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26)
426화 변화.
세계를 집어삼킬 것만 같던 전쟁이 끝났다.
정령들은 폭주를 멈추고, 정령왕들 역시 제자리를 찾았다.
“······ 이퀘렐.”
불의 정령왕 아그니스가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천마에 의해 정수만을 남긴 채 사라졌던 물의 정령왕 이퀘렐.
“아그니스, 움, 샨디.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군.”
그녀가 다시금 부활했기 때문이다.
딱딱한 어조로 말하긴 했으나 두 눈에 담긴 반가움만은 진심이었다.
땅의 정령왕 움이 말했다.
“황금의 정령께서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신 것이다.”
그녀를 부활시킨 건 다름 아닌 ‘황금 정령’이었다.
마계의 삼군주 마몬이 정령탑을 습격, 무너트린 뒤 황금의 정령을 강제로 깨운 탓에 그들은 ‘깊은 심연’에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천마의 공격에 물의 정령왕 이퀘렐은 소멸 직전까지 몰렸다.
비록 천마를 죽여 정수를 되살렸으나, 온전히 부활시키긴 힘든 상황.
남은 정령왕들이 간곡하게 빌자 황금 정령은 이퀘렐를 되살려주었다.
“하지만, 다시 모습을 감추셨다.”
바람의 정령왕 샨디가 말하자 아그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 여자’의 몸에 깃들어계신다.”
“그 여자? ··· 설마 칠군주 바사라?”
“아아.”
칠군주 바사라는 황금 정령과 접촉했다.
이후 황금 정령은 바사라에게 깃든 상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켜보는’ 상태라고 해야할까.
‘무엇이 그분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멈춰있던 톱니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그니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깊은 심연.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
하지만 세계수가 솟아있고, 수많은 정령들이 남아있는 이상, 이곳은 죽음의 대지가 아니다.
아그니스가 결연한 의지를 담아 입을 열었다.
“이 땅에 우리의 탑을 재건해야겠군.”
“아그니스. 이곳 심연에······?”
“정령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이 아니야.”
순간 정령왕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그니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세계수가 곧 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과 세계수를 지킨다면, 우리의 계약자도 좋아할 테지.”
“‘팬텀’······ 말인가.”
다수의 정령왕과 계약한 유일무이한 남자, 박현명.
그가 팬텀이라는 걸 정령왕들도 알게 되었다.
팬텀 역시 이 땅이 버려지길 원하진 않을 터였다.
도리어 정령들이 수호한다면 기뻐하리라.
무엇보다, 세계수의 옆에 있으면 정령의 성장도 가속화되기 마련.
“또한······ 더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 역시 강해져야만 한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우리의 힘이 보탬이 되도록.”
“다시 이런 끔찍한 일을 겪을 수는 없으니.”
“······ 동의하는 바다. 아그니스.”
정령왕들은 의견을 모았다.
고작 삼군주 마몬 따위에게 정령탑이 농락당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게 할 수는 없는 노릇.
강해져야만 한다.
누구도 그들을 넘볼 수 없게끔, 강해져야만 했다.
정령왕들의 두 눈에 강렬한 의지가 깃들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갔지?”
그때 불현 듯 땅의 정령왕 움이 물었다.
현시점에서 ‘그’라고 표현할 존재는 한 명뿐이었다.
가라앉은 황제!
“그러고보니······.”
“모르겠군.”
다른 정령왕들도 고개를 갸웃했다.
상황이 종료되자마자, 가라앉은 황제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
그 시각.
가라앉은 황제는 제국에 있었다.
제국의 심장, 황궁에.
그곳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비치된 황제의 침실에 말이다.
“드디어 눈을 떴나.”
가라앉은 황제는 침대에 누워있는 한 남자를 바라봤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눈을 뜬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잠든 황제.
아르혼 제국을 건국한 뒤 오랜시간 잠들어있던 바로 그였다.
“너는······ 나로군.”
황제 역시 무덤덤히 가라앉은 황제를 마주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면 놀라워해야하기 마련이지만,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반응한 것이다.
스릉.
가라앉은 황제가 검을 뽑아들었다.
“모두 기억났다. 왜 내가 심연에 처박혀 있었는지, 왜 멸망한 세계의 기억을 갖고 혼자 떠돌고 있었는지.”
“······ 그것이 너의 운명이다. 심연 그 자체인 자. 심연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칠왕(七王) 중 한 명, ‘도플갱어 로드’여.”
황제가 가라앉은 황제를 향해 확신의 어조로 말했다.
틀림없는 ‘도플갱어 로드’라고.
심연에서 가장 강력하다 전해지는 일곱 명의 심연왕.
천축의 고래를 비롯한 경이로운 괴물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 존재가 바로 도플갱어 로드였다.
황제를 닮은 ‘가라앉은 황제’가 되어, 심연을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금 가면도 그의 세포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복제에 불과했으니.
검을 들어 위협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황제는 의연하게 기지개를 켰다.
“‘궤멸’이 될 운명은 소멸했다. 천상의 눈은 내가 아닌 ‘팬텀’을 보고있지. 이제야 비로소 나는 자유가 되었다.”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실로,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깨어났음에도 개운하기 그지없었다.
그 말을 듣고 가라앉은 황제가 무겁게 말했다.
“이 모든 게 전부 너의 계획이었다는 거냐?”
“그렇다마다. 이 모든 게 나의 계획이며,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네가 나를 이렇게 찾아온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전부 자신의 손바닥 안이다.
황제는 느긋하게 가라앉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도플갱어 로드.
놈은 자신의 운명을 탐냈다.
하지만 황제의 운명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고작 도플갱어 로드 따위가 훔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나눠담을 수’는 있었다.
궤멸의 힘을 ‘정통’이라 불린 ‘영혼의 정령’들에게 나눠놓은 것처럼.
황제는 도플갱어 로드에게 ‘기억’의 일부를 담았다.
“나의 세계는 천상에 의해 소멸했다. 과거로 ‘회귀’했던 내가 세계의 축을 망가트린 탓에. 그런데도 천상은 내 영혼을 탐했지. 감히······.”
가라앉은 황제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기억’이 흘러들어오고 있다.
곧 황제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천상은 그의 세계를 멸망시켰으며, 그걸로도 부족해 그를 멸망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 따위 운명을 황제가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하여 황제는 판게니아로 탈출한 것이다.
멸망이 멸망시키는데 실패한 유일한 세계로.
궤멸의 힘과 기억을 모조리 나눠버린 채.
그리고 지금, 궤멸의 업은 소멸했으며, 나눠담은 기억 또한 그의 앞에 서있었다.
모든 게 황제의 계획대로다.
적어도 지금까진 말이다.
“복수라도 할 생각인가?”
“허, 복수라.”
가라앉은 황제의 물음에, 황제는 비웃음을 흘렸다.
복수라면 ‘천상 부수기’를 할 것이냐는 말인데.
“난 천상의 주인이 될 것이다.”
황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천상을 부수는 것보다 그곳의 주인이 되는 게 훨씬 더 실효성이 넘치니까.
이미 그는 한 번 천상을 겪은 자.
그곳에서 탈출한 유일무이한 존재다.
당연히 천상을 정복하기 위한 방법도 알고 있다.
이어, 황제가 턱을 쓸었다.
“다만······ 방해자가 있군. 내 계획의 범위 바깥에 있는.”
궤멸의 업을 소멸시킨 존재.
팬텀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피로 태어난 누군가가 언젠가 궤멸의 업을 소멸시키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아예 예상치도 못한 존재가 궤멸을 소멸시키고 더 나아가 천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천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다시 한 번 세계의 축을 망가트려야하건만.’
도와줄 것 같진 않다.
아마도, 자신을 적대하겠지.
그리고 세계의 축을 망가트리기 위해선 기억을 완전히 되찾고, 판게니아와 심연 전부를 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필히 팬텀과 부딪힐 것이라는 사실.
어찌해야할까.
팬텀은 ‘천상’이 사라지길 원한다.
황제는 ‘천상’의 주인이 되길 원했다.
둘은 절대 양립할 수 없다.
회유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둘중 한 명은 죽어야만 끝나리라.
당장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미래에 둘은 부딪히게 될 것이다.
황제의 운명과 팬텀의 운명이 격돌하며 거대한 태풍을 낳겠지.
“······ 어이가 없군.”
돌연 가라앉은 황제가 말했다.
가만히 듣고있자니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잠든 이유는, 저러한 이유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도플갱어 로드는 네놈이다. 내 ‘힘’을 봉인한 육신이여.”
그저 힘을 봉인한 봉인구였던 탓에 잠든 것이다.
일체의 기억도, 의지조차 없는 산송장.
그가 가까이 다가가고나서야 완전히 눈을 떴으니 말이다.
둘 중 한 명이 ‘도플갱어 로드’라면, 당연히 기억을 가진 쪽이 진짜 아니겠는가.
잠든 황제는 그저 잠들어있었을 뿐.
게다가 가라앉은 황제는 심연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잠든 황제가 본체라면, 판게니아에 버젓이 살아있는 그를 천상이 가만 놔두었겠나?
또한, 황제의 피로 복제가 가능했던 것이야말로 놈이 도플갱어 로드라는 증거다.
이처럼 생김새는 같으나 둘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의지도, 목적조차도.
그러니.
“이제 그만 사라져라, 과거의 망령.”
스팟-!
가라앉은 황제가 검을 휘둘렀다.
*
“여왕님!”
“흐에에에엥!”
이세라와 루카리아가 하나에게 안겼다.
용신을 넘어, 지배자의 업을 지닌 하나.
그녀가 미소지은 채 아이들을 안았다.
예전과 같은 어색하고 딱딱한 얼굴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미소.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뼈로 이루어졌던 날개엔 흰색 깃털이 수북하게 쌓였다.
언뜻 보기엔 ‘천사’와 다를 바가 없어보일만한 모습.
누가 그녀를 칼날용신이라고 생각하겠나.
폭주했던 이세라도 돌아왔고, 다쳤던 루카리아도 모두 회복했다.
게다가 하나가 변하자 아이들과 마혈종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 다들 천사가 됐군.’
흰색의 앙증맞은 날개가 등 뒤로 돋아난 것이다.
마혈종이 아니라, 이제는 ‘천족(天族)’이나 천사라고 불러야 될듯싶었다.
기뻐할만한 소식.
미궁도시도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었으나,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바깥 공터로 나오자 무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한 남자가 있었다.
“라이가.”
“······.”
제국제일검, 라이가.
그가 제국을 벗어나 이곳 미궁도시로 온 까닭은 간단했다.
라이가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알비노······ 나보다 오래 살 줄 알았거늘.”
팔가의 대장로 알비노.
전설의 드루이드인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황금 가면이자 궤멸에게 상당한 타격을 준 채.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비노는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 그저 막아서려고 했지.”
“······ 왜냐.”
“라이가 너의 식구라고 생각했나보더군.”
“황금 가면······ 놈이 내 식구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지막 기억을 내가 알고 있는 건, 심상 안에서도 본능적으로 계속 미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령 놈이 나와 관계있다한들, 알비노가 전력을 다하지 못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알비노는 너를 가족이라고 말했다.”
“······.”
“미안하다. 내가 너무 늦어서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 젠장할.”
라이가가 입술을 깨물었다.
황금 가면이 사신교의 병사들로 미궁을 공격할 때, 라이가는 제국을 지키고 있었다.
제국의 귀족들과 병사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억제하였다.
만약 그가 억제하지 않았다면 수십배는 되는 병사들이 미궁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이어, 라이가가 시선을 옮겨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황금률의 드루이드······ 오주력이자 ‘염소’, 팬텀······ 그게 진짜 너의 정체인가?”
“······.”
“나의 제자로 들어온 것도 나를 속이고 기망한 건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나? 투신의 탑에 오를 때부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결국, 라이가도 알게 된 것이다.
진실을.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배신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피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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