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11)
411화. 안 죽었잖아?
판게니아.
수많은 이종이 어울려사는 땅.
이곳엔 ‘신(神)’의 존재가 강력하게 자리매김했다.
멸망에게 모두 멸망당한 뒤임에도 사람들의 신앙은 죽지 않았고, 실제로 존재하는 신들또한 자신의 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예컨대 투신 카라스와 흉과 재의 주신.
그리고 용신 아인하사르까지.
하지만 지구에는 마땅한 신이 없다.
그나마 이군주 이세라의 침략때 ‘용신 루카리아’가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판게니아와 같은 신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감을 어떻게든 떨치려는 판게니아의 신들과는 달리, 지구의 신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허나······.
‘지구에는 스스로를 떨치는 신이 없다.’
나는 확신했다.
애초에 신이 부재한 것이다.
지구의 각성자들이 판게니아와 연동되고, 마왕군이 침략의 워프를 열어 공격을 감행하고, 칼날용신 하나가 용맥을 만들어 강제로 지구의 용신이 됐음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으니까.
게다다 용신(龍神)은 그 세계의 신이 아니다.
용신회에서 관리를 위해 보낸 관리자일뿐.
지구는 판게니와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종을 이끄는 신도, 탑도, 던전도, 심지어 세계수조차도, 그 무엇도 없었던 세계.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것이냐?
그럼에도,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눈’이 지구의 신임을 확신한다.
비록 판게니아의 신들과 같이 스스로의 존재를 확산하지 않지만.
하지만, 지구에는 신이 없는 게 아니다.
“지구는 ‘신’의 개념이 판게니아와 다른거라고 생각해. 너는 밖이 아닌 안쪽에, 그 존재 자체에게 깃드는 신.”
··· 그저 ‘신(神)’의 개념이 다른 것이다.
완전한 신의 부재가 아니라, 있기는 있으되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 지구의 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존재 자체의 안쪽에 있다.
내면에.
그러니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느낄 수는 있다.
영혼의 숭고함을.
덕분에 지구의 인간들은 신보다 자신의 증명에 더욱 힘을 쓰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과학을 발전시켰다.
혹은 강력한 믿음으로 세계를 관통하는 신학, 혹은 철학을 만들었다.
이는 분명히 판게니아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엔 많은 신이 필요없었겠지. 깃든채로 보면 될뿐이니. 아마도, 눈깔 너는 지구의 태초신과 같은 존재일 거야.”
······ 그렇다면 ‘눈’은 세계의 태초신일 터였다.
지구의 유일무이한 신 말이다.
그는 지구의 모든 존재 내면에 깃들어있다.
지구의 모든 존재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그는 그냥 지켜보는 게 전부다.
나는 강한 확신을 담아 ‘눈’을 바라보았다.
이에, ‘눈’은 눈을 한 번 깜빡이곤.
-정답이다, 탐욕의 악마.
*
태초신.
세계가 태동할 때 등장하며, 세계의 규칙을 정하는 존재.
그들은 ‘눈’의 형태로 세계를 바라본다.
판게니아의 태초신은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강력한 신들을 늘리고, 기적을 일으켰다.
수많은 종족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종족이 동시에 문명을 펼쳐나갈 수 있게끔.
하지만 지구의 태초신은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도, 수천만명이 죽어나가도, 인류가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할지라도 모든걸 자연선택에 맡길 따름이다.
두 가지 모두 장단점이 뚜렷하다.
신을 늘려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은 세계수의 탄생과 같은 수많은 기적을 발생시킨다.
외신 따위는 얼씬도 못하는 강력한 대지가 완성되지만, 그 기적들이 쌓여 결국 ‘천상’에 닿게되는 것이다.
반면 신의 개입을 없애면 기적은 사라지고 ‘천상’에 닿을 일도 없으나, ‘외신’과 같은 사사로운 것들에게 노려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단순히 선택의 차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자연선택’이 아닐 때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진다.
외신의 개입은 그중 한 가지일 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세계와의 충돌.
그런데 판게니아의 영혼이 유입되고, 판게니아와 연결되고, 판게니아의 침략이 이어지며 예외적인 경우가 계속해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때때로 나를 깨닫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숭고한 영혼을 지녔으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한 자들이었지. 그러나 ‘악마’가 나의 존재를 알게된 건 처음이로군.
탐욕의 악마.
그는 지구의 존재가 아니다.
판게니아에서 지구로 유입되어 ‘숨겨진’ 영혼이다.
두 여신이 필사적으로 숨겼던 존재!
간혹 지구엔 이와 같이 ‘다른 세계’의 영혼을 지닌 존재들이 태어난다.
하지만 기적이 없는 세계이기에 큰 파장을 낳지는 못한다.
또한, 그들이 태초신의 존재를 깨닫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럴진대.
······ 탐욕의 악마는 깨달은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벽을 넘어서고, 깨고, 다시 만들면서.
기적이다.
세계에 없던, 유례가 없는 기적이 지금 일어난 게다.
“정말 내가 탐욕의 악마라고?”
몇 번이나 들어본 말.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악마라니, 그 말을 다른 이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지켜본 존재가 말했다.
그것도 스스로를 태초신이라고 인정한 존재가 말이다.
거짓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당장은, 그러하다.
“당장은?”
-너는 보다 본질적인 존재이니라.
“······ 스무고개를 하는 기분인걸.”
‘눈’은 명확한 해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애초에 해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신들도, 탐욕의 악마 본인도 본질에 대해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탐욕’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 평범한 악마가 천상의 무기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멸망’에 닿을 수 있을리 없지 않은가.
“어쨌든 이만하면 된 거 같은데. 날 돌려보내줘.”
-불가.
“······ 나 안죽었잖아?”
심지어 탐욕의 악마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고 확언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인 영혼이, 다시금 죽음을 부정하는 건 진정 기적같은 일이니.
계기는 답답해서 대신 한 ‘대원정’ 때문일 터.
수많은 팬텀의 아바타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 ‘대원정’은 그의 영혼에 불을 지폈다.
죽은 영혼이 벽을 부수고, 집을 만드는 것도 놀라운 지경이건만.
······ 설마 스스로 자신의 미련을 박살낼 줄이야.
모든 아바타들을 모아 연결되어 깨어난 게 아니라, 그는 스스로 죽음을 극복했다.
그러자 그의 영혼에도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길은 네가 찾는 것이다. 찾기 위한 ‘눈’은 이미 주었으니.
진리의 눈.
일전, 히든 특성 ‘대현자’를 그는 ‘진리의 눈’으로 격상시켰다.
란돌프의 히든 특성으로만 끝난 게 아니라, 그보다 더 본질적인 변화를 준 것이다.
그걸 본인이 알아내지 못한다면 영영 길을 잃을 수밖에.
이곳은 내면의 세계.
심연보다 더 깊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의 내면 속이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알아서 선택해야만 한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박현명이 웃었다.
도저히 악마라고는 볼 수 없는 천진난만한 미소.
이후 박현명은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곤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 간다. 우리집에 초대할게. 놀러오라고.”
박현명은 보이지 않는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수많은 존재들이 따랐다.
마치 대원정에서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빌헬름을 따랐듯이.
지금은 박현명의 등 뒤로 빌헬름을 비롯한 존재들이 서있었다.
-······.
‘눈’은 가만히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죽음을 극복함과 동시에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천상의 또 다른 무기가 탄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급할 테고,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박현명은, 그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도리어.
-······.
놀러오라니.
박현명이 벽돌을 쌓고 만든 집.
13개의 히든 특성을 뭉개서 또 다른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개념을 ‘집’이라 칭하며, 다른 영혼들을 감싸안았다.
‘눈’도 처음보는 광경.
그도 그럴게.
지금 박현명이 만들어낸 것은······.
-그런가. 헤메지 않는가.
이미 박현명은 어디로 돌아가야할지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뿐이다.
길을 찾을 필요도 없다.
헤메지 않고, 헤멜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집’이 있으니까.
이래서야 ‘진리의 눈’을 준게 무색하다.
-나를 깨달았으면서, 나를 필요로하지 않는가······.
··· 처음이었다.
‘눈’은 그저 지켜볼뿐인 자다.
간혹 자신을 깨닫는 자들의 눈을 뜨게 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게 눈을 뜬 자들은, 한결같이 그를 갈구했다.
신의 존재를 깨닫고 신의 힘을 바랐다.
그가 더 지켜봐주고 알아봐주길 기원했다.
당연히 ‘눈’은 그들의 의지와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박현명은 아니다.
박현명은 자신의 도움을, 힘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갈구하지 않았다.
아예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
본인의 역경을 오직 스스로 극복하려 한다.
그 정도로 강력하게 자신을 믿기 때문이겠지만, 그저 그런 이유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눈’의 선택을 존중한 게다.
지켜보는 것.
······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
‘눈’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 세계의 꼭대기에 있는 또 다른 세계.
-천상이여. 모든 세계를 멸망시키고, 다시 시작하려 하느냐.
······ 천상.
천상은 사용할 ‘무기’를 늘리고 있다.
실패하긴 했으나 란돌프에게도 시도했고, 결국 ‘궤멸’도 만들어냈다.
모든 세계의 종말을 바라는 것처럼.
그 과정에서 ‘판게니아’와 ‘지구’는 중심이 되어버렸다.
이 두 세계가 멸망하거든 모든 세계가 연쇄적으로 터져나갈 것이다.
-··· 너희들도 실패한다는 걸, 이미 모두가 알아버렸으니.
판게니아에서.
멸망은,‘판게니아’를 전부 심연에 가라앉히지 못했다.
도중에 포기했으며 그 결과 실패했다.
처음있는 일이었다.
천상이 개입했으나 멸망하지 않은 세계는 판게니아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무기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멸망’이 일을 완수하지 못했다.
그것을 보며 모두 알게 됐다.
‘천상’도 실패할 수 있다는 걸.
그들도 완벽하지 않다는 걸!
곧바로 천상에 대적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외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용신회도 무언의 행동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천상은 다시금 ‘판게니아’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멸망에게 닿았던 ‘탐욕의 악마’가 지구에 있음을 알고, 지구 또한 멸망시키려는 중이다.
천상의 실패를 깨닫게된 모든 세계를 끝장낼 작정이었다.
전부 없애, 은폐할 속셈이다.
자신에게 대적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기 위해.
아무리봐도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다.
-······.
‘눈’은 생각했다.
그는 관찰자. 혹은 관조자다.
하지만 세계는 격동하고 있다.
자신이 세운 규칙은 무너진 지 오래.
천상을 피하고자 신의 개입을 없앴건만, 어느덧 천상은 지구를 마주보고 있다.
이미 가시권이다.
저토록 뚜렷하게 천상은 지구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지구에는 그의 의지를 대신할 신이 없다.
허나······.
‘눈’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박현명이 돌아간곳.
모두가 있는 집을 바라보며, 나지막히 말했다.
-··· 놀러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