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12)
412화. 등장.
쿠와아아아아아앙!
지축을 뒤흔드는 파공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궤멸과 멸왕 모크의 공세는 이미 미궁을 넘어 세계 전역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가공할 마력이 부딪히자 가장 먼저 모든 ‘워프’가 붉은 빛을 띄며 이상을 일으켰다.
연결된 워프 저장지가 사라지고, 갈 수 없던 장소로 이동되기 시작하며 제멋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자 짐승과 괴물들이 숨죽였다.
심지어 심연의 주인들도 그 강력한 파장에 움직이지 못할 수준이었다.
“······ 벌써 ‘멸망’이 등장했나.”
투신의 탑.
그 정상에서, 미궁을 바라보는 존재가 있었다.
투신 카라스!
온전한 신격을 되찾은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궁에 나타난 존재를 꿰뚫어본 것이다.
일전 투신의 탑에서 ‘또 다른 란돌프’에 의한 소란을 겪은 뒤, 투신 카라스와 탑은 한층 더 견고해질 수 있었다.
흉과 재의 주신들로부터 탑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흉과 재의 주신에게 축복을 받아, 그들의 힘마저 어느정도 끌어 쓸 수 있기에, 어떤 신들보다도 강한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흐음······.”
······ 상대는 멸망이다.
비록 이제 막 태어났다고는 하나, ‘문’을 연 이상 이미 주신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을 터.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안 선다.
투신 카라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먹구름을 뚫고 황금색의 용이 내려왔다.
용신 아인하사르.
아인하사르는 등장한 즉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용신회’로부터의 연락이다. ‘새로운 멸망’을 제거하라는군.
카라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 연락은 그게 끝인가?”
-이미 탄생했다면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글쎄. 새로운 멸망의 힘을 먼저 확인하려는 것이겠지.”
-아아.
아인하사르가 동의했다.
‘용신회’는 소극적이다.
판게니아를 버리는 패로 생각하고, 새로운 멸망의 힘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만약 일전 판게니아를 공격한 ‘멸망’과 같다면 아무리 많은 병력을 투입한들 허사이므로.
그 최강의 ‘멸망’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괴물이었으니.
-용신회가 ‘천상’에 대적할 무기를 완성했다고 들었다.
“그 무기를 적어도 지금 쓸 생각은 없나보군.”
-아마도.
“여전히 도움이 안 돼, 그들은.”
-······ 아아.
이번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아인하사르는 용신회의 소속이자 판게니아의 용신이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무능력함에 대해서 충분히 치를 떨고 있었다.
확신이 들지 않는 이상, ‘용신회’는 움직이지 않는다.
뿐만인가.
고일대로 고였고, 구시대적 방식만을 고수하는 탓에 발전이 없다.
천상에 대적할 무기?
이미 전부 망해버린 뒤에 쓰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판게니아만이 유일한 희망이거늘.’
무엇보다 천상에 대적하려거든, 판게니아가 남아있어야만 한다.
이곳은 모든 세계를 통틀어 가장 신의 위세가 강력한 곳이고, 천상의 심기를 거스를만큼 고도의 마도문명이 개척됐던 장소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대륙 곳곳의 ‘기적’은 모든 외신이 탐을 낼 정도이니.
판게니아가 완전히 몰락하여 사라지면 끝이다.
더 이상의 희망 따윈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
투신 카라스가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 ‘그’는 아직 안 깨어났나?”
-안 깨어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새로이 태어난 멸망과 동화될 수 있다.
“하기야, 당시에도 그 힘을 제어하지 못했으니······.”
란돌프를 말하는 것이다.
투신의 탑에서 어마어마한 어둠을 펼쳐냈던 란돌프가 ‘새로운 멸망’과 동화된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었다.
당시, 란돌프는 그 어둠을 제어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큰 어둠에 같이 휘말렸을 뿐.
제어하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력한 힘.
새로운 멸망에게 자극을 받는다면, 그리하여 어둠이 더욱 깊어진다면······ 두 멸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는 파멸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아아아아아아.
가공할 마력이, 한차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부르르르르!
카라스와 아인하사르가 몸을 살짝 떨었다.
《‘미궁 도시’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미궁 도시’에 ‘멸망(궤멸)의 탑’이 세워집니다.》
《‘멸망 게이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멸망(궤멸)’의 기운이 판게니아 전역으로 뻗어나갑니다.》
그들이 움직일 조건이 마침내 완성됐다.
신으로서 태어난 그들이 전력을 다해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려거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 탓이다.
그리고 조건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신력(神力)의 양이 다르다.
예컨대 ‘악마 사냥’에는 절반가량의 신력을.
이번처럼 ‘멸망의 탑’이 출현했을 때엔 신력 전부를 사용할 수 있다.
그게 판게니아의 태초신이 만든 신들의 규칙이었다.
투신 카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날개를 펼쳤다.
“······ 슬슬 움직이지.”
*
멸왕 모크를 죽이자, 놈의 내부에서 ‘상징물’이 튀어나왔다.
수많은 진화 끝에 멸왕 모크가 신격화 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신격화 된 짐승도 ‘궤멸’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멸왕 모크의 상징물을 부수고, ‘멸망 포인트’를 획득한 즉시 궤멸은 ‘멸망의 탑’을 이곳 미궁에 세웠다.
“이것이 멸망의 권능······!”
궤멸은 미소지었다.
멸망의 권능은 아주 다양했다.
게다가 이미 지니고 있는 ‘멸망 포인트’도 상당했다.
궤멸로서 완성되려던 황제가 쌓은 포인트이리라.
탑이 세워지고, 게이트를 통해 멸망의 하수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궤멸을 뵈옵니다.
-이 세계에 멸망을!
검은 병사들은 출현 즉시 미궁의 곳곳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검은색 별(★)’의 인장이 새겨진 투구를 쓰고 있었는데, 그 무력은 어지간한 초월자에 버금갔다.
‘게이트의 레벨에 따라 더 강력한 병사들이 나온다.’
멸망 게이트의 레벨을 올리려거든 꽤 많은 포인트가 필요하다.
마침 가능한 양의 포인트가 있었다.
《‘멸망(궤멸)의 게이트’ 등급이 상승합니다.》
《게이트에서 더 강력한 병사들이 출현합니다.》
이윽고 튀어나오는 병사들은 검은색 별(★★) 두 개의 인장이 새겨진 투구를 쓰고 있었다.
기존에 존재했던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강화됐다.
‘이 이상은 아직 못하는군.’
포인트를 모조리 사용했다.
게다가 이 이상은 훨씬 많은 포인트를 요구한다.
갖고 있던 양의 족히 두 배는 더 들어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따름이었다.
‘이 미궁엔 먹이가 넘쳐나지.’
미궁을 점령하거든, 3단계의 강화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
궤멸은 고개를 갸웃했다.
멸망의 힘이 가속화되자 그가 느낄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났다.
동시에 이곳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신격’의 존재 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꽤 신경이 쓰이지만, 느껴지는 건 그 둘만이 아니다.
“오호라······.”
더 멀리.
판게니아에 떠오른 심연의 주인들도,
더 깊은 심연 속 괴물들도 자각하게 되었다.
또한, 판게니아의 옆에 둥지를 튼 또 다른 세계.
마계까지 인식할 수 있었다.
한데, 그곳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이 있었다.
아마도······.
‘마왕.’
마왕이다.
마왕도 궤멸의 출현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놈을 죽이면 상당한 양의 ‘멸망 포인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지금 날아오고 있는.
아니, 이미 날아와 어느덧 자신의 앞에 선 두 존재보다도 더.
탐난다.
이 세계엔 아직도 가능성이 넘쳐난다.
그가 먹어치울 희망이 말이다.
-······ 네놈이 새로운 멸망이냐?
··· 누구인가 했더니.
용신 아인하사르.
그리고 투신 카라스라.
확실히 어지간한 신들보다도 강한 존재들이다.
판게니아에 남은 마지막 빛일 터였다.
그나마 있던 신들도 모조리 멸망에게 소멸됐거나, 심연에 묻혔거나, 아니면 힘을 잃었으므로.
하지만.
“··· 벌레들이 설쳐봤자 벌레인 것을.”
궤멸은 자신했다.
자신이야말로, 옛 멸망을 뛰어넘을 멸망이다.
모든 걸 없애 자신만을 남기는 궤멸이었다.
전설의 드루이드 알비노도, 흑왕과 멸왕 모크도,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신들도.
자신의 존재에 비하면 그저 벌레에 불과했다.
*
더는 방관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멸망’의 병사들.
그들을 상대하려면 팬텀의 아바타들도 움직여야만 했다.
“뭐 이렇게 많아······!”
“막아! ‘불’을 지켜!”
어느덧 멸망의 병사들이 미궁의 중심부까지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허드슨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 미궁이 뚫렸다.’
천혜의 요새.
절대로 뚫릴 리 없다고 자시했던 미궁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마지막 보루만을 남기고 있었다.
여기까지 점령되면 이 미궁에 희망은 없다.
최초의 불을 잃거든 박현명의 존재도 위험할 것이다.
“······ 카심님?”
그런데 그 중심에서.
가만히 서있는 카심을 발견하곤, 허드슨이 입을 열었다.
광휘의 초인 카심.
300년 전, 악신을 죽였다 알려진 여신의 기사.
“······.”
그는 떨고 있었다.
그의 잘게 떨리는 손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쳐들어오는 적들을 상대로도 아무것도 못할만큼.
“······ 분명히······ 분명히 죽였건만······!”
“정신차리십시오, 카심님!”
“300년 전의 그건 전조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게 무슨 씨나락까먹는 소리입니까? 전조라니요?”
카심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 300년 전, 판게니아엔 악신이 출현했다.
악신이 소환된 원인은 불분명.
엄청난 희생 끝에 카심은 악신을 죽일 수 있었다.
한데··· 지금 느껴지는 기색은 당시 악신이 소환될 때와 비슷하다.
비슷하지만, 방출되는 마력은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대하다.
“전조······.”
이제보니, 이렇게 될 징조였던 것이다.
‘새로운 멸망’이 출현할 징조 말이다.
실제로 300년 전 악신이 출현한 이후 판게니아의 구도는 바뀌었기 때문이다.
흑호족과 백호족의 전쟁.
황제가 잠든 것도 그와 비슷한 시기였으며, ‘빙의자’가 나타난 것 역시 그때였다.
당시 빙의자들은 ‘레벨’이니, ‘시스템’이니하는 이상한 단어들을 사용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와 같은 극적인 변화가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300년전이다.
“저건······ 이길 수 없다. 이기지 못한다······.”
300년간 검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악신’에 대한 공포는 이겨내지 못한 게다.
카심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무서웠으니까.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 너희는 두렵지 않은가?’
원탁의 기사들.
팬텀의 아바타들.
그들만큼은 끝까지 항전하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불’을 지켜내고 있다.
······ 저 ‘불’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
황금률의 드루이드라고 할지라도, 이 상황을 타개하는 건 불가능하다.
조금씩 전선은 밀리고 있었다.
쾅! 쾅!
꽈르릉!
시끄럽게 울리던 미궁이 조금씩 잠잠해져간다.
결국, 두 신격도 새로운 멸망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미궁을 벗어나 저 존재는 순식간에 세계를 멸망시키겠지.
카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신의 기사라 불리며 악을 상대했으나.
그의 앞에 들이닥친 악은 그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그런데 그렇게 눈을 감자, 묘한 소리가 귓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툭-, 투욱.
‘뭐지?’
이곳에 없었던 이의 발걸음 소리가.
그것도 ‘최초의 불’에서부터 들려온다.
누군가가 오고 있다.
이곳으로.
카심은 다시 눈을 떴다.
“······?”
하지만,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온데간데 없었다.
······ 이상하지 않은가.
카심은 재차 눈을 감았다.
툭, 툭, 툭!
발자국 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머지않아.
화아아아아악!
‘최초의 불’이 강렬한 불꽃을 뿜어냈고.
“······ 아!”
······ ‘그’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