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Temptation of the Iceworld RAW novel - Chapter 5
4장. 남극의 사람들
“월동대가 머무는 숙소 건물은 총 두동입니다. 여기 이 동은 남자대원들이 쓰고 저쪽 동은 여자 대원들이 씁니다. 원래는 조리사님도 저희와 같은 동을 썼는데 윤 선생님이 오셔서 저쪽 동으로 옮기셨어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조리사님은 여자라고 하기에는 좀 …..하하. 웬만한 장정보다 더 힘이 셉니다. 그리고 워낙 행동도 거침이 없으셔서 남자들과 같은 화장실을 쓰는 건 신경도 안 쓰시죠. 도리어 화장실에서 조리사님을 만나는 저희가 더 창히패한다니까요. 하하. 그래서 솔직히 전 조리사님이 숙소를 옮기시는 거 대환영입니다. 쿡쿡.”
멋쩍게 웃는 승규를 바라보며 현수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이 건물에 대원들 대부분이 거주하는군요?”
현수는 빨간색 숙소동을 가리키며 승규를 바라보았다.
“네. 그렇죠. 지금 하계연구원들이 많이 와 있어서 다 같이 생활하느라 북적이고 또 윤 선생님이 거주하실 숙소동도 사람들이 꽉 차있어요. 하지만 선배님이 오늘 오전에 입고에서 제일 안쪽 방으로 하나 빼놓았죠.”
“선배님?”
“네. 아까 보셨던 부대장님요. 첫인상이 별로였죠? 그래도 윤 선생님을 위해서 제일 안쪽 방으로 마련했어요. 보시면 알겠지만 대원들이 생활하는 건물들 대부분이 차가운 땅에서 공간을 두고 띄워서 짓는 바람에 복도를 걸을 때 발소리가 울려요. 입구 가까이 있는 방은 매일 드나드는 사람들 발소리로 잠도 못 잘 지경입니다. 다행히 선배님이 부대장 특권으로 맨 안쪽방을 비웠죠.”
현수는 그의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들을 들으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 남자가 그런 자상한 면도 있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며.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현재 세종기지에 있는 사람들이 몇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현수 또한 그녀가 무물 숙소로 가는 동안 내내 인사를 주고받았다. 특별히 자기소개를 할 것도 없이 그냥 반가운 미소와 ‘안녕하세요’라는 말 한마디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그녀의 방으로 향하는 숙소의 복도를 걸으며 또 한 번 인사를 나누었다.
“여깁니다.”
현수는 자신의 앞에서 문을 열어주는 이승규 연구원을 지나쳐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방이었다. 벽 한쪽에 쳐진 검은 커튼과 1인용 침대, 그리고 책상 하나, 작은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조금은 답답할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작죠? 하하하. 하지만 거의 잠만 자는 곳이니 클 필요가 없죠.”
현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벽에 걸려있는 검은 커튼을 보았다.
“하필 왜 검은색 커튼이죠?”
검은색 커튼이 더 방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좀 화사한 커튼으로 바꿔 달면 그나마 조금은 아늑함이라도 느낄 수 있을텐데…
“백야현상 때문에요.”
“백야?”
“네. 지금은 남극의 여름이고, 여름 동안은 해가 떠있는 시간이 매우 깁니다. 그러니 잠은 자야하고, 날은 밝고, 고문이죠. 그래서 검은 커튼으로 해를 가리는 겁니다.”
“아…”
현수는 그제야 검은 커튼의 용도를 이해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한 시간 후면 저녁 시간이니 아까 보신 본관으로 오세요. 거기 식당이 있거든요. 아참, 그리고 본관동에 윤 선생님이 근무하실 의무실도 있습니다. 조금 쉬시다 한 시간 후에 그리로 오세요.”
“네. 고마워요.”
“뭘요. 앞으로 1년을 한 식구처럼 살아야하는데요. 남극에 오신 것을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그리고 멀어지는 이승규 연구원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현수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1년을 살아야 한다. 사실 지금으로써는 정이 가지 않을 정도로 작고 답답한 방이었지만 억지로라도 정을 붙여야 하리라…..현수는 창으로 가까이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그러자 밝은 햇살이 방안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흠.이러니 좀 낫네. 잠만 잘 건데 방이 좀 작으면 어때.”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승규 연구원과 함께 가져온 짐을 풀기 시작했다.
현수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본관동 철제 계단을 오르다 갑자기 계단을 내려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 밀려 다시 땅으로 내려섰다. 그들이 건네는 인사를 받으며 그녀도 마주 미소를 지은 채 한동안 그렇게 서있다. 그들이 모두 저쪽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본관동 또한 숙소동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모두 원목으로 되어 있었다. 벽이며 문이며 할 것 없이 모두 원목으로 만들어져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현수는 식당을 찾아 걸음을 옮기다 ‘의무실’이라고 적힌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문손잡이를 잡고 돌려보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하긴 의약품들이 있는 방일 텐데 함부로 열어두면 안 되지.’
현수는 의무실의 방문이 잠겨있는 것에 만족하며 다시 걸음을 옮겨 활짝 열려있는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은 그런대로 넓었다. 4인 식탁을 붙여 8인용 식탁으로 나열해 약 30명정도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크기였다. 한 쪽 벽에는 커다란 밥통과 반찬들이 뷔페형식으로 나열되어 잇었다. 조금 전 본관으로 들어올 때 식사를 하고 나오던 사람들이 마지막이었는지 식당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 윤 선생 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
몇 시간 전에 만났던 그 조리사였다. 조리실로 보이는 곳에서 고개를 내밀며 대뜸 반말을 건네는 그녀을 보며 현수도 어정쩡한 자세로 미소를 지었다.
“네. 잠깐 눈을 붙였는데 그만 잠이 들었어요.”
“그래. 힘들기도 했지. 푼타에서 이틀 동안 발이 묶였다며?”
조리실을 나오며 묻는 그녀에게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네.”
“모두들 그래. 그래도 힘들게 들어와야 남극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거지.쉽게 아무나 들어올 수 있어봐. 그럼 남극이 남극인가? 하하하.”
그녀의 우스갯소리에 현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주로 식탁을 쓱쓱 훔치는 폼이 여간 숙달된 솜씨가 아니었다.
“자. 여기 앉아서 먹어. 저기 식판이 있으니 밥통에서 밥 덜고 반찬이랑 덜어서 먹으면 돼.”
“네. 조리사님은 식사하셨어요?”
“그럼. 나는 벌써 먹었지. 그리고 조리사는 무슨. 그냥 언니라고 해. 나보다 어린 대원들은 그냥 누님이라고 하니까. 윤 선생도 언니라고 해.”
그녀의 넉살에 현수는 이제까지 남아있던 모든 어색함이 단번에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럼 지금 여기 있느 사람들이 50명은 된다고요?”
“그래. 지금은 여름이라 그렇지. 한 열흘 후쯤이면 다들 다시 돌아가. 본래는 남극의 여름이 끝나는 2월까지 있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지난 차수 월동대와 다 함께 간다는군. 다 돌아가고 나면 차라리 이 북적임 그리울걸?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떠나는 고무보트가 멀어지는 그 순간 찾아오는 적막감이란….”
현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놀란 탄성을 질렀다.
“그럼 이 많은 사람들의 밥을 혼자 다 하신다구요?”
“그렇지. 50명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야. 예전에 공사판에서 식당 운영도 해봤고 학교 식당에서도 일해 봤는데 거기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야.”
“그래도…설거지도 혼자 다 하시는 거예요?”
“아니. 설거지는 돌아가면서 도와줘. 에이. 근데 귀찮아. 나혼자 하는 게 더 빨라. 지금이야 인원이 많으니 도움을 받지만 월동대만 남게 되면 도울 일도 없어. 나 혼자 충분해.”
현수는 정말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존경스러웠다. 자신은 한국에 있는 집 식구들이 먹은 설거지만으로도 허리가 아프네, 다리가 아프네 하면서 갖은 엄살을 피웠는데….50명분이라니….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해내리라.
“제 밥, 남았습니까?”
현수는 순간 식당입구에서 들려오는 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젠장. 오늘 하루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당연하지. 왜 이제 와?”
“내일 연구 활동 나갈 사람들 리스트 짜느라 좀 늦었습니다.”
“어서 앉아. 국이 식었겠네. 내 데워 올테니 우선 밥 먹고 있어.”
그리고 조리실로 급하게 사라지는 영숙의 뒤로 강 박사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됐어요. 그냥 두세요.”
“금방 돼.”
현수는 뭐라고 투덜거리며 식판에 반찬을 더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달그락.
현수는 자신의 맞은편에 식판을 놓고 자리에 앉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자신의 식판을 빠르게 비우기 시작했다. 현수는 그의 큰 손을 보다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우선, 키가 평균보다 큰 것 같았다. 대충 185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거기에 골격이 크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지금 보니 어깨며 팔이며 무슨 운동이라도 한 사람처럼 근육으로 단단해 보였다. 보통 키와 보통 몸매를 가진 그녀가 보기에 그는 큰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꽤 잘생긴 편에 속했다. 유하고 부드럽게 생긱 것이 아니라 강하고 거친 듯한 뚜렷한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것이었다.
“그 밥, 남길 겁니까?”
“네?”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느녀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되도록 아무것도 남기지 말아요. 밥이고 반찬이고, 딱 먹을 것만 덜어서 먹어요. 남극은 환경의 오염이 없는 청정지역입니다.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조차도 모두 모아서 한국으로 돌아갈때 가지고 나갑니다. 그러니 음식 쓰레기는 더더욱 생기지 않도록 해요.”
참나. 누가 어쨌다고. 저 남잔 왜 나한테 저렇게 퉁명스럽지?
“다 먹을 거예요.”
그녀는 그에게 톡 쏘듯 말하고는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그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식판을 비우기 시작했다.
“자. 따뜻한 국이다. 먹어.”
영숙이 내려놓는 국그릇에 남은 밥을 모두 넣어 말아먹는 그의 행동에 현수는 기가 죽었다. 무엇이든 거침이 없는 남자였다. 아니. 어떻게 된 남자가 밥 먹는 것조차 사람 기를 죽이는지.
현수의 식판도 다 비어갈 즈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한잔 하고 가.”
영숙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내일 다른 연구팀이 설상차(눈이나 얼음 위를 달릴 수 있도록 폭이 넓은 무한궤도를 장치한 특수 자동차)를 운행한다니 점검을 해놔야 됩니다.”
“쯧쯧. 강 박사 아니면 할 사람이 없대? 시설유지팀 일을 왜 강 박사가 해? 유지반장은 뭐하고?”
“바쁘니까요. 하계대가 있는 여름동안은 유지반장이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잘 먹었습니다. 아, 의료대원은 내일 오전에 잠깐 봅시다.”
현수는 순간 그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몰라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저요?”
“그럼 여기 의료대원이 당신 말고 또 있습니까?”
현수는 그의 말투에 발끈 화가 났다. 누구도 그녀를 의료대원이라고 부른 적이 없으니 당황한 것인데 그걸 가지고 저렇듯 비꼬다니, 정말 그녀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녀의 말투 또한 곱게 나가지 않았다.
“내일 오전 몇 시요?”
“끙. 몇 시….젠장. 시간을 정할 수가 없어.”
자신의 머리를 거친 동작으로 헤집으며 욕설을 내뱉던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곧이어 그녀를 향해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내일 오전 중으로 의무실로 갈 테니 기다려요.”
그리고 몸을 돌려 식당을 나가버리는 그의 바쁜 뒷모습에 현수는 기가 막혔다. 오전 내내 저만 기다리란 말인가? 나 참. 뭐 저런….
“쿡쿡. 현수 씨가 참아. 강 박사가 현수 씨 때문에 화가 많이 났었거든.”
현수는 영숙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뭘 어쨌게요?”
“현수 씨가 뭘 어째서 그런 게 아니고,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서 그런 거지. 들었겠지만 강 박사는 이번 월동대 부대장이면서 해상안전책임자야. 남극에서 해상안전책임자면 전 대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지. 그래서 이번 월동대도 그가 직접 대원들 선발에 참여했고 대원들의 훈련에도 함께 참가했어. 아마 이제까지의 월동대원들 중에 이번 월동대가 가장 훈령니 잘 되고 기량이 뛰어난 대원들일 거야. 연구원들뿐 아니라 시설유지팀, 그리고 의사까지 모두 그의 지휘방식에 적응된 사람들이야. 그런데 그 중 최 선생이, 최 선생은 이번 월동대의 의사였지. 최 선생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남극을 떠나고 다른 대체 의사를 데려와야 하는 데서부터 강 박사의 고민이 시작된 거야. 자신이 만든 완벽한 팀에 작은 구멍이 생겼고 거기다 시간이 촉박해 민간의사를 보내겟다는 연구소 본보의 말에 더욱 걱정이 생긴거지. 그런데 며칠 전 한국 극지연구소에서 통보해 온 전문에 의하면 그 훈련되지 않은 민간의사가 여자라는 거야. 쿡쿡쿡. 그때 그의 표정을 현수 씨가 봤어야 하는데.”
현수는 영숙의 말을 들으며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그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가 뭐? 어차피 민간의사가 오기로 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거기다 여자라서 더욱 고민이라니.
그녀의 못마땅한 표정에 영숙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강 박사가 여자에 대해 조금 안 좋은 편견을 가진 것 같지?”
“조금이 아니고 많이요.”
현수의 뾰로통한 말에 영숙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그래. 많이.그러니 현수 씨가 그런 강 박사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라고.”
“제가요?”
“그래. 여자도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의 일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잇는 사람인 걸 보여주라는 거지. 내 보기에는 현수 씨도 보통은 아니게 보이네. 그러니 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현수는 그녀의 말에 크게 호응이 되지는 않았다. 자신은 크게 강단 있는 여자도 아니었고 낯선 남극의 생활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지낼 배짱도 없었다. 하지만 저 강 박사라는 남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고픈 마음이 있었다. 영숙 언니가 도와준다지 않는가. 내 할 일만 제대로 해내면 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좋아요. 저 남자한테 본때를 보여주는 거 찬성이에요.”
“그래? 그래. 윤 선생 진짜 마음에 드네. 하하하하.”
너무도 재미있다는 듯 웃어젖히는 영숙과 달리 현수는 속에서 타오르는 맹렬한 전투력으로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오빠 둘과 평생 싸우며 컸는데 남자 하나쯤이야.
현수는 총무에게서 건네받은 열쇠를 문손잡이에 넣고 돌렸다. 찰칵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의무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넓지 않은 좁은 방이었다. 처음 보이는 것은 작은 책상과 의자, 그 뒤로 철제 캐비닛이 보였다.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의무실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오른쪽으로 의료용 간이침대가 있었고 왼쪽으로는 유리문이 달린 진열장이 있었다. 그 안에 각종 약품들과 소모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폼이 정리하는 데만 몇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현수는 다시 눈길을 돌려 진열장 옆의 원목 장롱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장롱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아니나 다를까 진열장과 마찬가지로 엉망으로 엉켜있는 의료기구들이 보였다. 아마도 자신의 앞에 왔다던 최 선생이라는 의사는 이것들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프레이 기지에 도착하자마자 다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고 하니 무슨 정신이 있었겠는가.
“휴….”
현수는 잠깐 그대로 서서 장롱 안을 들여다보며 이 모든 것을 어떤 식으로 배치할지 생각해보았다. 우선 가장 많이 쓰일 것 같은 약품들은 진열장에 나열하고 또 자주 쓰는 의료기구들은 저쪽 서랍과 저기 탁자위에…..
그렇게 그녀는 의무실을 어떻게 정리할지 구상한 후 의무실 한쪽 벽에 나있는 작은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창안으로 밀려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현수의 숨이 턱 멈추었다. 하지만 밝게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했다. 현수는 밝은 햇살에 호흡을 가다듬다 문득 웃음을 머금었다. 어젯밤은 기지로 오느라 피곤한 몸을 쉬어주기 위해 아홉 시쯤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때까지도 해가 떠있었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밖이 환애 벌써 늦은 아침인줄 알고 허둥거렸었다. 하지만 곧 새벽 네 시도 안 된 시간임을 알고 어찌나 우스웠던지.
그제야 기억이 났었다. 급히 남극으로 오느라 남극에 관한 책 한 권만을 들고 비행기에 탑승했었는데, 그때 읽었던 책속에 남극의 여름에는 밤 열한 시에 해가 지고 새벽 세 시쯤 해가 뜬다고 쓰여 있었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렇게 허둥거리며 남극에 적응하게 될 듯싶었다.
현수는 창밖의 차가운 바람에 몇 번 더 호흡을 가다듬고 오늘 오전 중으로 의무실을 정리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흐트러진 진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