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2
12. 시동을 걸다(2)
내역을 훑어보던 서하나의 눈길이 유서준으로 옮겨갔다. 그녀가 잡다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일단 3저 호황이라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당분간 활황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86아시안게임을 통해 국가 인지도가 높아졌고 아마 내년 88년 올림픽이 개최되면 더 좋아지겠죠. 적어도 내년까지는 시장이 크게 나빠질 일은 없다고 예상해요. 주식투자가에게는 기회죠.”
이 시기에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통한 대외 인지도 상승은 수출에 전반적인 긍정적인 효과를 뿌리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라는 3저 호황은 우리나라 경제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경제성장률도 10%를 넘어섰다. 당분간 이런 호황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물론 아직 경제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유서준은 경제 현상과 주가의 깊은 상관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서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매매는 합격입니다. 아니, 매우 잘했어요. 소질이 있어 보여요.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잠시 말을 중단하고 유서준의 눈치를 보았다.
유서준이 뒷말을 궁금해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잠시 투자하다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학교 투자동아리 가입을 적극 권해요. 전공이 경제 쪽이 아니시니까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더욱 필요할 거예요. 주먹구구식 투자는 운이 다하면 끝이랍니다.”
유서준은 처음 만났을 때 투자동아리 가입을 권유했던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가 권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처음 권유받았을 때와는 달리 약간은 긍정적인 마음도 일었다. 다이어리를 활용한 투자가 기본이긴 하지만 그래도 알고 투자하는 것과 모르고 투자하는 것의 차이는 클 것이다. 무엇보다 미인이 권하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내일 학교 가면 알아보도록 하죠.”
유서준은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서하나가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저녁 7시경 유서준은 구인혁과 함께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부근 생맥줏집에 도착했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저녁은 기숙사 식당에서 이미 먹은 뒤였다.
비교적 넓은 공간에 수십 개의 탁자가 펼쳐진 호프집이었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손님은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쪽 구석에 자리 잡았다.
“7시?”
유서준의 물음에 구인혁이 대답했다.
“그래, 7시에 만나기로 했어. 여기에서.”
유서준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미팅 상대가 될 만한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그로서는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미팅이라면 근사한 커피숍 같은 곳에서 만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첫 만남 장소가 맥줏집이라니?
“대체 어떻게 주선한 거야?”
유서준이 빙그레 웃음만 짓고 있는 구인혁에게 거듭 물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결국 구인혁이 털어놓았다.
“내가 여학생들이랑 연줄이 어디 있겠냐? 알다시피 나도 남고 나왔고 학과에 여학생이라고는 씨가 말랐다. 우리 과 여학생은 수도 적지만 그들은 여자가 아닌 제 3의 종족이야. 완전 선머슴이지.”
“그런데 어떻게?”
“으흐흐, 다 방법이 있지.”
구인혁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구인혁이 손을 저어 유서준의 귀를 가까이 오게 한 다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학생 기숙사에서 같은 층, 같은 호수에 쪽지를 남겼어. 미팅하자고.”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의외로 이런 직접적인 방법도 먹힌다. 사기처럼 보이지 않고 진지함이 묻어난다면.”
대개 여학생들은 그런 유치한 방법에 의심을 품고 응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의심을 지워버린 구인혁의 기발한 방법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는 더 묻지 않았다.
구인혁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봐. 시기가 중간고사 시험이 막 끝난 시점, 신입생이라면 누구나 미팅을 한 번쯤 그려볼 시기 아니냐? 서울대 남학생이야 여기저기에서 미팅 제의도 많이 들어오지만, 서울대 여학생은 그런 기회가 의외로 거의 없어. 그런 시점에 미팅 제의가 들어오면 관심을 가지겠지?”
유서준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구인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하하, 머리를 굴려라. 그게 지금이라서 가능한 거다. 그런 환경에서 굳이 미팅이라고 부담스럽게 굴지 않고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만남을 유도하면 다 먹히게 되어 있어. 같은 학교라는 신원 보장만 확실하게 해준다면.”
유서준은 구인혁이 의외의 분야에서도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여간 엉뚱한 구석이 많은 녀석이었다.
유서준은 시계를 확인했다.
7시 15분. 이미 15분이나 시간이 흘러있었다.
“아무래도 네 작전은 망한 것 같다.”
“아냐, 여자들은 원래 조금 늦게 나오지.”
구인혁이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 있을 때 입구에 여학생 둘이 나타났다.
두 여학생은 잠시 실내를 둘러보더니 곧바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유서준은 두 여학생이 그들의 미팅 상대란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구인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학생에게 앉기를 권했다.
약간의 호기심과 약간의 어색함을 드러내며 두 여학생이 맞은편에 앉았다.
“자, 인사부터 하죠. 전 물리학과 1학년 구인혁입니다.”
구인혁이 정중하게 인사를 시작했다.
나타난 두 여학생 역시 예상대로 기숙사 룸메이트였다. 한 여학생은 키가 작고 동글동글한 이미지에 귀엽게 생겼다. 그녀는 영문학과 1학년이고 이름은 이지은이라 했다. 고향은 구인혁과 같은 부산.
다른 한 여학생은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이었다. 낮에 보았던 증권사 직원 서하나 만큼은 아니었지만 팔도 다리도 길쭉길쭉 한 것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는 대전 출신에 김현아란 이름을 가진 경제학과 1학년생이었다.
유서준의 마음과 달리 그녀는 다소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하긴 산적 같은 그가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겠지.
네 사람은 돌아가며 인사를 한 다음 손쉽게 어울렸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같은 부류인지라 관심사도 비슷해서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두 여학생은 난데없는 쪽지 미팅 제안에 처음에는 장난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추가 제안과 먼저 호실을 밝힌 진지함 덕분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물론 김현아네 학과 남학생 하나가 유서준의 옆방에 살고 있었기에 사전 조사를 할 수 있었던 점도 도움이 되었다.
먼 곳에서 올라와 아직 아는 사람이라고는 학과와 동문 친구 정도가 전부인 상태에서 두 여학생은 호기심을 가졌다. 굳이 짝을 짓지 않고 같은 기숙사 호수라는 인연으로 맺어진 자연스러운 만남은 부담이 덜했다. 무엇보다 중간고사 후 엄습한 약간의 무료함을 달랠 좋은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 구인혁의 작전은 성공이었다.
문과생 셋에 이과생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인혁은 이과생답지 않게 잘 어울렸다. 그의 엉뚱한 성격과 유머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곧바로 서로 간에 말을 놓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너네 오늘 마음껏 마셔라. 이것 전부 서준이가 사기로 했다.”
구인혁이 생맥주 500을 하나 더 시키며 말했다.
김현아가 유서준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서준이가 재벌집 아들인가 보지?”
유서준이 손을 내저었다.
“아냐, 난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야. 고향도 강원도라고.”
“겉모습만 보면 산적 아들이지. 그것도 태백산맥!”
구인혁의 말에 모두 폭소를 터트렸다. 구인혁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서준이가 부자다. 요즈음 주식에서 많이 벌어. 우리처럼 집에서 간신히 용돈 타 쓰는 가난뱅이와는 차원이 달라.”
주식이란 말이 나오자 경제학과를 다니는 김현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주식도 해?”
“응.”
“신기하다. 경제학과 다니는 나도 아직 주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는데.”
김현아가 유서준을 신기한 눈초리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유서준을 그리 의식 않던 그녀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다.
유서준은 괜히 어색해져 미소만 지었다.
“수익은 괜찮아?”
김현아의 질문에 유서준은 금방 대답할 수 없었다. 구인혁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 녀석 요즘 수익도 좋아. 어제도 몇만 원 벌었어. 이 맥주도 다 이 녀석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라고.”
구인혁이 맥주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김현아 역시 맥주잔을 들었다.
“잘하나 보네. 그럼 네가 쏘는 거지?”
쨍.
네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마치 의기투합한 사람처럼 서로 분위기가 잘 맞았다.
“주식 공부는 좀 해봤어? 우리나라 주식판은 너무 투기적이라 공부가 필요 없다고 하지만.”
김현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역시 남녀 간의 만남에서 공통적인 관심사가 존재하는 것만큼 큰 응원은 없다.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다가 요즘에는 관련 서적도 보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점차 경제 전반적인 공부로 옮겨가지.”
김현아가 유서준의 말에 호응해주었다.
유서준이 그녀에게 물었다.
“너도 주식 매매할 생각이 있어?”
김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아니지만 오래지 않아 하게 될 것 같아. 학과 공부를 위해서도 경험해보는 게 좋으니까.”
두 사람은 주식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김현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주식투자 동아리에는 가입 안 했어?”
유서준은 오늘 낮에 서하나로부터도 투자동아리 가입을 권유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자꾸 권유받고 보니 그 동아리에 들어가면 뭔가 있을 것 같고 자신과 상성도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학교에는 어떤 투자동아리가 있지?”
“서울대 주식투자연구회라고 있어. 원래 경제학과 학과 내 모임이었다가 작년에 전체 동아리로 바뀌었어. 동아리 방은 학생회관…….”
김현아가 동아리에 대해 한참 설명했다.
유서준이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설마?”
“딩동! 바로 나도 가입되어 있어. 내가 일학년 부학년장인데 너도 가입해라. 환영해.”
유서준은 주식투자연구회와 뭔가 인연이 있는 것 같았다. 혼자서 매매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 분명히 많은 공부가 될 것이다. 물론 다이어리를 이용한 그의 매매이기에 수익은 차이가 없겠지만 지식 면에서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또, 동아리를 이용한 인맥 역시 훗날 나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경제 관련 전공이 아닌 그의 약점을 많이 보완해 줄 수 있는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럴까……?”
다소 미적대는 그의 표정에 김현아가 곧바로 결정을 굳혀주었다.
“내일 바로 가입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어.”
얼떨결에 유서준은 약속하고 말았다. 물론 그에게 다른 사심도 존재했다. 예쁜 김현아랑 계속해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털털한 성격의 김현아가 괜찮았다. 그냥 오늘 미팅이 전부라면 앞으로 만날 일이 없지 않을까.
김현아가 그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유서준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모습이 예뻐 보였다. 하긴 원래부터 마음에 쏙 드는 미인이긴 했다.
두 사람이 서로 죽이 맞는 사이에 구인혁과 다른 여학생 이지은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학생운동과 시국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 무렵 대학 신입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보는 그런 문제였다. 저런 내용에 구인혁이 장단을 맞출 수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맥주를 마시면서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는 시간은 즐거웠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밤 열 시가 훌쩍 넘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숙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술값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처음 예고된 대로 술값은 유서준이 냈다.
맥줏집 밖으로 나가서 네 사람이 모여 있을 때 부근을 지나던 한 남학생 무리와 마주쳤다.
남학생 하나가 그들을 향해 아는 채 해왔다.
“현아야, 여기 어쩐 일이야?”
유서준을 비롯한 모두의 눈길이 그 남학생을 향했다.
훤칠한 키의 멋들어진 남학생 하나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잘 생긴 외모에 뿔테 안경은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다시 보니 옷차림 역시 부티 나게 입었다.
김현아가 상대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 강수야, 넌 여기 웬일이니? 난 친구와 만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이야.”
강수라고 불린 남학생이 묘한 눈초리로 현아 옆에 선 일행을 훑어보았다.
유서준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상대방에게서 약간의 경멸을 느꼈다고 할까. 상대의 표정은 분명 호의적이지 않았다.
강수라 불린 남학생이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난 모임이 있어서 말이지. 너도 남자와 어울리는구나. 의외인데?”
유서준은 김현아 옆으로 가서 속삭이듯 물었다.
“누구야?”
김현아가 정색하며 소개했다.
“우리 과 과대표야. 이름은 박강수. 거기에다 주식투자연구회 신입생 학년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해.”
박강수는 김현아와 같은 경제학과 일학년 학생이었다.
김현아가 유서준을 박강수에게 소개하며 말했다.
“여긴 서준이. 아마 내일 우리 동아리에 가입할 거야. 잘 대해줬으면 좋겠어. 내 친구니까.”
친구라는 소개에 박강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잠시 유서준을 묘한 눈초리로 노려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박강수라 한다. 어느 학과지?
박강수! 유서준은 그 이름이 미래에서 온 LTCM 명단에 들어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경제학과라면 전공도 정확히 맞아 들어간다. 이 사람이 훗날 우리나라를 제 2의 외환위기로 빠트린 장본인이었던가.
유서준 역시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체구가 큰 유서준인지라 굳이 꿀릴 것은 없었지만 확실히 외모에서 박강수와 비교되었다. 순박한 시골 청년과 샤프한 도시남의 차이랄까.
“철학과.”
박강수의 입가에 피식하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상대를 얕잡아보는 표정이 역력했다.
순간 유서준은 그의 내심을 정확히 파악했다. 일반 사람들이 유명한 대학과 삼류대학을 차별하는 것처럼 박강수는 서울대 내에서도 커트라인이 높은 인기학과와 아닌 학과에 차별을 두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경제와 관련 없는 학과 학생이 주식 동아리에 참여하는 것이 가소롭게 보였거나.
상대의 내심을 어렴풋하게 눈치챈 유서준은 가벼운 미소로 받아넘겼다. 이렇게 유치한 놈과 굳이 실랑이를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박강수가 비웃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내일 꼭 가입해라.”
다소 적의가 실린 표정에 모두가 움찔하는 사이 박강수가 김현아에게 손을 흔들며 저쪽으로 사라졌다. 그는 떠나면서도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현아야, 너도 아무나 하고 어울리지 말고 얼른 기숙사 들어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