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14)
414화. 진짜를 맞이할 준비는 됐나, 가짜?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내가 키운 캐릭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죽지 않았음’을 깨달은 건 말이다.
심혈을 기울여 ‘생존’시킨 게임 속 캐릭터들이 현실에서 나를 기다리다니.
고마움을 느끼고, 나의 생존을 기원하다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낭만이라.’
게임을 할 때의 나는 항상 낭만을 좇았다.
낭만 없이 판게니아만을 주구장창 파고들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란돌프로 빙의한 뒤에는 현실을 따랐다.
잊고 있던 단어를 상기하자 한층 더 세상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심상의 안쪽에 갇혀있던 시야가 현실로 옮겨간 것이다.
그러자 엉망진창이 된 미궁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곳에서 나를 대신해 적들을 상대하는 동료들도 눈에 들어왔다.
최선을 다해, 목숨을 걸고 오로지 나를 지킨다.
‘······ 처음인데.’
지켜진다는 기분이 이런 것이었나.
이 또한 낭만적이다.
하지만 마냥 늦장을 부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돌아가는 게 늦을수록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또한, ‘황금 가면’이 ‘궤멸’로 완성되자 즉시 내 안의 ‘종말’이 영향을 받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눈깔’에게 돌아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하고 싶지만······.
‘어차피 안 알려줬을 거다.’
놈은 길잡이가 아니다.
철저한 방관자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존재.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문’을 여는 것.
‘눈깔’ 또한 ‘문’이었으니까.
녀석을 인식한 순간 내가 가진 열쇠로 말미암아 강제로 ‘문’을 여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허나, 그럼 나는 ‘또 다른 멸망’이 될 뿐이다.
란돌프의 종말에 이어 나 역시도 비슷한 부류가 되었겠지.
‘그건 내가 열어야 할 문이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내가 열어야 할 ‘문’은.
나는 꿋꿋이 집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성과 같은 집의 ‘문’ 앞에 섰다.
천천히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익-
그러자 문이 열린다.
“그럼··· 들어가 볼까?”
웃으면서 내 뒤에 서 있는 존재들에게 말했다.
비록 대답은 없지만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게 ‘낭만’ 아니겠냐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문의 안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곤 생각보다 더 처참한 주변광경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 내가 좀 늦었나?”
돌고 돌아, 마침내 집에 도착했으니.
*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모두의 시선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곳으로 향한 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까.
‘······ 내가 좀 늦었나?’
그런데 나온 말이 더 가관이다.
이 지경이 되어서 나타나 한다는 말이 뭐?
내가 좀 늦었나?
“······ 괜찮아요.”
이자벨라가 말했다.
얄밉긴 하지만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시 얼굴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그녀는 만족할 수 있었다.
세상이 밝아진 기분이다.
“좀 많이 늦으셨습니다.”
허드슨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긴장감에 토악질이 나올 뻔했지만, 그를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믿고 있었습니다.”
원탁의 부단장 아벨로프가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어? 다들 안 믿고 었었던 거 아닙니까? 저만 그랬어요?”
세렝게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죽기 전에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팬텀.”
‘천둥 사자’도.
“······ 팬텀, 제법이더군.”
‘살귀’도.
“함께하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팬텀’이시여···!!”
집행자들을 비롯한 모든 ‘아바타’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들의 눈빛이, 얼굴의 표정이, 비록 입은 안 열지라도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 감사하다고.
긴 시간을 넘어, 돌고돌아 마침내 고마움을 전할 기회가 왔으니까.
동시에 전의가 넘쳐난다.
죽더라도 그와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그러나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왜 안 움직이지?”
“‘멸망’의 병사들이······ 멈췄어?”
그들을 몰아붙이던 멸망의 병사들이 정지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정지’였다.
터럭만큼도 움직이지 않는다.
팬텀이 불을 넘어온 직후부터의 일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원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알았다.
이자벨라는, ‘박현명’의 변화를 조금이나마 눈치채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박현명이 예전의 박현명이 아님을.
뭐라고 해야할까.
‘여유가······ 안정화 되었어.’
여유가 생겼다.
이전에는 없던 종류의 감정이.
더불어 그의 전박적인 상태 역시 안정적으로 변했다.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 대해선 말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한 세계에 두 멸망이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일 것이다.
저것은 ‘멸망’의 병사들.
궤멸 본인의 병사가 아닌 탓이다.
그는 그저 ‘멸망’이 다루는 병사들을 소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라면 한 세계를 멸망시키는데 한 종류의 멸망만이 필요하지만, 지금 이곳엔 두 멸망이 대치하고 있었다.
란돌프의 종말과 궤멸이.
하지만 지금 박현명은 란돌프로 변신하지 않은 상태다.
박현명 본연의 모습이었다.
종말의 기색따윈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권능을 사용한다.
다룰 수 없었던 그 극한의 ‘어둠’을······!
‘··· 종말의 힘을 다룰 수 있으시게 된 거야.’
이자벨라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동안 다룰 수 없는 종말의 힘에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이자벨라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고자 안간 애를 썼음을 말이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러기엔 종말의 어둠이 너무 깊었으므로.
그런데 귀환한 박현명은 종말의 힘마저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윽고, 박현명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궤멸’을 마주보았다.
“······.”
-······.
대화는 없었다.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를 알아보았다.
서로가 서로의 천적임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확신할 따름이었다.
찰나.
타악!
궤멸이 손가락을 튕겼다.
곧이어 궤멸의 주변으로 작은 초신성들이 생성되었다.
【대멸종】
종 자체를 궤멸시키는 능력.
제아무리 ‘최초의 불’이 그를 잡아두고 있다고 한들, 이 폭발의 영향에서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최초의 불과 팬텀은 살아남을지언정.
인간들도, 멸망의 병사들도, 모조리 다 증발하겠지.
이곳에 있는 모두를 지키진 못할 것이다.
······ 정확히 말하자면, 지키지 않을 것이다.
궤멸은 생각했다.
‘너는 나와 같은 냄새가 난다.’
팬텀은 자신과 닮았다.
자신처럼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항상 고민한 자다.
그렇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 외의 모든 존재에게 크고작은 증오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니, 지금이라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놈에게선 그와 같은 ‘멸망’의 냄새가 났으므로.
멸망은 파괴하는 자이지 지키는 자가 아니니까.
그래서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다.
과연 팬텀은 저들을 지킬지, 지키지 않을지.
만약 지킨다면 타격을 입을 것이고, 실망할 테다.
머지않아.
눈 깜빡할 시간조차 되지 않은 순간에.
팬텀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초속의 세계에서.
쉬이이이이이-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앙!
두 신을 날려버릴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폭발이, 궤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
황금 가면.
그는 ‘궤멸’이 되었다.
아마도 내가 되었을 수도 있는 모습이.
만약 균형을 잡지 않고, 종말의 어둠에 굴복했다면, 저 모습이야말로 나였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막아야한다.’
동시에 확신했다.
현재 궤멸은 ‘미궁 도시’에 묶여있다.
‘최초의 불’이 묶어둔 탓에, 그의 능력과 권능은 미궁 도시 바깥으로 발출되지 않는다.
놈이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판게니아엔 재앙이 몰아닥칠 터.
막아야한다.
기필코, 죽여야만 했다.
이전이라면 불가능했을 터이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내 손에는 ‘겨울’이 쥐어져있었다.
최후의 황혼이자,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
란돌프의 모습일 때에만 사용하던 무기를 궤멸에게 겨누며.
대멸종의 폭발을 마주한 채로.
“천(天).”
선을 그렸다.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천.
빌헬름이 완성한 검술.
‘천(天)’은 영역을 지배하고 상대를 제어하는 검술이다.
상대를 읽고 상대가 되며 상대를 넘어서는 것이 빌헬름의 검술이었다.
나는 팽창하는 대종말의 폭발을 그대로 검으로 내리쳤다.
순간.
쩌어어어어어억!
불길이 둘로 나뉘었다.
최초의 불과 주변의 사람들 모두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 그건 무슨 능력이지?
‘궤멸’은 고개를 갸웃했다.
단순히 막아선 게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보는 종류의 능력이었다.
대종말의 폭발이, 검에 닿자마자.
······ 닿은 부분이,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증발해버렸다.
결(結)을 읽고, 무(無)로 되돌렸다.
“너의 ‘원본’이 만든 검술이다.”
황금 가면.
나는 놈이 ‘빌헬름’의 복제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처음에는 추측이었으나 심상의 안에서 확신하게 됐다.
궤멸의 힘을 받아들인 것도, 그것을 자유로이 휘두르는 것도 빌헬름의 피 덕분일 터였다.
그런데 놈은 빌헬름을 모른다.
그가 어떠한 검술을 휘두르는지조차.
단순히 증오하고 미워할 따름이다.
하여, 나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진짜’를 맞이할 준비는 됐나, ‘가짜’?”
*
“······ 빌헬름님.”
원탁의 부단장 아벨로프가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박현명의 모습에서 빌헬름이 보인다.
그가 하염없이 보고 따르던 기사왕의 뒷모습이.
여태까진 이 정도로 확연하게 보이지 않았건만.
“저게······ 팬텀.”
“훨씬 더 강해지신 것 같은데?”
팬텀의 아바타들이 넋을 놓았다.
박현명은 틀림없이 대원정 당시의 빌헬름을 넘어섰다.
그들이 보았던 때보다도 훨씬 더.
하지만 상식밖의 강함이다.
투신 카라스와 용신 아인하사르가 위압감 따위는 우스울 정도로.
과연 팬텀이라고 해서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는 게 가능한 걸까?
“··· 우리가 알던 분이 맞는 거겠죠?”
창술사 발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알던 박현명이 아닌 것 같았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존재다.
이전의 박현명이 보여주었던 무력과는 궤가 다르다.
만약 진정으로 ‘멸망’이 되었다면, 그들로선 어찌할 방도가 없을 듯했다.
“······ 예전에 한번, 란돌프님께선 부활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급격한 성장을 이뤘지요.”
허드슨이 침을 삼키곤 답했다.
사흉 바알을 상대할 당시, 란돌프는 죽음에서 부활한 전례가 있다.
이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성장을 이뤄냈고,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었으니.
허나 그를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성장이다.
란돌프로 변신한 게 아니지 않은가.
“드디어 달성하신 거예요.”
그때 돌연 이자벨라가 말했다.
박현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의 눈도 같이 죽어버렸지만.
그가 부활하자 마찬가지로 되살아난 것이다.
심지어 이전보다도 더 투명해진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박현명을 믿고 따르는 건 이자벨라일지도 모르겠다고 허드슨은 생각했다.
“무엇을 달성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이자벨라의 말은 의외였다.
단순히 부활을 해서 강해진 게 아니라, 무언가를 달성했다는 그 말이.
달성.
마침내 목표에 도달했다는 의미일진대.
끝도 없이 강해지던 박현명이 따로 세워둔 목표가 있었던가?
허드슨이 궁금해 묻자, 이자벨라가 짧게 말했다.
“레벨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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