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10)
410화. 내가 걸어온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기에.
눈을 떴다.
문이 열렸다.
흑왕이 지닌 ‘열쇠’가 빗장을 풀어헤친 것이다.
열쇠, 히든 특성.
세계에 존재했던 수많은 종족 가운데서도 ‘진리’를 탐했던 종주(種主)들, 그들의 이름과 개념을 특성화한 것이 바로 열쇠라 불리는 ‘히든 특성’이다.
특히 모든 세계의 시작이 되는 열쇠는 그 종류가 정해져있다.
또한,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곧 한 종류의 진리이며 그 열쇠들이 모여 ‘문’에 닿았을 때.
······ ‘멸망’은 탄생한다.
허나 황금 가면이 지닌 열쇠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고작해야 절반의 ‘문’을 여는데 지나지 않았다.
반면 ‘흑왕’이 지녔던 열쇠는 ‘문’을 열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문’은 무엇인가?
겉보기엔 거대한 눈의 형상을 띄고 있는 것.
‘눈’은 말 그대로 보는 용도다.
보고, 느끼며, 알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문’이라 불리는 그것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신인 ‘주신’들조차도 마찬가지다.
오직 ‘천상’만이 눈의 용도를 알고 그것으로 멸망을 만들어온 것이다.
“이런 기분인가-.”
황금 가면은 미소를 머금었다.
흑왕이 방심한 사이, 그의 열쇠를 모조리 강탈했다.
이후 문이 열리자 모든게 달라졌다.
재생한 육체는 이전의 몸이 아니었다.
“이것이 신이 된 기분인가?”
필멸자의 업이 지워지고, 그는 불멸자로 완성됐다.
‘신(神)’이 되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신이 아니라.
11개의 열쇠로 말미암아 문을 연 절대신이다.
이 세계에 멸망을 불러올 존재.
“나는 너희들의 ‘궤멸’일지니.”
그는 또 다른 멸망······ ‘궤멸’이다.
황금 가면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알았다.
더 이상의 복제가 아닌, 유일무이한 존재로써 본인을 자각했다.
그래.
자각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궤멸’로 완성되고자 존재한 것이다.
그리고 온전히 ‘궤멸’이 되기 위해선.
“이 세계를, 판게니아를, 내 손으로 ‘궤멸’시키마.”
멸망이 되려거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직접 멸망시켜야만 한다.
궤멸의 형태로.
궤멸이란 모든 걸 지우는 것.
현재 ‘천상’에 존재하는 세 멸망들.
파멸은 필멸하는 모든 것을 지운다.
절멸은 불멸하는 모든 것을 지운다.
그리고 멸망은 필멸하는 것도, 불멸하는 것도 전부 심연으로 몰락시켜 영원토록 고통받게 만든다.
‘나는 전부 지우는 자.’
궤멸······ 그는 불멸과 필멸을 모두 지운다.
오직 자신만을 남긴다.
오직 그만이,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은 가짜다.
자신만이 진짜다.
그렇기에, 전부 지워 없앤다.
구오오오오오오오-!
‘궤멸’은 눈을 돌렸다.
주인을 잃고 폭주를 시작한 멸왕 모크.
확실히, 저놈도 ‘선’을 넘은 괴물이다.
흑왕의 본체보다 저 ‘멸왕 모크’가 훨씬 까다롭다.
신의 영역을 넘본 금단의 존재이니까.
본래라면 태어나선 안 되는 잡종이다.
‘보인다.’
궤멸은 몸을 잘게 떨었다.
볼 수 없는 게 보인다.
알 수 없는 걸 알게 됐다.
‘··· 황제는 도망쳤다.’
전설의 드루이드 알비노의 말이 사실이었다.
열 한 마리의 ‘정통’이라 불린 사신들.
그것들은 ‘궤멸’의 힘을 담은 영혼의 정령이었다.
그것들은 하나로 합쳐지자 ‘문’의 형태를 띄게 됐다.
본래라면 ‘황금의 정령’을 찾아야만 했으나, ‘외신’의 힘으로 말미암아 강제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을 정통의 숫자와 같은 11개의 열쇠로 연 것이었다.
흑왕이 없었다면 전부 열지 못했을 터이나.
··· 겁도 없이 달려든 흑왕 덕분에 그는 완성될 수 있었다.
‘더 이상 그는 나의 우상이 아니다.’
황제는 짊어져야할 업으로부터 도망친 겁쟁이에 불과했다.
그런 겁쟁이의 피를 이었다는 게 창피할 정도였다.
쾅! 쾅! 쾅!
콰콰콰콰콰쾅!
궤멸이 펼쳐낸 보호막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멸왕 모크.
저 괴물은 궤멸의 보호막을 마구잡이로 깨트리고 있었다.
보호막은 부서지고, 재생하길 반복했다.
한데 미궁 전체가 진동하는 중이다.
그 진동만으로 미궁이 파괴되고 있으니, 가공할 힘이라 아니할 수 없다.
멸왕 모크의 괴력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아무리 궤멸이라고 하나, 이제 막 태어난 그다.
아직 자신의 세계를 멸망시켜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니 멸왕 모크는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 하지만 궤멸은 멸왕 모크의 처리에 당장 정신을 쏟을 수가 없었다.
볼 수 없는 걸 보고, 알 수 없는 걸 알게 되면서.
······ 불현 듯, 신경쓰이는 사실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염소. 넌 대체 뭐지?”
황금 염소.
12번째 정통을 지닌 자.
사신교로 들어와, 그들을 농락한 팬텀이라 불리는 존재.
그는 틀림없이 란돌프일 터이고, 플레이어일 터이나.
묘하게 걸린다.
“12번째 정통······ 그건 대체 뭐지?”
그것 또한 ‘영혼의 정령’이다.
틀림없이 천신의 힘을 담은 봉인구였다.
황제가 가져온 11개의 알, ‘궤멸’의 힘이 아닌.
궤멸이 되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그 12번째 정통은.
······ 궤멸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예 다른 무언가다.
아예 다른 존재의 힘을 봉인하고 있다.
그럴진대, 무슨 이유로 팬텀에게 붙어있는가.
팬텀은 플레이어고, 죄인이며, 천상과는 아예 상관이 없을텐데?
빌헬름도, 란돌프도, 전부 천상과는 연이 없다.
판게니아에 충실할뿐.
그런데 뭐란 말인가.
이 찝찝함은.
거슬린다.
궤멸인 자신이 무시할 수 없을만큼, 거슬렸다.
‘궤멸’은 시선을 돌렸다.
미궁의 중심부.
그곳에서 타오르는 ‘불’의 기색이 느껴졌으니.
‘최초의 불······.’
저건 건드릴 수 없다.
멸망을 피해가는 불이기에.
그러나 그 외의 모든 걸 없애면, 자연스레 불도 꺼질 것이다.
한데 저곳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있었다.
지금 이 모든 의문의 중심이 되는 존재.
‘궤멸’은 그를 보며 말했다.
“넌 누구지?”
*
······ 재미있었다.
나를, 내 과거를 되돌아보는 게.
내가 플레이했던 모든 캐릭터들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
특히 빌헬름의 대원정을 직접 겪었다.
그 웅장함, 떨림, 손끝으로 전해지는 압도적인 쾌감.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직접 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로 열중할 줄은 몰랐으니까.
느껴지는 무수한 시선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때, 쉽지?”
사실 쉽진 않았다.
이미 한 번 달성해봤음에도 역시 역대급 난이도였다.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겪었는지.
솔직히 다시 도전하라고 해도 백퍼센트 성공을 장담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최대한 오만하게 굴었다.
콧대를 치켜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저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나는 성공했으니까.
‘게임이 아니어도 괜찮네.’
여운이 남는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운이었다.
란돌프로 빙의한 직후 내게 게임은 현실이었므로.
살아남기 급급했고, 따라잡기 바빴다.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으니까.
세계를 지켜야만 한다는 압박감.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의무감.
그 수많은 책임감들이 나를 옥죄였다.
하지만······ 다른 캐릭터들의 ‘생존 퀘스트’를 돌아보고, 빌헬름의 대원정을 직접 겪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걸어온 길.
쉬지 않고 걸어왔던 길.
그 길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 같아서.
틀리지 않았음을 믿기에.
‘재밌어.’
이 세계가, 판게니아가.
나는 너무 재밌다.
한동안 잊고 있던 감각.
손에 잡힐듯한 생생함이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
“진짜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동안 나는 너무 강해지는데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강해진다’는 건, 무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게임이었다면 여러방면으로 도전해봤을 것이다.
수많은 캐릭터들은 모두 다른 방식의 강함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낚시를 하거나 농사만 지은 캐릭터도 있다.
그러한 경험들을 그동안 아예 도외시한 것 같다.
잊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고자 한 게 아니다.
내 주변에 있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나를 지켜보는 존재.
“어이, 눈깔.”
항상 나를 지켜보던 놈에게 말을 걸었다.
천상의 벽을 부순 뒤로 놈의 존재가 더 가깝게 느껴진 탓이다.
“우리 예전에 한 번 봤지? 그때 나한테 제대로 보라면서 ‘진리의 눈’을 선물해 준 것도 너고.”
-······.
‘눈’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란돌프의 히든 특성 ‘대현자’를 ‘진리의 눈’으로 진화시킨 게 바로 저 ‘눈’이었다.
제대로 보라면서.
보고, 판단하라고 말이다.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뭘 보라는 건지, 무엇을 판단하라는 건지.
“멸망이 될 것이냐, 아니면 다른 존재가 될 것이냐. 그런 의미였을 거고.”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란돌프는 ‘또 다른 멸망’이, ‘종말’이 되었다.
투신의 탑에서 ‘흉과 재’의 주신들이 선물한 장갑으로 성향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말’이 될 수 있었던 건 빌헬름이 ‘또 다른 란돌프’를 소멸시킨 덕이었다.
또 다른 란돌프.
그 존재는, 멸망이다.
란돌프를 멸망으로 만들고자 진리가 보낸 ‘문’이었다.
나 혼자였다면 절대로 놈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빌헬름이 또 다른 란돌프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패배했을 때의 결말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물론, 종말도 ‘또 다른 멸망’으로 불리지만, ‘종말’은 일반적인 멸망과는 다르다.
종말은······ 멸망을 지운다.
멸망을 멸망시키는 존재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때? 지금의 나는 제대로 보는 거 같아?”
-······.
“마음에 안 들어? 나는 현재의 내가 너무 마음에 드는데.”
-······.
‘눈’은 여전히 답하지 않는다.
아니, 답할 수 없는 것이다.
당황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을 찾아냈다는 걸,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데에.
처음으로 확실하게 인식한 순간이었으니.
우연이 아니다.
나는 분명히 ‘눈’의 존재를 깨달았다.
이전과 같이 애매모호한 느낌조차도 아니었다.
확실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나는 놈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처음에는 눈깔, 네가 ‘천상’과 관계되어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아예 관계가 없는 거 같단 말이지. 벽이 부서질 때도 가만히 지켜만 봤잖아.”
-······.
“그리고 마혈왕과 원시천마가 천상의 벽을 무너트리려고 할 때마다 네가 나선 줄 알았지. 그런데 한놈 더 있더라고? ‘입’말이야.”
-······.
“솔직히 ‘입’은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어. 내가 부술땐 개입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눈깔, 넌 알겠다. ‘문’이라 불리는 것. 아마도······.”
천상의 벽을 무너트리고 집을 완성했다.
그러자 알게된 것들이 있었다.
깨닫게 된 사실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저것, ‘눈’에 관련된 것이다.
‘또 다른 란돌프’가 지녔던 문과 비슷한 것.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
나는 놈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깔. 너, 지구의 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