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53
52화. 장미의 무덤 (2)
태양은 뜨겁지만, 바람은 선선히 불어서 땀이 줄줄 흐르지는 않았다. 활주로와 백사장을 제외하면 어디에나 나무가 심겨 있어서 그늘도 많았다.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바닷가에서 노는 것도 즐거울 터고,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친구들과 나눌 수는 없었다. 여러 선택지가 있는 가운데, 박호승과 이세환은 이미 결정을 했던 것인지 무거운 피크닉 가방을 힘차게 들고서 나를 이끌었다.
길치인 이세환과는 다르게 지도 외우는 게 특기인 박호승은 짧은 안내를 받는 동안에 길을 익혔는지 망설임 하나 없이 앞서나갔다.
“도착!”
박호승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양팔을 활짝 펼쳤다.
미로 같은 장미 덩굴을 헤치고 나오자 하얀 정자가 있는 아담한 장소가 나타났다.
그리스 신전을 반으로 축소해 놓은 것처럼 생긴 독특한 형태의 대리석 정자는 네 귀퉁이의 기둥마다 섬세한 조각이 가득해서 화려했다.
이런 건 대체 언제 찾아보고 가는 길을 알아둔 것인지 모르겠다.
분위기 좋은 장소를 앞에 두고 내 안목은 역시 뛰어나다며 자화자찬하는 박호승을 제치고 먼저 정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신발을 신고 올라서도 되는지 황송할 정도로 새하얀 디딤돌을 밟고 내부로 들어섰다.
‘원래 티타임 하던 장소인가 보네.’
네 명 정도 앉으면 꽉 찰 크기의 둥근 탁자와 한 세트로 보이는 의자들, 분명 어디선가 봤던 고풍스러운 감성의 테이블보, 그리고 그 위에 있는 3분짜리 모래시계 티 타이머가 보였다.
괜히 모래시계를 한 번 뒤집어놓고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연이어 무거운 가방을 들고 올라온 이세환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살금살금 걸었다.
마지막으로 내 말을 좀 들으라며 징징대던 박호승이 곧바로 따라 올라왔는데, 뭉그적거리는 이세환의 등짝을 시원하게 한 대 치면서 깔깔 웃었다.
“넌 왜 갑자기 소심해져서 이러고 있는 거야?”
“아니 그게…. 조금 부담스러워져서….”
“뭐가? 난 네가 저택 내부에서 놀자고 하면 숨넘어갈 거 같아서 나온 건데. 이 정도면 공원 같고 괜찮지 않나?”
진정으로 의아하다는 박호승의 반응에 남는 의자에 가방을 올려둔 이세환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이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울상으로 일그러진 눈동자가 애처롭게 나를 향했다.
모처럼 휴가다운 휴가에 기분이 너그러워진 나는 기꺼이 이세환을 위해 지원사격을 해줬다.
“아까만 해도 여행하러 온 기분이라서 별세계처럼 꾸며진 저택이 상관없었는데 갑자기 재력이 체감된 거지.”
“갑자기?”
박호승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어지고, 이세환의 고개는 연신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대조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크게 하품을 하면서 턱을 괬다.
사방에 진동하는 장미 향기가 벌써 익숙해졌는지 처음처럼 어지럽지는 않았지만, 미묘하게 몸을 늘어지게 했다.
뻑뻑한 눈을 끔뻑이면서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박호승에게 시비를 걸었다.
“금전 감각이 마비된 도련님이 알면 더 이상하니까 그냥 넘어가. 태어날 때부터 금을 물고 태어났으면 모르는 것도 있는 법이지.”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아니, 그리고 나 정도면 아껴서 쓰는 건데? 내가 어디 쓸데없는 곳에 돈 쓰는 것도 아니고, 엄청 비싼 걸 사는 것도 아니고, 이번 경매에서도 별로 안 썼다고! 이 정도면 금전 감각 평범하지 않아?”
“아이고, 이클립스에서 뭘 사긴 샀냐? 뭐 샀는지 빨리 불어봐. 진행자 말솜씨에 혹해서 별 필요 없는 물건을 산 거 아닌지 확인 좀 해보자.”
박호승이 땍땍거리며 벌떡 일어서더니 삿대질을 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호승을 살살 놀리면서 힐끔 이세환을 확인했다.
답도 없는 소심함이 조금 사라졌는지 이세환은 이제 바지런을 떨면서 가방을 풀어헤치고 있다.
각종 식기, 다구, 잘 포장된 간단한 찬거리와 간식 등이 줄줄이 탁자 위로 올라왔다. 펄쩍펄쩍 날뛰던 박호승이 반응 없는 내게 지쳐서 의자에 도로 앉아서 투덜대다가 금방 반색하며 좋아할 정도로 탁자 위가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졌다.
“뭐가 쉴 새 없이 나오네. 그거 평범한 가방 아니구나.”
“으응. 아이온으로 효과가 부여된 아이템이야. 겉보기보다 많이 들어가고, 또…. 들어도 무게만큼 무겁지 않고….”
“그 정도 효과면 꽤 비싸겠는데. 가방류는 원래 고가기도 하고.”
“헉, 진짜로? 그으…. 나 이거 받은 건데….”
이세환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벌벌 떨렸다. 반사적으로 박호승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내 시선을 피해 슬쩍 눈을 돌렸다.
하는 꼴을 봐서는 박호승이 선물하지는 않았을 테고, 저 가방을 누군가가 이세환에게 줄 때 별로 안 비싸니까 부담 갖지 말라고 바람이라도 넣은 것 같았다.
아이온 현상에는 관심이 있어도 아이템에는 ‘신기하다’ 외에는 지극히 일반인 정도의 호기심만 있는 이세환은 당연히 비용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받은 모양이고.
‘저런 가방이 있어서 나쁠 건 없지. 덥석 아이템을 안길 재력이 있는 사람과 연이 생겨도 나쁠 건 없고.’
박호승은 의외로 우리를 같은 재벌 그룹의 자제들과 어울리지 않길 바라서 소개해준 적이 없으니 그쪽 사람들은 아닐 것이고, 그 외에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부자들은 대개 전투 계열 감응자인데 내가 소개해준 사람은 거의 없으니 그쪽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뿐.
‘유달리 비행기에서 침착해 보인다고 했더니만. 로라와 제임스랑 따로 대화도 하고 선물도 주고받았나 보네.’
그리고 아마 그때 나를 홀랑 잡아다가 여기로 올 계획도 짰을 게 틀림없다. 괘씸한 마음에 조금 놀려줄까 하다가 곧 쉬려고 왔는데 괜히 시무룩해지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얘네들이 나를 골탕 먹이려는 나쁜 심보만으로 일을 벌인 것도 아니니까.
“로라? 제임스? 어느 쪽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이서 상의하고 줬을 테니까 그냥 잘 쓰면 돼. 내가 너희 옆에 있다 보면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어서 뭐라도 쥐여준 거 같으니까.”
“어어, 그 두 사람이 준 건 맞는데…. 위험? 우리가?”
“야, 너 설마 막 이상한 일에 발 담그고 그런 거 아니지?”
어리둥절한 이세환과 희한하게 튀어버린 박호승의 사고방식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내 친구들이지만 둘 다 답도 없다.
자꾸 나오는 하품을 참지 않고 내뱉으면서 상체를 조금 더 무너뜨렸다. 거의 탁자에 턱이 닿을 정도로 늘어진 채로 눈만 치켜뜨고 둘을 쳐다봤다.
“너희 내 보호자 자리 대체 어떻게 땄냐? 분명 너희들 데리고 수업하셨던 이시영 선생님이 가르쳐 줬을 텐데. S급 감응자는 계열 불문 소중한 인재인데 전부 협회 소속이라 자기편이 될 수 없잖아. 그러면 강제로라도 도움을 받아야겠는데, 본인을 납치할 정도의 실력자는 드물어서 감응자 주변인들을 미끼로 힘을 갈취하려는 자들이 많아. 그니까 너희들은 나 때문에 협회에서 보안 최고등급에 책정될 정도로 위협을 많이 받는 사람이 됐다고.”
“아…. 그 얘기구나….”
“들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순하게 대답하는 이세환과는 다르게 갸웃거리던 박호승이 가방을 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거랑 이 가방이랑 뭔 상관인데? 이거 피크닉 전용 가방이라서 식기류랑 음식 말고는 안 들어간대. 덕분에 일반 가방 아이템보다 싼 거라서 얘한테 준다는 거 받으라고 했던 건데.”
“너희가 호신용품을 받아서 어떻게 쓰겠냐? 나를 노리고 너희를 납치할 정도면 어지간한 등급의 호신용품으로는 어림도 없어. 차라리 얌전히 끌려가서 내가 구하러 갈 때까지 몸 성히 있는 게 낫지.”
그런 의미에서 로라와 제임스는 나름대로 호의를 베푼 셈이다.
그들은 창고에 있는 수많은 호신용품을 제외하고 일부러 등급이 그다지 높지 않아서 아이들이 받아도 부담이 덜 할 아이템을 선물했다. 나 때문에 자기들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지 않는 선에서 물건을 골라낸 것이다.
실제로 희희낙락하게 본래의 용도대로 소풍을 위해 싸서 들고 왔으니 그들의 현명한 안배가 잘 통한 셈이다.
“말이 피크닉 가방이지 일반 가방이랑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평소에도 들고 다녀. 보아하니 안에 넣어두면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온도도 그대로 유지되는 거 같은데, 물이랑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 챙겨 다니면 되겠네.”
“그거야 손이 많이 가지도 않으니까 괜찮은데…. 그, 만약에, 우리가 납치된다고 하면….”
“하면?”
“이런 가방은 뺏기지 않을까…? 안에 들어있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우물쭈물하는 이세환의 말에 몹시 드물게도 나와 박호승이 저 어리바리한 애를 어쩜 좋으냔 표정으로 동시에 서로를 봤다가 이세환을 응시했다.
쟤는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토착민인데, 고작 다섯 달 산 나보다도 사회 상식이 뒤떨어져서 어떡하냐.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으면서 박호승에게 설명을 떠넘기려고 했더니만, 그새 박호승은 차를 우리겠답시며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보온병에 챙겨온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끼어들지 않겠다는 굳센 표명에 박호승을 째려보다가 안절부절못하는 이세환에게 입을 뗐다.
“아이온으로 인해 부가 효과가 있는 아이템은 소유주를 지정할 수 있어. 감응자는 아이온을 자유자재로 다루니까 자신의 아이온을 물건에 덧씌워서 인식시키지만, 비감응자는 불가능하잖아? 그래서 나온 게 전용 거래 계약서야. 말이 계약서이지 손바닥만 한 종이인데, 거기에 서명하면 그걸 매개체로 물품과 주인을 묶어두는 거야.”
“아, 그럼 그때 사인했던 게….”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걸. 소유주가 죽거나, 스스로 계약서를 찢거나, 직접 양도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은 손댈 수 없어. 특히 감응자는 아이온에 예민해서 쉬이 건들지도 못해.”
“그렇구나. 몰랐어….”
이세환이 신기하다는 듯 자기 손과 피크닉 가방을 번갈아 봤다. 정말 이런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적나라한 모습에 끄응 작은 신음이 밖으로 샜다.
대체로 비감응자가 다니는 일반적인 고등학교에서 ‘아이온’에 관련된 내용은 아주 넓고 얕게 가르친다. 정확히는 일상생활에서 불편하지 않을 정도만 가르친다고 보는 게 옳다.
물론 졸업 이후에 감응자 관련 업무에 취직하거나 아이온과 연관된 학과로 진학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원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화 수업을 한다.
거기서 아이온이 부여돼 특별해진 물품을 거래하는 방법이나 그에 필요한 계약서 등 실무적인 방향의 정보를 알려주는지는 나도 들어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박호승의 반응으로 봐서는 이 정도는 아이온 물품에 관심을 조금만 가져도 알 수 있는 상식에 가까운 듯하다.
‘평생 아이온과 관련된 물품을 구매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안 알아봤나? 그야 비싸니까 보통은 엄두도 못 낸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백지상태인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설마 아이온과 균열의 상관관계를 제외하면 이전 세계의 이세환과 관심사가 온전히 똑같아서 그런가?
요리를 제외하면 다른 일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옛날의 이세환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가 눈앞의 상기된 뺨의 이세환을 비교했다. 어느 쪽이든 물가에 내어놓은 애를 보는 것 같다.
불현듯 드는 불안감에 숨을 크게 들이쉬자 흐려졌던 장미의 향기와 다 우러난 차의 향이 콧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무슨 차야?”
“누나네 회사에서 다음 주에 새로 발매하는 홍차.”
“미리 받았어? 이런 거 잘 안 빼주시지 않았나?”
“그렇긴 한데 이건 예외. 왜, 이번에 자체적으로 티룸 세웠잖아? 거기서 자체 블랜딩한 홍차만 팔기로 했는데, 라인이 좀 빈약했나 보더라고. 그래서 부랴부랴 여러 종류를 만들었고, 인맥을 십분 활용해서 테스터로 쓰는 중인 거지.”
박호승이 우리 앞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맑은 수색이 꽤 괜찮아 보인다. 향도 달짝지근하고, 묘하게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찻잔의 주둥이를 엄지로 살짝 문지르면서 호로록 마시고 있는 박호승에게 물었다.
“테스터면 너도 처음 마시는 거냐?”
“응? 아니. 지금 마시는 게 세 번째야. 받은 지 좀 된 거거든. 이것저것 종류별로 받아서 다 마셔봤는데 이게 제일 괜찮아서 들고 온 거야.”
한 잔 마시고 나면 금방 또 마시고 싶어져서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며 박호승이 어깨를 으쓱였다.
박호승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열에 여섯은 패스트 푸드에 인스턴스 식품을 좋아할 것 같다고 말하고, 그런 행동거지를 보이기도 하는데 박호승은 굉장한 미식가여서 아무거나 입에 대지 않는다.
공장에서 나오는 과자를 먹더라도 먹어본 것만 먹고, 즉석식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곱게 자라서 그렇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는데, 아무튼 박호승이 음식에 관련해서 내리는 평가는 꽤 까다롭다. 괜찮다는 평을 한 음식이 일반적으로 맛있다는 축에 들 정도니까 말 다 했다.
그런 그가 ‘중독성 있다’라 말한 차이니 티룸이 열리면 불티나게 팔리겠는걸.
약간 숨을 불어서 차를 식힌 후, 한 모금 마셨다.
“으음.”
특이한 맛의 향연에 내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사이, 이세환도 기대에 찬 눈빛으로 차를 삼켰다.
꿀꺽 마시자마자 정말 맛있다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이세환과 한 잔 더 주겠다며 좋아하는 박호승을 보다가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뭐지. 나만 이상한가.’
향도 좋고, 제대로 우러나서 수색도 좋은데 맛이 영….
물고 있던 차를 삼키고, 내 미각이 이상한가 싶어서 바로 앞에 있는 크랜베리 쿠키를 반으로 쪼개 입에 넣었다. 바삭바삭한 식감에 상큼한 맛이 일품인 쿠키는 이세환의 수제 같았다.
‘내 혓바닥은 정상인데. 뭐가 문제지.’
슬그머니 다시 마셔보았지만, 이번에도 엉망인 맛에 결국 찻잔을 아예 내려놓았다.
달그락. 찻잔과 받침이 부딪치는 소리에 박호승과 이세환이 대화를 나누다 말고 내게 시선을 옮겼다. 박호승이 거의 비워지지 않은 내 잔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맛없어? 진짜?”
“그, 뭐라고 해야 하나….”
표현할 말을 고르기 위해 머릿속을 뒤지다가 겨우 한 가지를 골라냈다. 고급스러운 단어로 포장을 해보려 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약간 직설적인 단어를 썼다.
“좀 잡탕 같은데.”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차를 쳐다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멋쩍게 볼을 긁다가 차분하게 말을 덧붙였다.
“향은 좋은데, 뭔가 따로 놀아. 향 따로, 맛 따로. 그게 조화롭게 섞였다기보다는 그냥 한데 넣고 끓인 느낌이라서 좀 이상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차에 들어간 재료는 다른 이에게는 감미롭지만, 감응자에게는 굉장히 맛이 없는 잎이기 때문입니다.”
낯선 목소리.
덜커덩.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우리가 정자로 왔던 길이 아닌 반대편 길에서 후드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있었다.
본능적으로 왼손을 튕겨서 꺼낸 지팡이가 허공을 가르다가 중간에 멈췄다. 한순간 불었던 바람에 흔들리던 후드 자락 사이로 내가 알고 있는 눈동자가 비쳤기 때문이었다.
“위후?”
유일하게 살갗이 드러나 있는 입술이 매끄럽게 호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