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72
171화. 망각의 도시 (11)
시간은 언제나 공평하게 흘렀고, 담장 안쪽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만 갔다. 애초 그들의 계획은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
통째로 마을을 빌리는 일까지 해가며 주변에 휩쓸릴 사람들을 배제했고, 균열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 김요한에게 결계에 대한 지식을 빌렸다.
균열이 아니라면 마을 안에서 소풍을 즐기고 맞으면 두 팀으로 찢어져서 빠르게 주인을 찾은 후, 연락을 할 것. 그것이 전부였다.
‘비감응자만이 볼 수 있는 부분도 있으니까 우리가 할 일이 있을 거라고는 했었는데….’
진예신이 한 말을 곱씹던 이세환은 할머니가 나무 새만이 아니라 상자까지 넘기시는 걸 얼떨결에 받았다.
할머니는 김요한에게 주려고 건네셨던 것이긴 했지만, 이세환이 반쯤 본능적으로 끼어들어서 받은 것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요한이가 별로 안 좋아했으니까….’
좋지 않음을 넘어서 싫어함에 더 알맞았던 반응을 떠올린 이세환은 혹시라도 김요한이 달라고 할까 싶어서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김요한이 어쩐 일로 먼저 나섰느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봤지만, 이세환은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조금 싫은 티를 냈더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안색이 변할 정도였으니까….’
굳이 김요한이 들을 필욘 없던 생각이라 은근하게 답을 기대하는 김요한을 무시하며 이세환은 꿋꿋하게 침묵을 지켰다.
박호승과 자신에게만 유난히 김요한이 너그러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부릴 수 있는 배짱이었다.
당연하게도 김요한은 캐묻는 대신 조각을 줘서 감사하다고 할머니께 인사한 후, 다음은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일을 택했다.
“일단은 마저 광장 남쪽부터 나머지 부분을 둘러본 다음에 박호승한테 연락하고 넘어가자.”
“바로 안 가고…?”
의외의 말에 이세환이 눈을 크게 떴다. 폭음이 터졌을 때 나보다 더 놀랐던 건 너였으면서?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무심결에 꽉 움켜쥔 나머지 모서리에 손바닥이 눌려서 통증이 일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분에 뒷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의문이었다. 이세환이 아는 김요한은 상황이 어떻든 사람을 우선시하는 정 많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바로 큰소리가 났던 쪽으로 이동하거나 적어도 박호승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안부를 묻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저쪽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게 없잖아. 그렇게 커다란 소리가 나면 우리가 걱정할 걸 알 텐데 조용하다는 건 괜찮다는 거야. 그러면 우리도 할 일을 다 하고 움직이는 게 맞지.”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으면서….”
“어…. 그렇게 보였나?”
“으응…. 나도 놀라긴 했는데…. 요한이 너도 얼굴 엄청 파랬고….”
나무 상자를 손톱으로 살짝 갉작거리면서 이세환이 웅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전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끔뻑거리던 김요한이 멋쩍게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변명하는 것처럼 약간 횡설수설했다.
“그냥 너희는 이런 데가 처음이니까 내가 예민해져서 그래. 물론 부협회장님이 같이 있으니까 심각할 정도는 아니고….”
이세환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하게 말하던 김요한은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썹을 찡그리며 웃고는 말을 돌렸다.
“어쨌든 이건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균열에 들어오면 무조건 동료를 믿어야 공략에 성공한다고 그러거든. 그러니까 내 말은 일단 균열에 들어왔으니 너도, 그리고 박호승도 동료니까 괜찮을 거라고 믿고, 하기로 한 일을 하는 게 좋다는 거야.”
“아…. 그렇구나….”
가만히 김요한의 말을 듣고 있던 이세환이 다소 어리벙벙하게 입을 벌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보나 긍정의 표시였지만 이세환의 약간 아래로 내려가 버린 눈썹이나 어색하게 웃는 입매 같은 것이 영 걱정스러웠는지 김요한이 조금 당황했다.
“내가 뭐 이상한 말을 했어?”
“어어?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덩달아 당황한 이세환이 나무 상자를 꼭 끌어안은 채로 열심히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절대 김요한이 문제가 아니라는 표현을 격렬하게 보이며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네가 우리…. 라고 말하는 거…. 처음이라서….”
“나, 너희들한테 우리라는 말 자주 쓰잖아?”
김요한이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되묻자 이세환이 어쩐지 뿌듯하고 기특하다는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세환은 자각이 전혀 없지만,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꽤 민망한 말을 늘어놓는다는 걸 잘 아는 김요한이 질색하며 말을 돌리려 했다. 고군분투한 김요한에게는 안타깝게도 소용은 전혀 없었다.
“아냐, 내가 실언했으니까 이건 없던 걸로 넘어….”
“으응, 자주 썼지만 방금은 협회 동료들을 향한 거였잖아? 나랑 호승이만 믿을 수 있으니까 우리라고 한다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협회 동료들도 그렇다는 거니까 뭔가 좀 기뻐서….”
“으윽….”
셋 중에서는 가장 어른스럽지만 가장 세상이 작았던 김요한을 이세환은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지 몹시도 밝은 얼굴로 웃었다.
내 친구가 성장해서 기쁘다는 말을 가감 없이 하는 사람 앞에서 그 어떤 타박을 늘어놓을 성정이 못 되는 김요한은 그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앓는 소리만을 낼 따름이었다.
조금 후끈거리는 볼을 문지르고 벌겋게 달아올랐을 귓바퀴를 매만진 김요한이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이세환의 관심을 애써 돌렸다.
“칭찬은 달게 받을게…. 여하간 보물 힌트를 보면 우리가 찾은 등은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 해당하는 게 맞을 거야.”
“건물은 재증축됐지만, 등은 아니니까…?”
“응. 그럼 남은 건 세 개. 지도는 마을 전역을 표시한 거니까 보물이 죄다 우리가 담당한 구역에 있지는 않겠지.”
이번엔 순순히 김요한이 이끄는 주제 전환에 탑승한 이세환이 못해도 하나는 더 이쪽에 있을 것 같다며 그의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그리곤 제법 들뜬 목소리로 보물이 있는 장소에 대한 추측을 이것저것 내놓았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열정과 균열에 들어왔다는 흥분, 그리고 수시로 김요한을 힐끔대며 상태를 확인하는 걱정이 버무려져 항시 주눅 들어있던 말투가 당당하게 바뀌었다.
느긋하게 이세환의 발걸음에 맞추며 그의 말을 귀담아듣던 김요한이 오래간만에 더듬거리지 않고 말하는 친구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난 광장 남쪽에 표시된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요한이 너는 어때?”
“응, 그래. 네가 맞을 거야. 거기서부터 살펴보자.”
사이좋게 목적지를 향해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뒤를 샛노란 눈동자가 소리도 없이 훌쩍 따라붙었다.
* * *
본래 모습이 어땠는지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로 곤죽이 된 건물 잔해가 쌓인 공터를 돌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옆에 끼고 으슥한 골목으로 훤칠한 청년 둘이 뛰어들었다.
그림자에 몸을 숨기는 것처럼 햇볕 하나 들지 않는 곳까지 달리고서야 발을 멈춘 두 사람은 돌담에 등을 기대며 숨을 골랐다.
정확히는 박호승만이 거친 숨을 내쉬며 가슴을 들썩였고, 진예신은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은 멀끔한 낯으로 구겨진 옷자락을 정리했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박호승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잔망스럽게 물었다.
“아아~, 이게 정말 최선이 맞는 거죠, 형~?”
“그럼요. 나만 믿으래도요.”
“물론 연약한 저는 형을 철석같이 믿고 있죠. 목숨이 달렸는걸요~? 그런데 지금 상황은 좀…. 그렇지 않나 싶죠~?”
대개 호선으로 휘어있는 서글서글한 눈매가 비뚜름하게 꺾였다. 들어온 골목의 입구와 자신들이 서 있는 어두컴컴한 지역을 번갈아 응시하는 박호승에게 진예신은 시종일관 태연하게 대꾸했다.
“스릴을 제대로 느껴봐야 균열을 만끽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아하, 스릴~?”
박호승의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이 났다. 일순 매끄럽게 웃고 있는 입술이 신경질적으로 비틀렸다가 되돌아왔다.
박호승은 나름대로 어른이자 현재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진예신을 생각해서 표정을 가다듬은 것이지만, 진예신은 스스로 알고 있는 나쁜 취미 중 하나가 다채롭게 변하는 표정을 구경하는 일이었기에 도리어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들어오겠다고 결정했을 때부터 각오하기는 했었죠~! 그런데 평생을 일반인으로 산 사람이 눈앞에서 건물이 내려앉고, 이상하게 생긴 것들이 막 쫓아오고, 일단 뛰는 것밖에 답이 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스릴이 아니라 호러죠~? 갑작스러운 장르 변경은 사양하고 싶은데요.”
“아하하, 미리 말을 못 해준 건 내가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난 일반인보다 감응자로 산 시간이 더 긴 탓에 이런 갑작스러운 일에 너무 익숙해졌거든요. 제 배려가 매우 부족했네요.”
“어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또 할 말이 없죠~! 어쨌든 저어기 쟤들한테는 안 들킬 만한 곳까지 오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쩌면 좋죠? 요한이한테 연락할까요, 아니면 하나 더 있을 걸로 추정되는 보물을 찾으러 달릴까요~?”
과장되게 한숨을 푹 내쉰 박호승이 볕이 드는 골목 바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진예신은 잠시 턱을 문지르면서 방금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복기했다.
‘건물이 폭삭 내려앉았는데도 주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 거기서 정체 모를 생물체들이 튀어나와서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데도 다들 평범하게 행동하고 있지.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야. 게다가 보물.’
진예신이 마석 보관함에 던지듯이 넣었던 ‘이 마을에서 가장 멀리서 온 물건’으로 추정되는 보물을 떠올렸다.
힌트를 따라 찾아낸 보물은 낡은 건물 안에 있었고, 그걸 빼내자마자 무너지는 바람에 박호승과 급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치 보물을 지켜야 한다는 듯이 정체 모를 시커먼 생물체들이 거리에 나타나 활보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건 없겠어. 그렇다면 빠르게 보물을 찾고, 요한 군과 합류해서 이 균열의 주인을 끌어내야지.’
일이 잘만 풀린다면 퇴장을 약속했던 오후 6시보다 이르게 일을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이른 퇴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활기가 솟은 진예신은 베테랑 감응자답게 샛길을 이용한 이동 루트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짰고, 박호승의 어깨를 경쾌하게 두드렸다.
“호승 군. 더 달릴 수 있죠?”
“아, 그렇긴 하죠~? 팔팔한 학생인걸요~”
“좋아요. 그럼 제가 신호를 주면 곧장 골목길 밖으로 뛰어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무조건 직진으로 달려요. 어디로 가는지는 제가 뒤쫓으면서 신호를 줄 테니까. 알았죠?”
“네네, 알겠습니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기는 하냐고 투덜대면서도 박호승은 말 잘 듣는 착한 학생답게 운동화 끈을 질끈 묶었다.
박호승이 톡톡 앞코를 바닥에 두드리며 달릴 준비를 끝냈다는 표시를 내자 진예신이 왼손을 튕겨 양손 검지와 중지에 밋밋한 반지를 장착했다.
얼핏 반지가 빛난다 싶어 박호승이 약간 고개를 기울였지만, 그걸 물어볼 새는 없었다.
“달려요, 앞으로 쭉!”
반사적으로 박호승이 달렸고, 골목길을 나서자마자 나타난 새카만 그림자처럼 생긴 생물체가 갈기갈기 찢겼다. 막혔던 시야가 확 트이며 보이는 도로를 내달리며 박호승이 이를 꽉 악물었다.
‘모든 장르 중에서도 고어가 가장 싫은데!’
뒤에서 쫓아오고 동시에 앞을 가로막는 정체불명의 검은 생명체는 죄다 찢겨서 안전해졌지만, 아무래도 파트너를 잘못 고른 거 같아서 박호승은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