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373)
검게 물든 알카르.
성도, 아드리움.
광휘의 기사단과 원탁의 기사단이 대결을 펼친다는 소식에 모두가 들끓었다.
수많은 신화를 써내려간 자들과 새로이 신화를 써내려가는 중인 자들이 맞붙는다는데 열광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딱 한 명.
허드슨만은 달랐다.
‘어떻게 해야하지?’
대결의 직전.
시간이 다가올수록 허드슨은 불안했다.
박현명은 그에게 전권을 맡겼다.
부단장 아벨로프와 상의하여 모든 일을 진행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허드슨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카심과 광휘의 기사단은 여신교의 기틀을 세운 전무후무한 강자들이었다.
카심 역시 300년 전 이미 대륙 최강의 인간이었다.
혼자 악신을 물리쳤을 정도라 하니까.
··· 지금은 얼마나 강할지 상상조차 안 간다.
‘여기서 졌다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거야.’
애써 잘못된 신을 바로잡고, 멸망의 탑을 부수는 퍼포먼스까지 펼쳤건만.
이제 마침표만 찍으면 끝나는데 하필 박현명이 모습을 감췄다.
원탁은 박현명 없이 이 대결을 승리로 이끌어야만 했다.
할 수 있을까?
물론, 원탁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만약 패배라도 했다간, 모든 명성과 명예가 카심에게 돌아갈 것이다.
여신의 기사라는 타이틀마저도.
대결을 받아들이지 않기엔 보는 이가 너무 많다.
하지만 자취를 감춘 박현명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블랙 돔 현상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으니까.’
박현명은 그것을 이대로 놔두면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사실이라면 카심과의 대결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불안한가요?”
“······ 이자벨라님.”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허드슨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층 부드러운 얼굴을 한 이자벨라가 있었다.
찬란한 은빛 갑주와 함께.
그녀 역시 ‘원탁’의 일원으로 대결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불안하냐고?
무엇이 불안한가.
이 대결의 승패가?
아니, 아니다.
“‘심연의 왕’들이 블랙 돔 안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드루이드 알비노께서도 심연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셨으니······.”
허드슨에게 가장 걱정되는 건 대결의 승패보다 박현명이다.
그의 강함은 언제나 허드슨의 상상을 웃돌았다.
하지만 ‘심연’만큼은 확신할 수가 없다.
심연의 안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최근 판게니아에 떠오른 심연의 구역들을 알비노는 살피고 있었다.
명예의 세계수를 지키며, 그들의 동태를 실시간으로 파악중이다.
그런 알비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했으니, 확실할 것이다.
······ 심연왕들은 지금 ‘블랙 돔’의 안에 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박현명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놈들과 대적해야만 한다.
원탁의 도움도, 칼날용신 하나의 도움도, 하다못해 자신의 도움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
“심연왕들······ 그들은 그분을 건드리지 못할거예요.”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한데, 이자벨라의 말이 묘했다.
건드리지 못한다니?
심연왕들이 박현명을 알아보기라도 한다는 건가?
알아본들, 심연왕들과 박현명은 서로 연이 없을텐데.
하지만 이자벨라의 입가엔 여유가 넘쳤다.
‘그들은 이미 한 번 란돌프님에게 도륙당했으니.’
그녀만큼은 ‘신의 섬’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기억했으므로.
그들을 도륙한 건 ‘또 다른 란돌프’였으나, 어쨌든 연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자벨라는 당시의 기억을 상기했다.
그녀는 박현명을, 란돌프를 지키고자 스스로를 희생했다.
신의 섬에서 악령임을 밝히며 소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소멸되지 않고, 대신 ‘진리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모든걸 지켜보았다.
란돌프가 스스로 ‘박현명’임을 깨우치고, 각성하며 ‘영원의 신’에 올랐을 때.
‘영원의 신’이 지닌 권능으로 신의 섬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뒤로 물려 이자벨라를 진리의 문에서 꺼내었을 때.
되살아난 심연왕들에게 무슨 현상이 생겼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신의 섬에서 겪은 일들은 모두 잊었겠지.’
그들의 기억은 삭제되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잊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을 거다.’
모든게 0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영원의 신’으로서 발현된 권능은 완전한 과거로의 롤백과는 거리가 멀었다.
억지로 없던 것으로 만들었을 뿐, 그들의 기억도 ‘진리의 문’에 삼켜졌을뿐.
또 다른 란돌프.
그가 심연왕들을 학살했을 당시.
당시의 기억은 이자벨라 그녀도 지우고 싶을만큼 잔인했으니까.
수많은 경험을 한 그녀지만, 그때의 기억만큼은······ 도저히 떠올리기가 싫었다.
······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쳐졌으므로.
*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와 동시에.
“후웁! 후웁······!”
“다, 다들 숨 쉬어!”
“미, 미친······ 뭐가 지나간거야?”
숨을 내뱉는 것조차 잊었던 사람들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도 처음이었으니까.
많은 종의 괴물을 겪어봤으나, 이런 느낌을 준 괴물은 단언컨대 없었다.
“······ 저게 심연왕인가보군.”
그라시아가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말했다.
사흉 바알을 비롯해 대륙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라이가조차도 직접 겨뤄본 그이지만, 방금 지나간 괴물은 차원이 달랐다.
아예 다른 종이었다.
불쾌하고, 불길하며,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느낌.
“바, 방금 그게 심연왕이라고요?”
“시, 심연왕들은 다 저런 겁니까?”
사람들은 경악했다.
저런 괴물이 몇이나 더 있다니.
그제야 사람들은 제대로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령왕을 제압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곳에서 승리하려거든, 저런 괴물을 몇이나 마주해야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행히 그냥 넘어갔지만 만에 하나 전투라도 벌어진다면······.
꿀꺽!
너나 할 것 없이 침을 삼켰다.
이아린을 제외하고서.
‘왜 도망친거지?’
이아린은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 분명히 뒷걸음질을 쳤다.
무언가를 보고,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이 주변에는 그들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정령도, 시체도, 그 외의 무엇도.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모조리 먹어치운 탓이다.
여기가 놈의 영역이라면, 그들은 침입자일터인데.
침입자를 놔두고서 도망쳤다고?
왜?
대체 누구를 보고서?
‘설마 나를?’
칠군주 바사라.
그녀의 존재감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마계와 심연은 접점이 없다.
심연을 정복할 계획은 있지만,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고로,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자신을 알아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애초에······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존재’를 마주한 인물이 누가 있겠나.
‘··· 정말 모르겠구나.’
자신이 파악할 수 없다니.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만물을 꿰뚫 수 있는 게 자신이거늘.
방금 전 일어난 ‘현상’에 대해선 도무지 답을 내기 어렵다.
“······ 올라가지. 우리를 가로막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을 테니.”
고개를 저으며 그녀가 앞장섰다.
어찌됐든 가장 위험했던 고비를 넘었다.
남은건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를 제압하는 것뿐.
*
······ 위험했다.
설마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여기 있으리라곤 나도 생각하기 어려웠으니까.
놈을 상대하려거든 ‘란돌프’로 변신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랬다간 다른 심연왕들 전원이 눈치챌 것이다.
놈들이 연대라도 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하여,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알아본건가?’
하지만 분명히 ‘신의 섬’에서의 기억은 모두 지웠다.
이자벨라를 제외하면, 그곳에 있던 심연왕 전원은 나에 대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한데······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나를 보자마자 뒷걸음질을 쳤다.
명백한 공포를 담고서.
나를 알아봤다는 방증이다.
···어떻게 알아본걸까.
‘태어나지 않은 존재라서, 기억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게 ‘태어나지 않은 존재’다.
기억을 지우는 것이 놈에게는 무의미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란돌프’의 기색을 느끼고, 줄행랑을 친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잔학한 죽음이 육체와 영혼에 새겨졌을 테니.
‘다행이로군.’
그래도 요행은 한 번이면 족하다.
다른 심연왕들도 같은 반응이리란 보장이 없으므로.
나는 빠르게 불의 산을 올라, 마침내 정상에 닿았다.
그 순간.
화르르르르륵!
거대하며 투명한 막 안에, 아그니스가 폭주한 채 불길을 뿜어대고 있었다.
《‘폭주하는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봉인석’을 해제하려면 ‘근원의 불’이 필요합니다.》
《‘근원의 불’을 얻기 위해선 ‘폭주한 불의 정령’의 계약자 100명을 모아, 봉인석에 제물로 바쳐야합니다.》
“······ 뭐라는 거야?”
“계약자 100명을 제물로 바쳐야 열린다고?”
“뭐 이딴 조건이······!!”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100명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겨우 봉인을 풀 수 있단다.
이런 사악한 조건은 본 적도 없었다.
“그게 꼭 우리일 필요는 없지.”
“내려가서······ 그 붉은 무복을 입은 놈들 백 명을 잡아올 수만 있다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자고?”
“그 ‘괴물’이랑 또 마주치면 어떡해?”
······ 그러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내려가는 것도, 야차들 백 명을 산 채로 데려오는 일도.
“그럼 우리중에 고르자는 말이야?”
“난 싫어!”
“‘폭주한 불의 정령’과 계약한 것도 서러운데······!”
특히 최강남을 비롯한 계약자들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제물이 된다는 건, 죽으라는 의미다.
계약한 채 올라오며 얼마나 고생했던가.
여기에 죽기까지 하라니!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차갑다.
덜덜덜덜!
최강남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근원의 불’이 확인되었습니다.》
《‘파티’의 누군가가 ‘근원의 불’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봉인석이 해제됩니다.》
스아아악!
결계가 사라진다.
“어어······?”
“‘근원의 불’을 보유한 사람이 있어?”
“누구야?”
모두가 의아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서는 이는 없었다.
누굴까.
누가 ‘근원의 불’을 보유했나?
‘근원의 사속성은 드루이드가 가진 재능이지.’
······ 바로 나다.
나는 근원의 사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불, 물, 땅, 바람.
이것들이 이곳의 정령왕과도 연계되는 모양이다.
그때였다.
《‘폭주한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가 깨어납니다!》
-마, 몬······!!!
마계의 삼군주 마몬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화아아아악!
꽈르르르르르르릉-!!!
보다 거대해진 아그니스가 화염의 창을 휘둘렀다.
“만개!”
“앱솔루트 실드!”
“정의의 방패여!”
사람들은 즉시 대처했다.
하지만.
“아악!”
“뜨, 뜨거워!”
“피부가 녹아버릴 것 같아······!”
창은 막았으나, 아그니스가 내뿜는 열기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그니스가 내뿜는 불은 근원의 불.
그것은 그라시아가 펼친 만 자루의 검을 녹일만큼 강력했으니.
“이래서야······.”
“어떻게 제압하지?”
다가가는 것조차 어렵다.
가까이 갔다간 예외없이 그대로 녹아버릴 것이다.
원거리의 공격을 펼쳐내도 마찬가지로 닿지 않았다.
《모든 내성 20%》
《모든 자연 속성 능력치가 ‘514%’에 달합니다.》
《‘근원의 불’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정령왕 아그니스의 불’에 99.8%만큼 저항합니다.》
나만 빼고.
0.2%만으로도 상당히 뜨겁지만, 생각보단 버틸만하다.
자연재생능력까지 합치면 놈에게 다가가는 건 일도 아닐 듯했다.
문제는 제압하려면 어느정도 힘을 드러내야한다는 건데.
-제가 나서겠나이다, 신이시여.
내 고민을 눈치챈 ‘검게 물든 알카르’가 말했다.
······ 아무리 서열 3위라고 해도, 정령왕을 이길 수 있나?
하지만 자신있게 나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검게 물든 알카르’가 신의 힘을 빌려옵니다.》
《‘검게 물든 알카르’가 ‘정령왕 아그니스의 불’에 99.8%만큼 저항합니다.》
과연.
자신있어하는 이유를 알겠다.
이게 바로 ‘검게 물든 알카르’의 능력 중 일부인 듯싶었다.
바로 신의 힘을, 나의 능력 중 하나를 빌리는 것!
“저, 저건 누구야?”
“저런 사람이 우리 파티에 있었어?”
“어, 엄청나군······.”
곧이어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게 물든 알카르’가, 아그니스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황금의 정령.
툭-
정장을 입은 우락부락한 사내가 주먹을 쥔 채 앞으로 나아간다.
투욱-
묵직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화염으로 둘러싸인 길을 묵묵하게 걸어나갔다.
정령왕 아그니스의 불.
천상의 오염물을 태워버릴 정도로 강력하기 그지없는 불이나, 면역에 가까운 내성을 지닌 알카르에겐 닿지 않는다.
-다 불태워주마!
쿠르르르르르릉!
아그니스가 불의 창을 날렸다.
불의 창은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키며 알카르를 향해 내리꽂혔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숨을 내뱉자, 검은색의 광선이 튀어나와 불의 창과 정면에서 부딪혔다.
쿠르르르르!
산 전체가 흔들리는 굉음.
곧이어 검은 광선과 불의 창이 상쇄되어, 영원토록 사라졌다.
-무한한 불이여!
허나 아그니스의 공격은 이제 막 시작했을 따름이다.
붉은색의 불이 파란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하얀색이 되었다.
“뭐 이렇게 뜨거운거야?”
“다, 다가갈 수가 없어······!”
상당한 거리를 둔 채 방비를 해도 살갗이 타들어갈 정도였다.
알카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작 0.2%의 불로도 모든걸 태울만큼 아그니스의 불은 위협적이었다.
치이이이이익!
실제로 정장이 타버렸으니까.
하지만 알카르에게 주인과 같은 압도적인 재생능력은 없다.
다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춰서지 않을 뿐이다.
입고있던 정장이 타서 재가 되고, 피부가 새빨갛게 부어오르며 괴사해도, 알카르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가까워질수록 불의 농도는 더욱 강해졌으나 개의치 않는다.
헌데······ 이상한 일이었다.
알카르가 지나간 길의 위에는 불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무한한 불을 물들이다니!
어찌하여 ‘검게 물든 알카르’인가.
이름 그대로 알카르는 모든 것을 검게 물들일 수 있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물들인 모든 것을.
“후우우.”
알카르가 다시 한 번 입을 크게 벌리자.
스아아아아아아!
그가 물들인 모든 ‘검은 불’이, 알카르의 입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꿀꺽!
알카르는 정령왕의 불을 흡수했다.
찰나.
쩌억, 쩌저적-
검은 불을 흡수한 알카르의 몸이 부풀어올랐다.
외관의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꼬리가······?”
“바, 반인반용?”
“요, 용기사다!”
흡수한 불로 말미암아, 알카르는 반인반용이 되었다.
칼날용신인 여왕의 의지에 따라 마혈종은 태어날때부터 각기 다른 모습을 취한다.
인간의 형태도, 자폭병의 형태도, 모두 여왕의 의지에 따름이다.
하지만, 알카르만은 아니었다.
마혈종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알카르는 흡수한 힘에 따라 자신의 의지로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
마혈종, 서열 3위.
그리 표현했으나······.
사실상 서열 1위와 2위인 ‘이세라’와 ‘루카리아’는 오버로드인 탓에 자연히 높은 순위를 기록했을 뿐이다.
이 순위는 ‘무력’의 수치에 근거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저 마혈종의 ‘중요도’를 구분한 척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3위다.
이는 마혈종들 중에서도 세 번째로 중요한 존재가 알카르라는 뜻.
용신의 심장으로 태어난 오버로드가 아님에도 그가 마혈종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마혈종들 중에서도 엄청난 별종으로 태어난 까닭이다.
여왕의 의지에 반하는 유일한 마혈종이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의 심장을 지닌 존재.
모든걸 물들이고 먹어치우는 알카르는 틀림없이 ‘탐욕’적이었으니.
누구보다도, 그들의 신에 가까운 마혈종이었다.
하여 만약, 단순한 무력만으로 서열을 정한다면.
알카르. 그의 무력은······.
“모든 영광을, 우리의 위대하신 신에게.”
검게 물든 알카르.
반인반용의 모습으로 변한 그의 손에는 어느덧 거대한 대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화염의 운석들을 마주하며.
스으으윽.
알카르가 검을 내리그었다.
순간.
검은색 반월 형태의 검기가 튀어나가 운석들을 모조리 갈라버렸다.
거기서도 멈추지 않는다.
검은 반월의 검기는 운석을 가를 때마다 조금씩 크기가 커져갔다.
이내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검기가, 순식간에 아그니스에게 닿았다.
【참격, 세상가르기】
스아악!
-안 돼······!
툭!
아그니스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
“······.”
이아린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아그니스를 궁지에 몰아버린 반인반용.
허나······ 분명히 없었던 자다.
분명히 500명으로 입장했건만, 몰래 따라들어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도 이상하다.
따라왔다면 자신이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히든 특성 ‘대현자’를 지니고 있음에도 숨어있는 걸 파악하지 못했다.
하물며 그녀의 눈썰미는 단순히 관찰의 재능을 맥스치로 찍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정교하다.
한 마디로 몰래 따라왔다는 건 가당찮은 이야기다.
‘따라온 게 아니라, 동화되어 있었던 게다.’
곧이어 이아린은 자신이 그를 못 알아차린 이유를 깨달았다.
몰래 따라오거나 숨어있었다면 찾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존재’는 마치 그림자처럼 누군가의 기척과 동화되어 있었다.
소름돋을 정도로 기척을 흉내내는데 도가 튼 자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 어이가 없군.”
그라시아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말마따나 어이가 없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머리가 잘린 아그니스는 이내 재생하였다.
불의 산에 있는 폭주한 불의 정령들이 모조리 튀어나와 정령왕의 신체를 수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건······ 괴물인가?”
문제는 저 남자의 행태다.
갑자기 대검을 바닥에 버리더니, 부리나케 뛰어들어 아그니스의 목을 물었다.
그리곤 마구잡이로 먹어치웠다.
맛있다는 듯 어그적 대는 소리를 흘려가면서.
······ 어지러웠다.
저 모습은 정말 인간이 아닌 듯했으니까.
행동에 정해진 규격이 없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분류와는 거리가 먼듯
했다.
도리어 짐승이나 괴물에 가깝다.
그것도 상당히 원초적인.
‘입장할 때 확인되었던 13개의 히든 특성도, 설마 자 자가······.’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근원의 불’을 보유하고 있던 것도 저 남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의아했다.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진대.
정장을 입고 있던 것으로 보아, 현대의 인물임은 틀림없을 터.
“대체 누구지?”
“처음 보는데······.”
“설마······ 란돌프?”
“패, 팬텀이라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만한 파격을 보일 수 있는 인물은, 그 외에 딱히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팬텀!
한때 빌헬름의 플레이어라고 여겨진, 그리고 란돌프로서 명예의 전당을 모조리 석권했던, 인류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자.
인류 10강도 팬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 전원을 합쳐도 팬텀 하나에는 못하다는 평가가 주류였다.
한때 ‘올리버’가 팬텀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무근이었다.
이아린도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팬텀의 실제 얼굴이나, 정보에 대해 모른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만에하나 저 남자가 팬텀이라면?
······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도망친 것도 저 남자 때문이라면?
“······.”
이아린은 가만히, 아그니스를 먹어치우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칠군주 바사라로서의 그녀가 찾아마지않던 존재가 바로 저 남자인 것이다.
하지만······.
저 자가 빌헬름을 조종한 플레이어라고 하기엔.
··· 그 방식이 너무나도 투박하지 않은가.
검술의 정교함, 자세의 절제, 한 호흡도 낭비하지 않는, 그 자체로 품격이었던 존재가 바로 빌헬름이다.
허나 저것은······ 말이 좋아 투박하다는 거지, 게걸스럽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폭주한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가 제압되었습니다!》
《‘아그니스’를 폭주시킨 ‘오염물’이 모두 제거되어, ‘아그니스’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옵니다.》
*
······ 상상 이상이었다.
검게 물든 알카르.
녀석의 힘은.
서열 3위라고 했지만, 조건에 따라서 무력적으로는 충분히 1위도 노려볼 수 있는 괴물이 알카르였다.
칼날용신 하나가 알카르만을 내게 붙여놓은 이유가 이것이다.
올리버를 지키는 데에는 수많은 마혈종을 투입했으나, 알카르는 혼자서도 충분히 그들 이상이라는 의미.
무엇보다······.
‘··· 나를 닮았군.’
뭔가 거울을 보는 느낌이다.
알카르는 지극히 탐욕적이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본능적으로 힘을 탐했다.
마혈종 중에서 이런 놈이 있었던가?
아니, 단연컨대 없다.
애초에 마혈종은 용신 하나에 의해 부품처럼 만들어지는 종족이다.
오로지 여왕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종들.
성장의 한계도, 부여된 힘도 모두 한계가 있었다.
반면, 알카르는 다르다.
한계가 없다.
이런 이종이 어떻게 태어난걸까.
‘나중에 하나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군.’
알카르를 대량생산할 수만 있다면, 마계정복은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파격적이다.
-여긴······ 어디지?
순간.
주먹만한 크기로 작아진 아그니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몬······ 놈이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렸나.
그리곤 후회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몬이라면 마계의 세 번째 군주를 말하는 건가?”
이아린이 물었다.
아그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원시정령의 군주 마몬······ 놈이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 정령탑의 핵을 부숴버렸다. 이제 세상의 모든 정령이 균형을 잃고 날뛰기 시작하겠지······.
“정령이 날뛰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정령탑은 단순히 정령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나가선 안 될 정령들을 가둬두고, 오염물을 정화하며 세계의 균형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가선 안 될 정령들이라면?”
-혼돈의 정령들. 그리고······.
아그니스가 말을 아꼈다.
혼돈의 정령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세상을 유지하는 시스템이 모두 파괴되고, 생명체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황금의 정령께서······ 분노하실 것이다.
오피러브
늑대훈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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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37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