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322)
······ 현의 뒤에서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는 두 여신의 모습이, 지금 보였으니까.
사신교가 믿고 따르는 정통과 그들의 신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성스러운 두 여신.
‘아아······.’
두 여신을 바라보며 라이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앤드류 사제.
그는 복수자가 되었으나, 다행히 아직도 여신의 품에 있었다.
그 사실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 정말 그분께서······.’
현.
그를 마주한 순간, 성력이 다시금 샘솟았으니까.
정확히는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힌 순간이다.
허나 여전히 의아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일 것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면죄부가 다시 발급된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왜 우리를 모이라고 한 거지?”
“란돌프 님께서 이곳에 계신건가?”
넓은 방.
그 안에 세렝게티와 앤드류 사제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세아 성녀, 이자벨라, 허드슨, 발테, 아이작.
심지어 칼날용신 하나까지.
란돌프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모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모임의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특히 발테와 아이작은 뒤늦게 도착했으니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란돌프가 이곳에 있겠거니 할 뿐.
끼이익.
곧이어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문을 닫고 들어서며 그들의 앞에 섰다.
허나 란돌프가 아니다.
“······.”
“······!!!”
무언가를 직감한 듯한 이자벨라,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허드슨.
반응은 모두 가지각색이었으나.
그 중심에서, 그가 말했다.
“내가 란돌프다.”
그리곤 무언가 설명이 부족한 듯 첨언했다.
“박현명이며, 빌헬름이기도 하지.”
우리들은 ‘플레이어’라고 하죠.
오랜 시간 고민했다.
밝힐지, 말지를.
하지만 언젠가는 밝혀야만 했던 진실이다.
영원한 거짓은 없으며, 그동안 나를 믿고 따라준 이들에게 계속해서 거짓을 고하는 건 신뢰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적어도 이곳에 모인 이들은 알 권리가 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이자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걱정을 모르는 게 아니다.
실제로 나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건 이자벨라였다.
신의 섬에서 그녀는 내 기억을 엿보았으니.
나 역시도 그녀의 기억을 엿보았고, ‘신병’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됐다.
하지만 이자벨라도 나의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
‘란돌프와 하나가 되며 부작용은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존재력이 흐릿해지는 페널티가 사라졌다는 것.
더 이상 란돌프와 나는 다른 존재가 아닌 탓이다.
하여, 나는 지금 한 치의 가감없이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앞으로의 일들을 대처할 수 있을 터이니.
판게니아 대륙에 일어난 지각변동.
그리고 ‘잊힌 명예의 던전’을 비롯한 또 다른 시련들.
나 혼자서 그것들 모두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제부터는 더욱 결집해야만 했다.
믿을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결속하는 것만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할 가장 확실한 수였으므로.
“······ 박현명?”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아이작이다.
뇌절(雷絶)의 아이작!
수많은 범죄행위로 말미암아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졌던 캐릭터.
운영자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고자 온갖 해괴한 짓을 다했으니, 자신을 멋대로 움직인 나에 대한 강렬한 원망을 갖고 있을 것이다.
또한, 아이작은 나의 이름을, 박현명의 이름을 안다.
이자벨라는 초월할 때 나의 얼굴을 보았고, 아이작은 내 이름을 들었으니까.
“죄인, 박현명?”
“진정하세요, 아이작. 우리가 ‘신병’에 걸린 건 모두 스스로의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이자벨라가 나와 아이작의 사이를 급히 끼어들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표정은 여전히 펴질 줄을 몰랐다.
“내가 선택했다고? 무슨 선택을 했다는 거냐?”
“그, 그건······.”
하지만 이자벨라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이작. 너는 광산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 하여, 내가 말했다.
“이름없는 광산도시. 강제로 납치한 노예들이 하루에도 수십씩 죽어나가는 곳. 너는 그곳에서 내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
아이작의 두 눈이 흔들렸다.
광산도시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
하지만 나는 더욱 자세한 일들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내가 직접 플레이 했었으니까.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파랑새, ‘운영자’와 거래를 했겠지. 너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으로부터 나를 불러내어 삶에 도전하는 것. 너는 도전을 선택한 거다.”
“그게 ‘신병’이라고······?”
“대신 너는 관련된 기억을 잃었을 게다.”
“그러니까··· 나를 대신해서 움직였다? 광산에서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음. 솔직히 쉽진 않았다. 수많은 감시자들뿐만 아니라 같은 노예라도 서로 고발하는 게 일상인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탈출만 하려고 했다만.”
“······.”
“마음이 바뀌었다. 광산을 매몰시키고, 노예들을 탈출시켰지. 이후 관련자들을 좇아 수많은 범죄행위를 일삼았다. 네가 수배자가 된 건 온전히 나의 탓이다.”
아이작이 크람델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동시에 아이작의 낯빛이 시시각각 바뀌며 이내 하얗게 질려버렸다.
“··· 최근 들어, 꿈을 자주 꾼다. 광산도시에서 잊어버린 기억이 조금씩 꿈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더군. 그냥··· 개꿈인 줄 알았는데······.”
믿기지 않는 듯한 눈초리.
하지만 사실이다.
나와 관계된 캐릭터들 모두가 현재 아이작과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을 것이었다.
“모두 사실이라면······ 왜 여태껏 숨긴 거지?”
“나도 몰랐으니까.”
“······ 뭐?”
“나도 이 세계가 실존하는 세계일 줄 몰랐으니까.”
잔인하지만, 때로는 그럼에도 진실을 말해야할 때가 있다.
숨긴다면 계속해서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일들이 벌어질 터.
지금부터 내가 말할 내용은 그런 것이다.
잠겨있던 빗장을, 열 때가 됐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말할 수 없는 진실.
“내게 이 세계는 그저 게임일 뿐이었다.”
나는 게임을 했고, 너희들은 게임 속 캐릭터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
이야기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성각자가 아니었다는 것.
속인 채로 접근하여 이용했다는 것.
수많은 캐릭터를 플레이했으며, 빌헬름조차도 캐릭터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빌헬름이 죽자 란돌프에 빙의했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
“······.”
모두가 입을 닫았다.
충격의 향연.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렇게도 들린다.
속인채 이용해왔다고.
아이작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나는 이용당했나?’
이용한다는 건 자신으로 인해 득을 봤다는 뜻이다.
하지만 란돌프는 아이작으로 인해 득을 본 게 거의 없다.
도리어 구원해주고, 악행을 지워줬으며, 보금자리까지 주었다.
동료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어디서도 느껴본 적 없는 온기를 맛보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속여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동안 쌓인 유대가, 관계가 진정제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 아니, 아니다.
자리만 박차고 나갔다면 다행이다.
‘죽여버리려고 했다. 목을 자르려고 했다. 나를 움직인 놈, 박현명의 생명을 빼앗을 생각밖에 없었다.’
초월한 뒤 ‘목 잘린 자의 별’을 먹어, 박현명을 보면 바로 목을 자르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 당사자가 눈앞에 있다.
그런데 박현명이 란돌프라니.
동시에 빌헬름이라니······.
그럼 이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하지?
너무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자벨라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으니까.
박현명을 바라보는 이자벨라의 눈.
그녀의 눈은 틀림없이 온정으로 가득했으므로.
“저도 마찬가지로 ‘죄인’입니다. 우리들은 ‘플레이어’라고 하죠.”
그때였다.
돌연 듯, 허드슨이 스스로의 정체를 밝힌 것이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며 허드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허드슨은 눈을 꾹 감고선 말했다.
“미안해. 세렝게티. 나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야.”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허드슨.”
“내 이름은 올리버야. 이곳 판게니아가 아닌 지구에서 온. 이 모습도, 얼굴도, 모두 진짜 내가 아니야.”
“······.”
“하지만 믿어줘. 너를 사랑한 감정은 진짜라는 걸. 내게는 너밖에 없다는걸.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는 걸.”
“······.”
세렝게티는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록 결혼식장에서 갑작스럽게 히드라곤이 출현한 탓에 미루어졌지만, 결혼 직전까지 갔던 사이 아닌가.
그런데 허드슨이 죄인이라고?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서로 사랑을 말했던 모습도 진짜가 아니라니.
“······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거야?”
“아니야. 그런게 아니야. 단지··· 핑계로밖에 안 들리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 이곳에서 우리의 존재는 말 그대로 ‘죄인’이었으니까. 침략자로 취급받았으니까.”
“······.”
“저 세계에서 나는 죽으려고 했어. 병약하고,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한 명 없었거든. 이 세계에서 너를 만나 너무 행복했어. 올리버가 아닌 허드슨이 내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진즉에 밝히려고 했지만,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숨길 순 없었다.
지금 밝히지 않으면 영원히 밝힐 수 없을 터.
“나는 너를 만나서 삶을 갈구했어. 살고 싶었어. 박현명 님은······ 란돌프 님께선, 그런 나를 구원해주셨지. 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켠에선 불안했어. 이 사실을 계속해서 숨기는 게 맞는지. 사실을 말하면 네가 날 떠날까 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어.”
“그래도 말했어야지.”
“말했어. 얼렁뚱땅 넘어갔지만··· 미안해.”
“······ 생각해보니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세렝게티가 입술을 깨물었다.
돌이켜보면 허드슨의 이상한 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결혼식 전, 허드슨은 분명히 세렝게티에게 말했다.
-실은 말할 게 있어.
-말? 무슨 말?
-나 사실······.
-사실?
-나, 죄인이야.
-내 마음을 뺏어간 죄인?
-아니······ 그게 아니고······.
-걱정 마. 식은 일주일 뒤에 진행될 거니까. 내가 다 준비해놨으니 허드슨은 따라만 와.
-잠깐. 일주일이라고······?
······ 죄인이라는 말을 틀림없이 들었다.
허나 결혼식의 준비를 핑계로 못 들은 척했다.
사실 세렝게티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아니길 바라며 애써 외면한 것이었다.
란돌프도, 허드슨도.
둘 다 죄인이라는 말.
크게 인식은 없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도······.”
“······ 응?”
생각을 정리한 세렝게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드슨이 고개를 갸웃하자, 세렝게티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도 네가 내 첫사랑이 아니야, 허드슨.”
“······ 어? 뭐라고?”
“내가 ‘원탁의 기사’에 들어간 결정적인 이유가 뭔 줄 알아?”
“······ 뭔데?”
“어렸을 때 본 부단장님이 너무 멋있었거든.”
“······ 내가 첫사랑이라며.”
“미안. 거짓말이었어.”
후우!
세렝게티가 시원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저··· 그럼 저는 왜 수련자의 산에 있었던 겁니까?”
발테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말했다.
발테는 수련자의 산의 혼돈 영역에서 끊임없이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가 그곳으로 향하게 됐는지 기억이 없다.
“외기 훈련이 너무 재미가 없어서 수련자의 산에 방치해 두었다.”
“······ 예?”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제약을 최대치로 했더니 아무것도 안 보이더군. 그 상태에서 창만 휘두르는 게 너무 재미가 없어서······ 설마 그렇다고 2년 넘게 그곳에서 창만 휘두르고 있을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아니, 미친. 제가 무슨 심심풀이 땅콩입니까?”
발테가 자동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심약한 그라도 한 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주하기 싫은 진실을 마주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진정으로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엄청나게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 전에 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죽을 상황에 처해있었을 텐데.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요.”
“······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기억이 안 난다.”
“예?”
“비슷한 상황에 너무 많이 부딪혀서······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잘 기억이 나지 않아.”
“······.”
“확실한 건 대부분은 괴물한테 쫓기거나, 어딘가에 갇힌 채 시작된다. 내가 해야할 일은 오로지 ‘생존’뿐이지.”
“그럼 몇 명이나 ‘생존’ 시키셨습니까?”
“글쎄. 대략 천 번 진행했고, 그중 99퍼센트는 ‘생존’시켰다.”
“컥!”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단말마.
발테가 내뱉은 소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