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372)
포식자.
5만 시간이 넘는 분량의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500명이 지닌 전체 조각의 보유량과 맞먹는 양이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점은 ‘온전한 황금률’도 여섯 개나 있다는 것이었다.
‘온전한 황금률을 조각으로 환산하면 일만 시간의 값어치는 충분히 있으니.’
때에 따라 1만 시간의 가치조차 넘어설지도 모른다.
온전한 황금률은 조각으로 치환할 수 있지만, 조각만으로는 결코 ‘온전한 황금률’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내가 ‘란돌프’로 변신하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아무리 많은 조각이 소모되어도 내게는 별 타격이 없다.
반면 나를 제외한 전원의 상황은 급박했다.
물론 그라시아가 3천시간의 분량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땐 저 수량으로도 여유롭진 못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보유한 조각을 나눌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조각을 빌려줌으로서 얻는 이득은 계약만이 아니지.’
나는 분명히 ‘계약’을 한다고 말했다.
절대로 거절할 수 없도록 ‘겨울(최후의 황혼)’을 이용할 생각이다.
그로 인해 조각을 빌려간 이들은 내게 상당부분 종속될 터.
시련을 성공적으로 돌파하기 위해선 이 과정이 필수다.
블랙 돔, ‘심연의 밑바닥’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련은 기본적으로 단체전이니까.
‘신의 섬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시련이다.’
신의 섬에서 마주한 심연의 주인들과 지고의 존재들.
만약 이자벨라가 스스로의 희생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과적으로 패배했을 것이다.
한데, 이곳에서 진행되는 시련은 단체가 전제였다.
우리 인류만이 아니라 심연의 주인들도 자신의 추종자들을 대거 끌고왔다.
말인 즉슨, 우리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전쟁은 결코 혼자 수행할 수 없다.
또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편’을 보다 확실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나를 대신해줄, 내 의지대로 움직여줄 손발들.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는 사람들!
‘머지않아 조각 때문에 내부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 적기다.
아직은 아무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조각을 얻는 방법은 ‘세계수 커뮤니티’만 있는 게 아니니까.
언급하진 않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킬(Kill).
상대 각성자를 죽이고 빼앗는 것.
아무도 자신을 돕지 않고, 모든 조각의 소모가 확실시 된다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이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도록 숨구멍을 열어줄 생각이다.
고작 10시간의 조각으로.
계약을 통해, 나의 편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게다가 중요한 점이 또 있다.
‘세계수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닉네임 알 수 있다는 것.’
공략글을 올리고, 내가 그 공략글을 구매해야만 조각이 부여된다.
공략글의 구매자는 신상을 알 수 없지만, 판매자는 필연적으로 닉네임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으니.
나는 상대를 알고, 상대는 나를 모른다.
상대에게 내 존재감을 키울수록 배신은 요원해지는 법.
강력한 종속관계로 말미암아 시련을 돌파하리라.
또한,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궁금한 건 이아린의 닉네임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곤 말했다.
“계약을 할 사람은 한 명씩 따라오도록. ‘세계수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을 보장해주마.”
“아······!”
“그, 그럼 나부터!”
마지막 저항을 깨주었다.
익명을 빌린 커뮤니티 활동.
수많은 이유로 자신이 사용하는 닉네임을 숨기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그렇게 따로 불러내어 다섯명에게 조각을 빌려줬을 때였다.
“······ 나도······ 부탁한다······.”
최강남.
녀석이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하긴 고작 40시간의 조각만을 보유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계약을 진행하기 전에 먼저 묻겠다. 세계수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 뭐지?”
이미 앞서 다섯명이 계약을 진행했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이 증명되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그, 그건······ 꼭 말해야 되나?”
최강남이 머뭇거렸다.
꼼지락대며, 두 볼은 붉게 상기된 상태였다.
“알아야 내가 공략글을 구매할 것 아닌가.”
“비밀은······ 비밀은 반드시 지켜주겠지?”
“걱정마라. 난 너처럼 쪼잔한 사람이 아니다.”
“이아린 부연합장님에게만은 꼭······!”
이토록 뜸을 들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체 세계수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 뭐길래?
“말하기 싫다면 안해도 된다. 나도 안 빌려주면 그만이니.”
“마, 말할게. 말한다고. 내 닉네임은······.”
최강남이 더듬대며 자신의 닉네임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 닉네임을 들은 나는.
“······.”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11명에게 ‘겨울(최후의 황혼)’에 의한 계약이 새겨졌습니다.》
《이는 모든 계약보다 상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내용은 한도 내에서 ‘부탁’을 한 차례 들어주는 것.》
《계약이 중첩될수록 ‘부탁’의 한도는 커집니다.》
《계약을 거절할시 전신이 얼어버립니다.》
‘겨울’은 모든 하위 계약을 베어버리고, 새로이 새겨넣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 효력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계약이란 무릇 상대의 동의 하에 이루어지기 마련.
10시간의 조각으로 죽음을 불사할 사람은 없다.
다만, 계약이 ‘중첩’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새로이 계약을 맺을 때마다 ‘중첩’된다는 조항을 달았다.
몇 번씩 조각을 빌려간 사람은 끝내 죽음조차 불사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
시선을 돌려, 고개를 숙인 최강남을 바라봤다.
계약 이후 최강남은 고개를 들질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최강남이 세계수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 상상이상으로 저질이었기 때문이다.
‘······ 팬티마스크라니.’
듣고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닉네임을 공개하면 자타공인 변태로 낙인이 찍혀도 할 말이 없을 정도.
굳이 알고 싶진 않았지만, 어쨌든 놈의 비밀을 쥐게 되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수많은 추격을 따돌리며 마침내 파티는 목표한 곳에 도착했다.
화르르르르륵!
불로 타오르는 산.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가 폭주 중인 불의 산.
그곳에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불의 산’에 입장하기 위해선 ‘폭주한 불의 정령’과 계약해야합니다.】
【‘폭주한 불의 정령’과 계약한 자는 계약하지 않은 네 명과 동시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정령계약’은 속성별로 한 번씩만 진행할 수 있습니다.】
【‘폭주한 정령’과 계약을 맺을 시, 지속적인 정령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정령산에 입장하기 위한 조건부터가 희생을 전제로한다.
당연히 누구 하나 쉽사리 나서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이미 한 명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 젠장.”
내 의도를 파악한 최강남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
“아아악! 뜨거워! 뜨거워!”
최강남이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폭주한 불의 정령과 계약을 맺자마자, 폭주한 정령에 의해 지속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던 까닭이다.
뿐만인가.
“왜 나만 공격하는건데!”
스아아아아!
화아아아악!
폭주한 불의 정령들 대다수가, 계약자만을 공격했다.
파티원들이 나서서 도와주고는 있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다.
결국, 최강남의 머리는 전부 불에 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뜨겁다. 뜨겁다. 뜨겁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불에 타 여기저기에 널려있던 시체들.
그 시체들이 일어나 공격을 감행했다.
일찍이 이곳을 오르다가 죽은 자들의 시체다.
쾅! 쾅! 콰앙!
심지어 가까이 다가오면 그대로 터져버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빠르게 나아가는 것뿐.
그렇게 불의 산을 한창 오르던 때였다.
“끄, 끝인가?”
“여긴 정령이 안보이는데?”
“시체도 없어!”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강남은 철푸덕 바닥에 엎어져 생존의 눈물을 흘렸다.
한단계 고비를 넘겼다.
아니, 넘겼다고 생각했다.
스으. 스으으으으.
어디선가 들려오는,
살이 지면에 쓸리는 불쾌한 소리.
“우웁!”
“이게 무슨 냄새야······!”
코가 막힐 것만 같은 악취.
찰나.
이아린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이아린만이 아니다.
그라시아도, 그를 포함한 모든 강자들이.
“저게, 뭐야······?”
새로이 나타난 ‘그것’을 보며 경악하고 말았다.
*
불의 산 초입.
입구를 바라보며 천여명에 달하는 야차들이 멈춰섰다.
“혈월신녀님. 제물들이 불의 산에 올랐습니다. 진입하시겠습니까?”
그 중심에는 혈월신녀가 있었다.
하지만 혈월신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이곳은 못 오른다.”
“못 오른다니요? 이곳에 뭐가 있는 겁니까?”
“아아. 다른 심연의 주인들도 쉽사리 건들지 못하는 게 이곳에있지.”
불의 산은 출입금지구역이다.
이곳에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다른 심연의 주인들과 추종자들이 아예 없는 것만 봐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천마 역시도 이곳만큼은 ‘금지’로 설정해두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야차가 묻자, 혈월신녀는 혀를 찼다.
“쯧.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이곳에 있다.”
“태, 태어나지 않은 존재라면······!”
“모든걸 먹어치우는 심연의 청소부다.”
이름을 들은 야차들 모두가 경악했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심연의 청소부로, 이미 심연에서도 이름난 괴물 중의 괴물이다.
놈이 못먹어치우는 건 없다.
이미 수많은 심연의 주인들이 이 괴물에게 먹혔으니.
다행인 건, ‘태어나지 않은 존재’에겐 자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하여 건들지 않고 근처에 다가가지만 않으면 별 해가 없다.
“······ 아무도 살아내려오지 못하겠군요.”
“우리가 한 발 늦었구나. 어쩔 수 없지.”
인간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셌다.
혈월신녀가 당도했을 땐 이미 인간들은 불의 산에 오른 뒤였다.
하지만 차라리 불의 산에서 ‘태어나지 않은 존재’에게 먹히는 게, ‘빙월신녀’에게 뺏기는 것보단 낫다.
그 괴물이 이곳에 있는 이상 놈들은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하필이면 불의 산을 가장 먼저 오르다니, 운이 없구나.’
최악의 선택을 했다.
뭐, 이제는 알 바 아니지만.
“돌아간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혈월신녀가 등을 돌렸다.
*
모두가 ‘그것’을 보았다.
마주치고 말았다.
절대로 보아선 안 되는 것을 본 대가는 참혹한 법.
본능적으로 느꼈다.
한 번 포식을 시작하면, 저것은 멈추지 않을 테다.
이곳에 있는 전부를 먹어치울 때까지 절대로.
“흩어져라······!”
이아린이 급하게 말했다.
그녀는 저게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심연왕 중 하나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진저리쳐지는 존재.
‘왜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이곳에······?’
어쩐지, 생각보다 쉽게 불의 산에 진입한 게 이상하다 싶었다.
설마 저 괴물이 이곳에 똬리를 틀고 있을 줄이야.
마주친 이상 이길 가망은 없다.
칠군주 바사라의 본체라면 가능성이 있으나, 지금 그녀는 이아린이다.
인간의 몸으로는 저 괴물을 대적하는 게 불가능하다.
저 포식자의 시선을 돌려 한 명이라도 살리는 게 최선일 터.
아니, 아니다.
‘늦었다.’
사실 알고 있다.
마주친 이상 늦었다는 사실을.
보아선 안 될 것을 모두 보았으니, 이제는 피해갈 방법이 없다는 걸.
여기서 끝이다.
‘죽겠군.’
인간의 유희는 끝인 듯싶었다.
여기서 파티가 전멸하면 지구도 희망이 없다.
혼돈의 정령왕이 탄생하거든 판게니아와 지구 모두가 위험할 테니.
하필이면, 가장 마주해선 안 될 것을 마주해버렸다.
······ 암담한 표정으로 ‘태어나지 않은 존재’를 마주했을 때였다.
스윽.
스스스슥.
“무, 물러난다?”
“뭐, 뭐야?”
돌연히.
갑자기.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의아한 일이었다.
저 심연의 청소부가 먹잇감을 앞에 두고 물러났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을진대.
게다가 저 모습은 마치.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치는 것 같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