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94
93화. 오래된 나각과 낡은 노리개 (7)
주오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인내심이 모자랐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부분은 훌륭한 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걸 알게 된 과정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아주 오래전부터 주오처럼 인간으로 변할 줄 아는 바다생물들은 서로의 안전을 위해 함께 모여 살았는데, 개중 자라들은 대개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요 하며 지냈었다.
하지만 주오는 늘 불만이 많았으며, 문제가 생기면 불쑥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하고 허구한 날 쌈박질을 하고 다녔다.
‘대화보다 무력이 훨씬 빠른 해결 방법이잖아.’
지금도 딱히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때는 생각을 밖으로 내뱉는 게 거침없던 시절이라서 왜 다쳤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저렇게 말하고 다녔다.
오죽하면 그게 자유방임주의던 용왕의 귀까지 들어가서 용궁으로 부름을 받을 정도였는데, 당시 용왕이 했던 말을 주오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싸우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다치지는 말라고 하셨지.’
용왕과 손가락까지 걸었던 약속을 어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어린 주오는 그 후로 인내심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물론 그렇다고 싸움을 안 했다는 건 아니다. 용왕은 다치지 말라고 했던 거지 싸우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까.
그때부터 주오는 일단 한 번 참고, 두 번째에 싸움을 걸고, 상처 없이 이기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리고 그 패턴은 머리가 좀 크고 나서도 변하지 않아서 주오의 전투 기술은 일취월장했으며, 한 마디도 참지 못했던 것에서 세 마디까지는 참아주는 자라가 되었다.
‘행여 약속을 어길까 싶어서 용왕님이 계속 지켜보는 바람에 자유가 조금 없긴 했지.’
덕분에 용왕과 친분이 두터워져서 측근의 자리까지 꿰찼기에 주오는 말썽꾸러기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언제였던가. 제법 예전에 용왕의 주치의로 용궁을 오가던 선옥과 서로 옛날이야기를 번갈아 하던 날이 있었는데, 그때 주오는 제 과거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며 가슴을 당당하게 폈고, 선옥은 대단하다며 혀를 내둘렀었다.
여러 감정이 섞인 반응이었지만 그걸 빈정거린다고 알아들은 나머지 주오가 또 시비를 걸 뻔했지만, 안 했으니까 된 것 아닐까.
일부러 친해져 보라고 자리를 마련했었던 용왕이 한숨을 쉬었던 일은 주오의 머릿속에서 이미 사라진 일이다.
‘자리가 이래서 그런가. 괜히 옛날 생각이 나네?’
심해의 어둠과는 다르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어둠 속, 저열한 말을 속삭이는 인간들의 수군거림, 그리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불편한 자리.
일부러라도 잊지 않았던 정말 깊숙한 기억의 순간이 떠오르는 온갖 상황에, 주오는 까득 이를 깨물었다가 턱에서 간신히 힘을 풀었다.
괜한 소란은 안 된다던 김요한의 부탁을 들어줄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용왕님께서 친분을 다지고 싶어 하는데 내가 훼방을 놓아서는 안 돼. 당연히 안 되는데….’
인생 사전에 참을성이라는 단어를 적어넣은 지 백 년은 족히 지났음에도 여전히 바닥인 아량은 이미 고갈이 났다.
주오는 방금 무대 위에 물건으로 올라온 박제된 어린 새 한 마리를 끈질기게 눈으로 좇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아야 한다고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팔걸이를 부수지 않기 위해서 무릎 위에 올려놨던 손을 꽉 쥐는데, 옆자리에 있던 강나비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가면을 살짝 위로 올리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마침 새로운 물품이 올라오고 있어서 무대 중앙에 빛이 환하게 들어오던 중이라 주오는 무사히 무슨 말을 하는지 읽어낼 수 있었다.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새하얗게 질린 낯의 강나비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주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무대 중앙을 핀포인트로 비추던 빛 사이로 경매의 물품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수조, 그리고 그 속에 구속된 채 갇혀 있는 거북이 한 마리.
주오의 가느다란 입술이 한없이 비틀어졌고, 강나비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둘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경매장은 순조롭게 진행이 이어졌다.
“그럼 다음 물품을 소개하겠습니다!”
마이크의 힘을 빌려 또랑또랑하게 퍼지는 사회자의 말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강나비의 얼굴이 귀신과 친구가 될 정도로 창백하게 변했다.
주오는 당장이라도 무대로 뛰어나가 사회자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주먹을 꽉 쥐며 참고, 이제 나서도 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전반부에는 물건이니까 나름 앉아 있을 수 있었지만, 후반부가 시작되고 절반쯤 지난 지금은 대놓고 동족이라고 해도 좋은 바다생물들이 올라오고 있는데 이 정도면 잘 참은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슬금슬금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주오의 매서운 기세에 무대를 노려보던 강나비의 정신이 순식간에 번쩍 들었다.
상사인 김요한이 특별히 부탁한 임무라서 이왕이면 잘 끝내고 싶었던 강나비는 주오를 말리기 위해 재빠르게 수첩을 꺼내 들었다.
-부수고 싶은 마음은 저도 굴뚝같지만, 지금은 안 돼요. 참아주세요.
강나비가 무대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솜씨 좋게 수첩에 문장을 휘갈기고는 소리 나지 않게 뜯어서 주오의 손에 쥐여주었다.
비밀 유지가 생명인 암시장이라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각종 필기 용품류도 반입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잠입이 반쯤 일상인 감사부의 강나비에게는 이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
사회자의 목만을 끈질기게 응시하며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풀어도 되는지 간을 보고 있던 주오는 생경한 감각이 손끝에 닿자 자연스레 종이에 시선을 돌렸다.
어서 읽으라는 강나비의 눈치에 눈만 굴려서 내용을 확인한 주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거 아닌가?’
백 년 전이기만 했어도 진즉에 이 경매장은 주오의 손에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을 텐데 아직 멀쩡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주오는 자신이 아주 점잖아졌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말을 강나비에게 하지 않고 참았다는 점도 칭찬받아 마땅한 점이라는 것까지도.
수틀리면 언제든 경매장을 때려 부술 수 있는 분노를 대충 밟아두면서, 주오는 어느새 의자 팔걸이를 꽉 쥐고 있는 강나비의 손등에 느릿하게 답을 적었다.
저 앞에서 경매를 진행하는 역겨운 인간과 같은 종족이지만, 종족 자체를 싸잡아서 경멸하지 않는 것 정도는 나이 먹은 어른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주오는 성심성의껏 자신의 감정을 글로 표현해줬다.
-난 충분히 참고 있어.
강나비가 웃기지 말라는 듯이 가면 속의 눈동자를 제법 무섭게 치켜떴지만, 제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아이가 부라리는 눈은 간지럽지도 않은 주오였다.
공연히 강나비를 골려볼까 고민하던 주오는 이내 손님의 친우분께 무슨 무례한 짓이냐며 길길이 날뛸 선옥의 성난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다소 차분하게 글씨를 마저 끄적였다.
-그런데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해?
유달리 차가운 주오의 손가락 감촉에 어깨를 살짝 움츠린 강나비가 재빨리 수첩의 새로운 장에 답을 써서 펜과 함께 통째로 넘겼다. 손등에 쓰지 말고 종이에 써달라는 무언의 항의였다.
-오늘은 그냥 넘겨야 해요. 정보 수집이 끝나면 그대로 귀환!
주오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심기가 불편해진 티를 더 팍팍 내는 주오의 모습에 강나비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황급히 훑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꽤 떨어진 좌석에 배정되어서 처음엔 들켰나 의심했지만, 이 자리가 일종의 귀빈석임을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대와 가까운 자리임에도 사회자의 시선이 덜 닿는다거나, 주변 소음이 적당히 차단된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직은 주오의 이상함을 감지한 사람이 없어서 다들 사회자가 소개하고 있는 거북에 정신이 팔렸다.
강나비는 주오가 폭주하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고, 주오는 가면이 가려주는 걸 믿고 인상을 팍팍 쓰면서 펜을 거칠게 놀렸다.
-난 열 받아서 이대로는 못 돌아가겠는데. 설마 저걸 보고서도 나한테 계속 참으라고 할 줄은 몰랐어.
적당히 수첩을 강나비에게 던지는 주오의 불같은 시선이 묶여 있는 거북을 유심히 살폈다.
거북은 오래 산다는 특성상, 그들 사이에서 성인으로 취급하는 나이도 남다르다. 더군다나 평범한 거북이 아니라 주오처럼 특별하게 변할 수 있는 개체는 더욱 그랬다.
물론 주오는 거북이 아니라 자라이고, 굳이 다른 종족을 위해 피를 흘릴 정도로 좋은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저건 애잖아.’
세상에는 뭐든 지켜야 하는 선은 있는 법이었다. 그 누구도 어린 개체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주오가 이를 아득 갈았다. 덜덜 떨리는 턱은 가면이 훌륭하게 가려주었고, 꽉 쥐는 바람에 물갈퀴가 살짝 드러난 손은 어둠이 상냥하게 덮어줬다.
“자, 이번 물품은 무려 장수거북입니다. 특이하지 않다고요? 설마요! 이 크기를 보십시오! 보통 장수거북은 150에서 200년 정도밖에 수명이 되지 않는데, 이 거북은 무려 400년을 산 장수거북입니다!”
400년. 인간에게는 오랜 세월이겠지만 주오에게는 아니다.
몇백 년은 우습게 살아가는 그처럼 저 아이도 한참 더 살아갈 날이 있다. 이런 곳에서 인간들에게 팔리라고 있는 미래가 아니란 얘기다.
더욱이 저 아이는 아직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조차 서툴러 보이는 ‘보호가 필요한’ 개체다.
무릎 근처를 배회하던 주오의 손이 기어이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었고, 까득 불길한 소리가 작게 울렸다.
팔걸이에 금이 가는 소리는 예로부터 귀한 취급을 받던 거북에 대해 떠드는 인간들의 수군거림에 가볍게 묻혔다.
옆자리에 앉아서 팔걸이가 망가지는 소리가 너무 잘 들렸던 강나비는 차마 무시할 수 없었기에 울고 싶은 마음을 담아 연거푸 가면 위를 손으로 쓸어내렸다가 수첩에 조금 길게 글을 썼다.
-용왕님께서 알려주신 정보에 의하면, 이 야시장이 가장 크게 열리는 건 9월 23일이에요. 매해 불규칙적으로 야시장이 열렸지만, 저 날짜만큼은 변하지 않고, 회원을 확인하는 의미로 입장권을 가진 전원이 참석해야만 하는 날이라고 했어요. 지금 봐요. 주변에 빈자리가 꽤 있잖아요. 지금 나서면 뿌리를 뽑는 작업이 아니라 가지 몇 개만 치는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고요.
그러니까 지금은 참고 나중에 같이 해결하러 오자는 말이었다. 주오의 타오르다 못해 이제는 서늘해진 시선이 수첩을 스윽 읽었다.
유독 ‘용왕’이라는 단어를 빤히 쳐다보던 주오가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나름대로 화를 참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강나비를 주오에게 보내기 전에 ‘용왕의 부탁’이라며 강조했던 김요한이 떠올라서 그런 것이었지만. 강나비는 몰랐기에 다시금 펜을 쥐고 정성을 담아 장문을 써 내렸다.
-용왕님이 여기로 주오만이 아니라 협회의 사람까지 보낸 이유가 있을 거예요. 당장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라는 뜻은 분명 아닐 거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조금만 참고, 9월에 열리는 야시장에 같이 와요. 그때는 참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마음껏 날뛰어보자고요.
-그것만으로는 분이 안 풀리겠는데.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그땐 과잉 진압도 제 선에서 무마시켜볼 테니까 오늘은 좀 넘어가 주세요.
-좋아. 그럼 대신 저 애들은 내가 데려가고 싶어. 그 정도는 돼?
무력으로 해결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이곳의 방법대로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려본 강나비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협회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김요한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면서 돈에 관련된 문제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강나비는 어련히 용왕이 넉넉한 보수를 줬나 보다 하고 넘어갔던 부분이었지만, 지금 보니 이런 사태가 벌어질 걸 예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좋은 좌석을 구한 거니까 괜한 의심을 받지 않도록 장신구 같은 사치품들을 전부 사 오라고 했던 김요한의 말도 합쳐보면 이 일을 할 때 돈 걱정은 필요 없다는 뜻이다.
‘대충 동물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고, 물건에만 관심 있는 귀빈 정도로 꾸미려고 했는데 약간 설정을 바꿔야겠어.’
강나비가 약간 흐트러진 가면을 똑바로 쓰면서 열정적으로 리모컨을 누르는 주오를 은근하게 주시했다.
다짜고짜 높은 금액을 불러서 한 번에 낙찰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주오는 차분하게 값을 올리면서 나름대로 돈을 아끼려는 기색을 내비쳤다.
‘다른 동물은 이미 넘겨버렸으니까, 바다생물에 관심이 많은 손님 정도면 되나?’
주오는 2부의 초반부에 나왔던 희귀동물의 알이나 화려한 깃의 새 등에게도 분노했지만, 사겠다는 말은 하지 않아서 안도했었다.
‘잠깐만…. 앞으로 남은 생물들 다 바다 쪽이지 않았나?’
강나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며 카탈로그의 정보를 되새김질했다. 내용물이 역겨워서 간신히 외워뒀던 카탈로그는 강나비의 예감대로 2부의 앞은 육지, 뒤는 바다에 서식하는 생물이 주된 상품이었다.
‘설마 계속 화내다가 결국은 뒤집어엎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불쑥 치고 오르는 불길한 감각에 강나비가 부르르 몸을 떨고는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강나비는 부디 주오가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기를 바라면서 난생처음으로 제 감이 틀리기만을 기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