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09)
409화. 답답해서 내가 뛴다.
살귀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의 스승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계하고 대비하는 것.
그것이 살귀가 세상을 대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쉽군.”
대원정의 진행은 순조로웠다.
빌헬름의 몸은 상상 이상으로 강인했고, 반응 역시 현실과 다를 바가 없다.
병사들의 탈주?
기사들의 배신?
아무렴. 그에겐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니까.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역경을 뛰어넘는 것.
망자왕 아흐람의 공략은 너무나도 쉬웠다.
놈의 움직임은 단조롭다.
망자들의 변칙성도 예견 가능한 수준이다.
반면에 빌헬름.
이 남자의 육체는 단련되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게끔 쇠질이 된 상태다.
“훌륭하다.”
아흐람을 공략한 뒤 살귀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빌헬름의 육체는 더할 나위 없다.
암살자인 자신과는 결이 다르지만, 그런데도 훨씬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근육의 강도와 몸의 유연함이 차원이 다르다.
거기에 암살자로서의 소양이 더해지니 감히 무적이라 칭할만했다.
이런 몸이라면 대원정을 완료하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듯싶었다.
아니, 도리어.
‘이렇게 쉬운 걸 못한다고?’
다른 팬텀의 아바타들이 우습기까지 했다.
같은 아바타라도, 실력까지 같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이군주 이세라의 약점 찾기.
제법 고생하긴 했으나 귀찮고 번거로울 뿐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삼군주 마몬?
원시정령을 다루는 마몬의 파괴력은 인상적이었으나 기습 공격에 약했다.
몸을 숨기고 약점을 찾아내어 공략하는 건 도가 텄으니.
“뭐야, 벌써 아무도 없나?”
살귀는 뒤를 돌아보았다.
삼군주 마몬의 공략을 완료했을 때.
그의 뒤에 남은 병사와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사제도, 성녀도, 도움을 줬던 그 누구도 존재치 않았다.
이군주 이세라의 약점을 찾고자 병사들을 던져넣고, 삼군주 마몬의 기습을 위해 몸을 숨기자 남은 이들이 원시정령의 공격에 몰살당한 것이다.
“쯧. 어차피 별 도움도 안 되는 놈들이었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이제부터 더 조심하면 될 뿐.
조금 더 수고와 시간이 들어갈 따름이었다.
살귀는 몸을 숨겼다.
기척을 죽이고, 존재감을 지웠다.
어찌 보면 살귀의 ‘가능성을 보는’ 능력이 더해져, 빌헬름은 대원정 당시보다도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흑왕을 죽였듯 나머지 군주들도 느긋하게 처리하면 그만.
마왕에게까지 닿는다면 팬텀도 깨어나리라.
그가 못할 건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신조차 죽일 수 있는 게 살귀다.
“······.”
하지만, 살귀는 이내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삼군주 마몬까지는 혼자서도 그럭저럭 공략 가능했으나.
사군주부터는 모든 게 달라졌다.
틈?
없다.
시간?
부족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괴물!
기적 같은 확률을 뚫고 가까스로 넘어섰음에도.
“······.”
힘에 부친다.
마계는 그에게 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끊임없는 공략을 요구하며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은신했음에도, 그들은 귀신같이 자신을 찾아냈다.
‘마왕은, 마족들은 빌헬름을 알고 있다. 대원정을 철저하게 대비했다. 이건······ 이건 처음부터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다.’
아아.
공격해올 걸 알고 방비한 자들을 상대로 암살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살귀는 결국 사군주를 상대하며 한 번 죽었다.
사군주를 죽이는데 일곱 번의 기회가 필요했고, 오군주의 목을 베는데 스무 번가량의 재도전이 이어졌다.
육군주는 오십여 번.
그리고······.
-형편 없구나, 빌헬름.
칠군주, 바사라.
그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백 번을 넘게 재도전했으나 마찬가지다.
바사라는 자신의 모든 걸 꿰뚫어 보았다.
마치 생각을 읽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틀림없이 팬텀도 빌헬름의 육체로 마무리 지었을진대.
똑같은 조건과 상황에서 왜 자신은 바사라를 이길 수 없단 말인가.
칠군주가 이렇다면 팔군주는 또 얼마나 강할지 예상조차 안 된다.
하물며 마왕은?
······ 이걸 고작 한 번에 해냈다니.
‘그래. 정보의 격차다. 팬텀은 마계에 대해, 군주들에 대해 더 자세히 숙지하고 있었을 거다.’
차이가 있다면 그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대원정’과 같은 역사에 남을 일을 실행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든 ‘생존 퀘스트’가 그러지 않았을까?
팬텀도 아무런 정보 없이 아바타들을 생존시켜야만 했다.
살귀. 그의 경우를 빗대어봐도, 마찬가지다.
‘젠장······.’
살귀는 처음으로 격차를 느꼈다.
누구에게도 격차를 느껴본 적 없는 그이건만.
하지만 쉽게 인정할 수도 없다.
그때였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무언가 꾹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설마 지금 그가 대원정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누가?
-하, 답답해서 원.
···뭐?
지금, 뭐라고 지껄였나.
‘답답하다고?’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신의 행동을 보고 답답하다고 말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백 번이 넘는 도전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답답하면 네놈이 해봐라.’
살귀는 확신했다.
이 대원정을 성공시키는 건 0의 확률이다.
0.000001%조차 아닌, 그냥 한없이 0에 수렴하는 숫자였다.
설령 팬텀이 다시 도전한다고 해도 엄두를 내지 못할 수준일 것이었다.
당연히 지금 들려온 목소리의 남자도 성공하지 못할 터.
그러자 남자가 말했다.
-다 비켜봐. 답답해서 내가 뛴다.
*
대원정의 진행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그나마 끝까지 빌헬름을 지켜본건 세렝게티와 세아 성녀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그녀들도 전부를 알지는 못했다.
마계의 공략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게 가능할 정도로 친절한 것이 아니었던 탓이다.
눈을 돌릴 틈도 없이 모든걸 극복해야만 하는 게 마계였다.
고로.
‘······ 내가 직접 움직이는 건 처음인데.’
나는 눈을 떴다.
게임 화면이 아닌 빌헬름의 시점 그대로에서.
“우리는 ‘마계’로 떠난다!”
“판게니아의 평화를 위해!”
“인류의 번성을 위하여!”
“와아아아아-!”
어느덧, 대원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미련일 것이다.
내가 직접 ‘대원정’을 이끌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투영된 것이리라.
게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빌헬름도 이런 기분이었나.’
가슴이 벅차오른다.
대해와 같이 끝도 없이 이어진 병사와 기사들을 보고있노라면.
비록, 그들 전부가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천천히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약속하마. 절대로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고.”
다른 말은 필요없다.
두렵다면 도망쳐도 좋고, 힘에 부친다면 검을 놓아도 된다.
다른 의도를 가졌대도 용서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고 따라와주었던 이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다시 등을 돌렸다.
마계로 이어지는 검은색 워프.
들어가는 순간,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가자.”
··· 그것도 기사왕의 숙명이었으니.
*
“······.”
살귀는 가만히 자신의 앞에 펼쳐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지만, 현재 빌헬름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게 ‘팬텀’임을 알아본 탓이다.
처음에는 몰랐다.
팬텀이 자신보다 나은 게 무엇인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살귀는 팬텀과 자신의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등을 돌리지 않는다.’
절대로 그는 등을 돌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앞서나가 병사와 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했다.
숨지 않고, 피하지 않으며,
······ 오직, 믿는 것.
팬텀은 알고있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계에 대원정을 알린 자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강행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 ‘믿음’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텐데도.
‘다르다.’
이상한 일이었다.
살귀인 그가 움직였을 땐, 등 뒤를 노려오는 검이 많았다.
그런데 팬텀이 행동하자······ 없다.
탈주는 할지언정 그를 공격하진 않는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어서일까?
아니,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나아가는 그의 등은 빈틈 투성이임에도······ 도저히 공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인가.
‘무겁군.’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검의 무게 따위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무겁다.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육체를 공유했을텐데 이토록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마침내 사군주에 도달했을 때도, 생존율은 비교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라고는 하나······ 살귀도 백 번 넘게 도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사군주에 도달하면 항상 한 명도 남은 적이 없다.
그런데 팬텀은 50%의 기적적인 생존율을 보였다.
대신,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본인의 몸을 희생해서 병사들을 살리는 게 무슨 의미인가.’
너덜너덜한 육체.
체력은 이미 바닥난 듯싶었다.
이제 채 절반밖에 못왔음에도 저 상태라면 더 볼 것도 없다.
‘등을 돌려라. 몸을 회복해.’
지금이라도 등을 돌리고, 병사와 기사들이 싸울 때 약간이나마 몸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로 보였다.
한데······.
씨익!
‘······ 웃어?’
그는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등을 돌리기는커녕 더 강렬한 기세로 부딪혔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도 괜찮다.
이미 목숨 따윈 버린 듯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연달아 벌어졌다.
“멈추지 마!”
“기사왕을 따르라!”
“나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계속해서 그를 지켜보던 병사와 기사들이 전력을 다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배신을 했던 자들도 한 마음으로 검을 들었다.
······ 뭐냐, 저건.
어이가 없었다.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확실한 건, 빌헬름과 팬텀에겐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등을 돌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심장을 아프게 만든다.
자기희생이라니.
누군가를 위한 헌신이라니.
‘그런게 존재했던가?’
살귀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는 아니다.
팬텀은.
그는······.
‘누구보다도 더 이 판게니아에 진심이다.’
이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한 것도 같은 이치다.
단순한 게임 속 아바타가 아니라, 자신이 이겨내야할 역경으로 여겼다.
그런 그를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내쉼에도, 행복해보였다.
뭐가 행복한지 도통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팬텀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냈다는 듯이.
‘······ 대단하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도전한들, 그는 절대로 팬텀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팬텀만큼 진심이 아니니까.
그 정도로 세계를,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팬텀은 사군주의 목을 베어내고, 오군주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육군주, 칠군주······.
마침내, 팔군주까지.
모든 군주들을 정리한 뒤, 그는 마왕과의 대전을 치루었다.
그리고.
“그래, 이 맛이지!”
마왕을 죽였다.
모든 아바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 한 번의 기회로.
답답해서 본인이 직접 뛰겠다는 말.
······ 말 그대로, 그들과 팬텀 간의 격의 차이를 몸소 보여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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