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39)
439화 보고 싶었습니다
디트리히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일말의 현실감도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태초의 숲으로 들어와, 엘프들의 손님으로 대우를 받는 것만으로도 믿을 수가 없었건만.
디트리히는 여왕의 찬탈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건 팬텀이다.
대결의 도중 끼어들어 검을 넘기고, 더 나아가 왕위를 찬탈한 엘프의 손을 들어 여왕임을 선포하다니!
‘······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애초에 사람이 맞긴 한 걸까?
엘프들도 그를 ‘드루이드’라고 칭했다.
하지만 여왕은 어쨌든 인간이라고 말했다.
무엇이 맞는 말이고 틀린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지금과 같은 장면을 본 사람은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세르닐 왕국의 수호 성검을 쥐고서 말이다.
마치 진정한 주인을 찾았다는 듯이, 수호 성검은 제스스로 모습을 바꿔가며 아우릴의 손에서 휘둘러졌다.
이 모든 일들이 팬텀의 주도 하에 일어났다.
장면 하나하나가 도저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해적 여왕의 자식으로 태어나 수많은 이적을 보고 자라왔지만, 그 모든 걸 합쳐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 찬탈식 하나에 비하지 못한다.
“······.”
“······.”
엘프들 역시 디트리히와 마찬가지인 반응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자신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얼빠진 표정.
가장 놀라운 점은 팬텀의 말 한 마디에 엘프 전원이 무릎 꿇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엘프들은 하나같이 강하다.
디트리히는 어릴 때부터 해적들의 전투를 무수하게 경험했고, 여왕에 의해 훈련되었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엘프는 인간들의 강함을 아득히 초월해있어.’
인류의 숫자에 비하면 엘프의 수는 턱없이 적지만 한명 한명의 무력이 비교 불가한 수준이라는 걸.
어지간한 초월자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모든 엘프를 단 한 번의 말로 제압하다니.
‘······팬텀은 신인가?’
정말 신이라도 되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된다.
게다가 디트리히만은 무릎이 꿇려지지 않았다.
새로운 엘프 여왕에게 인간인 디트리히가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면 알수록 끝이 없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는다.
인간의 규격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야말로 일인군단.
짝!
디트리히가 손뼉을 쳤다.
짝짝짝짝!
그리곤 연달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여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의미도 있으나, 디트리히는 결심한 것이다.
‘나도······ 할 수 있어.’
아우릴의 상황은 디트리히의 상황과 닮았다.
주어진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왕위를 강제로 찬탈하는 모습이.
왠지 아우릴이 성공한 게 자신이 성공한 것 같아서.
“아······!”
“여, 여왕님이 패배하시다니······!”
“정말 새로운 여왕이 즉위하는 건가? 그것도 하이 엘프도 아닌 일반 엘프가?”
디트리히의 박수 소리를 듣고서야 엘프들은 정신을 되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현재의 여왕은 그들 대부분이 태어날 때부터 계속해서 여왕이었던 존재.
그런데 갑자기 여왕이 바뀐다고 하니, 현실성이 없게 느껴질 수밖에.
“이제 세계수의 앞에서 맹세해주시죠. 저를 여왕으로 인정하겠노라고.”
아우릴이 당차게 말했다.
비록 대결에선 승리했지만, 여왕의 계승은 오직 여왕만이 가능하다.
세계수의 앞에서 맹세해야만 세계수의 새로운 수호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여왕의 두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패배했으니 다른 가능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아우릴을 새로운 여왕으로 임명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그녀도 죽는다.
세계수는 오직 수호자인 엘프에게만 정기를 보낸다.
그 정기로 말미암아 여왕은 자신의 수명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살 수 있었다.
당연히 여왕의 직위를 넘기는 즉시 정기가 끊기며 흙으로 돌아가리라.
문제는······.
거절한다고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는 것.
‘날 죽일 거다. 어차피······ 살 수 없어.’
황금률의 드루이드.
그는 괴물이다.
또 다른 멸망인 궤멸을 죽였으니 그 힘은 일개 엘프 따위가 항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왕이라 해도 마찬가지.
그런 괴물이 자신을 무저갱과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부정하고 거부했다간 저 괴물에게 살해당할 터.
어차피 죽음이 확정되었다면······.
“······ 미안해요. 추태를 보였군요.”
그래. 인정하자.
여왕답게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여왕은 고개를 들었다.
“아우릴. 어릴 때부터 당신은 욕망이 강했죠.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아낼 정도로 비상한 데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주저함이 없었어요.”
갑자기 시작된 칭찬에 아우릴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전부 여왕님 덕분이에요.”
“아니요. 저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외지의 존재를 배척하는 게 숲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바깥세상을 경험한 아우릴은 비정상적인 속도로 강해졌다.
허나 어릴 적의 아우릴은 사고뭉치였을 따름이다.
다른 엘프들에 비교해서도 욕망이 강하고 무슨 일이든 빠르게 해결하려고 들었다.
겸손하지 않았고, 탐구심도 강했다.
이는 엘프에겐 금기시되는 것.
도리어 다크엘프에 가깝다.
그러한 욕구와 욕망들이 바깥세상을 접하며 극한으로 비대해진 건 아닐는지.
하지만 어쩌면 아우릴이야말로 엘프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일지도 모른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나.
그것을 겸손하지 않다고, 버릇이 없다고 비방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여왕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오랜 세월을 살며 생각이 굳어버렸습니다. 오직 저만이 세계수와 숲을, 엘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답니다. 그래서 쉽게 이 자리를 놓지 못했어요. 그런데······.”
아우릴을 올려다보며 여왕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곤 계속해서 말했다.
“······ 제 신념이 틀린 것 같군요. 아우릴, 당신이라면 태초의 숲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
“······ 여왕님.”
“아우릴 당신을 세계수의 수호자로, 태초의 숲을 지키는 여왕으로 임명하겠습니다. 부디······ 숲의 번영을 가져다주시길.”
휘아앙!
순간 여왕의 머리 위로 황금빛의 왕관이 나타났다.
황금률의 선으로 이루어진 왕관이다.
여왕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왕관을 아우릴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이로써 완벽한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 여왕님?”
아우릴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여왕.
아니, 전대 여왕의 피부가 급속도로 노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푸석푸석해진 피부가 마치 마른 사막같이 갈라진다.
두 눈의 동공도 생기를 잃어갔다.
원래의 시간을 되찾은 여왕이 숲으로, 흙으로 돌아가려는 징조.
“여러분과 함께라서 행복했습니다.”
여왕이 마지막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추태를 보였지만, 마지막만큼은 품위를 지킬 작정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면 살수록 생존에 대한 욕구는 커졌다.
여전히 살고 싶지만······ 살아남을 수 없음을 직감했으니.
그 순간이었다.
죽음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
그가.
팬텀이 말했다.
“아쉽군. 여왕의 직위를 그냥 넘겼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 그게 무슨 소리죠?”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살 방법이 있었다니?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그녀가 살아남을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걸 생각하고 계산하여 행동한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를 안 주지 않았나? 계승이 대결의 형태로 진행된 탓에 내가 손쓸 방법이 없어졌다. 세계수도 마찬가지고.”
“······손 쓸 방법이 있었다는 건가요?”
“있었지. 여왕이 꼭 한 명이어야만 한다는 법은 엘프들에게나 있지, 적어도 세계수에겐 없으니까 말이다.”
“······!!!”
“아우릴이 여왕이 되면 세계수는 회복된다. 도리어 전보다 힘이 넘치겠지. 너의 수명 정도는 가볍게 연장할 수 있었을 터.”
아······!
간과했다.
현재의 세계수는 이미 힘을 잃을 대로 잃었다는 사실을.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정기 또한 넘쳐나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그는 황금률의 드루이드다.
드루이드는 세계수의 씨앗을 옮기는 종족.
세계수의 정보에 대해선 가장 빠삭할 수밖에 없다.
설령 그가 인간이라 하더라도, 드루이드의 자격을 갖추게 된 이상 본능적으로 세계수에 대해 파악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미 여러 그루의 세계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거짓은 아니리라.
“아쉽군.”
······아쉽다고?
그럼 이걸 왜 이제야 말해준단 말인가.
미리 말해줬다면, 거리낌 없이 새로운 여왕을 찾아 뽑았으리라.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엘프로 콕 집어서 말이다.
대결을 펼치며 모든 걸 잃어버린 셈이었다.
······살 방법이 있었다.
없는 줄 알았는데.
확정적인 죽음 외에는 길이 없다고 여겼는데!
‘살 수 있었다니!’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너무 늦은 후회였다.
스르르르!
몸이 흙으로 변해간다.
이제는 입도 뻥긋 할 수 없었다.
‘아, 안 돼······!’
*
아우릴이 여왕이 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화친이다.
같은 숲의 종족인 드라이어드들을 태초의 숲 내부로 들이고, 손님으로 맞이해준 것이다.
“하하! 형제여!”
“롬멜. 오랜만이로군.”
“아마도 균열의 탑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지?”
하이 드라이어드 롬멜.
바스락 숲의 왕인 그가 나를 보자마자 격하게 껴안았다.
그나저나 란돌프가 아닌 박현명의 모습임에도 한번에 알아볼 줄이야.
내가 바스락 숲에 있는 신록의 주인이라서 그런걸까?
“미궁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고 들었다. 왜 우리를 안 불렀는가, 형제여?”
무척 섭섭하다는 표정.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들은 신록을 지켜야하니 어쩔 수 없지.”
“무슨 소리! 형제가 부른다면 우린 땅끝이라도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다!”
피식 웃고 말았다.
아주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시여.”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아우릴이 있었다.
“음?”
“한 가지 여쭈어보고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되묻자 아우릴이 잠시 망설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란돌프님이십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전대 여왕님과의 대결이 끝나고 제 팔을 붙잡았을 때 느꼈습니다. 언젠가 비슷한 느낌을 란돌프님에게 받았던 것을요.”
과연.
한창 바쁠 시간에 굳이 나를 찾아와 물어본다는 건 이미 확신하고 있다는 뜻일 터이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란돌프다.”
“아······!”
아우릴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곤 .
덥썩!
“보고싶었습니다, 란돌프님!”
“헉······!”
툭!
아우릴이 나를 끌어안자, 디트리히가 쥐고있던 수호 성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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