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38)
438화 패배
값싼 아우릴의 도발.
여왕은 이맛살이 찌푸려지려는 걸 겨우 견뎌냈다.
‘감히······!’
아우릴이 세계수의 축복을 받도록 한 건 전적으로 여왕의 의지였다.
전쟁 이후 많은 엘프가 죽었고, 전력이 약화했다.
누가 태초의 숲을 다시 노려올지 모르는 상황.
강한 전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여왕은 일반 엘프인 아우릴에게 하이 엘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아우릴로 말미암아 다른 엘프들도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욕심이 지나치구나, 아우릴.”
축복을 부여하고, 힘을 주었는데 그 결과가 이것이라니.
그것도 여왕의 자리를 하이엘프도 아니고 일반의 엘프가.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다.
“인간과 어울리더니 욕망이 생긴 거니?”
“어릴 때부터 생각했죠. 왜 이 숲은 정체된 건지.”
아우릴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검술의 실력은 제법이었지만,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그녀의 어미나무인 월계수 나무와 잎이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우릴이 성장이 더뎌서만은 아니었다.
잎을 성장시키는 축복과 재료들은 모두 하이엘프들만 누리는 특권.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것은 그로 인한 차별 탓이었다.
“엘프와 하이엘프의 차이는 뭐죠? 왜 우리들은 강제로 이 숲에만 있어야 하는 걸까요?”
게다가 세계수가 죽어가고, 지력이 다해 모든 나무와 숲이 힘을 잃었다.
어미 나무가 죽으면 엘프도 함께 죽기 마련.
그런데도 하이엘프는 자신들의 특권을 놓지 않았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미나무를 지력이 강한 곳으로 옮기면 된다.
문제는 그마저도 허락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엘프는 오직 태초의 숲에만 있어야 하므로.
폐쇄적이고, 외부의 모든 존재를 경계한다.
그러나 아우릴은 보았다.
“여왕님께선 무엇이 두려운 거죠?”
여러 종족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미궁에서 충분히 보고, 느꼈다.
무엇보다 란돌프와 함께하며 아우릴은 성장했다.
어미나무 역시 생기를 되찾았다.
축복을 받지 않고, 지력이 강한 곳으로 옮기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됐다.
어미나무의 상태가 엘프에게 영향을 끼치듯, 엘프의 상태도 어미나무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무엇이 두렵냐니?”
“바깥세상에서 저는 강해졌습니다. 제 어미나무 역시 꽃을 피웠죠. 수많은 욕망들이 처음에는 두렵게 느껴졌지만, 욕망 없는 존재는 결코 강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처음 만난 란돌프는 두렵기만 했다.
그토록 거대한 욕망의 덩어리는 마주한 적이 없으므로.
그러나 그와 함께한 짧은 시간 동안 아우릴은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만약 계속해서 숲에 남아있었다면 아우릴은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바깥세상은 욕망의 구렁텅이란다. 엘프들은 살아갈 수 없어. 아우릴, 네가 경험한 건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허나 여왕은 부정했다.
다른 존재들의 욕망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엘프와 숲을 지키려거든 최대한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여왕은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세계가 멸망한 뒤 나는 전대 여왕으로부터 오직 이 숲과 세계수, 엘프만을 생각하고 지키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단다. 지금이야 이곳은 우리에게 낙원이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
“이상하군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있지만 여왕님이 숲을, 세계수를, 엘프들을 죽이고 있지 않나요?”
“······ 오해란다. 그리고 제대로 여왕의 자격을 갖춘 엘프가 나타나면 미련 없이 계승해줄 생각이란다.”
“자격을 갖춘 ‘하이 엘프’이겠죠.”
일반 엘프에겐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아우릴은 확신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의지를 돋우며 검을 겨눴다.
“세계수의 앞에서 저 스스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여왕님.”
“···끝까지.”
여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한 말을 무를 수도 없고, 아우릴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은 해결 방법은 하나뿐.
스릉!
여왕이 검을 쥐었다.
세계수의 검. 오직 여왕에게만 허락된 전설의 무구를.
*
아우릴은 이미 한 번 엘프들을 이끈 경험이 있다.
심지어 여왕마저도 자신의 휘하에 넣고 움직인 경험이 있었다.
‘세계수의 던전에서 내가 아우릴에게 단장직을 맡겼었지.’
솔직히 그때부터 여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엘프들을 헤집어놓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지만, 그런 것치곤 상상 이상으로 아우릴은 단장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걸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요.”
디트리히가 넋을 놓곤 중얼거렸다.
엘프 여왕의 전투를 누가 바로 앞에서 볼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냥 전투도 아니고, ‘왕위 찬탈 전투’였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자.
새로운 여왕이 되려는 자가 서로 맞붙고 있다.
“동질감이라도 느껴지나?”
“예. 조금은······ 그렇습니다.”
디트리히도 세르닐 왕의 자리를 찬탈했다.
물론 아직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다.
지금쯤이면 성검을 훔친 죄로 왕국 전체에 수배가 걸렸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디트리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전투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제발 아우릴이 승리하길 기원하고 또 기원하는 것이리라.
그녀가 자신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할 터이니.
“아······!”
디트리히가 탄식했다.
촤악!
아우릴의 어깻죽지가 길게 베여나갔다.
역시 여왕은 여왕이다.
전성기 시절에 비교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엘프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자 다웠다.
그러나 아우릴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급히 한 발자국 물러나서 방어의 태세로 전환한 아우릴이 조용히 틈을 노렸다.
이에 여왕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아우릴을 밀어붙였다.
챙! 챙! 채채챙!
검이 부딪힐 때마다 폭풍과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진심이로군.’
아우릴은 진심으로 여왕이 될 생각이다.
하지만.
“아, 안돼!”
······부족하다.
아우릴은 강하지만 여왕은 더 강했다.
차아앙!
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아우릴은 이내 맨손이 되어버렸다.
놓은 검 또한 검신이 뭉개질 대로 뭉개진 뒤였다.
기사의 싸움에서 검을 놓은 것은 패배를 의미한다.
“···더 할 생각이니?”
“예!”
하지만 엘프의 싸움은 다르다.
특히 아우릴은, 자신이 죽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두 눈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식지 않았다.
여왕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변화를 바라는 바람이.
허나 이대로 부딪히면 아우릴은 필히 죽는다.
“잠깐.”
“······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
“너무 아우릴이 불리한 싸움 아닌가?”
“왜 그렇게 생각하죠?”
여왕의 물음에 나는 그녀가 쥔 검을 가리켰다.
“모든 엘프의 검은 어미나무를 재료의 하나로 사용한다고 들었다. 맞나?”
“그게 무슨 문제라도?”
“너의 검은 세계수로 만든 검이다. 이 숲의 나무들은 세계수의 자식이니, 당연히 부딪히면 깨지는 건 아우릴의 검일 수밖에.”
“그런 건 실력에서 밀린 자의 푸념일 뿐입니다.”
“그래? 그럼 내 검을 아우릴에게 쥐여 줘도 상관없겠지?”
“······ 그래야만 인정할 수 있겠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여왕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야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아우릴을 상대로 패배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든 덕이었다.
자. 그럼 무슨 검을 아우릴에게 주어야할까.
인내? 겨울?
그건 나밖에 못 든다.
잠시의 고민 끝에, 나는 디트리히에게서 성검을 빼앗았다.
“검 좀 빌리마.”
“엇······!”
그리고 쥔 성검을 그대로 아우릴을 향해 던졌다.
“마, 만지면 안 되는······!”
디트리히가 경악을 내질렀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다.
아우릴이 수호 성검을 쥐었다.
그 즉시.
후우우우웅!
수호 성검이 몸을 거칠게 떨기 시작했다.
검신이 흔들리며 사방으로 검강이 솟구친다.
검의 형태도 조금이지만 변했다.
더 날카롭고, 더 예리하게.
‘역시 수호 성검은 엘프의 검이었군.’
태초의 숲 제단에 있는 열쇠.
그러나 단순히 열쇠인 것만은 아니었다.
수호 성검은 지금 엘프 여왕이 쥐고 있는 검과 비슷한 맥락의 검이다.
멸망이 출현하기 훨씬 전 엘프가 사용한 검 말이다.
지금은 죽고 없어진 세계수를 재료 삼아 만들어졌을 터.
“······황금률의 드루이드께선 매번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하지만, 그래 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엘프 여왕의 입가에 미소가 지워졌다.
아우릴이 쥔 검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래 봤자 순수한 실력의 차이는 이미 입증됐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대결.
“아아!”
“뭐, 뭐야!”
“엘프가 어떻게 여왕님을······!”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우릴의 검세가 달라졌으니까.
검을 쥔 기세, 검을 나누는 그 실력의 간극이.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하게 좁혀졌다.
이에 조급해진 건 여왕이다.
압도적으로 찍어 눌러도 부족한 판국에 비슷한 실력을 선보이다니.
그러한 조급함은 결국 패배를 낳았다.
채엥!
바닥으로 날아간 검.
어느덧 목에 겨누어진 아우릴의 성검.
“패배를 인정하시죠. 여왕님.”
“······.”
“세계수의 앞에서 맹세하신 것 아닌가요? 설마 아니었다고 하실 생각은 아니겠죠?”
실망 어린 눈빛으로 아우릴이 말했다.
하지만 여왕은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과 눈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결판은 났다.
이전의 여왕은 사라지고, 이 숲은 이제 아우릴이 이끌게 될 것이다.
“검, 검이······ 그 검 때문에······.”
“그런 건 실력에서 밀린 자의 푸념이라 하지 않으셨나요?”
맞다. 엘프 여왕은 검의 등급이 결과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 걸 따지는 건 약한 자들 뿐이라고 말이다.
“내가······ 질 리가······.”
여왕은 끈질겼다.
하기야,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닥쳤으니.
영원토록 영위하려던 여왕의 자리를 반납하게 생겼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프들도, 하이엘프들도 전부 자신이 본 걸 못 믿는 눈치였다.
이쯤 해서 한 번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무겁게 말했다.
“꿇어라.”
쿵!
“······ 커헉!”
“악······!!”
엘프와 하이엘프 할 것 없이 동시에 무릎을 꿇는다.
강제로 무릎이 꿇리자 비명을 내질렀다.
엘프여왕조차도 나의 ‘언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느덧 모든 엘프가 아우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엘프여왕을 바라보았다.
“아······.”
나를 바라보는 엘프 여왕의 눈에는 어느덧 두려움이 들이닥쳤다.
쉴 새 없이 흔들린다.
마치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
엘프 여왕은 항거할 수 없는 언령의 공포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아우릴의 팔을 들어 올리고 선언했다.
“엘프들이여, 너희의 새로운 여왕을 맞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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