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55
154화. 꽃 한 송이, 사탕 한 바구니
에피소드 19.
협회장이 여는 통로는 대개 협회장실로 바로 연결된다.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고, 밤에 진행될 계획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던 신유하는 일찌감치 협회장실에서 요깃거리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신경을 많이 썼을 테니 피로가 심할 거로 생각했다나.
살갑게 인사하며 태연히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말한 신유하는 우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태 확인부터 했다.
그리곤 유일하게 피가 묻은 옷을 입고, 안색이 나쁜 진예신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신여월에게 양껏 잔소리를 들을 때도 시무룩하기만 하던 진예신이 어깨를 흠칫 굳히고선 어설프게 웃었다.
참으로 안쓰러운 모양새였지만 신유하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협회장실의 내선 전화에 손을 올렸다. 누구에게 치료받고 싶은지 골라보라며 선택지를 두 개 주는 얼굴이 자애롭기 짝이 없었다.
‘내가 뻔히 같이 있는데도 두 사람을 언급한다는 것은 누구에게 혼나고 싶은지 말하라는 뜻인가.’
천하의 진예신을 구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목록에 윤혜아가 있다는 게 조금 놀랍긴 한데, 두 사람이 오랜 친우란 얘기를 들었던 게 떠올라서 그럴 법도 하겠구나 싶다.
박호승과 이세환도 내가 아프기만 하면 난리가 나거든. 여하간 제 미래를 상상했는지 시커멓게 눈이 죽은 진예신은 윤혜아를 골랐다.
심초연보다는 윤혜아한테 덜 혼날 것 같았을까. 내가 봤을 때는 거기서 거기인데.
진예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윤혜아에게 연락을 넣은 신유하는 진예신만 외따로 떨어진 의자에 앉히고, 나와 신여월은 응접용 소파에 앉히며 차를 내어왔다.
“고생 많으셨어요, 어머니. 그리고 요한이도.”
“시간이 늦어서 그렇지 딱히 고생이라고 할 건 없었단다.”
“응. 별일 없었거든. 부협회장님께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시지만.”
신유하가 직접 블랜딩했다는 긴장을 풀어주는 홍차를 받으며 신여월이 겸손을 떨었고, 나는 쭈글쭈글해진 진예신을 찌르는 말을 했다.
진예신이 너무한다는 듯이 나를 봤지만, 무시하고 차를 즐겼다. 그러게, 누가 다치라고 했나. 최대한 몸 성히 귀환하라는 말을 들어 먹지 않은 진예신이 전부 잘못했다.
“평소보다 이르긴 한데, 아침 식사를 할까요? 간소하지만 2단 트레이는 채워서 왔거든요.”
“나는 좋단다. 요한이는 어떠니? 아침부터 단 것이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으니?”
“강철도 씹어 먹는다는 고등학생이 뭘 못 먹겠습니까. 더군다나 신유하의 솜씨라면야, 메뉴가 뭐든 협회 모두가 자기가 먹을 거라고 달려들 겁니다.”
내 대답에 신여월이 킥킥 웃음을 터트렸고, 신유하가 어쩐 일로 내 얼굴에 금칠을 다 해주는 거냐며 장난스럽게 미간을 찡그렸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잠시 안쪽에서 스콘하고 토스트를 데워 올 테니까 차를 즐기고 계세요. 금방 올게요.”
“천천히 하렴. 혜아도 곧 올 테니 한 잔 더 준비해주고.”
“그럼요. 넉넉하게 가져왔는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신유하가 나긋나긋하게 대답하고는 응접실 안쪽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풀풀 나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단 생각은 안 하고 있었는데,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가 나니까 괜히 허기가 졌다.
마시기 딱 좋은 온도의 홍차를 조금씩 마시며 속을 달래는 사이, 열심히 달려온 것인지 윤혜아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협회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예신이 다쳤다면서요? 얘 어디, 아하, 거기 있었네?”
고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신여월에게 먼저 말을 붙였던 윤혜아가 눈을 번뜩이며 협회장실을 훑고는 빠르게 진예신에게 다가갔다.
핏자국을 보여주기 싫은지 있는 대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진예신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슬그머니 양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했다.
뾰족하게 눈을 치켜뜬 윤혜아는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지 연신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후우 깊은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할 말이 진짜 많겠다, 그치? 그런데 일단 내가 좀 말해도 될까? 응?”
“어어, 얌전히 들을게….”
“아주 좋은 자세야. 변명은 듣고 싶지 않지만, 그 자세를 높게 쳐서 이따가 시간을 주기는 할게.”
일단 똑바로 앉으라며 일갈하는 윤혜아의 살벌한 기세에 진예신이 쭈그렸던 몸을 곧게 세웠다.
아직 진예신에게 자초지종을 듣지 못했고, 겉보기에는 멀쩡해서 왜 그렇게 다쳤는지, 어디를 다쳤는지 하나도 모른다.
피 냄새가 짙어서 크게 외상이라도 입은 줄 알았는데, 옷이 해진 부분은 없는 걸 보니 내상이었나? 얼굴은 어떻게든 닦은 모양인데, 옷은 여전한 게 좀 의아하다. 아이온으로 한 번에 깨끗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혹시 아이온에 문제가 있나.
어차피 치료는 내가 하게 될 테니 윤혜아가 탈탈 터는 동안에 슬쩍 진예신의 몸을 확인해볼까 싶었는데, 신유하가 달달 트롤리를 밀면서 나오는 바람에 생각이 끊겼다.
“간소하다더니 잔뜩 가지고 왔구나. 밤새 만들었느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거든요. 계속 손을 움직이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그래도 드실 수 있는 만큼으로 자제한 거니까, 꼭 다 드셔야 해요?”
“아무렴. 아들이 해주는 걸 언제 이 어미가 마다한 적이 있더냐?”
신여월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신유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류지하가 일전에 했던 말 때문일까, 아니면 게임에서 이 둘의 결말이 그리 좋지 못했던 점을 알아서 그런가.
유달리 사이가 좋은 걸 보면 복잡한 기분이 들긴 한다. 저 평화를 깨는 건 못 할 짓 아닌가 싶은 그런 기분?
‘게임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끌려오기 전에 분명 히든엔딩이라고 했으니까…. 일단 다채로운 몰살 엔딩은 아닐 거 아냐. 그러면 뭐, 내가 하기 나름이겠지.’
반쯤 비운 잔을 내려두고 신유하가 끌고 온 트롤리를 빠르게 훑었다. 깔끔한 흰색 접시에 차곡차곡 담긴 티 푸드가 하나 같이 맛있어 보인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식빵, 반으로 자른 크루아상으로 만든 샌드위치, 크랜베리가 박힌 스콘이며 수제가 분명한 각종 잼과 크림, 그리고 달착지근한 향이 나는 마카롱과 과일 푸딩 등등.
아래층부터 먹으면 된다고 말하며 능숙하게 트레이를 세팅한 신유하가 접시 하나씩을 따로 앞에 놓아주며 아예 샌드위치를 나눠줬다.
한창 혼나고 있는 진예신과 조목조목 말로 패고 있던 윤혜아에게도 공평하게 나눠준 덕분에 잠시 협회장실이 조용해졌다.
“내 몫도 있었어?”
“그럼요. 제가 불렀잖아요. 일단 먹고 마저 할 일 하시면 돼요.”
“나야 고맙긴 한데….”
얼떨결에 접시를 받아 들고 당황스레 눈을 깜빡이던 윤혜아가 진예신을 흘끔 쳐다봤다. 넋을 놓은 것처럼 맹한 진예신의 얼굴을 확인한 윤혜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예신이가 이거 먹는다고 정신력이 채워질 거 같진 않은걸?”
“제가…. 그것까지 알아야 할까요?”
소설의 주인공은 게임의 주인공에게 몹시도 매정했다!
짭짤한 햄과 아삭한 양상추가 꽤 마음에 든 샌드위치를 열심히 먹다가 일순 기침이 나올 뻔했다.
꿀꺽 입 안에 든 걸 넘기고 급하게 홍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울상이 된 진예신이 제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냐며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오, 아직 제정신을 못 차렸나 본데.
이쯤 잔소리했으니까 그만하려던 기색을 보였던 윤혜아의 눈썹이 다시금 하늘을 향해 쭉 올라갔다.
그런 윤혜아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린 신유하는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일단 먹으라고 재촉했고, 그렇게 잠시간 맛있는 음식과 함께하는 조용한 아침 식사가 이어졌다.
협회의 감응자들은 식사하면서 근황을 나누는 일이 일상이다 보니까 언성이 올라가지 않을 정도의 대화는 꾸준하게 이뤄졌지만 말이다.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열심히 홍차와 티 푸드를 동내는 와중, 신유하가 흥미가 돋는 말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어머니. 이안 선배팀 오늘부터 사흘간 휴가에요. 몸져누우셨다고 연락이 왔어요.”
“음? 벌써 그런 시기가 됐느냐? 평소보다 조금 이른 것 같구나.”
“그런가요? 선배가 아픈 시기는 늘 달랐으니까요. 제일 잦았던 게 겨울이기는 하죠.”
고개를 끄덕이며 푸딩을 야금야금 먹는 신유하에게 윤혜아가 한동안 균열에는 내가 들어가겠다며 자연스럽게 일을 가져갔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사람이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며 신여월이 일을 채가고, 그건 다시 내가 반 정도 덜어서 가져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예신이 자기가 하겠다며 번쩍 손을 올려버려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친애하는 진예신 부협회장님. 이런 질문 실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으셨는지?”
윤혜아의 신랄한 말이 가감 없이 쏟아졌다. 웃지 않는 입매와 귀화가 서린 눈동자가 나를 향하지 않아도 섬찟했는데, 진예신은 언제 혼났냐는 듯 당당하게 마주하며 설득을 입에 올렸다.
“이번 일은 내가 잘못한 게 맞지. 다시 없을 기회라지만 네가 줬던 팔찌가 끊어질 때까지 안에서 버틴 것도 맞고, 또 여월 님하고 요한 군에게 부담되게 인질까지 됐으니까 말이야.”
“잘 알면 병동에 박혀 있지? 아이온이 오염돼서 지금 제대로 힘도 못 쓰잖아.”
“요한 군이 있잖아. 이 정도는 충분히 해독할 수 있어. 게다가 그렇게 심각할 정도는 아냐. 이제 피를 토하는 것도 아니잖아. 고작 이런 일로 협회 최고 전력 중 하나를 쉬게 만드는 게 더 문제라고.”
오염? 해독? 윤혜아와 진예신의 입에서 차례로 나온 단어에 내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두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기 몸을 막 굴리는 진예신한테 한소리 대차게 하고 싶은 마음을 접어두고, 의아하게 꽂히는 진예신의 눈빛과 담담한 윤혜아의 눈빛을 보며 우선 필요한 질문부터 했다.
“제가 작전을 수립한 장본인인데 모르는 정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온 오염이 뭡니까? 보고받은 사례는 없었는데, 윤혜아 선배가 따로 알고 계셨던 사항입니까?”
“으음, 엄밀히 말하자면 여월 님한테 허락받고 내가 보안을 걸어두긴 했어. 그런데 여월 님이 자세한 얘기를 아시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거슬려서 따로 연구하던 부분이거든.”
“공개하지 않을 겁니까? 부협회장님이 저렇게까지 다쳤으면, 제법 위험한 상황인데…. 연구 결과가 어떻든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응, 나도 알아. 그래서 준비는 차근차근히 하고 있었어.”
한숨을 푹 내쉰 윤혜아가 진예신에게 손바닥을 내밀었고, 진예신은 자연스럽게 보관함을 열어서 밀봉된 여러 물건을 우수수 쏟아냈다. 정체 모를 가공되지 않은 광석 몇 개, 새카만 병이 세 개, 그리고 두꺼운 문서들이었다.
“얘가 이번에 배정된 곳에서 단서가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그거 무사히 캐오라고 정화작용이 있는 팔찌를 준 거였어. 그렇다고 무리하란 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이지. 여하간 이거까지 취합해서 부장 권위로 긴급회의를 소집할 생각이었어.”
“그렇다면 지금 듣지 않아도 되기는 합니다. 결과 기다리겠습니다.”
당장 부실한 내용이라도 듣고 싶긴 했는데, 윤혜아의 연구원으로서의 프라이드 문제도 있으니까 참는 게 좋겠지. 아이온 오염이라는 처음 듣는 문제 상황에 대해 나도 따로 생각해볼 거리가 있으니까….
‘뭔가 게임에서 수상하게 여겼던 몇몇 문제들이 이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막 든단 말이야….’
언제쯤 회의가 시작될지, 그리고 이 정보가 어떤 가치가 있을지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는데, 윤혜아가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어우, 요한이 네가 미덥지 않아서 정보 공개를 안 한 건 절대 아니니까 섭섭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응? 그런 건 없는데, 내 얼굴이 이상하기라도 했나…?
당황한 내가 윤혜아를 진정시키기도 전에 윤혜아는 자료를 모조리 들고 후다닥 협회장실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붙잡을 새도 없었다.
황망하게 윤혜아가 나간 자리만 쳐다보자 신여월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고, 신유하가 허리를 굽혀 어깨를 떨었으며, 진예신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짜 뭔데….
웃음이 떠도는 협회장실에서 나만 웃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