐? 아니면 윤 선생도 동의한 생각이냐?”
영숙의 물음에 태훈의 표정은 더욱 험상궂게 변했다.
“동의할 겁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하지만 만약 윤 선생과 의논하지 않고 지금처럼 네 생각대로만 밀고나간다면 분명 윤 선생과 네 사이는 지금처럼 좋지만은 않을 거야. 잘 생각해서 해.”
태훈은 자신조차 깊이 들추어내기 힘들었던 부분을 정확히 끄집어내는 영숙을 노려다보았다.
“좋지만은 않다?”
“그래. 넌 지금 네 생각만 하고 있어. 듣기로 윤 선생은 레지던트 과정이라고 하던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남은 과정, 마저 끝내고 전문의가 돼야지. 너와 마찬가지로 윤 선생도 나름의 계획이 있을 거라는 거야.”
태훈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젠장.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랬었지. 처음 그녀가 남극으로 들어오기 전 그녀의 이력을 팩스로 받았었다. 레지던트 3년차. 1년만 더 있으면 전문의를 취득할 수 있는데 왜 이곳으로 오나 의문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깊이 빠져 지내는 동안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영숙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동의 없이는 결혼도, 또 그가 원하는 미래도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영숙은 깊은 생각에 잠긴 태훈을 바라보며 일어섰다. 무턱대고 이기적은 놈은 아니니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고 윤 선생을 쉽게 포기할 그도 아니었다. 지금껏 보아오면서 강태훈이 목표했던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이번에도 윤 선생과 그의 꿈,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힘은 들겠지만 그가 해낼 것이라는 것을 영숙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