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54
53화. 장미의 무덤 (3)
주름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로브를 입은, 작은 짐가방 하나 없이 가벼운 차림새의 남성이었다.
오랜 시간 방랑하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한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위후는 풀 밟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걸음걸이로 정자까지 걸어와서 내게 가볍게 인사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당신을 한번 보고 싶어서 제임스에게 부탁했는데, 내게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척이나 정중한 요청이었지만 일방적인 만남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감점이다.
게임 속에서는 대사도 거의 없고, 마주치는 일도 적어서 몰랐는데 의외로 막무가내로 일을 해결하는 타입인가?
지팡이를 왼손에 쥔 채로 정자에서 빠져나와 위후와 똑바로 마주 섰다.
등 뒤로 걱정스럽게 이쪽을 힐끔거리는 친구 두 녀석의 눈초리가 퍽 따가워서 어서 용건만 해결하고 헤어졌으면 하는 심정에 다소 빠르게 대답했다.
“로라와 제임스에게 초청받아 휴식을 즐기고 있던 터라 저로서는 반갑지 않습니다. 용건이 있으시다면 빠르게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오, 미안합니다. 제가 마음이 성급했습니다. 제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거니와 미리 약속을 잡는 것도 힘든 처지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위후가 오른손을 가슴팍에 올리고 허리를 숙여 사죄를 표했다. 입씨름하기에도 여의찮아서 대충 괜찮다고 넘기고 다시금 용건을 물었다. 그러자 위후가 조심스럽게 박호승과 이세환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제가 보기에 저 두 분은 감응자가 아닌 것 같은데, 혹 이후 감응자가 될 여지가 남은 분들이십니까?”
“그건 예언자가 아닌 이상 모르는 부분이잖습니까. 일단은 둘 다 일반인입니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안 됩니까?”
“예. 김요한 씨도 저들이 위험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영원히 저희가 오늘 나누는 대화를 모르시는 편이 좋습니다.”
단호한 위후를 물끄러미 올려다봤지만, 후드 자락에 감춰진 눈동자가 보일 리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발언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일반인이 감응자의 일에 깊게 연관되어서 좋을 게 없는 건 맞아.’
친한 친구와 보호자라는 사적인 관계는 어쩔 수 없다지만, S급 감응자로 해결하는 공적인 일에 저 둘을 끌어들이는 건 사절이다.
그래서 위후에게 간단히 동의를 표하고 박호승과 이세환에게 잠시 기다리고 있으란 말을 전했다.
반발하고 싶은지 입술을 움찔대는 둘에게 식기 전에 차나 마시고 있으라며 정자에 앉혀두고 위후의 곁으로 붙었다.
위후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자며 앞장섰고, 그 뒤를 따라 구불구불한 미로 정원 안으로 발을 디뎠다.
사방이 장미와 푸른 잎만 보이는 장소에서 비로소 위후가 후드를 뒤로 넘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과분하게도 심판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위후라고 합니다. 봄의 주인인 당신을 만나기 위해 전야제 참석을 조건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봄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아직 별칭이 붙을 정도의 공적은 세운 적이 없습니다마는, 당신들 사이에서 제가 그리 불립니까?”
“방랑자들은 행운의 봄이 주인을 결정한 순간부터 당신을 주인으로 칭했습니다. 이유는 후에 우리의 수장에게서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만날 것이라 예언한 지 제법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래쪽으로 축 처진 두꺼운 눈썹과 다부진 눈매가 특징적인 얼굴이 애매한 미소를 그렸다.
오른쪽 눈과 볼을 지나는 흉터가 인상을 험악하게 만드는 데에 한몫하는 터라 분명 웃는 얼굴인데도 무시무시한 기세가 느껴졌다.
얼핏 검은색으로 보이는 진한 초콜릿 색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꼿꼿하게 서 있는 나를 선명하게 비춰냈다.
“점술사 도우.”
“예, 그분입니다. 당신과 동급의 S급 감응자이자 특수 능력자인 예언가이시며, 방랑자들의 왕이십니다.”
“말이 방랑자이지 세계 규모의 용병 집단이지 않습니까. 그런 자의 수장이 아시아의 작은 국가, 거기에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감응자에게 관심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수장의 심중을 읽는 건 그 누구도 할 수 없으니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곳에 온 것은 제 의지가 절반쯤이고, 수장의 의지가 절반쯤인데….”
위후가 넓은 소맷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복주머니를 꺼냈다. 윗부분이 꽉 조여 있는 주머니는 손바닥 정도의 크기로 작았는데, 위후는 거기서 주머니보다도 커다란 상자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별다른 장식은 없지만 고급스러움이 물씬 느껴지는 상자를 차마 받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쳐다만 보고 있자 위후가 강제로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
“수장의 의지는 제가 전서구의 역할을 하기 바란 점입니다. 수장이 말하기를, 언제 이 상자를 열어보실지는 당신에게 달렸으며, 부디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나의 작은 안배이며, 그대에 대한 속죄다. 라고 하셨습니다.”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수장의 말은 늘 알쏭달쏭하여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렸다고 했으니, 상자를 열지 않는 것 또한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아예 받지 않고 싶습니다.”
“그건 힘듭니다. 당신이 받지 않으면, 저는 이 상자를 다시 수장에게 줘야 하는데 그러면 분명 다시 건네주라며 당신에게 보낼 게 틀림없습니다. 이건 수장을 옆에서 보좌하는 제 판단이니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떨떠름하게 상자를 쳐다보다가 우선 받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마석 보관함에 넣어 지금 열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을 했다.
위후는 상자가 어떻게 되든 내 손에 있으면 상관이 없는지 후련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제 용건입니다. 지난달 초에 당국, 그러니까 제 고향에 들르기 위해 중국에 잠시 입국했습니다. 방랑자의 이름으로 보호받고 있기도 하고, 고향의 사람들은 전부 제게 목숨 빚을 진 자들이라 가끔 고향 풍경이 그리울 때면 들르는 편인데, 이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면 어디든 새어 나갔을 텐데, 지난달에는 중국에서 기사화된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럴 겁니다. 고향을 포함한 주변 마을 다섯 개를 통째로 봉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을 틀어막는 것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한 나라이니 앞으로도 목숨을 건 기자가 없는 이상, 비밀에 부쳐지게 될 겁니다.”
“그런데 위후 당신은 알게 되었으니 위험한 것 아닙니까?”
“늘 위협받고 있는데 하나 더 안다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하여 어떻게든 제 선에서 해결해주고 싶어서 이리저리 알아보았습니다만 영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수장이 저를 불러서 봄의 주인에게 조언을 구해보라고 말해줬습니다.”
도우는 대체 나랑 무슨 원수를 졌나?
생전 만나지도 못한 사람이 예언을 통해 나를 알고 있다는 점부터 기분이 더러운데, 위후를 일부러 이곳에 보냈다고 하니까 이제 짜증이 났다.
위후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도움을 주는 선에 속하는 사람임을 알지만, 누군가의 장기판 위에 올라간 느낌이 싫은 거다.
‘애초에 게임에서 도우가 한 일이라고는 매일 운세를 점쳐주는 상점이었다고. 얼굴이야 알지만, 전투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방랑자라고 부르는 용병 집단이 무슨 일을 했는지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잖아?’
게임 시간으로 자정이 되면 그날의 운세를 점쳐서 하루 동안 좋은 축복 효과를 걸어주거나 풀기 까다로운 저주 효과를 걸어주던 NPC. 그게 딱 도우라는 캐릭터에 대한 감상이었고, 현실이 된 이후에도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예상한 자이다.
진짜 이름은 그의 최측근도 알지 못하고, 성의 없는 가명인 ‘도우(Doe)’만으로 활동하는 괴짜랑은 친분을 다지기도 싫었단 말이다.
꽁한 마음이 들어서 부루퉁한 눈초리로 위후를 노려보며 물었다.
“아시겠지만, 이제 유월이니 저는 감응한 지 이제 여섯 달째에 접어드는 초보자입니다. 제 몇 배나 되는 시간 동안 감응자로 활동한 당신에게 해줄 만한 조언이 있을 리가 없단 얘깁니다.”
“상식적으로 당신의 말이 옳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것이라 지혜를 빌려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중국과 사이가 더럽게 안 좋아서 고향도 싫어하는 줄만 알았는데. 위후라는 캐릭터를 게임에서 만났을 때 봤던 농도 짙은 ‘나라와 고향에 대한 혐오감’은 그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목숨 빚을 지웠다는 마을 사람들을 걱정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좋습니다. 우선 얘기를 마저 들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것을 먼저 봐주십시오.”
사람이 사람을 걱정하고 있는데 다짜고짜 못한다고 뻗댈 수는 없다.
인간 된 도리로서 사정을 들어보고 결정할 심산으로 지팡이를 돌려보내고 팔짱을 끼며 대답하자 위후가 반색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뭡니까, 이건? 평범한 조약돌처럼 보이는데….”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글동글하게 깎인 조약돌이 한 주먹이었다.
위후의 손에 있던 것 중 서로 색이 다른 두 개의 돌을 가져와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비교하며 묻자 위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다시피 실제로 조약돌이 맞습니다. 다만 아이온을 불어넣으면.”
위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온을 조약돌에 밀어 넣었다.
왼손이 녹색으로 물들면서 조약돌에 쑥 스며들었고, 이내 조약돌은 물고기 모양의 자물쇠로 모양을 바꿨다. 골동품점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옛날 전통 자물쇠다.
신기한 마음에 자물쇠를 이리저리 살피는데 위후가 한숨처럼 웃으며 말을 끝마쳤다.
“예, 달라집니다. 그렇게. 다만 열쇠가 없어서 열 수 없습니다.”
“이런 자물쇠는 열쇠가 아니라 쇠 지렛대만 있어도 열릴 텐데, 통하지 않습니까?”
“네.”
나지막하게 대답한 위후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또렷한 눈동자가 내 손바닥 위의 자물쇠를 담았다가 이내 그보다 더 먼 곳의 과거를 헤매기 시작했다.
“제 고향은 아주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좁고, 정이 많은 곳입니다. 세상은 감응자니, 균열이니 시끄럽지만 그런 소식조차 별세계처럼 느껴질 정도인 곳이었습니다. 한데 그런 곳에 균열이 생긴 겁니다. 작은 시골 마을을 전부 삼켜버릴 것처럼 새빨간 균열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감응자가 되었고, 균열을 공략하기 위함이 아닌 마을을 폐쇄하러 온 당의 감응자를 전부 병원에 실려 보냈습니다. 심판자라는 별칭도 그때 받았습니다.”
게임 속에서도 언급되었던 과거였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꽤 유명한 얘기다.
오버 A급의 치유사가 자신의 국적을 포기하고, 고향 땅을 떠나서 방랑길에 오르게 된 사연이 몹시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다.
‘국적을 버렸는데도 중국에 충성하라면서 고향을 인질 잡았다고 들었는데. 게임에서는 그 탓에 고향도 등졌다고 되어 있더니만, 지금 시점에서는 아니었나 본데.’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게임 속 정보와 위후가 직접 말하는 정보를 취합하면서 자물쇠를 별 뜻 없이 톡 두드렸다.
그러자 물고기의 부릅뜬 눈이 빙글빙글 돌다가 나를 보더니 별안간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물고기가 왜 눈을 깜빡거리지? 아니 그 전에 이거 자물쇠잖아.
갑작스러운 변화에 뻣뻣하게 팔을 굳힌 채로 위후의 말을 애써 귀담아들었다.
“여하튼 그 후로 고향에 간 것은 손에 꼽습니다. 올해로 네 번쯤 되었으니 5년에 한 번 정도 들렀습니다. 그때마다 균열이 크게 열렸던 곳이니 행여 또 생길까 싶어서 변화가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저를 붙잡고 말해줬습니다. 갑자기 픽픽 쓰러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들이 죽은 듯이 잠만 잔다고.”
“죽은 듯이 잔다라…. 얼마나 오래 의식을 잃고 있던 겁니까?”
“가장 먼저 쓰러진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면 두 달입니다. 먹지도 못하고, 변변찮은 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라 영양소를 공급해줄 수도 없었는데 쓰러진 날과 똑같은 체격으로 침상에 누워서 간혹 헛소리를 하는 것까지 자는 사람과 똑같았습니다.”
움직이는 물고기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가까스로 떼고 위후를 응시했다.
전조도 없이 사람이 쓰러져서 꿈을 꾸는 거라면, 보통 원인은 누군가의 저주다.
서로 속속들이 사정을 다 알고 지낼 정도로 작은 마을이라면 주술사가 직접 마을을 찾아갔을 리는 없고, 무언가 매개체를 통해서 사람들을 옭아맸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자물쇠가 그 물건인 모양인데, 이쪽은 내 전문 분야와는 살짝 결이 달라서 확신을 내리기엔 이래저래 단서도 정보도 모자라다. 그럼 물어봐야지.
“그럼 이 자물쇠는 쓰러진 사람의 주변에서 찾으신 겁니까? 아니면 따로 모여 있는 곳이 있었습니까?”
“후자입니다. 저주의 가능성이 가장 커서 마을 전체를 샅샅이 뒤졌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조약돌 형태로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장이 서는 장터로 인근 작은 마을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이는 장소입니다.”
꽤 넓은 공터이고, 그 주변을 따라 마치 결계를 쳐 놓은 것처럼 조약돌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며 위후가 설명을 추가했다.
“처음엔 제 지식으로 해주를 해보려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정화 물품을 사용해보기도 했고, 강제로 꿈을 깨우는 주술을 써보기도 했습니다만 그 무엇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조약돌에 아이온을 가했고, 모양이 변한 것을 확인한 후에는 열어보기 위해 아이온만으로 이루어진 열쇠를 만들기까지 했는데 수확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당신의 수장이 제게 보냈다는 건데, 저도 해주에 관해서는 그리 박식하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내 말에 실시간으로 기운이 빠져나가 축 늘어지는 위후에게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자물쇠를 보여줬다. 위후의 다부진 눈매가 크게 벌어지며 동요하는 게 보였다.
이런 건 자신이 시도하던 중 보지 못했던 반응인가. 하긴 나도 자물쇠가 의지를 가진 건 처음 보긴 한다. 평범한 자물쇠가 아니라 저주의 매개체지만.
“당신의 반응을 보아하니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예, 예…. 정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멍하게 대답하던 위후가 돌연 눈을 번뜩이며 양손으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사이에 끼인 자물쇠가 어쩐지 퍼덕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고향 마을만이 아니라 장터를 이용하던 인근의 마을에 잠들지 않은 사람은 이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르신과 가장 어린아이로 마을마다 두 사람뿐입니다. 무사히, 그들이 무사히 눈을 뜰 수만 있다면 저는 뭐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봄의 주인.”
“그으…. 하아. 봄의 주인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건은….”
별칭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서 진저리를 치며 말하자 위후가 풀죽은 얼굴을 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생긴 외모인 주제에 불쌍한 표정이라니.
그 괴리감이 어색했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그에게 매정하게 못 한다고 말할 순 없었다.
결국,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엄연히 베테랑 치유사인 자신의 자존심도 내려놓고, 어린 내게 달려온 사람인데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을까.
기껏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에 생긴 일거리가 달갑지 않았지만, 일복이 터지는 것도 내 팔자다.
“예, 함께 해주 해봅시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환하게 핀 얼굴로 꾸벅꾸벅 허리를 숙이는 위후의 뒤쪽으로 장미 넝쿨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게 꼭 일터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손짓처럼 느껴져서 조금 속이 쓰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