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379)
379화. 나는 마신(魔神)이니라.
-태평해보이는군, 아그니스.
-이퀘렐. 오늘도 시비를 걸 셈인가?
-어차피 물은 다 증발하고 없는데 어떻게 그게 온천이지?
-역시 시비를 걸 셈이었군.
-아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다. 아그니스.
-이런걸 ‘기분을 낸다’라고 하는 거다. 이퀘렐.
-······ 받아라. 불을 억제해줄 거다.
-수신(水神)의 수건? 이건 네 보물 중 하나 아니던가?
-누가 준다고 했나? 빌려주는 거다.
-왜?
-계약자가 죽은 뒤로 상심한 듯 보여서 말이다. 평소엔 하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아······.
물의 정령왕 이퀘렐.
그녀는 유일하게 ‘남을 챙길 줄 아는’ 정령왕이었다.
이퀘렐은 상심한 듯 보이는 아그니스를 위로하고자 자신의 보물을 내어줄 만큼 배려심이 깊었다.
아그니스와는 정반대인 속성을 지녔지만, 그럼에도 아그니스는 이퀘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삭막한 정령탑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으므로.
만약 이퀘렐이 없었다면 정령왕들은 정령탑에 갇힌 억겁의 세월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흘러 내려오는 오염원을, 기약 없이 태우는 일 따윈 감히 벌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이퀘렐······.’
······ 그녀가, 소멸했다.
아그니스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이퀘렐의 소멸을 감지했다.
영영 사라졌으며, 상실된 게다.
영원을 함께했던, 앞으로도 함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존재가.
···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나는 하지 못했다.’
아그니스는 격분했다.
이퀘렐을 소멸시킨 천마에게.
그리고 과거의 자신에게.
상반되는 속성을 지닌 탓에, 아그니스는 이퀘렐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불과 물은 섞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퀘렐은 언제나 겁 없이 자신에게 다가오곤 했다.
혹여나 증발하는 게 두렵지도 않은 것처럼.
그녀가 다가올수록 아그니스는 이퀘렐을 멀리했고.
‘아직······ 못 돌려줬건만.’
수신(水神)의 수건.
그조차도, 돌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돌려줄 방법을 몰랐다.
하여 고민만 무던히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고민을 할 이유가 사라졌다.
-악신······!
이퀘렐이 소멸함과 동시에 대기로 뻗어나간 그녀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아그니스는 이퀘렐의 고통을 읽었다.
그 처절하며 고독했던 싸움이 눈앞에 그려졌다.
천마.
놈은 이미 ‘악신(惡神)’이었다.
악신의 힘을 고스란히 계승해 물의 정령왕 이퀘렐을 소멸시킨 것이다
일반적인 심연의 괴물들은 결코 정령왕을 소멸시킬 수 없는 탓이다.
애초에 심연의 오염원을 정화하는 게 정령왕이다.
정화의 대상인 자들에게 역으로 소멸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마가, 악신이 된 게 아니라면.
-내가 저 악신을 멸하는 것을 허락해다오.
아그니스는 계약자에게 부탁했다.
저 악신을 자신이 죽이게 해달라고.
-우리가, 이 일의 매듭을 지을 수 있게 허락해다오.
모든건 방심에서 비롯됐다.
마계의 삼군주 마몬.
놈은 순한 양인척 그들에게 접근했고, 정령탑의 중추에 있는 핵을 부쉈다.
그들이 처음부터 방심만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이 모든 건 누구의 탓도 아닌 정령왕들의 잘못이다.
이퀘렐이 소멸한 일 역시도.
대지의 정령왕 움도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게 하도록.”
······ 하여, 나 또한 허락했다.
저 책임감과 복수심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니.
어차피 내가 거부한다고 나서지 않을 정령왕들도 아니었다.
그러자 아그니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온다.
문득, 대지의 산 초입에서 ‘무덤의 주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온다’고 했던 게 설마 천마였을까.
일전, 신의 섬에서 만난 천마는 강했다.
그 이름답게 세상을 오시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란돌프’에 의해 도륙됐다.
당시의 천마는 악신이 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하지만 아그니스는 천마를 일컬어 ‘악신’이라 표현했다.
그렇다면, 천마는 악신이 되었다는 의미다.
‘잊힌 신으로서의 악신이 아닌, 온전한 악신을 보는 건 처음으로군.’
세계수의 던전에서 릴리스를 조종하던 ‘잊힌 신’으로서의 악신은 만난 적이 있다.
빌헬름으로 활동할 당시 무수히 많은 악신의 제단을 부수기도 했다.
허나, 온전히 악신이 된 존재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쿠르르르르릉!
곧이어 산이 흔들렸다.
하지만 흔들림의 진원지는 산이 아니다.
산의 아래.
“······ 무덤의 주인이 막아서고 있나.”
그라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천마.
놈이 산에 진입하는 걸, 무덤의 주인이 막고 있는 것이다.
*
“너희들은 모른다.”
광휘의 초인 카심.
그가 대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악신(惡神)이 얼마나 치명적인 존재인지.”
먼 옛날, 카심은 악신을 죽였다.
그를 따르는 광휘의 기사단과 함께.
그가 성검으로 만든 초인들과 함께.
지금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모두 악신을 상대했던 자들이었다.
비록 성검이 되어 자아는 사라졌고, 카심의 명령을 들을 뿐이지만.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날을 카심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깊은 후유증에 시달려 수백년간 은둔했다.
그 강력하고, 전율적인 모습은 뇌리에서 도무지 잊혀지질 않았다.
악신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무수히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인과율을 비틀 정도기에 신들은 필사적으로 악신의 출현을 막아서곤 했다.
하지만 그날, 악신은 결국 모든 조건을 완성하여 모습을 드러냈다.
악신은 대륙을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였다.
“흐읍······!”
채엥-!
동시에, 칼 한 자루가 연무장 위에 꽂혔다.
“세, 세렝게티가······?”
“뭐야, 혼자서 프리드릭 왕을 물리쳤다고 하지 않았어?”
“둘 다 엄청나게 강한데!”
검을 손에서 놓은 기사는 세렝게티다.
검을 놓은 순간 패배는 확정된 셈.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눈초리로 홀리 나이트를 바라봤다.
‘당연히 이해가 안 될 테지.’
단순한 무력으로는 이자젤보다 세렝게티가 위였다.
인간계에서 세렝게티는 감히 적수가 없을만큼 강했으므로.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광휘의 이자젤이 원탁의 세렝게티를 상대로 승리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악신을 죽이기 위해,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어야했다.’
완성된 악신은 강했다.
홀로 인류 전부를 상대할 정도로.
하지만 상대하다보니 깨닫는 게 있었다.
바로 악신을 죽이려면 ‘인간’을 버려야 한다는 것.
본질은, 근원을 버려야만, 악신을 상대하는 게 비로소 가능해진다.
결국 카심은 스스로 성검이 되었다.
그리하여 수백년을 살아갈 수 있었다.
광휘의 기사단 모두가 그랬다.
저들은 모두 외형도 이름도 다르지만, 카심이다.
현재 이곳엔 13체의 카심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결과가 달라졌다.
그냥 ‘성검 이자젤’은 세렝게티를 이길 수 없으나, ‘광휘의 초인 카심’이라면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탁은 절대로 열 세명의 나를 이길 수 없다.’
13명의 카심을 원탁이 감히 상대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악신을 죽이고자 모든걸 버린 그를.
이후 수백년간 더욱 강해진 자신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놈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두렵다.
악신이.
자신이 분명히 죽였으나, 악신의 원천까지 소멸시키진 못했으므로.
하여, 반드시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놈이 ‘소환’되어 소환체에 빙의된 게 아니라, 온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날이 온다면······.
‘그 하늘의 악귀가 온전히 세상에 나오는 일만큼은 결단코 없어야한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윽고.
“광휘의 기사단, 이자젤 경께서 승리했습니다!”
원탁의 충격적인 첫패배가 선언됐다.
*
천마.
천산의 주인은 ‘천마도’에 얽힌 초대천마의 힘을 모조리 흡수했다.
천마도의 기억과, 영혼과, 그 원천을.
천마도는 천산의 초대 천마가 깃든 신물(神物).
모두가 ‘천신’, 혹은 ‘마신’이라 부르던 존재가 원래부터 그였던 탓이다.
하늘을 떨게 만들고, 신들조차 건들지 못한 무소불위의 괴물!
그리고 지금 그를 먹어치우고 넘어섰으니.
“나는 마신이니라.”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마신(魔神)이 아니겠나.
아니, 오히려 천산신교의 근본이 되는 초대천마보다 더 뛰어나다.
초대천마는 세외에 악신으로서 악명이 드높았다.
그가 가는 곳은 항상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럼에도 제지할 수 없다.
인류 전체가 덤벼들어도 상대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고금제일이 바로 초대 천마였다.
원인 불명의 이유로 ‘천마도’에 봉인되었음에도 계속해서 후대에 자신의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막강한 존재.
그 존재는, 틀림없이 ‘악신’의 반열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그 악신조차 넘어섰다-
“어리석은 무덤의 주인이여.”
무덤의 주인을 바라보며 천마가 미소지었다.
감히 마신을 대적하려는 어리석은 돌맹이다.
왜 놈이 산의 진입을 막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봤자 돌맹이일따름.
-온, 다.
무엇이 온다는 말일까.
자신의 죽음이?
죽을 때가 되긴 했다.
무덤의 주인이라는 이름처럼, 무덤으로 돌아갈 때였다.
천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무덤의 주인’은 전투불능의 상태였다.
쓰러진 채 발에 밟힌 버러지처럼 미동도 못하고 있다.
놈을 따르던 수많은 고렘들도 전부 박살냈다.
“그나저나.”
힘의 격차를 못 알아본 무식한 돌덩어리 녀석.
무덤의 주인은 자신의 발목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의아했다.
이미 대부분의 힘을 사용한 듯, 제압하기가 너무 쉬웠으니까.
싸우기 전부터 부서진 고렘의 잔해들이 넘쳐났다.
그제야 천마는 깨달았다.
“아아······, 내가 오기 전에 놈이 왔었나보군.”
가라앉은 황제!
놈이 이미 무덤의 주인을 한 차례 공격한 것이다.
그런데 그냥 물러났다.
무슨 이유로?
‘설마 무덤의 주인조차 상대하지 못한 거냐?’
그렇다면 실망이다.
이보다 더 큰 실망은 없을 것이었다.
무덤의 주인 같은 이 돌덩어리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니.
그래도 녀석만은 자신을 어느정도 대적해주리라 믿었건만.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그게 아니면.
‘내가 너무 강해진건가?’
하기야.
천마는 미소를 머그었다.
이곳 심연의 깊은 곳에서 그는 더 완전하게 완성되었다.
가라앉은 황제도, 천축의 고래도, 그 어떤 심연의 주인도 자신을 막아서진 못하리라.
천마가 시선을 돌려 산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죽을 자리로 스스로 기어오는구나.”
대지의 정령왕을 제압한 자들.
인간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곧 자신에게 먹힐 것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다만, 의외인 점은 있었다.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
대지의 정령왕 움.
두 정령왕이 저 인간들과 계약을 한 것 같았다.
대지의 산에 세계수가 피어난 것도 같은 맥락일 테지.
한데······.
‘으음?’
순간, 천마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찌르르르르-!
··· 쥐고있던 ‘천마도’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으니까.
아니, 천마도만이 아니다.
천마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게 천마도만은 아니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