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05
215. 회유(2)
투자수행 인공지능 공동연구.
메리웨더의 노림수는 인공지능 개발보다 신선영을 노린 것이었다.
반면 신선영은 다른 생각 때문에 고심했다.
두 거대 맹수가 연합해서 공룡 하나가 되면? 커다란 철장 내부에 맹수의 범주를 벗어난 거대한 공룡 한 마리와 여러 마리의 토끼. 과연 그런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한 마리의 공룡은 오래지 않아 굶어 죽지 않을까.
토끼가 사라지는 순간 LTCM과 SJ의 혈투가 벌어질 것이다. 이런 모양새는 좋지 않다. 설사 SJ가 이긴다고 할지라도.
신선영은 문득 다른 의문점에도 생각이 미쳤다.
외부에서 보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LTCM의 인공지능 거래가 SJ보다 우위에 서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녀 역시 그렇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LTCM의 인공지능 투자 움직임을 보고 SJ도 시작했으니까. 앞선 기술을 가진 LTCM이 왜 협력 개발을 요구해 오는 것일까?
뭔가 이상했다.
“일단 제안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리 선뜻 내키지는 않네요.”
신선영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메리웨더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까지이건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메리웨더가 칵테일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다른 협력도 있습니다. 저희가 최근에 한 지역에서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SJ에서 방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서요.”
그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타인이 듣는 것이 싫다는 의미였다.
신선영은 이번에 나온 내용은 더 직접적인 협력임을 직감했다.
메리웨더가 잔잔한 미소를 보냈다.
“앞으로 저희 LTCM에서는 남미를 칠 겁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을 말입니다. SJ에서 방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신선영은 순간 자신이 들은 내용을 의심했다.
국가를 친다니? 물론 군대를 동원해서 전쟁을 벌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환율을 비롯한 경제 전쟁을 의미한다. 미국 내 5대 투자은행에 들어가면 웬만한 국가보다 경제면에서 더 영향력과 힘이 세다.
역사적으로도 개인 기업과 국가가 경제면에서 전쟁을 벌인 일은 많았다.
헤지펀드로 악명 높은 조지 소로스 같은 경우에 영국을 무릎 꿇린 사나이로 주가를 높인 적이 있지 않았던가.
특히 남미는 경제적으로 취약했다. 일차산업을 제외한 제조업에서 세계적인 기업의 토대가 빈약했다. 거의 일이십 년마다 외채를 갚지 못하겠다는 모라토리엄이 선언된다.
겉보기에 모리토리엄을 선언하면 그 국가에 외채를 빌려준 은행이 손해를 볼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해당 국가는 모라토리엄을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유자산을 팔아치우게 되고 이 과정에서 투자자는 이익을 본다.
모라토리엄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집단과 손실을 보는 집단이 명확하게 갈리는 것이다.
신선영은 LTCM의 의도를 눈치챘다.
아직 SJ 투자은행으로서는 생각해보지도 않은 영역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외환위기를 겪어본 그녀였기에 그런 위기가 발생하면 해당 국가에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서준도 마찬가지. 따라서 SJ 투자은행은 본능적으로 이런 식의 경제 전쟁을 싫어한다.
메리웨더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신선영은 그 표정에서 그의 자만심과 잔인한 야수의 기질을 얼핏 보았다.
절로 그녀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SJ에서 방관해주시길 기대합니다. 남미는 양쪽이 이익을 취할 만큼 크지 않으니까요.”
메리웨더가 담담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어차피 저희는 그런 방면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신선영이 머릿속으로 남미와 관련된 채권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며 대답했다.
그녀의 머리를 들여다본 것일까. 메리웨더가 곧바로 말했다.
“만일 남미 쪽 채권을 갖고 있다면 조만간 처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공격을 시작하면 채권값이 폭락할 것이니까요.”
“알았어요.”
신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남미는 SJ에 그리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메리웨더가 칵테일을 완전히 비운 다음 정중히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공지능 공동연구는 깊이 고민해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신선영은 앉은 채 답례를 했다.
메리웨더가 사라진 후 신선영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과거 1990년대의 LTCM을 떠올렸다. LTCM이 파산한 대외적인 이유에 아시아 외환위기와 러시아 모라토리엄이 존재했다.
순간 그녀는 메리웨더의 행보를 눈치챘다.
그의 최종 목표는 미국 투자은행 랭킹 1위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를 제패하려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과거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국가의 모라토리엄에 의해 파산한 LTCM이 모라토리엄을 일으켜 되갚으려는 것이다.
그 첫 제물이 남미였다. 두 번째 제물이 어디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아시아도 제물로 들어갈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늦은 밤.
거리는 어둠에 갇히고 인적이 드물어질 시각, SJ 증권 본사가 들어선 높은 건물에는 몇 군데 창에서 환한 불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서하나는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유세라의 유학 준비에 자신도 미국으로 건너가고 싶었다. 실제 처음 계획은 그러했다.
문제는 출발 직전이었다. 이래저래 복잡한 일이 벌어지면서 그녀는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결국 세라와 유서준 둘만 보냈다.
그 두 사람이면 불안했겠지만 미국에서 심포지엄을 마친 김현아가 합류하기로 했다니 안심이었다. 김현아는 예일대가 있는 그 동네에서 거의 10년을 살았던 경험자다. 그 누구보다 많은 도움이 될 사람이다. 거기에 신선영까지 있으니 굳이 그녀가 갈 필요는 없었다.
둘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허전했다.
가끔 자식을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의 외로움과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단 며칠이지만 기러기 엄마로서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참 예쁘게 컸어.”
그녀는 딸을 떠올렸다.
항상 외모로 타인의 주목을 받았던 그녀가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유세라의 외모는 범상치 않았다. 젊은 시절의 그녀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산적을 닮은 유서준을 일부 닮았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유세라가 아버지를 닮은 부분은 키가 유일했다.
덕분에 유세라의 키는 그녀보다 더 커서 훨씬 늘씬했다.
성격은 둘을 반반 닮았다고 할까. 그녀의 여성스러운 면모와 유서준의 부드러운 감성이 잘 융합됐다. 백번 양보해도 정말 바르게 자랐다.
이미 재계에서는 그녀를 며느릿감으로 눈독 들이는 곳이 많았다. 자산 규모가 10조를 넘어가는 재벌 집안의 외동딸이었으니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
“오늘은 돌아오려나?”
서하나는 유서준을 떠올리며 책상 위를 정리했다. 이제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책상을 말끔히 정리하고 창가의 블라인드를 치려 할 때 문이 열렸다.
“다녀왔어.”
유서준이었다.
서하나는 함께 가지 못했던 서운함이 싹 날아갔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이렇게 놀라게 하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유서준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서하나도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웃은 다음 유서준이 경과를 보고했다.
“집을 뉴욕 근교에서 구했는데…….”
“아, 선영이에게 이미 연락받았어. 세라에게서도 전화 왔었고.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
보고할 거리가 없어진 유서준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잘 다녀왔냐는 소리도 없네.”
“아하, 잘 다녀오셨나요?”
서하나가 농담 섞인 표정으로 다시 인사했다.
“그럼 그럼.”
유서준이 그제야 그녀에게 다가가 살짝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는 이제 막 치워진 책상 위를 보며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오늘 조금 바빴어. 연기금 운용 때문에.”
“연기금이 왜?”
“금감원이 무슨 생각인지 중소형 증권사 몇 곳에 연기금 운용을 대거 일임하겠다고 하더라. 그 바람에 대형 증권사에서 난리도 아냐.”
어차피 SJ 증권은 연기금 운용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약간 떠맡긴 했지만 단지 명목상 발만 담근 것이었다.
금감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런 것이긴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증권사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연기금 운용은 홍보 면에서도 나쁘지 않았고 기본 운영비를 빼내기에도 유리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금감원 방침이 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유서준은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SJ 증권이나 투신에 배당해주면 다행이고 배당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지금 현재 SJ 증권 입장에서 연기금은 큰 고객이 아니었다.
유서준이 한쪽 팔을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물었다.
“그동안 긴장하지 않았어?”
“왜?”
“무려 첫사랑이랑 같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는데.”
유서준의 말은 김현아랑 함께 귀국한 것을 의미했다.
서하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게 한두 번인가?”
“음, 너무 긴장감이 없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나도 나가보면 붙는 여자들 많아.”
유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하나가 킥킥거리며 그의 요모조모를 훑었다.
“흐음, 그렇게 말하는 것 보니 이번 여행에선 둘이 뭔가 있었나 보네?”
“당연. 무려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잤었는데…….”
“비행기 안에서?”
“들켰당.”
서하나의 안면에 웃음이 가득 드리워졌다. 뭔가 재미있는 것을 본 어린이 표정이었다.
“그래도 무려 손까지 잡고 잤다.”
유서준이 툴툴거리며 서하나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으이그, 좋았겠네. 첫사랑이랑 손잡아서.”
그녀는 유서준이 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금방 그의 넓은 품 안에 갇혔다.
처음부터 김현아라면 어쩐지 한발 물러서게 되는 서하나였다. 유서준을 그녀에게서 뺐었다는 묘한 미안함이 존재했었다. 마지막 다이어리를 본 다음부터는 더욱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적절한 선을 유지해주는 유서준과 김현아가 고마웠다.
그녀의 몸이 휘청하더니 유서준의 품에 안겨 그대로 책상 위로 넘어갔다.
등 뒤로는 딱딱한 책상 위의 유리판의 느껴지고 눈앞에는 웃음을 지으며 내려다보는 유서준의 얼굴이 보였다. 어느새 편안하게 책상 위에 눕혀져 있었다.
“손잡으니 하나 씨 얼굴이 떠오르더라.”
유서준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치마 속으로 쑥 들어오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서하나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유서준이 미소를 머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부터 세라가 없다고 생각하니 신혼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있지?”
자식과 떨어지면서 느끼는 감정이 남편과 아내가 다른 모양이었다.
치마 속 깊숙이 들어온 손 덕분에 치맛단이 허벅지 위로 말려 올라간 것을 깨달은 서하나가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서준 씨,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씨씨티비 있단 말이야.”
“사장실에는 없는 것 다 알아.”
유서준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충 치마를 걷어놓고는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서하나가 손을 붙잡으며 힘을 썼다.
“아이 참, 직원들 들어올지도 몰라.”
유서준이 부지런하게 손을 놀리며 대답했다.
“직원이라곤 5층 기획부에 두 사람 딱 남아 있던데 뭘. 여긴 안 올라올 거야. 설사 이 장면을 본다 해도 다정한 부부 사이인데…….”
“아흑, 사장 체면에 이게 뭐야.”
마지 못해 그를 끌어당겨 키스한 서하나가 다시 그를 밀었다.
“이러지 말고 집으로 가. 집에 가서.”
아쉬움에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고 눈을 맞추던 유서준이 반색했다.
“아, 우리 오랜만에 기분 내 볼까?”
“어떻게?”
“신혼 때처럼. 결혼한 그 날처럼.”
무슨 의미인지 눈만 굴리는 그녀에게 유서준이 은근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서하나는 결혼식 날을 떠올렸다. 이래저래 친지와 친구에게 인사하고 파김치가 되어 그날 밤 어디로 갔었더라. 신라호텔에서 묵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어둠 속 창가에서 남산타워를 보며…….
서하나의 안면이 붉게 물들었다.
“또 창가에 세우려고?”
“어떻게 알았어?”
유서준이 서하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신라호텔 그 룸을 찾아보자.”
서하나는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그녀에게 호기심을 잃지 않는 그런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