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390)
390. 팬텀 그 자체.
용신의 사명(使命)은 간단하다.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수호하는 것이다.
마계의 칠군주라 불리며 공포로 군림한 바사라가 은연중 인간들을 돕게 된 건 어쩌면 그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왕은 세계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마왕이 파멸시킬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선 인간들의 편에 서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으므로.
‘블랙 돔’에 들어와 인류의 강자들을 자처하며 지킨 것 역시 같은 맥락이리라.
또한, 동생 이군주 이세라의 죽음조차도 그녀에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지구를 침략하다 죽은 것이지 않나.
이는 용신으로선 해서는 안 될 절대적인 규율의 위반이다.
그래.
‘나는 용신이 되고 싶다.’
그녀는 처음부터 용신이 되고 싶었다.
그녀가 느낀 모든 무료함과 무감정함은 사실 용신이 될 수 없음에 따른 절망일 뿐이었다.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박현명의 이름을 묻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가 다시 세계를 즐길 수 있도록 기원했다.
판게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박현명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진심으로 즐기는 박현명만이 자신의 저주를, 모두의 속박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이다.
······ 하지만, 닿지 않는다.
부족하다.
이곳에 있는 이들만으로는 박현명의 의지를 다시 세울 수 없다.
지금, 박현명에겐 거대한 존재들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가 판게니아를 즐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애초에 그들이 아닌 탓이다.
무엇이었을까.
저토록 눈을 빛내고 해맑게 웃으며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가.
‘팬텀임을 상기시켜야 한다.’
그가 가장 빛났던, ‘팬텀’의 기억.
팬텀은 순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직 혼자서만 플레이하며, 순수하게 게임을 공략할 따름이다.
히든 피스, 이스터 에그, 시크릿 퀘스트 등등.
게임의 숨겨진 요소를 찾아내는데 언제나 몰골 하는 자.
그 순수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 그 덕분에 생존한 사람들.’
판게니아의 가장 어려운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생존’ 퀘스트다.
게이머가 제일 먼저 겪는 요소이며, 실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하는 부분이었다.
당연히 팬텀이 가장 즐겼던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이나 많은 ‘생존’을 겪은 게이머는 없을 테니.
박현명을 되살리려면 팬텀으로 인해 생존한 자들이 필요하다.
그들만이 박현명의 순수함을 되찾아줄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계약으로 인해 그들은 모든 기억을 잊었을진대.
휘이익!
그때였다.
박현명의 안에 있던 ‘외신의 깃털’이 두둥실 떠올라 그녀에게 다가왔다.
황금의 정령과 일체화했기에 이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건······ 파랑새의 깃털.’
파랑새.
판게니아의 인간과 계약을 주관한, 운영자다.
이 깃털은 단순히 사용자를 지키는 용도 외에도 또 다른 용도가 있었다.
두 여신과 박현명도, 란돌프도, 빌헬름조차도 알 수 없었던.
심지어 원시천마는 까마득히 몰랐던.
··· 적혀있지 않은, 숨겨진 옵션이.
‘······ 계약을 해제하는 힘.’
아아.
이것이 깃털의 진짜 용도다.
이미 생존한 자들의 기억을 되찾아주는 것!
그동안은 스스로 초월한 자만이 일정부분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깃털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초월하지 않아도 계약 탓에 지워진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다.
······ 파랑새는 어찌하여 박현명에게 깃털을 주었을까?
이걸 어떻게 써야할지도 알 것 같다.
‘용신의 권능이 필요하다.’
세계 전역에 이 깃털의 능력을 흩뿌리려거든,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용신의 권능이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나는 용신인가?’
그녀는 아직 헤메이고 있다.
용신이 되고 싶으나, 당장 용신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용신들은 결코 그녀를 같은 ‘용신’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용신회(龍神會)에서 제명당하지 않았나.
-너는 용신이란다. 바사라. 내 사랑스러운 딸.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미의 음성이 뇌리를 스친다.
그녀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황금의 정령도 마찬가지다.
허나, 알 것 같다.
용신의 자격은 용신들이 정하는 게 아니라는 걸.
박현명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하지 않았는가.
새롭게 시작하고, 수없이 좌절해도, 결국 해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 내 자격은 내가 정한다.”
나는 용신일 것이다.
*
판게니아의 서비스 종료!
이 말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가.
게임이 끝나고, 모든 게 현실처럼 변한다는 걸까?
“세계수 커뮤니티도, 명예의 전당도, 황금률 상점이나 경매장도 이용이 안 돼.”
“아무 글도 안 올라가. 성좌들도 조용하고.”
“설마 서비스 종료라는 게 게임적인 요소들이 전부 사라진다는 건가?”
“말도 안 돼! 이제와서?”
“뭐가 문제야? 왜 갑자기 서비스가 종료된건데!”
“공지사항도 없잖아.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분명한건 그동안 편의적으로 이용하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성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도대체 원인을 알 수가 없었으니까.
“······ 이자벨라.”
하지만, 그 원인을 어렴풋이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원탁의 기사단.
광휘의 초인과 대결을 치루던 그들 중 대다수가.
박현명의 죽음을 이제는 깨달은 탓이다.
잠시의 휴식시간을 갖고, 허드슨은 이자벨라에게 다가갔다.
“······.”
그러나 이자벨라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죽어있었다.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박현명의 죽음이 그녀에게 너무나도 충격이었기에.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건 여기 모여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현실을······ 받아들여야돼.”
허드슨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허드슨 그마저도 무너진다면, 모든 게 끝이다.
원탁은 사라질 것이고, 그와 관려된 모든 게 소멸하겠지.
“우리는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해야돼.”
“······.”
“아직 전부 끝난 게 아니야. 우리가 그분의 의지를 이어야만 한다고!”
허드슨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초유의 사태에 대결이 잠시 중단되고, 그들은 좁은 복도에 모여있었다.
허나 모두 침묵만 하는 상태였다.
부단장 아벨로프도, 세렝게티도, 아이작도 전부.
허드슨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젠장할! 다들 고개를 들라고!!”
쿵!
벽을 치며 허드슨이 벽에 머리를 박았다.
“나도 믿기지 않는다고······ 빌어먹을.”
허드슨.
그에게 박현명은 빛이요 소금이었다.
처음 경매장에서 만났던 때가 엊그제같건만.
그로 인해 다시 세렝게티를 만나고, 현실에서도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박현명은 허드슨의 유일한 친구였다.
친구이자, 영원히 따라야할 주군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유지를, 이어야만 한다.
순간 번뜩이는 생각에 허드슨은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 그분의 죽음이 서비스 종료로 이어진 이유를 알아내야돼.”
여기서 플레이어는 허드슨뿐이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모두가 ‘판게니아’의 게임에 대해 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허드슨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팬텀은 마지막 게이머였어. 팬텀이 플레이하던 ‘빌헬름’이 죽자 세계가 변했지. 침략이 시작되고, 모든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어. 팬텀도 ‘란돌프’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됐지.”
그 사이, 걸리는 게 있다.
“그동안 우리는 게이머가 판게니아인에게 빙의하는 기준이 ‘게이머가 키운 캐릭터 중 가장 강한 캐릭터가 죽었을 때’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 허드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렝게티가 물었다.
그러자 허드슨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소환되는 기준이 나는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가끔 예외가 있었거든. 혹은 둘이 같이 소환되는 경우도 있었고.”
박현명에게 들었고, 최근에 밝혀진 던전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바로 네크로폴리스에 있는 ‘시체 까마귀 던전’이다.
그곳의 두 아이는 한 캐릭터를 같이 키우다가 소환됐다.
이는 그동안 플레이어가 생각한 ‘기준’과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둘이 동시에 소환되다니?
이로써 캐릭터 하나에 한 명이라는 공식이 깨졌다.
어쩌면, 그들이 생각한 공식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허드슨은 오래 전부터 생각하던 바를 입에 담았다.
“······ 가장 강한 캐릭터가 아니라, 플레이한 게이머를 ‘상징’하는 캐릭터의 죽음이 그들을 판게니아로 부르는 거라면?”
“팬텀의 상징은 빌헬름······.”
“아니야. 팬텀의 상징은 빌헬름이 아니야.”
“그럼 누가 그를 상징할 수 있어?”
“‘팬텀’ 그 자체!”
팬텀, 박현명.
바로 그다.
그가 그의 상징이다.
판게니아에서 유일무이하게 존재하지 않는 닉네임 ‘팬텀’을 부여받은 자!
그 자체가 캐릭터고 상징이었다.
“갑작스러운 서비스 종료는 틀림없이 이런 오류때문일 거야. 아무런 공지조차 없었으니까. 빌헬름이 아니라, 팬텀의 죽음이 사실 마지막 ‘캐릭터’의 죽음이었던 거라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근본부터 뒤엎어야할 엄청난 오류지.”
시작이 잘못됐다.
이건 서비스를 종료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오류다.
허드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류는 고쳐야돼. 완전한 서비스 종료가 아니라, 서비스를 급하게 종료시켜놓고 점검 중인 거야!”
고지할 틈도 없이, 모든 걸 멈췄다.
그래. 단지 멈췄을 뿐이다.
세계수 커뮤니티도, 명예의 전당도, 상점도, 전부 아직 존재하고 있다.
진실로 서비스가 종료되었다면 저것들 전체가 아예 사라졌을 터.
볼 수조차 없어야한다.
급하게 멈춰야만 하는 이유가 있던 게다.
“··· 그분께선 아직 완전히 죽은 게 아닐지도 몰라.”
······ 바로 박현명의 죽음을 유예하고자.
그게 오류를 바로 잡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빌헬름의 죽음이 아니라, 팬텀의 죽음이 시작이라는 이 오류를 바로잡으려거든, 팬텀 자체를 살려둬야만 하는 것이다.
박현명이 완전히 죽으면 고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죽음 직전에 급히 멈춘 것이다.
마저 진행되기 전에 종료시켜버린 것이다.
“······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순간.
이자벨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뭘 해야되지?”
박현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각오였다.
“우선 우리는 이 대결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그리고······ 음?”
순간.
“와아아!”
“뭐야?”
“요, 용신이다······!”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무언가를 느낀 허드슨이 즉시 바깥으로 나갔다.
모두의 시선을 따라 하늘 위로 눈을 돌리자.
“용신 아인하사르······?”
메인퀘스트 10을 달성하면 만나게 되는 용신, 아인하사르가 그곳에 있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판게니아 전역에 자신의 존재감을 흩뿌렸다.
-용신회가 가만있지 않겠으나, 이번 한번만 도와주마······ 돌연변이.
그는 즉시 용신의 권능을 사용했다.
곧이어 판게니아에 파랑새의 깃털이 가진 기운이 퍼져나갔다.
동시에.
“어어?”
“갑자기 머리가······!”
잠들어있던, 수많은 판게니아인이 속속들이 기억을 되찾기 시작했다.
수천, 수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
“······.”
“······.”
제국의 사신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