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375)
굴종하거라.
정령의 계약.
이는 정령탑의 정령이 계약자에게 자신이 지닌 힘의 ‘일부’를 나눠주며, 그 대가로 ‘마력’을 담보받는 것이다.
정령을 지상으로 소환하기 위한 마력은 기본.
가장 중요한 건 계약자가 죽은 뒤 육체와 영혼에 새겨진 ‘근원의 마력’을 정령이 가져가는 것이었다.
생명체는 각자 어느정도의 ‘생명의 근원’을 갖고 있기 마련이었고, 이 ‘근원의 마력’으로 말미암아 정령들은 자아를 비대하게 형성하며 강해지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짙은 ‘근원의 마력’을 가질수록 더 강한 정령과 계약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령왕’을 만족시킬 정도의 ‘근원의 마력’을 지닌 존재는 거의 없다.
몇 세기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할 수준.
그마저도 정령왕의 힘을 전부 빌리는 경우는 없었다.
빌려주는 힘은 계약자가 지닌 ‘근원의 마력’과 비례하는 탓이다.
지옥의 군주 이세라도 고작 20%에 불과했다.
다시금 마혈종으로 태어난 이세라는 50%였지만, 그래봤자 절반수준.
물론 추후에는 충분히 100%에 가까운 수치의 힘을 빌려갈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하다.
근원의 마력은 벽을 넘을수록 커지키 마련이었으니.
당연히, 당장 다수의 정령왕과 계약하긴 힘들다.
애초에······ 다수의 정령왕과 계약을 한 사례 자체가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도 거의 없었다.
그것도 인간들 중에선 전무했다.
‘유일하게 정령왕의 다중계약이 가능했던 종족은 드루이드뿐이다.’
자연의 창생자.
세계수를 보전하고 씨앗을 옮기는 종족.
가장 많은 근원의 마력을 지닌 종족이 그들이다.
허나, 드루이드 중에서도 전설로서 치부되는 몇몇만이 ‘정령왕의 다중계약’이 가능했다.
그들은 정령왕들도 인정하고 존중하는 몇 안 되는 존재였으므로.
문제는 드루이드가 대륙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멸망’이 출현하며 가장 중요시 여긴 일들 중 하나가 ‘드루이드’의 멸절이었다.
탑을 관리하는 흉의 일족을 제거하는 것만큼이나 드루이드의 제거 역시 우선시 되었으니 그들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이후 오랫동안 다중계약은커녕 정령왕이 불려나갈 일조차 없었다.
그럴진대.
‘그런데 왜······.’
저 인간에게서, 드루이드의 기척이 느껴지는가?
얼마전, ‘명예의 세계수’가 나타난 걸 아그니스도 알고는 있었다.
그것도 전설의 드루이드 ‘알비노’와 함께.
알비노라면 마땅히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는 자다.
하지만 그의 성향은 ‘불’과는 맞지 않다.
물의 정령왕, 혹은 대지의 정령왕과 호환할 테지.
모든 드루이드가 그랬다.
‘불의 정령왕’이 드루이드와 계약한 사례는 없었다.
모든걸 태우는 그는 씨앗을 옮기는 드루이드와는 맞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 인간에게선······.
‘뜨겁구나.’
······ 뜨거운 불길이 느껴진다.
근원의 불.
그걸 넘어서는, 더욱 강렬한 불길이!
‘태초의 불······!’
머지않아 깨달았다.
그의 안에, ‘태초의 불’이 있다는 걸.
이세라가 그를 소환하여 강제로 계약한 매개체가 바로 ‘태초의 불’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이세라에게 태초의 불을 나눠준 인간일 것이다.
태초의 불을 소유한 실제 주인 말이다.
드루이드의 기척을 풍기는 그가 어찌하여 자신과 호환되는지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신은······ 불의 주인이로군.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가, 태도를 굽혔다.
태초의 불을 지닌 자에 대한 당연한 예우.
“저, 정령왕이 고개를 숙였어?”
“불의 주인이 뭔데?”
하지만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판게니아의 역서사를 살펴봐도 정령왕은 ‘무례하고 콧대 높은’ 존재로만 묘사됐으니까.
특히 불의 정령왕은 그 경향이 아주 심했다.
그가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절대 없다.
한데, 놀라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의 주인이여. 나,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와 계약하겠는가?
······ 불의 정령왕이 먼저 계약을 제안하다니.
모든 사람들의 눈에 물음표가 새겨졌다.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므로.
다만, 확실한 것은 역사적인 순간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정령왕과 계약하는 사상초유의 사태를.
그걸 바로 앞에서 지켜보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나.
모두의 눈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윽고, 모두의 기대어린 시선 끝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거절한다.”
*
적막이 흘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감히 정령왕의 계약을 거절하다니!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해도 부족할 판국에!
-······?
아그니스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령왕의 계약을 거절하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어이가 없던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이어진 말이 더 가관이었다.
“굴종하거라.”
-굴, 종······?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 굴종.
납작 엎드려 복종하라는 의미다.
동등한 계약 따위가 아니라, 확실하게 ‘갑’과 ‘을’을 정하자는 말이었다.
물론, ‘갑’은 저 남자이고 ‘을’은 아그니스 자신일 것이다.
이런 말을 들은 것부터가 굴욕적이다.
자신이 누구이던가.
모두가 선망해 마지않는 정령왕이다.
필멸자들은 모두 그와의 계약을 바라고 또 바라기 마련.
“저게 무슨 소리야?”
“계약을 안하겠다는거야, 지금?”
“그, 그러면 안 되는데······!”
듣고있던 사람들도 기겁하고 말았다.
단순히 계약만 거절한 게 아니다.
‘굴종’하라는 건 선을 넘어도 세게 넘었다.
지금 그들은 인류를 구원해야하는 입장이다.
정령왕의 계약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일진대.
도리어 그의 분노를 살 수도 있는 발언인 것이다.
불의 정령왕은 자존심이 강하기로도 유명했으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령왕이 굴종한 역사는 전무후무하다.
정령탑이 세워진 이례 한 번도 없었다.
아그니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하여 자신을 제압한 알카르를 바라봤다.
‘애초에 마혈종이 왜 여기있지?’
아그니스는 이세라와도 계약한 상태다.
하여, 알카르가 마혈종임을 알아보는 게 어렵진 않았다.
문제는 왜 마혈종이 인간들과 있냐는 것이었다.
‘이세라에게 태초의 불을 나눠준 자를 호위하기 위해서인가?’
혹시, 저 남자를 지키고자 있는 걸까.
확실히 알카르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반적인 마혈종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저런 괴물이 지키고 있다면, 억지로 계약을 진행할 수도 없을 터.
하지만 계약하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이대로면 모든 힘을 잃고 혼돈의 정령이 될 것이다.
혼돈의 정령이 되는 건 아그니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수치였다.
이 모든 게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굴종······ 하겠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기 마련.
결국, 아그니스는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시간이 없었으니까.
아그니스 혼자라도 모든 오염물질을 태워 최악의 상황만은 면해야했다.
그러려거든 ‘태초의 불’ 소유자와 계약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그 순간이었다.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가 굴종했습니다.》
《‘일방적 계약’이 체결됨에 따라 ‘아그니스’를 소환하는데 마력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오직 ‘아그니스’의 마력만으로 소환이 지속됩니다.》
《‘아그니스’는 계약자의 소환 요청에 불응할 수 없습니다.》
《‘계약자’가 죽은 후에도 ‘아그니스’는 ‘계약자’가 지닌 ‘근원의 마력’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다만, 소환된 아그니스가 발휘하는 힘은 ‘계약자’가 지닌 ‘근원의 마력’에 비례합니다.》
불공정 계약도 이런 불공정 계약이 없다.
작금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맺지 않을 계약이었다.
계약을 맺은들 소환에 응하고 불응하는 것도 본래 정령의 마음이다.
예전에 ‘지옥의 군주 이세라’가 소환했을 때 실제로 불응한 적도 있다.
그런데 계약자는 아무것도 손해볼 게 없는, 오직 이득만 보는 계약이라니.
죽은 후에 마땅히 정령이 가져가야할 ‘근원의 마력’에도 손을 댈 수 없다니!
‘이, 이 힘은······?’
하지만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계약이 끝난 즉시.
주먹만하게 작아졌던 아그니스에게 엄청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으음······?!
*
혈월신녀가 고개를 돌렸다.
“······ 봉인이 풀렸다고?”
이상한 일이었다.
불의 산을 오르는 이들은 자신이 쫓던 인간들뿐이다.
하지만 틀림없이 ‘태어나지 않은 존재’에게 먹혔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 봉인이 풀렸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봉인을 풀 리는 없으니 이는 인간들이 해냈다는 의미인데.
‘설마?’
말도 안 되지만, ‘태어나지 않은 존재’를 피해갔다는 뜻인가?
쿠르릉!
머지않아 ‘불의 산’이 크게 흔들렸다.
산 전체를 태우던 불이 잠잠해져갔다.
······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가 제압된 것이다.
“돌아간다!”
혈월신녀와 천여명의 야차들이 급히 왔던 곳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의 산의 입구에서 그들은 마침내 인간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후, 혈월신녀는 후회했다.
“아악······!”
“부, 불이다!”
“불의 정령왕이 왜 인간들 편에······!”
정령왕 아그니스가 인간들과 함께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폭주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강해진 상태로 말이다.
*
마침내, 하산을 끝냈다.
불의 산에서 목표했던 바는 이뤘으므로.
불의 정령왕을 제압하고, 계약까지 했으며, ‘불의 종’도 얻었다.
환호를 내지를 법도 하건만, 이아린을 포함한 모두가 그럴 수 없었다.
맨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는 남자.
이전보다 훨씬 더 거대해진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와 나란히 서있는 존재.
방금전 붉은 무복의 무인들을 모조리 제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두 괴물들.
그중에서도, 한 남자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 정말 네가 팬텀인가?”
결국, 참다못한 그라시아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또한 오랜세월 팬텀을 찾아헤맸다.
팬텀의 실체를 알고싶었다.
하지만 팬텀은 절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내, 팬텀이라 추정되는 자를 마주한 것이다.
그런 그라시아의 물음에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알카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믿고, 안 믿고는 자유다.
지금 그는 마혈종의 신인 박현명을 대신해 사람들을 이끄는 중요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 정도의 ‘연기’야 알카르에겐 매우 간단한 일.
하지만 사람들은 알카르의 연기를 연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보여준 위력과, 정령왕 아그니스의 태도 등이.
······ 팬텀이 아니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
“빌헬름을 플레이한 것도 너인가?”
“글쎄.”
“지금 그 모습은 란돌프인가? 아니면?”
“······.”
알카르는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반면, 알카르가 아니라 박현명을 바라보는 시선도 만만치않게 많았다.
‘저놈이 불의 정령왕과 계약하다니······!’
헬숙해진 최강남이 내심 비명을 내질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불의 정령왕과 계약한 2세대 각성자라니!
이아린도, 그라시아도, 이곳에 모인 그 어떤 강자들도 해내지 못한 업적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놈은 일약 대스타가 될 것이다.
특히 정령왕 아그니스의 위력은 이미 세계에 알려져있었다.
아무도 쉽게 건들 수 없으리라.
······ 운이 좋아도 너무 좋지 않나.
‘놈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남은 정령왕은 이제 셋.
그중 하나라도 계약을 해내면 그만이다.
최강남이 부푼 희망을 품었다.
그리곤 슬쩍 알카르에게로 다가갔다.
‘팬텀이 확실하다. 옆에 있으면 분명히 풀지 않은 공략도 알 수 있을 거야······!’
아무리 봐도 팬텀이 분명하다.
그의 옆에 찰싹 붙어있는다면 안전하다.
그리고 떨어지는 콩고물도 받아먹을 수 있으리라.
이후로도 파티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머지않아 다음 목적지인 ‘대지의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고렘들······?”
“숫자가 너무 많은데?”
문제는 산의 입구를 지키는 고렘들이었다.
또 다른 ‘심연의 주인’과 추종자들일 것이다.
수많은 고렘들이 대지의 산 주변을 끊임없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그들은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저 거대한 고렘은 뭐야?”
“뭐 저렇게 커?”
압도적으로 거대한 고렘을.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자,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하기 그지없었다.
저런 크기의 고렘을 그들은 본 적이 없다.
······ 나를 제외하고선 말이다.
나는 거대한 고렘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아직도 주인을 찾고 있느냐, 무덤의 주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