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Temptation of the Iceworld RAW novel - Chapter 6
5장. 독재자
영숙은 감자조림을 더 담아내기 위해 조리실을 나오다 밥통 앞에서 밥을 푸고 있는 태훈을 발견했다.
“왜 혼자야?”
태훈은 다짜고짜 왜 혼자냐고 따지는 영숙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립니까?”
“윤 선생은 어쩌고 너 혼자냐고?”
“윤 선생?”
“그래. 윤 선생. 너 오전 중에 윤 선생 만나기로 했잖아. 난 윤 선생이 아직까지 점심 먹으러 안 와서 너하고 같이 있는 줄 알았지. 아니었어? 그럼 왜 아직 점심 먹으러 안 오는 거지?”
영숙이 혼잣말을 하며 들고 있던 감자조림을 반찬 통에 담고 있는 사이, 태훈은 자신이 오늘 오전 중에 의무실로 윤 선생을 만나러 가겠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런. 제길.”
태훈은 밥을 푸던 주걱과 식판을 내려놓고 거친 발걸음으로 식당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 강 박사. 어디가?”
영숙의 말에도 대꾸도 않은 채 문밖으로 사라지는 태훈의 걸음은 빨랐다. 태훈은 그 멍청한 여자가 오전 내내 자신을 기다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오전이었다. 마리안 소만의 얼음조각공원을 보기 위해 떠나는 하계연구팀의 안전을 챙기고, 행여나 불의의 사고가 날 경우를 대비해 안전교육을 시키느라 오전시간을 모두 보냈다. 게다가 설상차의 작은 기계적 결함으로 기계설비 담당을 찾아 헤매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렇게 바쁜 오전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자신의 연구 활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사실에 온통 신경을 쓴 탓에 새로 온 의사선생과의 약속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태훈은 조금 전 식당으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의무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안을 살펴보았다. 언뜻 보기에 의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며칠 전 하계연구원 한 명이 작은 찰과상을 당해 소독약을 가지러 들렀던 그때의 의무실이 아니었다. 우선 열려진 문안으로 느껴지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퀴퀴하고 묵은 곰팡내가 아니라 맑고 깨끗한 공기와 함께 은은한 향기까지.
태훈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다시 문짝에 붙어있는 글씨를 쳐다보았다. 의무실. 제대로 찾아왔는데….태훈은 다시 문안으로 한발자국 들어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종 서류철과 잡다한 문구류로 어지러웠던 책상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개어진 모포가 놓여있는 간이침대가 보였다. 그리고 다시 눈길을 돌려 진열장과 원목장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진열장 안은 각종 약상자들이 제자리를 찾고 있었고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태훈은 순간 짙은 눈썹을 슬쩍 치켜 올렸다. 원목장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각종 책과 파일더미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파일 철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태훈은 방으로 들어가려던 동작을 멈추었다. 은테 안경을 끼고 어깨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는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채 볼펜 뒤꼭지를 입에 물고 있는 폼이 영판 개구쟁이 사내아이를 연상시켰다. 몰론 생긴 모습은 전혀 남자 같지 않았지만. 게다가 아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흠.”
태훈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작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보고 있는 파일에 흠뻑 빠진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어제 칠레 프레이 기지에서 처음 본 그녀의 첫인상은 평범했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이 깨끗했고 눈이 유난히 맑다는 정도만 빼면 여는 평범한 아가씨들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썩 예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눈에 확 띌 정도로 몸매가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가 훈련되지 않은 여의사가 온다는 사실에 화가 나있던 참이라 여자를 곱게 보지 못했었다. 그러니 자연 그녀를 향한 말투나 행동도 곱지 못했을리라.
태훈은 아예 몸 전체를 의무실 안으로 들여놓고 벽에 기대섰다. 언제쯤 그녀가 자신을 알아차릴지 기대가 되었다. 태훈은 파일에 눈을 고정시킨 채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하계연구원들이 들어오고부터는 이렇게 우두커니 서있는 여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8월부터 시작된 월동대 훈련에서부터 월동대를 이끌고 이곳 세종기지로 들어와서 지난 차수 월동대로부터 인수인계를 받는 것까지. 여유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꿈도 꿀 수 없었던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골똘히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여유가 자신에게 옮기라도 한 듯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저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할 일이 태산이었다. 하계연구원들이 돌아가면 다음 하계연구원들이 들어올 때까지 1년이라는 긴 시간이 놓여있다. 남극에 있는 1년 동안 지겹도록 느낄 여유를 지금처럼 정신없이 바쁜 때에 느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점심식사 안 할 겁니까?”
현수는 의무실을 울리는 굵직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였다. 월동대 부대장, 강태훈 박사. 여자인 그녀가 남극 세종기지에 온 것을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그 벽창호.
현수는 끼고 있던 은테안경을 벗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늦으셨네요? 벌써 점심식사 시간이에요?”
“지금껏 날 기다린 것처럼 말은 하지 맙시다. 보아하니 의사선생도 오전 내내 바빴던 것 같으니.”
곧 죽어도 자기가 약속 어긴 건 말 안하는 것좀 봐. 현수는 그의 말투에 또다시 기분이 상했다. 좋아. 그런 식으로 하시겠다?
“기다렸단 말 아니에요. 보셨겠지만 저도 무척 바빴거든요.”
“그럼 됐습니다. 점심이나 먹으러 갑시다.”
흥. 누가 댁이랑 밥 먹는대? 현수는 슬쩍 비웃는 웃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먼저 드세요. 전 나머지 정리 좀 하고 먹을게요.”
“그건 나중에 해요. 난 점심 먹고 나면 또 시간을 내기 힘듭니다. 그러니 점심 먹으면서 얘기 좀 합시다. 이곳 규칙이나 앞으로 일정, 몇가지 할말이 있으니까.”
젠장. 현수는 그의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마치 그가 점심식사에 초대라도 하는 줄 알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의 초대를 거절했는데 사무적인 볼일 때문에 함께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니.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던가.
현수는 들고 있던 파일을 내려놓고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무안해하며 머뭇머뭇 일어나는 동안 그가 몸을 돌려 의무실을 나가는 것이 보였다. 으. 창피해.
오전 07시 30분 아침식사.
오전 09시 00분 업무회의.
….
현수는 밥을 먹다 그가 내미는 에이포 용지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식사시간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다른 일과시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곳도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놓고 다른 직장인들처럼 업무를 본다니 조금은 의외였다.
“연구원들은 대체로 연구 활동을 나가거나 연구동에 있는 각자의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며 보내고, 시설유지팀은 각자 맡은 분야에서 시설물이나 기계에 이상이 없는지 항상 점검하고 유지하는 업무를 합니다. 의사선생은 사고가 날 경우 치료와 대원들의 건강상태를 살피는 것이 주 업무니 크게 힘든 일은 없을 겁니다. 보통은 의료대원이 주방을 도와주었지만 이번 차수 주방대원은 다른 일체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하니 의사선생이 굳이 주방에 상주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수는 맞은편에 앉아 벌써 식판을 깨끗이 비우고 말을 시작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이라 만족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별 의미 없는 사람이 되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성격상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차피 적성에 맞지도 않았다. 뭐. 차차 할일이 생기겠지. 현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한국에서 극지적응훈련은 얼마나 받았습니까?”
“얼마나? 글쎄요. 그 얼마나가 어느 정도인지….”
“조디악. 그러니까 고무보트 사고대비 훈련은 받았습니까?”
“사고대비 훈련이요?”
“그래요. 사고대비 훈련.”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현수는 재빨리 그녀가 떠나오기전 극지연구소에서 초고속으로 받았던 극지적응훈련과정에 그가 말하는 사고대비훈련이 있었는가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워낙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훈련이라 거의 이론 중심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고립지역으로 간다는 사실에만 정신이 팔려 그 이론조차도 건성으로 들었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젓자 그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젠장. 곧 하계연구원들이 떠다면 월동대원들만 남아서 연구활동을 펼쳐야합니다. 가끔 의사를 대동하고 연구를 나가야 할 때도 있는데 이런 기본적인 훈련도 되어있지 않아서야.”
그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자 현수는 마치 자기가 커다란 죄라도 지은 듯, 아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짝이 되어버린 듯 느껴져 기분이 상당히 나빠졌다. 그리고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그의 말두테 대답하는 그녀의 말투도 시보조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전신구명복 입잖아요? 그리고 훈련이야 시간 날 때 부대장님이 해주세요. 이제 와서 어쩌겠어요? 훈련 안 됐다고 나가야 할 연구 활동에 안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숟가락을 탁 소리가 나게 식탁에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을 뱉어내자 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이디?
“….좋습니다. 이제 와서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최대한 맞춰봅시다.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수는 그의 마지막 말에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잘해보자면서 꼭 저 말을 해야 하나? 정말 못된 남자였다.
“그러죠.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비록 부대장님의 마음에 완벽히 들 자신은 없지만.”
그녀의 비꼬는 말에 태훈은 눈썹을 치켜떴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드는 폼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겉모습만 보고 순진하고 연약하다고 생각한 선입견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거 재미있군. 태훈은 그녀와의 대화가 은근히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일부러 용기를 내어 대들어놓고 눈치를 살피는 폼이 우습기도 했다.
“앞으로 열흘 정도만 지나면 하계연구원들이 돌아갈 거요. 그 이후로 시간을 내서 해상안전교육을 좀 받읍시다. 그동안은 내게 남극에 대한 보고서가 있으니 그거라도 보고 있어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판을 들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현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잘났어! 정말.”
현수는 식사를 끝낸 후 영숙이 내미는 커피를 한잔 들고 의무실로 돌아왔다. 밖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니 자신이 오전내내 애썼던 일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장시간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서인지 눅눅하고 퀴퀴했던 방의 공기가 확 달라졌고, 여기저기 쓸고 닦은 흔적이 확연히 남아있는 의무실이 단정하게 보여 그녀의 기분도 산뜻했다. 게다가 혹시 몰라 한국에서 가져온 방향제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 의무실은 은은한 향기까지 맴돌고 있었다.
현수는 창가로 다가가 오전 내내 열어두었던 창을 닫고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는 찰나 그녀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강태훈 박사를 발견했다. 그녀가 볼 때 여기 세종기지에서 가장 바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월동대의 부대장인 저 강 박사임이 틀림없었다. 어젯밤 여기저기 둘러보다 얼굴을 익힌 대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는 팔방미인이었다. 사람들의 안전을 챙기는 것부터 시작해 세종기지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여러 가지 방면에도 그의 힘이 미쳤다. 물론 시설유지팀도 있고, 시설유지팀의 지휘자라고도 할 수 있는 시설유지 반장도 있었지만 시설유지반장마저도 강 박사의 지휘권 아래 있었다.
게다가 하계연구원들부터 월동대원들까지 모두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무슨 일이든 허락을 구하는 것 같았다. 월동대의 대장인 장 박사도 있었지만 오늘 오전 아침식사 시간의 그들의 대화에 의하면 강 박사가 하는 보고를 거의 형식적으로 듣고 웬만한 결정권은 강 박사에게 일임하는 듯 보였다. 아마도 처음 그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가 대체 무슨 일을 담당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생물학 박사라는 사람이 해양안전책임자라는 직책까지 맡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듣기에 그는 분명 해양생물을 연구하는 박사라고 들었는데 그가 하는 일을 보면 연구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생긴 분위기부터가 연구를 하는 연구원 같지는 않아 보이니까.
현수는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저 멀리서 사람들을 인솔해 부두로 향하는 그를 쳐다보았다. 대원들 모두가 하나같이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니 그녀 또한 그의 리더십에만큼은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인간성이 문제지. 사람이 잘나면 단가? 인간이 돼야지.
거기까지 생각한 현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내뿜는 그에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식사 전에 정리하던 파일더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고래를 직접 보셨다고요?”
현수는 자신을 향해 놀란 질문을 하는 하계연구원, 강원석 씨에게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도 밍크고래요.”
“헉. 밍크고래요?”
남극의 봄부터 여름까지 약 2,3개월만 머물다 돌아가는 하계연구원들은 남극의 모든 것을 볼 기회가 적어 고래를 보았다는 현수의 말에 모두들 놀란 신음을 내뱉었다. 이번이 두 번째 하계연구 활동을 온 강원석 씨도 아직 고래는 못 보았다며 현수를 부러워했다. 현수는 자신을 향해 부러운 눈빛을 보내는 세 명의 하계연구원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았죠.”
“남극에서 고래를 보면 행운이 있다던데. 윤 선생님에게 행운이 있을 모양인데요?”
다른 연구원 한 명이 그녀를 부러워하며 다시 말을 잇자 또 다른 연구원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전 남극에서 범고래를 봤다는 사람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밍크고래라니. 정말 윤 선생님에게 대단한 행운이 올 모양입니다.”
그런가. 현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워하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훗. 글쎄요. 두고 봐야죠.”
“에이. 틀림없어요. 아마 남극에 계시는 동안 행운을 가득 실어서 귀국하실 겁니다. 하하하.”
강원석 씨의 말에 현수 또한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야…..
“선배님. 저는 좀 빼주세요. 예?”
세 명의 하계연구원들과 수다를 떨던 현수는 지금 막 휴게실로 들어서는 이승규 연구원과 강태훈 박사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강태훈 박사는 느긋한 태도였고 이승규 연구원은 꽁지에 불붙은 새 마냥 강태훈 박사를 졸졸 쫓아다니며 무언가를 조르고 있었다. 현수를 비롯한 나머지 하계연구원들도 모두 그 둘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강 박사를 쫓는 도중에도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허둥지둥 인사를 하는 이승규 연구원과 달리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강 박사의 태도에 현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튼 사람이 이쁜 구석은 찾아보려야 찾아볼수가 없다니까. 휴게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화이트보드의 일정표를 수정하는 강 박사의 옆에 바싹 다가선 이승규 연구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전 일주일 전에도 다녀왔단 말입니다. 전 정말 거기 가기 싫다고요.”
“…..”
묵묵부답으로 자신의 할 일만 하는 강 박사와 여전히 애처로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애원하는 이승규 연구원의 태도에 현수와 하계연구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문이 담긴 눈짓을 교환했다. 현수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승규 씨가 저렇듯 비굴하게 애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가면 신선한 채소를 얻을 수 있다잖아.”
“아니. 왜 꼭 제가 가야합니까?”
태훈은 옆에서 따지듯 묻는 승규를 돌아보며 진짜 모르냐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 몰라서 물어?”
다 알면서 왜 그러냐는 듯 되묻는 태훈의 말에 승규는 비명을 질렀다.
“으악!진짜! 전 싫단 말입니다. 그 조리사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고요!”
정말 소름이 끼친다는 듯 팔을 쓱쓱 문지르는 승규의 행동에 현수와 하계연구원들은 더욱 의문의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어쩌냐. 그 조리사 아가씨가 너만 좋다는데. 여자가 그렇게 좋다고 하는데 웬만하면 호응 좀 해줘.”
그리고는 유유히 휴게실을 벗어난 강 박사의 뒤로 조금 전보다 더 큰 승규의 비명소리가 뒤따랐다.
“으아악! 그 여자가 어디 아가씹니까? 아저씨지. 그런 아가씨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좋으면 선배님이 호응해주면 되잖아요!”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강 박사가 나갔던 문으로 뛰쳐나가는 승규의 뒤로 또다시 현수와 하계연구원들만 남았다. 마치 순간적인 폭풍이라도 지난 듯 그 둘이 나간 자리는 적막이 흘렀다.
“저게 다 무슨 소립니까?”
하계연구원 중 한 명이 궁금한 듯 묻자 강원석이 알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충 감이 오네요. 아마 러시아 기지의 여자 조리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러시아 기지의 여자 조리사요?”
현수의 질문에 강원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저도 어제 지나다 들었는데 러시아 기지의 여자 조리사가 웬만한 씨름선수 저리 가라 하게 생겼답니다. 그런데 결혼도 안한 아가씨래요. 그 조리사가 이승규 연구원에게 필이 꽂혀서 이승규 연구원만 보면 뭐든 인심 좋게 막 퍼준다더라고요.”
강원석의 설명에 한동안 그 뜻을 파악하던 나머지 사람들은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에 박장대소를 했다.
“예에? 하하하하하하하.”
현수도 조금 전 이승규 연구원의 절박한 표정과 강원석의 설명을 이어서 상상을 하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꽤 귀엽게 생긴 이승규 연구원의 외모에 그 여자 조리사가 첫눈에 반한 것이 분명했다.
“어. 그런데 저기 윤 선생님 이름 아닙니까?”
“네?”
현수는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무슨 말이냐는 듯 강원석 씨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려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확인했다.
강태훈, 이승규, 전남일, 손영익, 도창용, 윤현수
“윤현수…”
분명 현수, 그녀의 이름이었다. 다시 확인해도 러시아 기지 방문자 리스트에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아니, 저기 내 이름이 왜 있지?
“윤 선생님. 내일 러시아 기지 가기로 하셨어요?”
강원석의 질문에 현수는 명확한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자신도 모르는 일이니까.
“글쎄요. 저도 지금 안 사실인 걸요.”
현수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해내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니. 당사자가 여기 이렇게 딱 버티고 앉아있는데 설명도 안 해주고 그냥 가나? 기가 막혔다. 분명 조금 전 휴게실을 다녀간 사람은 강태훈 박사였고 러시아 기지 방문자 리스트 또한 그가 작성했을 것이다. 그러면 리스트에 포함된 당사자에게 여차저차해서 기지를 방문할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든지, 아니면 통보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현수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저렇게 독단적인 사람이 있나 싶었다.
현수는 의무실 책상 위에 카세트를 올려놓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가수의 목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깨끗한 공기로 숨 쉬는 운동 자체가 즐거웠고 이렇듯 조용하게 혼자 있을 때면 음악이 벗이 되었다. 이렇게 여유로운 생활이야말로 그녀가 진정 원하던 자유였다. 현수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창가로 다가갔다. 남극의 여름은 그녀가 상상하던 남극이 아니었다. 눈에 덮여 하얗기만 할 줄 알았던 남극은 지금이 한여름이라 대지는 말라있었고, 식물이 자라 초록색 땅까지 보이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라면 남극에서 1년이 아니라 10년도 살 수 있을 듯싶었다.
현수는 눈길을 들어 부두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유빙들이 푸른 바다 위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보트창고에서 나와 본관건물 쪽으로 걸어오는 강태훈 박사가 보였다. 순간, 현수는 재빨리 의무실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저 남자에게 지금 당장 따질 것이 있었다.
“이봐요.이봐요! 강 박사님. 잠깐만요.”
현수는 겨우 그를 따라잡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웬 걸음이 그렇게 빠른지 분명 의무실을 나올 때만 해도 본관건물 근처도 오지 않았었는데 그녀가 본관을 나와 그를 발견했을 때는 벌써 본관을 지나쳐 연구동 쪽으로 가고 있었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빠르기는 엄청 빨랐다.
태훈은 자신의 앞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전, 오후 내내 자질구레한 일들을 겨우 끝내고 이제야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가는데 그런 그의 앞을 가로막는 그녀가 영 마땅치가 않았다.
“아까 오전에 휴게실에서요.”
“….”
현수는 자신의 말에 전혀 대꾸도 않는 그를 올려다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를 해야 할 것이 아냐. 그녀는 꼭 벽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러시아 기지 방문자 리스트에 제 이름이 적혀있던데….”
“…..그런데?”
그런데라니. 참나. 아니 이 정도 말을 했으면 설명을 해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왜 자기를 쫓아와서 이런 말을 하겠는가 말이다. 척하면 척이지. 하여튼 앞 뒤, 꽉 막힌 벽창호라니까.
“왜 제 이름이 거기 적혀….?”
“준비하고 있어요. 러시아 기지는 킹조지 섬 주변의 기지 중에서는 의료장비들이 가장 잘 갖춰져 있습니다. 그러니 의사선생이 러시아 기지에 어떤 의료장비들이 있는지 봐두면 나중에 필요할때 이용하기 편할 거요.”
그리고 그녀를 덩그러니 남겨두고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현수는 그의 말은 충분히 이해를 했지만 그의 태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유가 그런 것이었다면 진즉 좀 설명해주면 어디가 덧나는가 말이다. 아. 정말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남자다.
분명, 저 남자가 그녀의 고요한 생활에 유일한 방해물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현수는 흔들리는 고무보트 위에 자리를 잡고 고무보트의 맨 앞자리에서 인원을 체크하는 강 박사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햇볕도 따뜻하고 바람도 잔잔한 화창한 날씨였다. 이번 방문의 목적은 러시아기지에서 세종기지에 나눠줄 보급품도 받고 러시아 쇄빙선을 빌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 들었다. 쇄빙선을 보유하고 있는 기지들의 허락을 받아 쇄빙선을 빌릴 수 있는 날짜를 정하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나의 세종기지처럼 쇄빙선을 보유하지 않은 나라는 다른 나라가 쇄빙선을 이용하지 않는 날을 골라 빌려야 하니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히 얼마 후면 우리에게도 쇄빙선이 들어온다고 하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의료!”
현수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젠장. 의료!”
강 박사가 그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현수는 놀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윤 선생님. 크게 대답하세요.”
현수는 그녀의 옆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중장비 담당 전남일 대원의 목소리에 그를 잠깐 쳐다보다 다시 눈길을 돌려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 박사를 쳐다보았다. 아니. 지금 대답 좀 안했다고 저렇게 화를 내는 건가? 지금 초등학교 출석 부르는 거야? 사람이 있는 걸 봤으면 됐지. 웬 대답?
“…네.”
현수의 시큰둥한 대답에 태훈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이승규 대원.”
“네!”
“손영익 대원.”
“네!”
그리고 이어지는 호명에 모두들 커다란 목소리로 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만 빼고 모두 큰 목소리로 그의 호명에 답하고 있었다. 저 강 박산가 뭔가 하는 독재자가 얼마나 사람들을 들볶았으면 저렇게 잔뜩 군기들이 들어서 대답을 할까? 현수는 그런 그들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바다에서는 언제 바람이 세게 불지도 모르고 파도가 들이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바로 옆 사람을 확인하는 것도 어려울 경우가 있죠. 그래서 보트의 대장이 호명을 하면 무조건 큰소리로 대답하는 것이 바다 위에 있을 때의 철칙입니다.”
그녀의 옆에서 조용히 설명을 하는 전남일 대원의 말에 현수는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젠장. 이런 낭패스러운 일이….. 그것도 모르고 강 박사만 욕했으니, 게다가 섣부른 반항까지 한답시고 그의 호명에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듯 대답했으니 이보다 더한 창피도 없었다.
현수는 흘낏 눈을 들어 강 박사를 바라보았다. 보트의 전방으로 고개를 돌린 채인 그의 뒷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해양 안전책임자라지 않는가. 그러니 저렇게 익숙하게 파도를 가르는 것이겠지. 이제 웬만하면 그에게 반항을 하지 않아야할 듯 했다. 괜히 반항해봤자 그녀가 얻는 이득도 없었다. 그래도 만약 그에게 대들 일이 있으면 신중히, 아주 신중하게 해야 하리라.
현수는 두 번째로 고무보트에서 내렸다. 러시아 기지의 부두에는 현수일행을 마중 나온 러시아인들이 반가운 미소를 지었고 가장 먼저 보트에서 내린 강태훈 박사가 그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꽤 유창한 러시아어를 하는 그를 보며 과연 그가 몇 개 국어나 구사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현수는 고개를 돌려 이라고 적힌 푯말을 보았다. 꽤 오래된 나무 푯말에 영어와 러시아어가 동시에 적혀있었다.
“벨링스하우젠 기지는 여기 필데스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기집니다. 미국과 냉전시대 때 지은 기지라 그 당시에는 미국보다 앞서려고 가장 시설이 우수했고 기지에 상주하는 대원들도 많았죠. 하지만 지금은 많이 줄었어요. 그래도 예전의 시설들이 남아있고 또 중요한 장비들이 구비되어 있어서 우리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죠.”
현수는 승규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쇄빙선도 빌리고 각종 시설물도 빌리는 건가요?”
“주로 그렇고, 만약 시간이 맞이 않으면 다른 기지에서 쇄빙선을 빌리기도 하죠. 그래도 지금껏 러시아 기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 서로 물자도 나눠주고 시설도 나눠 쓰고 합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참 보기 드문 일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들과 이렇게 우호적인고 친근감 있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문명과 떨어져 극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공통점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는 국경도 없었고 네 나라, 내나라라는 개념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공동체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어려운 환경에서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오친 쁘리야뜨나! 승규!”
현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하이톤의 목소리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웬 거구의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아니 여잔가? 약간 탈색된 금발을 하나로 묶고, 엄청나게 큰 키에 덩치가 큰 사람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요란스럽게 팔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현수는 놀란 숨을 들이키며 그녀를 향해 뛰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강태훈 박사가 꽤 큰 축에 들어 키가 큰 러시아 사람들을 별로 크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기 달려오는 사람은 강태훈 박사보다 훨씬 더 컸다.
“헉! 젠장, 빌어먹을.”
현수는 자신의 옆에서 거친 욕을 내뱉는 승규를 돌아보았다. 그의 인상이 정말 죽을 맛이라는 듯 구겨지고 있었다. 왜? 그러다 문득 현수는 승규를 좋아한다던 그 러시아 조리사가 떠올랐다. 맙소사! 그러니까, 지금 저기 뛰어오는 저 거인이 이승규 씨를 좋아한다는 그 조리사?
현수는 거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 거인을 피해 살짝 몸을 움직였다. 그런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조리사는 곧장 그녀를 지나쳐 승규를 와락 끌어안았다. 억지 미소를 띠우며 살짝 손을 흔드는 승규의 행동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조리사는 승규를 번쩍 들어 안더니 공중으로 빙 한 바퀴 돌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현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승규 연구원이 작은 사람도 아니었다. 한국 남자로서는 가장 표준일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조리사의 품에 안긴 승규는 더 이상 남자의 표준이 아니었다. 그저, 그저……어린아이 같았다. 거인 조리사에게 안긴 승규는 어린아이 같았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
“쿡, 쿠쿠쿠쿡.”
현수는 입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기지 부두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당사자들 앞에서 웃는 것이 실례라는 것은 알지만 도저히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따냐!”
현수는 러시아 대원 중 한 명이 웃음을 터트리며 조리사를 향해 이름을 부른 후에야 승규를 안고 있는 조리사의 이름이 ‘따냐’임을 알 수 있었다. 따냐라고 불린 여자는 완전히 울상을 짓고 있는 승규를 그제야 놓아주고 승규의 손을 꼭 움켜쥔채 기지건물이 있는 곳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어라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현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여자의 말 중 단 한마디도 승규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데 세종기지로 돌아가서 이 일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승규의 엄청난 화풀이를 감당해야 할 거요.”
현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주의를 주는 강 박사를 바라보았다. 남극에서 그를 만난 이후로 그의 미소는 처음 보았다. 그녀에게만 그러는 것인지 본래 표정이 그런 것인지 그를 볼 때마다 그는 굳은 표정이거나 찡그린 표정에 화가난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표정은 꽤 봐줄만 했다. 아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사람이 저렇게 웃으면 얼마나 좋아. 보는 사람도 즐겁고, 웃으면 복도 온다잖아. 웃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야. 현수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승규와 따냐가 들어간 건물로 걸음을 옮기는 강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 남잔 마음에 안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