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 stacking hunter RAW - volume 4 (4)
4-4장.
황룡 길드는 곧장 이수현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를 찾아온 남자가 굽신거리며 길드의 고충을 설명했다.
“게이트 안에는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던전 등급이 5성 수준이라 큰 문제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략대 두 팀이 산 채로 붙들려갔다.
더군다나 변종 몬스터의 끈질긴 방해로 구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수현 헌터님이 저흴 꼭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변종 몬스터들 때문에 도저히 숲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샐러맨더 길드의 화산 던전 사건처럼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했다.
“알겠습니다. 보수만 제대로 쳐주시면 도와드리죠.”
“물론입니다. 선뜻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 몬스터한테 잡혀갔다고 했죠?”
“네.”
“그럼 잡혀간 사람들은 이미 죽었지 않았을까요?”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건 짐승이 아니라 몬스터다.
이수현의 당연한 의문에 남자는 단호히 말했다.
“그들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죠?”
“저희 길드엔 특별한 아티펙트가 있거든요. 그걸로 길드원들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있죠.”
“‘생명의 촛대’군요.”
“맞습니다.”
나예린은 황룡 길드 소유의 아티펙트, ‘생명의 촛대’에 대한 소문을 들었었다.
거기에 불을 붙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
딱 한 가지 경우만 제외하면.
“불을 켠 사람이 죽으면 그 초도 꺼지죠. 아직 촛불은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원 무사하죠. 다만…….”
“다만?”
“불씨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엔트’의 소행이죠.”
“엔트?”
시간을 더 끌면 길드원들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수현은 엔트가 어떤 몬스터인지 잘 몰라서 슬쩍 질문했다.
“선배, 엔트라는 건…….”
“나무와 정령이 결합한 몬스터예요.”
“평소엔 고목으로 위장해 있다가, 사냥감이 지나가면 본색을 드러냅니다.”
“녀석들은 먹잇감을 생포한 뒤, 생명력을 양분처럼 빨아먹죠.”
이번 던전의 주인은 4성급 몬스터, 엔트였다.
하지만 이수현은 이해가 안 갔다.
물론 엔트가 약한 몬스터는 아니다.
4성 중에선 비빌 존재가 없을 정도니까.
하지만 황룡 길드 역시 어중이떠중이 길드가 아니다.
10대 길드의 공략대가 어쩌다 그런 놈들한테 붙잡히는 곤욕을 치른 걸까.
이수현은 혹시나 해서 질문했다.
“혹시 공략대에 화염 능력자가 하나도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놈들은 변종이라 화염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습니다. 저희 길드장님이 쏜 화염 마법도 견뎠으니 말 다 했죠.”
황승규 길드장의 전매특허가 바로 화염 마법이다. 그의 마법도 견뎠다니.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심지어 무기로 부수고 잘라도 바로 재생하더군요.”
놈들을 아무리 공격해도 멀쩡히 일어섰다. 헌터와 엔트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러다 지친 길드원들은 놈들에게 붙들려 숲속으로 끌려갔다.
남자는 분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음. 뭔 짓을 해도 놈들이 금방 재생한단 말이죠?”
“예. 화산 던전과도 유사점이 있어 보여 수현 님께 찾아온 겁니다.”
“길드에서 준비해 줬으면 하는 게 몇 개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것만 있으면 놈들의 재생력을 무력화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수현은 남자한테 뭔가 적은 쪽지를 넘겼다. 그는 화색이 돌며 연신 허릴 굽혔다.
“감사합니다! 길드장님께 바로 전하겠습니다.”
남자는 준비가 다 되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돌아가자 서민아는 궁금한 얼굴로 질문했다.
“수현 씨, 해결할 방법이라도 떠올랐어요?”
“엔트라고 해 봤자 어차피 나무잖아요.”
“…그렇죠?”
“그럼 말려 죽여야죠.”
* * *
황룡 길드가 철수한 지 이틀 정도 지났다.
숲속의 나무로 위장한 채 잠들어 있던 엔트들. 그들은 묵직한 땅의 울림을 느꼈다.
이건 틀림없는 인간의 발소리였다.
눈을 뜬 엔트가 귀찮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들이 또 왔군. 거의 이틀 만인가?”
“동료들을 되찾으러 몰려온 거겠지.”
“차라리 잘 됐어. 전부 잡아다 대장님께 바치자고.”
“저번에는 강한 마법사가 한 놈 섞여 있어서 다 놓쳤잖아. 그거 때문에 대장님이 단단히 화가 나셨더군.”
“그래. 이번엔 한 놈도 놓치면 안 돼.”
쿠웅!
엔트들은 위장을 풀고,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4m는 되어 보이는 나무 거인이었다.
이들이 자신만만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간단했다.
“멍청한 놈들… 우리한테 몇 번이나 당했으면서 깨닫지 못하다니.”
“우린 숲에서 절대 안 죽는데 말이지.”
엔트들은 대륙인들을 경멸했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은 모두 추악한 존재였다.
그들은 인간에게 줄곧 핍박받아 왔다. 단지 징그럽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우리에겐 페어리처럼 몸을 숨기는 주술도, 엘프처럼 뛰어난 마법 능력도 없어.’
그저 나무인 척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졌다.
몇 달 전, 이 숲에 새로운 지배자가 찾아왔다.
나무 군주의 하수인. 그는 그들에게 엄청난 생명력을 나눠 주었다.
엔트들은 그가 가진 신비한 힘에 매료되어 충성을 맹세했다.
덕분에 그들은 숲에서 한층 더 강력해졌다.
‘더는 인간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숲의 정기와 가호가 함께하니까.
신물의 힘만 있으면 어떤 적을 상대해도 두렵지 않았다.
“엔트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조심해!”
인간의 목소리가 수풀 속에서 들렸다. 저번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다.
그런데 저들의 복장이 좀 독특했다.
대륙에선 볼 수 없는 의복, 지구에선 방진복이라 불리는 보호복이다.
게다가 얼굴엔 방독면까지 장착했다.
“인간들 옷차림이 좀 희한한데.”
“그러게. 아티펙트인가?”
엔트들은 사냥감들이 잔뜩 몰려오자 기뻐했다.
“전투 준비!”
“모두 준비한 걸 꺼내!”
인간들은 뭐라 소리치며 기괴한 물건을 꺼냈다.
엔트들은 그게 뭔지 몰랐지만, 농사를 하는 사람이면 단박에 알 것이다.
그건 농약을 살포하는 도구였다.
“저건 또 뭐지?”
“저게 뭐든 상관없어. 우린 숲에서 무적이잖아.”
“하긴. 저번처럼 내기나 할까? 누가 더 많이 잡는지.”
“좋지.”
엔트들은 처음 보는 인간들의 무기에 멈칫했지만, 두려움을 떨쳐냈다.
저게 뭐든 간에 자신들한텐 소용없다.
쿵! 쿵!
그들은 지축을 울리며 침입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놈들이 처음 보는 무기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촤악!
거기서 물줄기가 쏘아졌다.
“…물? 우리한테 물을 뿌려?”
“흥, 실성한 건가!”
촤악-!
엔트들은 나무줄기를 늘려서 채찍처럼 휘둘렀다.
무자비한 채찍질에 인간들은 몇 명이나 나뒹굴었다.
하지만 인간들 역시 만만치 않은 전사들이었다.
“반격해!”
“그래 봤자 4성급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
서걱-!
인간들도 곧장 반격에 나섰다. 늘어난 엔트의 팔을 마구 썰었다.
그들은 황룡 길드의 정예 헌터들.
평범한 엔트 정도는 그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문제는 놈들의 비정상적인 재생력.
“아, 팔이 썰렸잖아. 짜증 나는 놈들 같으니라고.”
“아주 팔팔한 놈들이야. 끌고 가면 대장님도 좋아하시겠어.”
팔이 통째로 잘렸지만 엔트는 태연했다. 숲의 정기만 있으면 바로 재생할 수 있으니까.
그는 키득대며 인간들에게 자신의 재생력을 과시했다.
“봐라, 인간들아. 네놈들이 나한테 뭔 짓을 해도…….”
엔트는 잘린 팔을 복구하려 했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자라난 나무줄기의 상태가 아까보다 볼품없었다. 줄기는 쩍쩍 갈라졌고, 나뭇잎은 색이 바랬다.
“어, 이게 왜 이러지?”
“왜 그래? 빨리 재생하고 나 좀 도와줘.”
“크어억……!”
혼자서 인간들을 상대하던 엔트가 전우에게 고갤 돌렸다.
쩌적.
엔트의 몸이 점차 바스러졌다. 전우가 눈앞에서 서서히 말라죽기 시작한 것이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내 몸이 이상해. 너무 괴로워…….”
“쿨럭!”
엔트들은 비틀댔다. 머리는 빙빙 돌고 속이 이상했다.
놈들의 변화에 헌터들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놈들한테 고엽제가 통합니다!”
“좋아, 단숨에 해치워!”
인간들은 엔트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상황은 단숨에 역전됐다.
엔트들은 침입자들의 전진을 막지 못했다.
그들이 쏴대는 고엽제에 맞으면 어떤 나무라도 금세 말라 죽었다.
황룡 길드는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곳까지 금세 도착했다.
반면 엔트들은 방어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급속히 무너졌다.
고작 수십 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길드장님, 엔트 놈들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좋아. 깡그리 죽이면서 안쪽까지 전진한다.”
‘몬스터한테 고엽제가 통한다니. 이수현 헌터, 대체 무슨 능력이 있는 거지?’
황승규 길드장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특기인 화염 마법에도 몇 방이나 버틴 놈들이다.
그런 괴물들이 고작 제초제에 죽다니.
‘그에게 특별한 뭔가가 있어.’
신성 길드장이 그를 영입하려 호시탐탐 노린다더니. 그 이유를 이제 알겠다.
이수현은 결코 평범한 헌터가 아니다.
어쩌면 그는 새로운 세력의 중심이 될지도 모른다.
* * *
“대, 대장. 인간들이 계속 진격해 오고 있어요.”
“인간들에게 밀렸다고? 쯧, 한심한 것들 같으니라고.”
숲의 중심부까지 도망쳐 온 엔트들은 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자 그들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거목이 눈을 떴다.
숲의 지배자는 패배한 부하들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놈들이 비겁하게 독을 사용했어요. 대장, 이걸 좀 봐 주세요.”
“…독이라고?”
인간들이 만든 독이라 해 봤자 그게 그거일 텐데.
그렇게 생각했던 대장은 부하들의 상태를 확인하고선 눈을 찌푸렸다.
“아주 지독한 걸 썼군. 아예 숲 전체를 말려 죽일 셈인가.”
숲의 지배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다. 그가 일어나자 땅이 사방으로 갈라지고, 주변의 나무들은 우수수 뽑혔다.
숲의 주인은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군주님의 사유지에 멋대로 발을 들인 것도 모자라 독까지 퍼트려? 절대로 용서 못 한다.”
그는 나무 군주의 신물을 발동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숲의 정기가 모여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 힘만 있으면 우린 죽지 않아. 당장 일어나라!”
그가 힘차게 외쳤다.
그의 외침에 고엽제로 죽어 가던 엔트들은 눈을 번쩍 떴다.
숲의 막대한 정기가 쓰러진 자들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말라붙었던 엔트의 뿌리에 생기가 돌아왔다.
“몸이 나았어!”
“역시 대장이야!”
“잘 들어라. 인간들은 모조리 생포해야 한다. 군주님께 바칠 귀한 제물이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며칠 전에 생포한 인간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나무줄기에 전신이 휘감겨, 나무의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저들이 품고 있는 생명력은 하나같이 상당했다.
‘이들은 군주님의 마력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러니 한 마리도 놓쳐선 안 돼.’
“이제부턴 내가 앞장서겠다. 다들 날 따라서…….”
숲의 지배자는 부하들을 이끌고 출진하려 했다.
쿠웅-! 우지끈!
하지만 그의 외침은 시끄러운 소리에 파묻혔다.
숲의 중심부에 무언가가 도착했다. 기괴한 생김새의 노란 마차였다.
‘저게 뭐지? 노란색 골렘?’
굉음을 일으킨 장본인이 고갤 빼꼼 내밀었다.
그가 숲의 지배자에게 말했다.
“네가 여기 보스냐?”
“…골렘에 탄 인간? 설마 군주 살해자인가!”
기묘한 골렘으로 천둥 군주를 죽였다던 소문의 인간.
군주들 사이에선 이미 군주 살해자라 불리며 유명해졌다.
‘나무 군주님께서도 내게 경고했었지.’
골렘을 조종하는 인간을 만나면 조심하라고.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이것도 틀림없이 운명이리라.
“뭐야, 너 날 알아?”
“군주님께 들었다. 골렘을 다루는 마도학자가 천둥 군주를 죽였다고.”
“이미 소문 다 퍼졌구나. 뭐, 상관없겠지. 그래서 넌 누구 따까리야?”
이수현은 호기심이 생겼는지 그에게 말을 붙였다.
건방진 말투에 숲의 지배자는 인상을 팍 쓰면서 말했다.
“…나무 군주, ‘클라이포트’ 님을 모시는 ‘아르보’라 한다.”
“난 이수현이야. 그리고 이건 너희를 싹 밀어 버릴 불도저라는 거고.”
“불도저?”
숲의 지배자, 아르보는 자긍심 넘치는 얼굴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자 이수현도 받아줬다.
그는 이름을 밝히고, 불도저의 용도까지 친절히 소개해 줬다.
아르보는 이수현에게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주 살해자, 이수현. 넌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착각?”
“우린 숲에서 죽지 않아. 이 신물의 가호 덕분이지.”
아르보는 손목에 찬 꽃 팔찌를 보여 줬다.
거기서 초록빛 마력이 넘쳐흘렀다.
그 마력이 주위의 엔트들에게 끊임없이 흘러 들어갔다.
‘신물로 버프를 주는 건가.’
이수현은 궁금하단 얼굴로 질문했다.
“진짜 안 죽어?”
“그렇다.”
“이걸 맞아 보면 생각이 좀 바뀔걸.”
이수현은 그렇게 말한 뒤, 엔트들에게 돌진했다.
콰지직!
그들은 불도저를 멈춰 세우려 달라붙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수현은 압도적인 힘으로 엔트들을 완전히 뭉갰다.
숲의 정기도, 신물의 가호도 불도저 앞에선 소용없었다.
산산조각이 난 엔트들은 쓰레기처럼 짓밟혔다.
“이 자식이 감히……!”
부하들의 죽음에 아르보는 분개했다.
그는 지면에 자신의 팔을 박아 넣었다. 그러자 땅바닥에서 수십 개의 나무줄기가 솟구쳤다.
그것들이 이수현의 불도저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어?”
110톤에 육박하는 불도저가 손쉽게 들렸다. 이수현은 제법이란 눈으로 보스 몬스터를 쳐다봤다.
그는 움직일 수 없게 된 불도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일어나라.”
완전히 박살 났던 엔트들이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다들 정상이 아니었다.
팔과 다리가 제대로 복구되지 않은 자들이 태반이었다.
아르보는 부하들을 둘러보더니 이수현에게 말했다.
“골렘의 위력은 대단하구나. 힘으로 숲의 가호를 부수다니. 하지만 이제 그것도 못 쓰게 됐지. 자, 어쩔 테냐?”
“어쩔 수 없지. 귀찮아도 하나씩 벌목하는 수밖에.”
“……?”
이수현은 따로 준비해온 엔트 전용 무기를 꺼냈다.
위이이잉-!
벌목용 전기톱이 힘차게 울부짖었다.
“혹시 산림 기능사라고 들어는 봤니?”
“뭐?”
“그럼 조경 기능사는?”
“그게 무슨…….”
“옛말에 그런 말이 있어. 모르면 맞아야지!”
이수현은 전기톱을 들이밀며 달려들었다. 엔트들의 비명이 들렸다.
쿠웅-!
거목이 쓰러졌다. 두 다리를 잃은 아르보가 원통한 눈으로 이수현을 올려다봤다.
‘…고작 인간 하나한테 전부 당하다니.’
천둥 군주를 죽인 건 골렘의 힘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는 이수현에게 변변한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
아니, 부하들까지 동원했는데도 역으로 썰렸다.
이수현의 전기톱은 신물의 가호마저 다 찢어 버린다. 그 탓에 엔트들은 전부 땔감이 됐다.
이번엔 아르보가 땔감이 될 차례다.
“나무 군주의 따까리,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위이이잉-!
이수현은 휘파람을 불며 전기톱을 돌렸다. 그러자 아르보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그를 저주했다.
“이 악마 같은 자식! 군주님께서 널 절대 용서치 않…….”
“네, 얘기 잘 들었고요.”
콰드드득!
이수현은 그의 유언이 끝나기도 전에 전기톱을 내리찍었다.
아르보의 녹색 안광이 픽 꺼졌다. 고목에 깃든 생명력이 완전히 소멸한 것이다.
“후, 벌목 끝.”
“…정말 놀랍군. 혼자서 보스까지 잡다니.”
“아, 오셨습니까?”
황승규 길드장은 뒤늦게 길드원들과 숲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엔트들의 시체는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고, 끌려갔던 공략대는 이미 자유를 되찾았다.
‘고작 한 시간이다.’
이수현이 던전에 투입되고, 보스까지 잡는 데 걸린 시간.
그들은 숲의 초입부에서 며칠이나 끙끙댔는데 말이다.
황승규는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전기톱으로 이 많은 몬스터를 썬 건가?”
“예,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제가 잡은 거니까 제가 챙겨도 되죠?”
“물론이네. 당연히 자네가 가져야지.”
황승규는 흔쾌히 그에게 사체 소유권을 넘겨줬다.
일반적으론 던전 입장권을 따낸 길드가 독식하고, 협회의 지원팀은 남은 부스러기를 받는 정도지만.
여기선 상황이 정반대였다.
“자네한테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지금은 제가 바빠서요. 짐부터 다 나르고 얘기합시다.”
“알겠네. 기다리지.”
심지어 입장도 뒤바뀌었다. 황승규 길드장이 이수현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였다.
이수현은 벌목한 엔트들을 대형 트럭에 차곡차곡 담았다.
엔트는 고급 목재로 취급되기에 가격이 꽤 쏠쏠했다.
‘그러니 싹 다 챙긴다.’
“여러분들, 구경만 하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황룡 길드원들은 멍하니 바라보다, 그의 말에 짐 나르는 걸 돕기 시작했다.
그들은 끙끙대며 나무를 날랐다.
“세상에, 혼자서 이걸 다 잡았단 말이야?”
“와, 씨. 다 팔면 얼마야 이게.”
“…끄흑! 이 무거운 걸 혼자서 든다고?”
두 명이 들어도 힘든데, 이수현은 어깨에 큼직한 통나무를 하나씩 짊어졌다.
그러고도 표정 하나 안 바뀌었다. 그의 말도 안 되는 괴력에 길드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운반이 끝나기만을 쭉 기다렸던 황승규가 그에게 다가왔다.
“짐 옮기는 것도 얼추 끝났군. 그럼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지.”
“황룡 길드에 절 영입하려는 겁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이수현의 돌직구에 그는 머릴 긁적였다.
물론 영입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는 이수현이 평범한 헌터가 아닌 걸 직감했다.
‘능히 자신의 길드를 세우고도 남을 인재야.’
지금이야 나이도 젊고, 인지도가 부족해서 무리가 있겠지만.
이대로 실적을 쌓다 보면 저절로 그의 주변에 사람이 몰릴 거다.
길드라는 게 사실 별것 없었다.
인망과 실력을 갖춘 헌터한테 사람들이 모이면 그게 길드지.
“자네 실력이면 어딜 가더라도 대우받을 텐데. 왜 협회에 남은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배움엔 끝이 없더라고요.”
“…배움?”
“대충 그런 이유로 협회랑 계약했습니다.”
동문서답이었다. 이수현은 그렇게 말하곤 트럭에 올라탔다.
그가 시동을 걸고 자릴 뜨려 하자, 황승규는 다급히 다음 질문을 했다.
“혹시 자네… 나중에 길드라도 만들 생각인가? 그래서 신성 길드의 가입 제안도 거절했고?”
“협회가 망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아마 없을걸요.”
“뭐?”
부웅-!
이수현은 트럭을 끌고 철수했다.
협회에 계속 남겠다는 말로 들렸다. 황승규는 그게 이해가 안 갔다.
대체 뭐가 좋다고 협회랑 전속 계약까지 했단 말인가.
“배움, 배움이라…….”
그는 이수현이 한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도통 모르겠다.
‘속내를 모르겠어. 하지만 보통내기는 아니야. 돈이나 지위 같은 거에 휘둘릴 타입도 아니고.’
그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활약은 활약대로 다 하면서, 잡힐 듯 안 잡힐 듯 살살 유혹하다니.
“…사람 애간장 태우는 것도 아니고.”
* * *
숲의 지배자, 아르보의 죽음으로 차원 게이트는 닫혔다.
주민을 잃은 숲은 며칠간 고요했다.
하지만 그 평온도 오래가지 못했다. 엔트들의 숲에 누군가가 방문한 탓이다.
엘프의 외견을 빌린 여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감싸 쥐었다.
‘이건 독인가? 숨을 쉬기 힘들어. 초목들도 괴로워하고 있고.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인간들이 숲에 뿌려댄 고엽제 탓이었다.
그녀는 나무에 남겨진 기억을 더듬었다. 거기서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아르보가 인간한테 당했어?”
고속으로 회전하는 양날의 검, 그걸 든 인간이 아르보의 머리를 단번에 쪼갰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엔트들도 무자비하게 도륙당했다.
“감히 내 신물을 가져가?”
심지어 그 남자는 자신의 신물까지 훔쳤다.
그녀는 남겨진 기억을 살피곤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기묘하게 생긴 골렘에, 처음 보는 무기를 다루는 인간.
‘군주 살해자. 그놈이 틀림없어.’
군주들의 회의에서 계속 언급되던 놈이다. 천둥 군주를 죽였으며, 화염 군주의 영토를 멋대로 헤집은 인간.
그 녀석이 이번엔 그녀의 사유지까지 침범했다.
‘내가 조심하라 일렀거늘.’
아르보는 그녀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결국 당했다. 멍청한 것 같으니.
불쑥!
그녀의 그림자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고양이 귀가 달린 소년이었다.
“클라이 누님! 속보예요, 속보!”
“…어둠 군주. 말을 걸 땐 기본적인 예를 갖춰라. 멋대로 내 이름을 줄이지도 말고. 벌써 몇 번째 경고지? 넌 지능이 좀 모자란 모양이구나.”
“아이, 참. 그런 것보다 진짜 큰일이 났다니까요?”
나무 군주, 클라이포트.
묘인족 소년은 그녀의 이름을 클라이라 멋대로 줄여서 말했다.
그는 이번에 새로 뽑힌 어둠 군주였다.
‘왕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이번에 새로 뽑힌 천둥 군주와 어둠 군주.
그 둘은 아직 권능을 다루는 법이 미숙했다. 그렇기에 왕은 군주들에게 명했다.
군주가 한 명씩 옆에 붙어, 권능 다루는 요령을 좀 알려 주라고.
‘역시 제비뽑기로 해선 안 됐어.’
그녀는 어둠 군주를 돕는 멘토 역할에 걸렸다.
하지만 이 고양이가 자꾸 마음에 안 드는 짓만 골라서 했다.
자꾸 내 이름을 줄여서 부르질 않나.
누님이란 말 같지도 않은 호칭을 뒤에다 붙이질 않나.
몇 번이고 그러지 말라 지적했지만 고쳐질 기미가 안 보였다.
‘열 받으라고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단 말이지.’
본인은 아니라고 계속 발뺌하지만.
나무 군주는 성가시단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래,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리 호들갑이냐.”
“심해 군주가 아무래도 죽은 것 같아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심해 군주가 죽었다는 말에 그녀는 숨이 턱 막혔다.
“그런데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고?”
“누님께선 군주가 죽으면 그 영혼이 왕께 돌아간다 했잖아요?”
“그래. 그건 용케 기억했구나.”
“그런데 심해 군주의 영혼과 권능이 왕께 돌아오지 않았대요.”
“뭐?”
군주가 죽었는데도 영혼은 안 돌아와?
지금껏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로 어둠 군주를 쳐다봤다.
“그럼 녀석이 어딘가에 살아 있겠지. 거짓 소문을 듣고 온 거냐?”
“아뇨! 안구스 형님이 그랬어요. 심해 군주의 기운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죽은 게 확실하대요.”
“…뱀 군주가 그렇게 말했다고?”
“네, 방금 제가 회의장에서 듣고 왔다니까요?”
뱀 군주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심해 군주가 죽었다. 그럼 대체 누구한테?
“역시 천둥 군주가 한 짓이 아닐까요? 종족 간 원한도 되게 깊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막 각성한 애송이가 어떻게 심해 군주를 죽인단 말이냐.”
“방심하다 당했을 수도 있죠. 딱 지금 누님처럼요.”
“…….”
“그런데 숲이 엉망이네요. 여기 무슨 일 있었어요? 으, 구역질 날 것 같아…….”
어둠 군주는 속 터지는 소리만 골라서 했다.
“영혼이 자체적으로 소멸한 건가? 아냐. 그건 더 말이 안 되는데…….”
“아니면 누군가가 빼앗았을 수도 있고요.”
“……!”
심해 군주를 죽인 자가 영혼을 강탈했다면?
그럼 왕께서 하사한 권능은 어떻게 되는 거지?
더는 심해 군주가 탄생할 수 없게 되는 걸까.
“마음 같아선 천둥 군주한테 직접 묻고 싶지만, 전 물이 영 무서워서…….”
“녀석에게 물어본다 한들 솔직하게 말해 줄 이유도 없지.”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그녀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그녀는 인간에게 신물을 빼앗겼고, 심해 군주는 돌연 죽었다.
‘왕께서는 어떻게 하실까.’
평소처럼 방관하실까. 아니면 이례적인 경우이니 직접 움직일 것인가.
* * *
[나무 군주의 팔찌] [등급: 에픽]– 나무 군주, 클라이포트의 신물.
– 지니고 있으면 숲의 가호가 발동된다.
– 숲의 가호: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주위에 초목이 많을수록 가호의 효과가 증가함.
– 자연 친화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재생력은 알겠는데, 자연 친화력은 뭐지?”
이수현은 새로 얻은 신물을 살펴봤다.
재생력을 올려 주고, 자연 친화력이 상승한다.
그럼 이걸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까. 이수현은 일단 팔찌를 착용해봤다.
‘정령의 목소리라고?’
정령사. 정령과 계약해 힘을 빌려오는 자를 뜻했다.
아주 희귀해서 한국엔 몇 없다고 들었는데. 보기 드문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나.
– 목말라…….
– 나도.
– 너무 심심해. 뭐 재밌는 일 없나?
“……?”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칭얼거림. 이수현은 목소리에 이끌려 숙소 밖으로 나왔다.
그 목소리는 영약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쪽에서 들렸다.
‘안에 아무도 없는데. 설마…….’
이수현은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새끼손가락만 한 존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 인간 왔다!
– 근데 쟤도 우리 못 보잖아.
– 심심해.
– 물 좀 줘… 우리 목마르다고…….
이수현은 영약을 재배하면서 어떤 녀석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실대며 제대로 못 자라는 약초들.
녀석들은 어찌나 까다로운지 열심히 관리를 해 줘도 픽픽 쓰러졌다. 어찌어찌 키워도 효능이 별로였고.
이수현은 바짝 마른 약초들 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방금 목마르다고 했지? 아까 물 충분히 뿌려줬잖아.”
– 그런 평범한 물 말고! 마력이 담겨 있어야 할 거 아냐!
– 맞아! 물만 뿌린다고 잘 자라는 줄 알아? 게다가 흙도 별로야.
“흙은 뭐가 문젠데?”
– …어?
약초들은 짜증을 부리다, 이수현의 중얼거림에 일순 조용해졌다.
어떤 녀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너, 우리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 뭐가 불만인지 싹 말해 봐. 고칠 수 있는 건 다 고쳐 볼게.”
그 말에 약초들은 지금껏 담아 뒀던 불만들을 마구 뱉어 댔다.
이곳의 땅이 비옥하지 않다. 평범한 물로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대기에 마력이 턱없이 모자라다.
“결론은 너희들이 절대 살 수 없는 악조건이라 이거지?”
– 우리도 모르겠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지?
그건 이수현의 재배 스킬 덕분이었다.
그걸로 쥐어짜듯 영약들을 억지로 키워 낸 것이다.
하지만 그 스킬도 한계가 있었다. 효능은 월등히 좋지만, 적정 환경이 아니면 자라지 못하는 영약들.
그런 영약들은 그의 스킬로도 자라지 못했다. 그래서 늘 골치가 아팠는데.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이수현은 자기 주변에 모여든 조그만 존재를 바라봤다.
처음엔 약초들의 영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정보 분석으로 그것들의 정체를 확인했다.
‘최하급 정령.’
“너희들, 여기서 계속 살고 싶지?”
끄덕.
조그만 정령들은 대답 대신 고개만 움직였다. 말은 못 해도 의사소통은 가능하구나. 좋은 생각이 났다.
“야, 너희들. 나랑 일 하나만 같이 하자.”
이수현은 목소리를 쫙 내리깔며, 최하급 정령들에게 뭔가를 제안했다.
* * *
강혜나 매니저는 물뿌리개를 들고서 비닐하우스에 들어왔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문을 열자 이수현이 보였다.
“어? 수현 씨, 여기서 뭐 하세요?”
“아, 혜나 씨.”
이수현은 피에 굶주린 마검을 집어넣었다.
심해 군주를 죽이고 얻은 스킬, 아쿠아 블레이드.
그는 그걸로 마력이 충만한 물을 양껏 뽑아내고 있었다.
“물 좀 주고 있었죠.”
둥실.
대야에 가득 담긴 물이 저절로 떠올랐다. 마치 마술쇼를 보는듯했다.
그 물방울들은 약초밭에 골고루 흩뿌려졌다. 강혜나는 그걸 멍하니 바라봤다.
[마력수를 충분히 공급했습니다.] [약초들의 성장 속도가 빨라집니다.]‘좋아. 일 잘하네.’
그녀의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지금 비닐하우스 안에는 최하급 정령들이 바삐 날아다니고 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정령들한테 도움을 좀 받았죠.”
“정령이랑 계약했어요?”
“네, 구두 계약이지만요. 앞으로 밭은 얘네들이 알아서 관리해 줄 거예요.”
“직접 가꾸는 재미가 있었는데. 좀 아쉽네요.”
정령들 덕분에 이곳은 자동화 농장이 됐다. 사람의 손길은 필요가 없어졌다.
할 일이 없어진 강혜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갔다.
땅의 정령은 잡초를 제거하고, 마력으로 흙을 비옥하게 만든다.
물과 바람의 정령은 마력수를 골고루 공급해 주는 스프링클러 역할이다.
‘남은 건 햇빛인데. 이건 어쩌지.’
약초들의 불만 사항은 거의 다 해결됐다. 하지만 딱 하나가 충족되지 않았다.
햇빛. 지구의 햇빛은 성장에 불충분한 모양이다.
물론 지금의 환경이라면 지난번보다 품질 좋은 영약이 자랄 거다.
그래도 기왕이면 최상급으로 키워 내고 싶은데.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햇빛, 빛…….”
이수현은 그렇게 중얼대며 이것저것 검색해 봤다. 그럴듯한 자격증 하나를 찾았다.
‘일단 기능사부터 가볍게 따볼까.’
저번에 딴 태양광 기능사는 내 예상을 빗나간 스킬이었는데. 이건 어떠려나.
* * *
“복덩아, 너 안 힘들어?”
“왕!”
서민아는 복덩이와의 산책 중에 신기한 일을 겪었다.
그녀는 7팀에 들어오고서 체력과 정신력을 미친 듯이 키웠다.
그렇기에 자신의 광폭화 버프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됐고.
쉽게 말해 그녀는 신체 능력만 놓고 봤을 때, 다른 생명체보다 독보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분명 그럴 터인데.
‘하나도 안 지쳤어?’
복덩이는 두 달 전이랑 확실히 달라졌다. 예전엔 산책한 지 10분도 안 돼서 힘들다고 땅바닥에 퍼질러졌는데.
오늘은 수십 분을 달렸는데도 호흡 하나 안 바뀌었다.
“이상하다. 이쯤 되면 지칠 법도 한데…….”
“왕!”
“알았어, 가자.”
복덩이는 며칠 만에 주인과 나온 산책이라 신이 났다. 자기 입으로 목줄을 물고 잡아당기며 서민아를 재촉했다.
복덩이는 산길을 신나게 뛰어 올라갔다. 그녀는 저러다 관절이라도 다치면 어쩌나 걱정했다.
서민아가 복덩이와의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건 몇 시간이 훌쩍 지나서였다.
그녀는 숙소 앞에서 이수현과 마주쳤다.
“민아 씨, 설마 산책을 지금까지 했어요?”
“네. 복덩이가 계속 보채서요. 바빠서 며칠 산책 못 시켜 준 게 미안해서…….”
“왕!”
서민아는 지친 얼굴로 그에게 대답했다.
그 밑에는 새카매진 복덩이가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만족스럽단 표정이다.
이수현은 뭔가 이상해서 복덩이의 정보를 분석했다.
그러자 저번에는 못 봤던 정보들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옥봉인형삼을 83회 섭취했습니다.] [영약의 신비한 기운이 복덩이의 전신에 스며들었습니다.] [복덩이의 각성까지 앞으로 17회 남았습니다.]‘이게 뭐야?’
각성이라니. 이수현은 복덩이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녀석은 마냥 좋다며 그의 얼굴을 싹싹 핥았다. 옥봉과 인형삼으로 만든 간식을 계속 챙겨 주긴 했지만.
그게 이런 효과를 낳을 줄이야.
그는 서민아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말했다.
“민아 씨,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네.”
“복덩이가 곧 각성할 것 같은데요?”
“…네?”
* * *
탕탕!
간수가 감옥의 철창을 두들겼다. 그러자 누워서 자던 죄수들이 일어났다.
그들을 깨운 간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한 마디 툭 뱉었다.
“5분 안에 전부 준비해라. 출동이다.”
그는 그 말만 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죄수들이 욕설을 뱉으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또야? 귀찮아 죽겠네.”
“저 개새끼들, 형량도 안 줄여 주면서 졸라게 부려 먹어요.”
저마다 사고를 치고 감옥에 끌려온 고위험 능력자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위험한 놈들은 협회 본부에서 따로 관리한다.
고위험 능력자는 쓸만한 인력이니 마냥 감옥에다 처박아 둘 순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던전의 선발대로 들어간다. 고기 방패와도 같은 취급이다.
혹여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져 죽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던전의 몬스터와 하등 다를 바 없으니까. 죽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준비됐으면 바로 출발한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간수의 으름장에도 죄수들은 실실 웃었다. 그들은 마력 억제용 수갑을 낀 채, 감옥 밖으로 나왔다.
수십 분 뒤, 죄수들을 태운 차량이 게이트 입구에 멈춰 섰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간수가 일어나며 죄수들에게 말했다.
“이번 게이트의 차원력은 4성이다. 너희 수준이면 문제없겠지만, 신중하게 정찰해라. 질문은?”
“없습니다.”
“그럼 빨리 내려. 던전에 돌입하고 1분 뒤에 억제기 타이머가 발동할 거다. 제한 시간은 15분. 늘 하던 대로만 해.”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협회의 헌터들이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정보를 긁어모아 오도록. 그게 네놈들의 존재 가치니까.”
협회의 헌터들이 온다는 말에 죄수들 눈빛이 변했다.
“허, 길드 소속도 아닌 놈들한테 정찰 병력을 지원해 줍니까?”
“말조심해라. 협회 7팀은 최근에 급부상 중인 곳이니까.”
간수가 빨리 들어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죄수들은 구시렁대며 게이트로 진입했다.
던전에 입장하자 서열이 제일 높은 죄수가 욕을 뱉었다.
“참나, 내가 이젠 협회 놈들 뒤치다꺼리나 해 줘야 해?”
“그놈들 길드도 못 들어간 무지렁이 아닙니까.”
“막말로 저희끼리 던전 공략하는 게 훨씬 나을걸요?”
죄수들은 협회 소속의 헌터들을 깔봤다.
그들은 재능만 놓고 봤을 땐 고위험 능력자로 분류될 만큼 우수한 자들.
범죄만 안 저질렀으면 적당한 길드에 들어가 한자리 차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긴 대체 어디야? 어두워서 뭐가 보여야 말이지…….”
“형님, 이거 쇠창살 아닙니까?”
게이트를 통과하자 나온 건 어두컴컴한 실내였다. 그런데 어째 구조가 익숙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감옥이었다.
“허, 기분 더럽네. 뭔 던전에 들어와도 감옥이냐.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끼익!
문은 열려 있었다. 죄수들은 횃불 하나에 의지한 채 내부를 탐색했다.
하지만 워낙 어두워서 주변이 제대로 안 보였다.
이곳은 감옥이 아닌 낡은 성이었다.
성의 지하에 감옥이 있던 것이다.
“후딱 둘러보고 돌아가자.”
“예, 형님.”
삑!
마력 억제용 수갑의 타이머가 발동했다.
남은 시간은 15분. 그동안 마력 억제가 멈춘다.
봉인됐던 마력이 돌아오자 죄수들은 용기가 샘솟았다.
그들은 고성의 복도를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수색했다.
하지만 너무 고요했다. 몬스터가 이렇게 안 보이는 경우도 흔치 않은데.
“형님, 여기 뭔가 좀 이상한데요.”
“그러게. 어떻게 한 마리가 안 나오냐.”
“그냥 돌아가시죠. 분위기도 뭔가 으스스하고…….”
“새끼, 쫄기는. 어쩔 수 없지.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철수하자. 꼬우면 자기들이 직접 들어오던가.”
시간을 지체하면 마력 억제기가 다시 작동할 터. 그렇게 되기 전에 돌아가야만 했다.
그들은 왔던 길을 따라서 되돌아갔다.
몇 분 정도 걷던 죄수들은 이질감을 느꼈다.
“어? 형님, 뭔가 이상합니다.”
“왜?”
“이쯤에 분명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여기가 확실해?”
“예, 틀림없습니다. 제가 벽에 표시도 해 뒀는데요.”
그는 X자 표시가 그어진 벽을 횃불로 비췄다. 표식은 있지만, 내려가는 통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다른 곳에도 내려가는 통로가 있겠지. 시간 없으니까 뛰어.”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내려가는 길이 안 보였다. 그제야 죄수들도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헉, 헉… 씨발. 뭐야!”
“형님, 내려가는 길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나도 알아! 더 샅샅이 뒤져!”
돌아가는 길이 사라졌다. 대신 똑같은 복도의 풍경만 반복됐다.
죄수들은 완전히 공포에 질렸다. 그때였다.
“……?”
철그럭. 철그럭.
귓가에 무거운 금속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죄수들은 침을 삼키며, 어두운 복도의 저편을 바라봤다.
뭔가가 자기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 누구냐!”
방장의 목소리에 움직이던 소리가 멈추고 고요해졌다.
횃불로 복도 저편을 비추자 뭔가가 보였다.
‘갑옷?’
어두운 복도 끝에서 검을 쥔 갑옷이 있었다. 하지만 머리에 투구가 없었다.
갑옷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방장의 사고는 거기서 완전히 중단됐다.
“…헉!”
갑옷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의 갑옷들이 각기 다른 무기를 쥐고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방장은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도저히 싸워서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이 고를 선택지는 최대한 도망치는 것뿐이다.
“시발, 다들 튀어!”
* * *
“차원력이 급증했습니다!”
“뭐? 얼마나 늘었는데?”
“방금 6성을 돌파했습니다. 거의 7성에 육박합니다.”
“미친……!”
그 정도 등급이면 대형 길드가 나서야 하잖아.
죄수들은 15분 타이머가 다 되어 가는데 돌아올 기미가 없고.
던전의 등급은 상승해 버렸다. 즉, 대형 사고가 터졌다.
간수가 초조한 얼굴로 협회에 보고하려 할 때, 차량 하나가 도착했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 혹시 7팀의…….”
“나예린 팀장입니다. 방금 던전의 등급이 올라갔다 하셨죠?”
“네, 4성 수준에서 6성을 훌쩍 넘겼습니다.”
간혹 있다. 헌터들이 입장하면 난이도가 급증하는 변종 던전이.
간수에게 현 상황을 전해 들은 이수현이 말했다.
“저희가 들어가겠습니다.”
“하지만 던전 내부가 어떤지 확인도 안 됐는데…….”
“그럼 선발대들이 다 죽어도 괜찮습니까? 저는 상관없어도, 간수님은 곤란할 텐데요.”
“…알겠습니다. 대신 위험하다 싶으면 죄수들은 그냥 버리고 나오십시오.”
“알겠습니다.”
죄수들보다 7팀의 안전이 더 중요했다.
이수현은 팀원들과 함께 게이트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실내가 나왔다.
“여긴 감옥인가 봐요.”
감옥의 철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죄수들이 열어 두고 간 거겠지.
“앞이 안 보여요…….”
서민아는 벌벌 떨며 이수현의 등에 찰싹 붙었다.
‘맞아. 민아 씨 의외로 공포 영화 같은 걸 무서워했었지?’
이수현은 겁에 질린 서민아의 손을 잡아 줬다. 그러자 나예린이 뾰로통한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민아 씨, 그러다 수현 씨까지 위험에 빠트리면…….”
끼익!
낡은 철문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꺄악!”
나예린은 비명을 지르며 이수현한테 딱 붙었다. 서민아랑 이수현은 그걸 보고선 픽 웃었다.
그러자 나예린은 귀까지 새빨개져서 작게 꿍얼댔다.
“우, 웃지 마세요…….”
“의외네요. 선배도 무서운 거 싫어하나 봐요? 저번에 언데드는 별 반응 없더니.”
이수현은 히죽 웃으며 나예린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그녀가 애써 반박했다.
“그건 몬스터잖아요. 여긴 다르죠…….”
“어떻게 다른데요?”
“분위기가 칙칙해서 너무 무섭잖아요! 그땐 인원도 많았고…….”
“맞아요. 그거예요! 분위기. 앞도 잘 안 보이고…….”
서민아가 나예린을 거들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며 고갤 끄덕였다.
“마침 어두운 던전이 나와 줬네요.”
“네?”
“며칠 전에 새로운 스킬을 얻었거든요.”
“어떤 스킬인데요?”
“보여 줄게요.”
영약 재배에 써먹으려고 딴 자격증인데. 이렇게 쓸 줄이야.
이수현은 검지를 올리며 성경의 한 구절을 읊었다.
“하느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그러자 감옥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수현의 손가락 위에 새하얀 구체가 생겨났다. 그 구체가 밝은 빛을 힘차게 내뿜었다.
그러자 어둡던 지하 감옥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와! 그거 뭐예요?”
“광학 기능사를 따서 얻었어요. 마력이 담긴 빛을 만들 수 있죠.”
“광학?”
“빛의 특성이란 뜻이에요.”
서민아가 이수현의 능력에 감탄을 터트렸다. 그는 빛의 구체를 두 개 더 만들었다.
그걸 그녀들 주위에 하나씩 배치하자, 남아 있던 어둠도 싹 걷혔다.
“영약 재배에 도움이 될까 해서 땄는데, 던전에서도 유용하네요.”
“덕분에 살았어요. 어서 서두르죠.”
나예린은 안도하며 그에게서 슬쩍 떨어졌다. 그러곤 앞장서서 감옥을 나갔다.
그들이 복도로 나오자 양옆으로 감옥이 즐비했다.
“세상에… 저기 해골도 널려 있어요. 방치된 지 오래됐나 봐요.”
어두웠으면 못 보고 지나쳤을 것들이 지금은 훤히 보인다.
다른 감옥 안에는 죄수들의 유골이 있었다.
그마저도 오래돼서 팔다리가 온전한 게 거의 없었다. 벽 구석구석 쳐진 거미줄은 이곳이 오랫동안 방치됐단 걸 증명했다.
「지하 감옥이 있는 성이라…….」
“응? 여기가 어딘지 알아?”
「이만한 규모의 고성은 흔치 않아요. 녹슬긴 했지만, 벽에 새겨진 문양은 라키아 왕국의 상징이고요. 제 예상에 여긴…….」
다인은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꺼림칙한 목소리로 말했다.
「‘체페쉬’ 백작의 성일 거예요.」
“체페쉬 백작?”
「네, 라키아 왕국을 배신하고, 어둠 군주에게 붙은 더러운 변절자죠. 그는 왕국을 지키던 용맹한 기사였지만, 동시에 미치광이였어요.」
“어둠 군주라고?”
그는 전장에서 무참히 죽어 가는 병사들을 보며, 영원한 삶을 갈망했다고 한다.
그 갈망은 어긋난 집착이 되어, 젊음을 유지하는 흑마법에 빠졌다고 한다.
「그는 왕국의 국경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둠 군주의 공습이 시작됐죠.」
“녀석이 바로 항복했구나.”
「네, 라키아 왕국은 순식간에 멸망했어요. 체페쉬 백작은 가장 먼저 항복한 대가로 어둠 군주의 하수인이 됐죠.」
다인은 씁쓸하게 옛날 일을 말했다.
「잔혹한 면이 있었어도 실력만큼은 훌륭한 기사였는데. 그렇게 타락할 줄 몰랐어요. 라키아 왕국이 멸망하고 다음은 저희였죠.」
그녀는 군주들의 공세를 막지 못해 자결했다.
「그가 이 성에 아직 머물고 있다면, 당신이 꼭 처치해 주세요. 그는 이제 마귀로 전락한 괴물이니까.」
“오케이. 흡혈귀가 보스란 거지?”
이수현이 마검이랑 계속 대화를 나누자 일행이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마검이 또 뭐래요?”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더라고요. 다인이 말로는 어둠 군주의 하수인이 보스라던데요.”
“어둠 군주라면 저번의 그…….”
이수현이 신성 길드와 함께 해치운 흡혈귀잖아.
서민아는 보스가 흡혈귀란 말에 조금 걱정했다. 반면에 나예린은 다른 걸 지적했다.
“수현 씨. 그 마검에 갇힌 영혼을 방금 다인이라 부른 거죠?”
“네.”
“…그 영혼이랑 친해진 거예요? 아까 보니까 거리낌 없이 편하게 대화하던데.”
“네? 뭐, 물어보면 아는 대로 알려 주니까…….”
“그 영혼은 믿을 수 없어요. 수현 씨를 죽이려고 거짓말하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나예린은 그를 보고 있으면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이수현은 마검을 너무 신용하고 있다.
그녀는 그게 분하고 또 부러웠다.
「솔직하지 못하긴. 귀여운 아가씨네요.」
“귀엽다고?”
“귀, 귀엽다고요? 방금 마검이 저한테 그딴 소릴 했어요?”
그 말에 나예린이 발끈했다. 하지만 다인은 풋풋하다며 보기 좋다고 말했다.
「절 질투하는 거예요. 몇 달을 같이 지낸 동료가 자기만 놔두고 수상쩍은 놈이랑 계속 얘기하니…….」
“아하.”
이수현은 고갤 끄덕이며 그 말을 그대로 전했다.
“선배, 다인이한테 질투했어요?”
“아, 아니에요! 전 그냥 수현 씨가 걱정돼서… 후, 됐어요.”
나예린은 빽 소릴 지르며 부정했다. 그녀는 뭐라 더 말하려다 고갤 홱 돌렸다.
다인이 그걸 그대로 말하면 어쩌냐고 따졌다.
「그걸 대놓고 말하면 어떡해요. 귀여운 아가씨가 삐졌잖아요. 빨리 가서 달래 줘요.」
나예린은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고선 혼자 성큼성큼 걸어갔다.
던전에서 위험하게 혼자 다니면 쓰나.
이수현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지하 감옥에 돌연 암흑이 찾아왔다.
통로를 밝혀 주던 빛이 전부 사라졌다.
“…어?”
나예린은 제자리에 딱 멈췄다.
자기 앞에 떠다니던 빛의 구체가 없어진 탓이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뒤쪽을 바라봤다.
이수현과 서민아 주위에 있던 빛도 사라졌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팀원들의 형체만 겨우 식별될 뿐.
이수현은 짓궂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선배, 왜 혼자 잘 가다 멈춰요?”
“…수현 씨, 장난치지 말아요. 이런 거 진짜 재미없어.”
그녀는 감춘다고 감췄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틀림없이 어두워 진 걸 무서워하고 있다.
“아니, 전 선배가 혼자서도 당당하게 가길래. 제 도움은 필요 없는 줄 알았죠.”
“…불 좀 켜 줘요.”
그녀는 벽을 짚으며 겨우 돌아왔다.
그러더니 이수현의 팔을 꼭 붙잡으며 부탁했다.
그가 불을 켜주자 나예린은 볼을 조금 부풀린 채였다.
“알았어요. 놀려서 미안해요. 반응이 재밌어서 장난 좀 친 건데…….”
“지금 저희끼리 놀 시간 없어요. 선발대로 들어간 사람들도 수색해야죠.”
서민아가 상황을 중재했다. 그러자 나예린도 고갤 끄덕이며 화를 풀었다.
그들이 계단을 오르려던 그때, 감옥 어딘가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을 끌 거면 끄고, 켤 거면 켤 것이지. 왜 정신 사납게 켰다가 끄는지 원.”
“…거기 누굽니까?”
의문의 목소리에 이수현이 발걸음을 딱 멈췄다.
“수현 씨, 또 장난칠 거예요?”
“빨리 올라와요.”
먼저 계단을 올라가던 일행들이 그를 불렀다. 이수현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 감옥에서 사람 목소리 안 들렸어요?”
“목소리? 전 못 들었는데. 나 팀장님은 들었어요?”
“아무것도 안 들렸어요. 수현 씨, 자꾸 무섭게 이럴 거예요?”
‘뭐지?’
서민아와 나예린의 저 반응은 아무리 봐도 연기가 아니다. 진짜 안 들렸다고?
“다인, 너도 목소리 못 들었어?”
「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다인까지 못 들었다고 하자 이수현은 어째 오싹해졌다.
분명 안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생각했다.
‘감옥 어딘가에 유령이라도 있는 거 아냐?’
그는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이수현이 계단을 내려가자, 나예린과 서민아는 허겁지겁 그를 따라갔다.
“이봐요, 방금 말한 사람 누굽니까? 불을 끄고 켜고 어쩌고 했잖아요.”
이수현이 그렇게 소리쳤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헐. 진짜 유령이야?’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안에서 노인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정말로 내 목소리가 들렸단 말인가?”
“아! 들려요. 잘 들립니다! 근데 어딨어요?”
이수현은 지하 감옥에 울려 퍼진 노인의 목소리를 쫓았다.
그러자 노인이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여기네. 난 여기일세! 감옥 제일 안쪽에 갇혀 있어.”
“찾았다. 선배, 민아 씨! 여기 사람이 있어요!”
“유, 유령 아니죠? 저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유령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수현은 감옥 안에 홀로 갇힌 노인을 발견했다.
노인은 벽에 박힌 쇠사슬로 사지가 속박되어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혓바닥으로 도움을 청했다.
“제발 나 좀 도와주게! 여기서 풀어 주면 꼭 보답하겠네.”
노인은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도움을 청했다.
그는 한눈에 봐도 비쩍 말랐다. 여기서 오랫동안 갇혀 지낸 모양이다.
나예린과 서민아도 뒤늦게 이수현이 멈춰선 감옥 앞에 도착했다.
“어? 진짜 사람이 있네요?”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벙어리 같은데요.”
“네? 지금도 잘만 말하고 있는데요. 어서 꺼내 달라고…….”
“제 눈엔 입만 뻐끔거리고 있어요.”
“저도요.”
나예린과 서민아는 노인의 목소리가 아예 안 들렸다.
“난 망할 고양이한테 저주받았네. 내 목소리가 남에겐 안 들리도록 만들고, 여기에 가뒀지.”
“망할 고양이?”
“그래. 그런데 젊은 친구, 미안하지만 자네 피 좀 나눠줄 수 있나? 여기에 갇히고서 한 모금도 못 먹었거든.”
「저 남자, 설마…….」
다인슬레이프가 거세게 떨렸다. 다인은 노인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경악했다.
“뭐야, 다인아.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
「체페쉬 백작!」
* * *
“그래. 난 블라드 체페쉬 백작일세. 이 성의 관리인이었지.”
감옥에 갇힌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이수현은 당연히 체페쉬가 보스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 꼴을 봐선 던전의 주인이 아닐지 모른다.
“그럼 지금은 누가 여길 차지한 겁니까?”
“그 망할 고양이가 성을 점거했네. 난 내 모든 걸 빼앗겼어. 신물은 물론이고 이 성과 병사들까지 전부!”
그러고 보니 어둠 군주랑 흡혈귀를 해치울 때도 신물은 구경도 못 했었지.
어디 갔나 했더니 체페쉬 백작이 관리하고 있었구나.
그는 원통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그래서 그 망할 고양이가 대체 누굽니까.”
“놈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며 성을 점거했네.”
“아니…….”
체페쉬는 자기가 하고픈 말만 늘어놨다.
묘인족 소년이 대뜸 성에 침입하고선 말했다.
어둠 군주는 죽었으며, 자신은 그녀의 뒤를 이을 새로운 군주로 뽑혔다고.
그러니 그녀의 신물과 사유지는 몽땅 내 것이다. 대충 그런 논리였다.
“녀석은 어둠 군주님이 인간들에게 죽었다고 말했지.”
‘아직 어둠 군주가 죽은 줄 모르고 있네. 성에만 박혀 지냈나?’
“그래서 난 개소리 말라며 병사들과 함께 장렬히 싸웠네.”
결과는 체페쉬의 참패였다. 그는 결국 지하 감옥에 유폐됐다.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그림자 저주로 놈의 인형이 되었고.
“난 여기 갇히고서 급속히 약해졌네. 피를 먹지 못하니, 영원할 것만 같았던 내 젊음도 눈 녹듯 사라졌고…….”
“저기요.”
“…응?”
“그쪽 사정은 제 알 바 아니니까, 묻는 것만 대답해요. 이 성에 어떤 몬스터가 있는 겁니까.”
이수현은 그의 사정 따윈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던전의 몬스터에 관해서만 물어봤는데, 노인은 묻지도 않은 개인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내 병사들은 놈의 저주를 받았네. 갑옷의 그림자에 혼이 묶였지. 이젠 놈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일 뿐이야.”
“그럼 평범한 공격은 안 통하겠네요.”
“그렇네. 갑옷은 껍데기고 그림자가 본체일세. 그 그림자를 몰아내려면 강한 신성력이 필요하지. 혹시 자네들 중에 사제가 있나?”
체페쉬는 7팀을 쭉 둘러봤지만, 그들에게서 신성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갤 저었다.
“…아무도 없는 모양이군. 그럼 그림자를 없앨 수 없네. 성수도 일시적일 뿐이야. 자네들만으론 못 이기겠어.”
“그 갑옷들 말고는 뭐 다른 몬스터 없습니까?”
“어둠 군주님께서 기르시던 애완동물이 있네. 녀석은 신물도 갖고 있으니 조심하게나.”
“얘기 잘 들었습니다.”
이수현은 체페쉬와의 대화를 끝내고 감옥 문을 닫았다.
그러자 체페쉬가 당황한 얼굴로 철창에 매달렸다.
“그, 그냥 가면 어쩌잔 건가! 여기서 날 풀어 줘야지.”
“전 풀어 준다고 한 적 없는데요?”
“날 어쩔 셈인가!”
“그야 당연히 죽여야죠. 흡혈귀라면서요?”
“그, 그래도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해 줬잖나. 제발 자비를…….”
“대륙인들이 자비를 구할 때, 당신은 그들에게 뭐라 말했죠?”
“그, 그건…….”
할 말이 없었다. 체페쉬는 흡혈귀가 되고서, 대륙인들을 무참히 학살했으니까.
이수현은 손가락 위에 빛의 구체를 만들었다. 그걸 본 체페쉬가 눈을 크게 떴다.
‘저건 평범한 빛 마법이 아니야. 아니, 마법이긴 한 건가? 인간이 만든 빛이 저토록 순수할 수 있다니.’
신성력. 그건 사제가 신의 힘을 인공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재현도 역시 올라간다.
교황과 고위 사제의 신성 마법이 유달리 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수현이 만들어낸 빛은 신성력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마치 신이 창조해 낸 태초의 빛 같지 않은가!’
자기가 저런 걸 맞았다간 그 즉시 소멸이었다. 체페쉬는 태양보다 눈 부신 빛줄기에 벌벌 떨었다.
‘저 남자, 정녕 인간인가?’
이수현은 커다란 빛의 오브를 만들고서 말했다.
“빛이 당신을 태울 것입니다.”
“…캬아아악!”
영생을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체페쉬 백작. 그는 차가운 지하 감옥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 * *
철그럭. 철그럭.
절대 멈추지 않고 죄수들을 쫓는 텅 빈 갑옷들. 속도는 느리지만 괴기스러웠다.
“…젠장, 몇 바퀴나 돌았는데, 출구가 없잖아!”
죄수들은 복도를 뛰어다니며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내려가는 계단이 안 보였다.
마치 출구가 없는 미로 속에 갇힌 것 같았다.
방장은 지친 얼굴로 수갑의 타이머를 확인했다.
‘고작 3분 남았어.’
3분 뒤엔 마력 억제기가 작동할 거다. 그러면 마력을 못 쓰게 된다.
강체술 없인 놈들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형님, 이러다 타이머 다 지나겠어요. 그러면 저흰 끝장입니다!”
“그냥 죽기 살기로 싸워 봅시다. 출구도 안 보이고, 도망치기만 해선 답이 없어요.”
“에이, 씨. 그래. 지금 죽나 3분 뒤에 죽나. 그게 그거지. 전부 무기 들어!”
죄수들은 도망치는 걸 그만뒀다. 방장의 명령대로 갑옷들과 대치했다.
‘저것들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야.’
갑옷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흉흉하고,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농도가 짙었다.
“죽어!”
“흐아아압!”
퍽-!
죄수들이 무기로 갑주를 냅다 후려쳤다. 그러자 갑옷 부위들이 빈 깡통 소릴 내며 복도를 굴렀다.
“뭐야? 겉만 그럴듯하고 별것 없는데.”
“괜히 쫄았네. 진작에 싸울걸.”
죄수들은 한 방에 갑주를 날려 버리고선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방장에겐 여전히 보였다.
분해된 갑옷에서 시커먼 마력이 줄줄 새어 나오는걸.
그것들은 마치 뱀처럼 꾸물거렸다.
“아직 안 죽었어!”
“예?”
“대가리 숙여!”
촤악-!
갑주에서 시커먼 기운이 칼날처럼 쏘아졌다.
그건 이수현이 죽였던 어둠 군주의 하수인, 벨로카의 기술과 아주 흡사했다.
방장의 경고 덕분에 죄수들은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목이 달아났을 거다.
“히익!”
죽을 뻔했던 남자가 겁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달그락.
바닥에 분해된 갑옷 부위들이 한데 모여들었다. 놈의 그림자가 갑옷을 하나로 이어 붙인 것이다.
몬스터는 죽지 않았다. 다시 복구된 갑주가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일어났다.
“그, 그림자다! 본체는 그림자였어!”
방장은 이제야 몬스터의 정체를 깨달았다. 갑옷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갑주의 그림자가 길쭉하게 늘어나더니, 칼날처럼 변했다. 그게 죄수들 쪽으로 쇄도했다.
“마, 막아!”
방장의 외침은 소용없었다.
그림자 칼날은 돌진해 오며 방향을 마구잡이로 꺾었다.
푹!
그 탓에 죄수들은 제대로 막지 못하고 찔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급소를 피해 갔다는 점이다.
‘갑주는 가짜야. 놈들의 그림자가 본체였어.’
방장은 적의 정체를 이제야 파악했다.
갑주는 더미. 진짜는 갑옷에 기생한 그림자였다.
그는 죄수들에게 소리쳤다.
“그림자다, 놈들의 그림자를 찔러! 그게 본체야.”
“그, 그림자를요?”
“잔말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마력을 쓸 수 있을 때 한 놈이라도 더 해치워야 한다.
삐이-!
그렇게 생각하던 방장의 귓가에 힘 빠지는 타이머 소리가 들렸다. 3분의 시간이 다 지났다.
“내 마력이……!”
“제, 제기랄…….”
마력 억제기가 다시 동작했다. 강체술도 쓸 수 없게 되자, 죄수들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여기서 다 죽는 건가.
갑주의 틈에서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이제 그들은 저것에 난도질당할 일만 남았다.
“다들 무사하십니까?”
“……?”
갑옷들은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복도의 끝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다.
죄수들은 여유가 잔뜩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뒤로 고갤 돌렸다.
“헌터다!”
“살았다! 형님, 저희 살았습니다!”
그들을 찾은 건 젊은 헌터였다. 밖에서 구조대가 온 거구나.
죄수들은 이제 살았다며 안도했다.
방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에게 조심스레 질문했다.
“다, 당신 대체 누구야?”
“협회 소속의 이수현 헌터입니다. 간수 아저씨가 여러분들을 걱정하더라고요. 모두 무사하죠?”
“그래,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시네. 근데 설마 너 혼자 왔어?”
“성이 너무 넓어서 팀원들이랑 흩어졌죠.”
“혼자 다닌다고? 그러다 뒈지면 어쩌려고……!”
“제때 찾았으면 됐죠.”
“후, 그래. 그보다 헌터 등급은?”
‘혼자 다닐 정도면 최소 팀장급이겠지?’
“7급이요.”
“…망할.”
방장은 얼굴을 구겼다.
협회 나부랭이라고 해서 불안했는데, 안 좋은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이수현은 그를 지나치며 갑옷들 앞에 홀로 섰다.
그의 뒷모습에선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협회 소속에다 7급이면 완전 떨거지잖아. 시발, 우린 이제 망했어.’
협회는 오래전부터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그래서 협회 소속의 헌터에겐 승급의 허들도 낮은 편이다.
말만 7급이고 실력은 등급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저것들 움직이는 게 왜 저럽니까? 좀 이상한데.”
이수현은 갑옷들의 움직임을 보더니 고갤 갸웃거렸다.
방장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자기가 알아 낸 정보를 공유했다.
“갑주는 가짜야. 공격해 오는 건 놈들의 그림자다. 그게 칼날처럼 변해서 마구 날아들던데, 너무 빨라서 막지도 못해.”
설명만으론 감이 잘 안 왔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이수현은 마검을 뽑으려다 멈췄다.
“저것들은 베어도 피 안 나겠죠?”
“당연하지. 텅 빈 깡통이라니까?”
“쩝,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수현은 마검 대신 화염 군주의 창을 소환했다.
여기서 괜히 마검을 뽑았다간 죄수들을 썰게 될지 모르니까.
‘차원 주머니가 있으니 편하네. 확실히 돈값은 해.’
마탑에서 산 아공간 주머니.
이것만 있으면 게임의 인벤토리처럼 각종 물건을 보관할 수 있었다.
이수현은 포션 몇 개를 꺼내, 죄수들 쪽으로 굴려 줬다.
“일단 그걸로 치료 좀 하고 계세요. 금방 처리할게요.”
“혼자서 싸우겠다고? 죽으려고 작정했냐!”
“근데 여러분들은 뒤에서 구경만 할 겁니까? 다들 각성자 아녜요?”
“이 망할 수갑 때문에 우린 아무것도 못 한다고!”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해 주시지.”
콰직!
이수현은 방장의 수갑을 창날로 찍었다. 그러자 마력 억제기가 한 방에 박살 났다.
“……!”
방장은 입이 떡 벌어졌다. 어지간한 충격에도 버티는 물건인데.
그걸 손쉽게 부수다니.
‘대체 뭐 하는 놈이지?’
협회 소속에다 7급이라길래 당연히 약골이라 생각했건만.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다른 사람들 수갑 좀 풀어 주고 있어요. 금방 정리할게요.”
이수현은 그렇게 말하며 갑옷들 쪽으로 걸어갔다.
촤악!
그러자 그림자들이 칼날처럼 변하더니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이수현이었다.
“아, 뭐야. 저번에 본 거네.”
어둠 군주를 지키려다 죽은 흡혈귀.
그 여자가 사용한 기술이랑 흡사했다.
화르륵!
그는 그림자 쪽으로 청염을 쏘았다. 하지만 놈들은 지그재그로 꺾더니 불꽃을 죄다 피했다.
“위험해!”
방장이 그렇게 소리쳤다. 혼자 자신만만하게 나서더니, 내 저럴 줄 알았지.
저 헌터는 곧 그림자 칼날에 썰려 고깃덩이가 될 거다.
“어딜.”
파앗-!
이수현은 전방에 빛의 구체들을 생성했다. 빛을 쬔 그림자들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빛으로 그림자를 날렸어?’
그의 대처에 방장이 이마를 쳤다.
그래. 눈부신 섬광 앞에선 그림자도 드리우지 못한다.
그걸로 놈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 했구나. 저 녀석, 머리 좀 굴렸군.
그림자가 날아가자, 갑옷들도 우르르 쓰러졌다.
“하지만…….”
빛으로 그림자의 형체를 날린들, 그건 잠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했다.
그림자를 없애지 못하면 소모전으로 이어질 뿐이다.
산산이 흩어졌던 그림자들이 꾸물대며 다시 뭉쳤다. 쓰러진 갑주도 비척대며 일어났다.
“끈질긴 놈들. 싹 태워 줄게.”
이수현은 그렇게 말하며 갑주들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림자들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갔다.
놈들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수현의 사각지대를 찔렀다.
“뒤를 조심해!”
방장은 다급히 소리쳤다. 이수현의 등짝을 노리는 칼날만 십여 개다.
자신도 아까 당해 봐서 안다. 저걸 맞았다간 몸이 성할 리 없다.
재수 없으면 즉사하겠지.
번쩍!
이수현은 오브를 터트려 빛을 퍼트렸다. 그건 마치 섬광탄 같았다.
“이러면 접근 못 하지?”
화르륵!
이수현은 갑옷과 그림자를 모조리 불태워 녹였다.
숙주를 잃고 꾸물대던 그림자들이 청염에 타들어 가며 소멸했다.
어둠 군주에게도 먹혔던 청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혼자서 저렇게 간단히…….’
방장의 눈에 진득한 탐욕이 일었다. 그는 저 창이 너무도 탐났다.
범죄자 인성 어디 안 갔다.
그는 이수현 덕분에 죽다 살아났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저 녀석을 인질로 삼아서 탈옥하는 거야.’
“준구 형님, 이제 살았습니다!”
“진짜 뒈지는 줄 알았어요.”
죄수들은 살았다며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방장은 부하들이 뭘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이수현한테 다가갔다.
“이봐, 형씨. 솜씨가 제법이던데. 그림자를 태운 거나, 수갑을 부순 건 그 창의 힘인가?”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죠?”
이수현은 솔직하게 답했다. 신물은 일반 무기보다 성능이 훨씬 좋았으니까.
‘돈이 많은 놈이군. 실력에 안 맞는 무기를 쓰고 있어.’
방장은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넌지시 말했다.
“그래도 안심할 때가 아니야. 아직 던전의 보스가 남았잖나.”
“그렇죠.”
“살려 준 보답을 하고 싶은데. 우리가 보스 공략을 도와주지. 어떤가?”
“주, 준구 형님?”
그의 발언에 다른 죄수들이 당황했다.
이수현도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보스 잡는 걸 도와주신다고요?”
“그래.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실력은 확실해.”
“제가 그쪽들의 뭘 믿고 풀어 줍니까. 다 범죄자들 아녜요?”
“던전에선 남이 아니라 자기 실력을 믿어야지.”
“이상한 짓거리 하면 알죠?”
“물론이지.”
콰직-!
이수현은 죄수들의 수갑을 모두 박살 냈다. 그들은 가벼워진 손목을 매만지며 눈치를 슬슬 살폈다.
“빨리 따라오세요. 보스 잡으러 가야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앞장섰다.
죄수들은 방장을 쳐다보며 속닥댔다.
“형님, 뭐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 저 새끼를 인질로 잡아야지. 그러면 간수 놈들이 우리한테 뭐 어쩔 거야.”
“탈옥하시게요?”
“그래, 저 창만 가져다 팔면 우리도 새로 시작할 수 있어.”
놈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 이건 절호의 기회다.
그의 말에 다른 죄수들도 감화됐다.
“형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좋아, 내가 신호하면 동시에 달려드는 거다.”
하나, 둘, 셋!
열이 넘는 인원이 이수현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이수현이 기다렸단 듯이 고갤 홱 돌렸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내 이럴 줄 알았어.”
* * *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형님.”
“오냐.”
이수현은 1분 만에 죄수들을 전부 제압했다.
그들은 기절할 때까지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맞고, 그가 나눠 준 포션으로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다.
서열 정리가 확실히 끝나자, 방장을 포함한 죄수들은 아주 고분고분해졌다.
방장은 이수현을 아예 형님이라 부르며 설설 기었다.
“수현 씨, 여기에요!”
“빨리요!”
“형님의 팀원분들이십니까?”
“그래.”
“캬, 둘 다 이쁘네.”
“부럽습니다. 저런 애들을 양옆에 끼시고…….”
“이제부터 헛소리하면 맞는다.”
“넵.”
나예린이 복도 끝에서 이수현을 불렀다. 그녀 옆에는 서민아도 있었다.
둘은 수색 도중에 만나서 합류한 모양이다.
죄수들은 오랜만에 하는 여자 구경에 아주 신이 났다. 이수현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그들은 바로 조용해졌다.
“선배, 이 철문은 뭐예요?”
이수현은 그녀들 뒤에 있는 거대한 철문을 발견했다.
나예린은 진지한 말투로 답했다.
“아마도 이 안에 보스가 있는 것 같아요.”
“나 팀장님이 제일 먼저 발견했어요. 여기서 수현 씨가 오기만을 계속 기다렸다고요.”
“죄수분들도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근데 수갑은요?”
그녀들의 질문에 이수현은 대충 둘러댔다.
“보스 잡는 걸 돕겠데요. 제가 위험하다고 말렸는데, 구해 준 은혜를 꼭 갚고 싶다나. 그렇지?”
“무, 물론입니다!”
죄수들은 이수현의 말에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방장은 얼빠진 얼굴로 나예린을 쳐다봤다.
‘…나 팀장님? 설마 저 애가 팀장이라고?’
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저렇게 어린애가 어떻게 팀장이지? 팀장이라 하면 보통 그 팀에서 제일 뛰어난 헌터가 맡던데.
그럼 이수현은 뭐란 말인가.
‘그럼 이 녀석은 팀장도 아니었잖아. 그 실력에 고작 팀원이라고?’
협회의 헌터들은 낙오자들이 모이는 집단이라 들었는데.
그가 감옥에 들어간 지도 어언 13년.
방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자기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바깥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구나.
“그럼 보스 잡으러 들어가죠. 준구야, 앞장서.”
“…예, 형님.”
이수현은 준구의 등을 떠밀었다.
방장은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철문을 힘껏 밀었다.
끼이익!
보스방이 활짝 열렸다.
그르릉!
철문이 열리자 안에서 짐승의 소리가 들렸다. 이건 안 봐도 보스다.
죄수들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안에서 지독한 마력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다.
“형님, 이 인원으로는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철수하고 증원을…….”
철문을 연 준구가 덜덜 떨며 이수현을 쳐다봤다. 허락만 해 준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문을 닫을 기세였다.
“준구야, 헛소리 말고 빨리 들어가.”
하지만 이수현은 그를 용서해 줄 마음이 없었다.
턱짓으로 빨리 들어가라 말했다. 고기 방패와도 같은 취급에 준구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 자기 업보지.
준구는 침을 꼴깍 삼키며 한 걸음 내디뎠다.
컹! 컹!
그러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보스는 마지막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맹렬히 짖었다.
“…케르베로스!”
던전의 보스는 머리가 셋 달린 시커먼 개였다. 마견 케르베로스.
고위 마족들이 애완동물로 키운다는 강력한 마수다.
준구는 녀석의 살벌한 눈을 보자 몸이 얼어붙었다.
‘저거 6성급 몬스터잖아? 저런 게 여기 왜 있어!’
여기 4성 던전이라며. 간수들한테 사기당했다.
솔직히 6성이면 대형 길드가 나서야 할 수준이다. 이건 선을 심하게 넘었다.
준구는 벌벌 떨며 케르베로스를 살폈다. 그런데 녀석은 목에 스파이크가 박힌 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쇠사슬?’
그 목걸이엔 튼튼해 보이는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사슬은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즉, 놈은 목줄에 묶인 개 신세였다.
준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왜 안 움직이나 했더니 묶여 있었네.”
“아, 그러네요. 집주인이 묶어 두고 어디 갔나 봅니다.”
다른 죄수들도 웃으며 맞장구를 쳐줬다.
그르릉.
케르베로스는 준구를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자 준구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빨 보이면 뭐 어쩔 건데? 거기서 못 움직이는 놈이.”
녀석은 그의 도발에 제대로 흥분했다.
보스가 단숨에 준구 쪽으로 달려들었다.
터엉-!
하지만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돌진을 막아 세웠다.
“켕!”
자기가 달려들던 힘 그대로 목이 옥죄었다.
까득!
보스는 분했는지 신경질적으로 사슬을 물어뜯었다. 준구는 녀석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비웃었다.
“푸하핫! 그게 되겠냐? 대가리 개수는 많은데, 하는 짓이 영 멍청하네. 아, 개라서 그런가?”
“저, 준구 형님.”
“왜?”
“쟤 열 많이 받은 것 같은데요?”
“열 받으면 자기가 뭐 어쩔 건데. 주인이 목줄 잘 채워 놨네.”
“그치. 반려동물 키울 거면 목줄은 필수지.”
이수현이 준구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개가 어떻게 스스로 목줄을 풀겠어.
“어?”
화르륵!
그런데 그게 됐다. 녀석이 입에서 뜨거운 불꽃을 확 내뿜었다.
그 열기에 사슬의 이음새가 흐물거렸다. 녀석은 그 부분을 꽉 물고서 힘껏 비틀었다.
콰득!
놈을 속박하던 목줄이 그대로 박살 났다.
“…어?”
준구는 엿 됐단 표정으로 부하들을 쳐다봤다.
자유를 되찾은 케르베로스가 거친 숨결을 훅 뱉으며 준구 쪽으로 달려들었다.
“젠장, 싸워!”
“형님이 괜히 자극해서 그렇잖아요!”
“다, 닥쳐!”
그러자 죄수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보스에게 응전했다.
이게 다 보스의 성질을 건드려서 일어난 일이야. 죄수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진형을 갖췄다.
하지만 실력의 차이는 역력했다. 죄수들은 보스의 공격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방패를 쥔 죄수들이 놈의 앞발에 맞고 바닥을 우당탕 굴렀다.
준구는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다.
“수, 수현 형님! 저희 좀 도와주십쇼!”
“자기가 뿌린 씨앗은 스스로 거둬야지. 게다가 너, 아까 날 배신했잖아.”
“죄, 죄송… 커헉!”
준구는 뭐라 말하려다 케르베로스의 꼬리에 맞고 멀리 날아갔다.
그의 얼굴에서 코피가 줄줄 흘렀다.
서민아가 불안한 얼굴로 질문했다.
“수현 씨, 안 도와줘도 돼요?”
“보스의 움직임을 보려 했죠. 대충 파악했어요. 슬슬 마무리하죠.”
“…그럼 죄수들은 샌드백으로 쓴 거예요?”
“쟤들은 저렇게 당해도 싼 놈들이에요.”
이수현은 창을 빙빙 돌리며 보스 쪽으로 걸어갔다.
나예린과 서민아도 그를 따라 진형을 잡았다.
“다친 사람들은 뒤로 빠지세요.”
“가, 감사합니다! 누님!”
“…누가 당신 누님이야.”
죄수들은 보스한테서 1분도 못 버텼다. 나예린은 부상자들에게 뒤로 빠지라 말했다.
그러자 죄수들이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도망쳤다.
이제 살았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긴장이 탁 풀렸다.
죄수들은 안전한 곳까지 물러선 뒤 그들을 바라봤다. 고작 셋이서 저 괴물 같은 보스를 상대한다니.
“아무리 수현 형님이 강하셔도…….”
“세 명만으로 잡겠다고? 이거 맞아?”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
그렇게 생각했던 죄수들은 놀라운 광경을 봤다.
“깨갱!”
이수현은 창대로 보스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그러자 녀석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괴력이었다.
덥석!
서민아는 뒤로 돌아, 쓰러진 보스의 꼬리를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뭐, 뭐야!”
“미친! 저거 사람 맞아?”
부웅-!
그녀는 제자리에서 보스를 빙빙 돌렸다. 이수현보다 더한 괴력이었다.
그 비결은 이수현이 재배한 영약이었다. 이수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영약을 복용한 덕분에 한층 성장했다.
그 진가가 여기서 드러났다.
“크워!”
서민아는 기합 소리와 함께 꼬리를 놨다. 그러자 보스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놈은 머리를 부딪혀서 균형을 바로 잡지 못하고 비틀댔다.
나예린은 놈이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피잉-!
여러 개의 화살이 보스의 눈을 찔렀다.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피를 쏟았다.
“크어어어!”
화살에 눈이 먼 보스가 구석으로 몰렸다.
구경하던 죄수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진짜로 잡겠는데!”
“준구 형님, 이제 한시름… 준구 형님?”
“뭐야. 준구 형님은 어디 갔어?”
“설마…….”
죄수들은 전투에 정신이 팔려서 준구가 보스방에서 도망친 것도 몰랐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은 철문 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아까 그가 흘린 피였다.
“진짜 너무하시네. 저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자기 혼자만 튀고.”
“근데 먼저 가 봤자 형님 혼자선 출구 못 찾지 않을까?”
죄수들은 그에게 진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기들까지 버리고 혼자만 몰래 튀다니.
“민아 씨, 바로 해치우죠!”
“그워!”
“잠깐만요, 보스의 목걸이가 좀 이상해요.”
이수현과 서민아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보스 쪽으로 돌진했다.
그러자 나예린이 손가락으로 보스를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보스의 목걸이가 심상치 않았다. 거기서 시커먼 기운이 줄줄 흘러나왔다.
‘저게 어둠 군주의 신물이었어?’
이수현은 뒤늦게 눈치챘다. 놈이 끼고 있는 개 목걸이에서 어둠 군주의 마력이 느껴진다는 걸.
“다들 조심해요!”
그가 조심하라고 외쳤지만, 이미 신물의 능력은 발동하고 말았다.
화아악!
진한 어둠이 순식간에 방을 뒤덮었다. 모두 거기에 꼼짝없이 삼켜졌다.
“……?”
하지만 몸에 아무 변화도 없었다. 이수현은 뭔가 이상해서 주위를 살폈다.
털썩.
나예린과 서민아. 그리고 뒤에서 구경하던 죄수들까지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다.
“선배, 괜찮아요! 민아 씨, 눈 좀 떠봐요!”
이수현은 쓰러진 나예린과 서민아부터 챙겼다.
그가 그녀들을 불렀지만, 괴로워하는 소리만 낼 뿐 일어나지 못했다.
“으, 으으…….”
“싫어…….”
둘은 열병을 앓는 환자처럼 헛소리를 뱉어댔다. 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수현은 자신만 멀쩡한 상황에 이상함을 느꼈다.
‘왜 나만 멀쩡하지?’
그는 그 이유를 바로 알아챘다.
궁지에 몰린 보스가 신물을 사용해 어떤 저주를 건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용석으로 만든 방어구가 있다. 그래서 저주가 안 먹힌 거겠지.
‘나중에 용석으로 뭐 좀 만들어서 줘야겠네.’
그에겐 광산에서 얻은 큼직한 용석이 남아 있었다.
그걸로 뭐라도 만들어서 팀원들한테 주든가 해야지.
이수현은 비척대며 일어선 보스를 바라봤다.
“네 주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여기서 계속 기다렸구나. 좀 불쌍하네.”
체페쉬가 말했었다. 어둠 군주의 신물은 그녀의 애완동물이 지니고 있다고.
이 녀석은 자기 주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줄곧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잘 가라. 주인 곁으로 보내 주마.”
케르베로스는 나예린의 화살에 시력을 잃고, 몸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화르륵!
녀석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최후의 숨결을 내뿜었다.
“……!”
하지만 그에겐 화염 내성이 있다.
이수현은 불길을 헤치고서 멀쩡히 나왔다. 심지어 신물의 저주도 그에겐 안 통했다.
이제 케르베로스에겐 저항할 수단이 없었다.
푹!
이수현은 놈의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청염으로 보스를 완전히 불태웠다. 바닥에 남은 건 어둠 군주의 신물뿐이었다.
“선배, 눈 좀 떠 봐요.”
보스를 쓰러트렸지만, 쓰러진 사람들은 여전히 눈을 못 떴다.
악몽이라도 꾸듯 식은땀을 줄줄 흘려댔다.
이수현은 나예린과 서민아의 뺨을 계속 두들겼지만 깨어나지 못했다.
“…물 같은 걸 끼얹어야 하나?”
짝짝!
이수현이 그렇게 중얼댈 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와, 너 제법이네? 그 멍멍이를 혼자서 잡다니.”
“…누구냐!”
철문 밖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
이수현은 창을 꽉 쥐고서 급히 뒤돌았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고양이 귀?’
사람처럼 생겼지만, 녀석에겐 고양이 귀가 한 쌍 달려 있었다.
등 뒤로는 검은 꼬리도 살랑거렸다.
나이는 앳되어 보인다.
놈의 정체는 아리엘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묘인족이었다.
이수현은 몸을 낮추며 창술을 펼칠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녀석이 빙긋 웃으며 뭔가를 던졌다. 그걸 본 이수현의 표정이 굳었다.
“……!”
“내 주술이 깨져서 와봤더니, 혼자 복도를 뛰어다니더라고. 시끄러워서 죽였는데, 혹시 네 친구야?”
“아니, 어차피 날 배신했던 놈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어.”
“와! 우리 부족의 말을 할 줄 알잖아? 괜히 공용어로 말했네.”
녀석이 눈앞에 던진 건 죄수들의 대표, 준구였다.
녀석은 이미 죽어 있었다.
‘체페쉬가 말한 망할 고양이. 분명 저 녀석이겠지.’
“네가 이번에 새로 뽑힌 어둠 군주냐?”
“응. 그런데 넌 어떻게 악몽의 저주를 맞고도 멀쩡해?”
“악몽의 저주?”
신물의 저주로군. 이수현은 눈동자를 굴려 쓰러진 동료들을 쳐다봤다.
놈은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아는듯한 눈치였다.
“케르베로스를 해치웠는데, 저주는 왜 안 풀리지?”
“그 저주는 술사가 죽으면 더 강력해지거든. 그래봤자 악몽 좀 꾸는 거야. 뭐, 정신력이 약하면 그 악몽에 잡아먹히겠지만.”
어둠 군주는 기절한 죄수의 머리에 손을 툭 얹었다.
빡-!
그러더니 대뜸 이마를 세게 때렸다. 전문 용어로는 냥냥 펀치라고 한다.
녀석은 쓰러진 죄수들에게 심심풀이로 몇 번이나 펀치를 먹였다.
그러다 금세 질린 건지 이수현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널 여기서 만날 줄 몰랐어. 근데 너흰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어? 성 전체에 환각 마법을 걸어뒀는데…….”
“날 아나?”
“당연히 알지! 군주 살해자잖아? 너 엄청 유명해.”
녀석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고양이처럼 자기 손등을 핥았다.
이수현은 목소릴 내리깔고 협박했다.
“그걸 알면 당장 도망쳤어야지. 군주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벌써 뒈지고 싶어?”
“아, 무서워라.”
어둠 군주는 하나도 안 무섭단 눈을 하며 헤헤 웃었다.
쓸개 빠진 녀석 같으니. 이수현은 저런 부류를 가장 싫어했다.
자기 속내를 감추고 능글맞게 행동하는 놈.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순 없었다.
놈과 싸우면서 팀원들까지 챙기는 건 불가능했다.
“다른 인간들이 다칠까 봐 그래?”
“…뭐?”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내가 얘네들 공격할까 봐 걱정하는 거지?”
어둠 군주는 이수현 옆에 쓰러진 나예린과 서민아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면서 그의 정곡을 찔렀다.
“그 인간들을 감싸면서 싸울 자신이 없는 거잖아. 아니야?”
“…….”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 잔챙이 사냥엔 관심 없어. 난 너랑 제대로 싸워 보고 싶거든.”
“싸울 거면 자리를 옮기자.”
다행히 녀석은 다른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소문이 자자한 군주 살해자. 그는 얼마나 강한가.
녀석은 그게 궁금한 거겠지.
“귀찮게 그럴 필요 없어.”
어둠 군주가 그렇게 말하며 사방으로 마력을 발산했다.
그러자 방 전체가 어둠으로 가득 찼다.
주위엔 이수현과 어둠 군주 둘뿐이었다. 쓰러진 사람들은 안 보였다.
“사람들을 어디로 보냈어!”
“걱정하지 마. 걔들한텐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그럼…….”
“난 주술에 일가견이 있거든. 인간들은 아까 그 장소에 그대로 있어. 옮겨진 건 우리뿐이야.”
녀석은 자기 손톱을 핥으며 살기를 뿜었다. 이수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확인했다.
“여기서 우리가 싸워도 사람들은 괜찮다는 거지?”
“그래. 하지만 뭔가를 소환할 순 없어. 여긴 공간이 단절된 곳이니까. 그러니 네 대단한 골렘은 못 꺼낸단 소리지.”
천둥 군주를 죽였다던 골렘. 그것만 봉인하면 자신에게도 승산이 있을 터.
어둠 군주는 그렇게 판단했다.
이수현은 마검에 손을 얹고서 말했다.
“고양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뭐?”
“물이야. 목욕할 시간이다, 야옹아.”
-5권에서 계속
스펙 쌓는 헌터 4권
지은이 │ 긍정론적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33길 11. 1101호(구로동, 에이스테크노타워 8차. 11층)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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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396-0042-1 (05810)
ISBN │ 979-11-396-0038-4 (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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