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t, Might, Mayhem RAW novel - Chapter (209)
남령(藍靈).
산해경에서 이르길 그 원한의 뿌리가 잊혀지지 않는 통곡에 가깝고, 존재의 여부가 삼백여 년 이상에 달하는 오래된 원혼이라 한다.
이미 남령에 이른 순간부터는 영적인 범위를 넘어서 그 격이 고위 이매망량인 요수(妖獸)나 마수(魔獸)와도 비견될 만큼 극도로 위험하다고 평한다.
그것은 하나의 움직이는 소재해(小災害) 그 자체이기에 제령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되어 있다.
-쏴아아아아아!
쏟아지는 빗줄기들이 온통 피로 물들어 세상에 핏빛으로 가득하다.
역한 피비린 내와 함께 들썩이는 핏물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로 하여금 섬뜩한 공포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소위 고수라 할 수 있는 섭춘과 몽무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환상인가? 실제인가?
환상이라고 하기에 오감 전체가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으윽.”
-첨벙.
“아, 아가씨!”
이들조차 이렇게 놀랄 지언데 평범한 인간인 장원 주인의 여식 우향이 이를 보며 견딜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쓰러진 그녀를 황급히 부축하는 장정조차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어디로 눈을 둘지 몰라 위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게 대체 뭐지?’
파계승 자금정은 영력이 개안하여 죽은 이들이나 괴이(怪異)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런 그조차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사방이 피로 물들 것은 그저 환상이 아니라 저 원혼의 영력이 이 공간 자체를 장악한 걸로 보였다.
‘이건 단순한 원혼으로 치부하기에는…..’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힘만 보더라도 위험하다는 선을 넘어섰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파계된 이후 처음으로 아미타불이라는 말이 나올 뻔 했다.
-후우.
바닥에 고여 있던 핏물 속에서 완전히 현신한 청령이 곰방대를 입에서 떼며 자욱한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더니 그녀가 입 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며 말했다.
-상쾌하구나.
오랜만에 모든 영력을 개방하고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였다.
천지회 내에서는 최대한 영력을 억압하고서 스스로를 숨겼었지만 이곳에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모든 족쇄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이런 그녀에게 목경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청령에게 맡겨도 괜찮겠죠?”
-그러려고 본좌를 부른 게 아니더냐? 후후후.
청령이 여유롭게 웃으며 어느새 피비로 불이 꺼져버린 본당 앞에 서있는 장원 주인에게 깃들어 있는 원혼을 바라보았다.
원혼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만큼 두 원혼 간에 격의 차이는 확연했다.
한 쪽은 삼백여 년 이상의 원한을 가졌다는 남령(藍靈)급이었고, 또 다른 한 쪽은 그 원한이 백여 년에 이른 청령(靑靈)급의 원혼이었다.
‘어떻게 이런 존재가?’
장원 주인에게 깃든 청령급의 원혼이 내심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이런 존재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했었다.
참으로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청령급의 원혼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대 같은 존재가 어찌 한낱 인간들과 함께 이런 곳에 강림한 것이오?
-그건 네가 신경 쓸 바 아니지.
-……..
청령의 말에 청령급의 원혼이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
격의 차이가 확실하기에 섣불리 대했다가 사달이 벌어질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첨벙!
그때 방사 이문해에게 빙의해있는 원혼이 핏물이 고여있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말했다.
“격이 높은 원혼이시여. 원한으로 이승에 남아있는 저희라고 할지언정 서로의 영역과 한을 침범하지는 않습니다.”
-침범?
“이곳은 백여 년이 넘게 하윤님의 영역이었습니다. 부디 이분의 한을 존중하시어……”
-어른들이 얘기하는데 아이가 끼어드는구나.
-슥!
그 말과 함께 청령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바닥에 고여있던 핏물에서 스멀거리며 피로 만들어진 손들이 튀어나왔다.
-파파파파팍!
그러더니 피로 물든 손들이 이내 방사 이문해에게 빙의해있는 원혼의 팔과 다리를 붙들었다.
“어, 어찌!”
-아가는 빠져라.
청령이 손을 움켜쥐는 시늉을 하자,
-솨아아아아아아!
“아 안 돼에에에에에!”
피로 물든 손들에 붙들려 있던 이문해에게 깃들어 있던 원혼이 육신 채로 바닥의 핏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마치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는 심해라도 된 듯이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한순간에 주령 급의 존재가 당한 것을 본 장원 주인의 육신에 깃들어 있는 청령급, 아니 하윤이라 불린 원혼의 표정이 굳어졌다.
원혼들 역시도 오래 된 존재일수록 상호 간에 존중이라는 것이 생긴다.
그도 그럴 것이 격이 높아지면 원한과 본능에 휘둘리는 것을 넘어서 이성과 자아가 뚜렷해진다.
이매망량의 영역에까지 이른 고위 급 원혼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눈앞의 이 남령 급에 이른 존재는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대놓고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격이 높은 원혼이여. 그대와 나는 척을 지지 않았는데 어찌 나의 영역에까지 들어와 이렇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오?
-적의? 너는 이게 적의로 보이는 것이냐?
-적의가 아니라면 어찌 이에 관여하는 것이오? 이것은 이들 우가(澞家) 일족이 벌인 업(業)으로 벌어진 일이오.
-그렇겠지. 아무 이유없이 너 같은 존재가 움직일 리가 있나?
하윤은 청령 급에 이르는 격이 높은 오래된 원혼이었다.
그런 존재가 직접적인 원한이 엮인 것도 아닌데, 한 집안을 저주로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그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일일이 감안한다면 자신들이 물러나야 한다.
그렇기에,
-하나 이쪽도 나름의 이유가 있거든.
-이유?
-그래. 이 일대의 주인인 네 체면을 봐서라도 권유토록하지. 이 정도에서 끝내라. 당장 그 자의 몸에서 나와.
자비를 베푼다는 듯한 청령의 말에 원혼 하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자신의 영역이었다.
우가 일족이 벌인 일로 인해 이 일대의 수많은 원혼들이 분노하고 있었고, 그들의 분노가 집대성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한데 그런 자신들의 한에 함부로 관여하려 하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격이 높은 원혼이여.
-……..
-그대는 누군가에게 억눌려 그대가 가진 한을 포기할 수 있소?
한(恨).
그것은 원혼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한을 풀려고 하는 원혼더러 그것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지우라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런 하윤의 말에 청령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격이 낮은 원혼은 힘에 억눌려서 스스로의 의지를 접는 경우가 있지만, 확실히 청령급에 이를 정도의 깊은 원한을 지닌 원혼은 달랐다.
아무리 힘의 격차를 알더라도 쉽게 굽히지 않았다.
더군다나 토착하여 지박령 형태로 자신의 영역을 가진 원혼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별 수 없네. 그럼 힘으로 굴복시키는 수밖에.
이런 청령의 말에 원혼 하윤이 노려보며 말했다.
-그대가 격이 나보다 높고 강한 것은 인정하오. 하나 이 일대 전체는 나와 우리들의 영역. 아무리 그대라고 해도 영력으로 만든 그 영역이 내게 미칠 것 같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였다.
-쿠르르르쾅쾅!
천둥 소리와 함께 빗발이 거세졌다.
피로 물들었던 사방에서 번개 빛이 일어났다.
그러자 뭔가 균열이 일어나듯이 공간이 일렁이며 흔들렸다.
“뭐죠?”
목경운의 물음에 청령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영역 침범이다.
“영역 침범?”
-녹령(綠靈) 급 이상의 격을 가진 원혼은 자신의 한(恨)이 깃든 일대를 벗어나도 영력으로 스스로의 영역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귀의영역.”
이건 알고 있었다.
격이 높은 고위 원혼의 강한 념(念)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귀의영역(鬼意領域)이었다.
-이곳은 한이 맺힌 놈의 영역이다. 그게 본좌의 귀의영역과 부딪쳐서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령이 자신의 영력으로 스스로의 귀의영역을 만들어냈다면, 원혼 하윤은 영력이 아닌 자신의 한이 깃들어 있는 이 일대 전체가 고유영역이었다.
고유영역은 그 원혼의 한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에 영력이 극대화된다.
그렇기에 원혼 하윤은 이곳 일대 전체를 자신의 영역이라 칭한 것이었다.
-흐으으으으으!
-우우우우우우!
사방에서 수많은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이 일대 주변으로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원혼들이 몰려와 있었다.
격이 낮다고 하나 이 정도 수는 시혈곡 절벽보다도 많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 죽었던 걸까?
‘우라질. 이거 너무 많잖아.’
원혼들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파계승 자금정이 혀를 내둘렀다.
여기가 정말 인간들이 사는 곳인지 아니면 지옥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사방이 원혼들로 가득 차고 있었다.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정말 저놈이 이걸 해결할 수 있을까?
의아해하던 차였다.
-격이 높은 원혼이여. 아까 그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리다. 당장 이 일대에서 벗어난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꽤 득의양양해졌네?
-그대의 체면을 봐서 권유하는 것이오. 이제 물러나시오. 우가 일족은 스스로가 저지른 업을 받아야 하오.
-쿠르르르쾅쾅!
사방에서 천둥번개가 치며 핏빛으로 물든 주변이 울렁거렸다.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원혼들도 그렇고 당장에라도 이 영역을 밀고 들어올 기세였다.
그때 청령이 입 꼬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이내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네게는 본좌의 영역이 이게 다라고 생각하느냐?
-이 일대 전체가 나의 영역이오. 그대가 아무리 영력을 더욱 높인다고 해도 결국은…..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 순간 하늘을 어둡게 물들이던 검은 구름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더니 본당 건물 주변에 그쳤던 피비가 삽시간에 마을 전체로 퍼져나가더니 인근 이백여 장이 온통 핏빛으로 번져갔다.
‘이, 이게 대체……’
원혼 하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일대는 자신과 수많은 원혼들의 한이 깃든 곳이었다.
그런 고유영역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이 일대 전체를 자신의 귀의영역으로 뒤덮어버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청령이 들고 있던 곰방대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둥둥!
세차게 내려치던 핏빛 빗줄기가 갑자기 멈췄다.
핏빛으로 촘촘한 방울들이 허공에 멈춘 이 광경은 그야말로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청령이 웃으며 곰방대를 휘저었다.
그 순간,
-솨아아아아아아!
멈췄던 핏방울들이 역으로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역으로 솟구친 핏빛 빗방울들은 장원 전체를 에워싸고 있던 원혼들을 향해 난사되듯이 날아들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팡!
이로 인해 몰려들었던 원혼들의 영체가 갈가리 찢겨나갔다.
압도적인 영력에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핏방울들을 견디지 못한 원혼들은 결국 혼비백산 흩어지고 말았다.
-!!!!!!
이 광경에 원혼 하윤의 얼굴이 비참하리만큼 일그러졌다.
‘……..고유영역마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이건 너무도 압도적인 격이었다.
아무리 격이 남령(藍靈) 급에 이르렀다고 해도 이건 너무 상상 이상이었다.
청령이 당혹스러워하는 원혼 하윤에게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쩌지? 이제 이곳 일대가 전부 본좌의 영역이구나.
-………
그녀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원혼 하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격차는 너무 컸다.
그때 목경운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이제 마무리 하시죠.”
-그럴 참이다.
원혼 하윤이 떨리는 눈으로 목경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체 저 인간의 정체가 뭐지?
어떻게 이런 격이 높은 원혼이 한낱 인간따위의 명을 따르는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끝
ⓒ 한중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