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of the Fox RAW novel - Chapter 11
11화
“뭐냐, 이 상황…?”
깜깜한 집안. 스탠딩 스탠드의 은은한 불빛만이 유일한 어두운 거실에서 쇼파에 앉아있던 재신이는 현관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말없이 나와 지호를 번갈아보던 녀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둘이 같이 들어오는 거고, 왜 원지호가 누나를 업고 있는 것이며, 누나 네 꼴은 왜 그 모양인 건데?”
납득이 가게끔 설명을 해보라는 듯, 쇼파에서 일어선 녀석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입을 열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나와 지호가 엮이는 걸 유달리 싫어하는 재신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설명을 하든지 녀석은 납득하려들지 않을 것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화가난 듯, 재신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째,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가는 것 같다. 집에 도착했으니 이제 나를 내려줘도 됐지만, 지호는 등에 업힌 나를 내려주지 않았다.
“야, 백재신.”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은 지호의 무심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업혀 있어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 톤이 한층 더 자세히 들렸다. 몰랐는데 녀석의 목소리는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개소리 집어쳐. 발 때문에 업은 거니까.”
귀찮은 말투의 지호의 말에 재신의 시선이 잠깐 내 발에 닿았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심하게 부어있는 데다가 피딱지까지 얹혀있는 발목에 할 말을 잃은 듯, 재신이는 말이 없었다. 다만, 못마땅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짜증나는 것처럼.
“내려놔.”
“…….”
“알았으니까 누나 내려놓으라고.”
낮게 깔린 재신의 목소리에도 지호는 날 내려놓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마치 기싸움이라도 하는 것마냥, 팽팽한 신경전이 오갔다. 평소라면 이들 사이에 껴들어 중재라도 했을 텐데, 온몸의 힘이 빠져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그저 얼른 방에 들어가 눕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후우―야. 얘 발 다쳤댔잖아. 못 걷는다고.”
지호는 성가신 듯, 짜증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백재신은 나와 원지호가 엮이는 게 정말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어느새 지호의 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업을게. 됐지? 이제 내려놔.”
세상에…….
날 대하는 백재신의 평소 모습으로 미루어볼 때, 녀석은 절대 내가 다쳤다고 순순히 등을 내줄 녀석이 아니었다. 내 발이 완전히 부러졌거나, 자신의 눈앞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한, ‘그냥 걸어. 안 죽어.’라 말하며 시큰둥하게 반응할 녀석이었다. 그런 재신이가 너무나 쉽게 나를 업어들었다. 등에서 등으로. 단지 나를 업은 사람이 바뀌었을 뿐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어제 나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했던 재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독 지호에 관해서만 유난을 떨어댄다. 재신이가 이토록 지호를 경계하는 이유가 뭘까. 녀석은 왜 이렇게 지호와 내가 엮이는 것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희수라는 그 여자애 때문일까.
“진짜 지랄이다.”
기가 차다는 듯, 지호는 낮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 상황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무슨 짐짝마냥 사람을 등에서 등으로 옮겨주는 것도 이상하고, 그 일을 자처한 재신이도 녀석의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될 터였다.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있든, 지호의 장난스런 말에 얼어가던 분위기가 완화된 것은 명백했다. 재신이 역시 픽―웃더니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는 내 방이 있는 2층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분명 녀석은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눈이 마주치면, 왠지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아, 졸라 무거워! 아오. 살 좀 빼, 돼지년아.”
계단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뒤에서 지호가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힘든 내색을 전혀 안 하던 백재신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짐짝마냥 나를 침대에 내팽개쳤다. 아무리 침대로 떨어졌다하더라도 멍하니 빼놓던 정신 상태에서 몸에 가해지는 갑작스런 충격으로 인해 엉덩뼈가 아려왔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럼 그렇지. 네가 곱게 업어준다고 할 때부터 어째 이상하다했다.
“원지호 허리 안 부러졌대? 이야…어떻게 널 업고 여기까지 왔대냐. 독한 새끼. 나 몰래 뭐 보약이라도 챙겨 먹는 거 아니야? 야야, 나 손 떨리는 거 보이지. 아오, 허리야….”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오는 데에 걸린 10분 남짓한 시간에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지호였다. 그의 등에 업혀있는 내내, 운동하는 남자는 역시 다르구나―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성급한 일반화였던 모양이다. 층계도 얼마 안 되는 계단, 그 몇 걸음 날 업고 올라왔다고 저리도 유난을 떨어대는 재신이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내가 창피해졌다.
“나가. 나 잘 거야.”
피로가 몰려왔다. 발도 너무 아프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우선 지금 입고 있는 이 찝찝한 옷들부터 갈아입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백재신은 나갈 생각도 않고 멀뚱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뭔가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 사람처럼.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말해주냐?”
예상대로 백재신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비단, 궁금증이나 호기심뿐만 아니라 왠지 모를 조바심이나 걱정스러움이 묻어난 눈으로 날 지그시 바라보는 재신이를 향해 난 그저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하루가 나에게는 마치 1년 같았다. 하루 동안 나에게 벌어진 엄청난 일들은 나 스스로 감당하기도 힘들었다. 나 혼자 추스르기도 벅찼다. 평소에 이혜준을 무한 신임하던 백재신에게 오늘 일을 얘기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늘 이혜준 편을 들었던 재신이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행동할지가 궁금하긴 했지만 모든 걸 내입으로 말하기엔 눈앞의 현실이 너무 잔인하기만 했다.
“알았어…쉬어. 오늘 좀 이상하다, 너.”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는지 재신이는 생각보다 빨리 꼬리를 내렸다. 예상대로라면 칭얼거리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줄 때까지 안 나간다고 버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다만,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방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재신이가 방을 나가고 나서야 온전히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다시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까 너무 오열을 한 탓일까, 울음이 나오진 않았다. 다만 조금 휑하고 슬퍼질 뿐. 옷 갈아입을 생각도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온갖 생각들이 뒤엉킨 실들처럼 아무렇게나 꼬여있는데, 이상하게도 이혜준 생각은 별로 나질 않았다. 그렇게나 많이 좋아했던 사람인데. 첫사랑에게 배신을 당한 건데. 아까 쏟아냈던 눈물과 함께 리셋이라도 시켜버린 건지, 그에 대한 분노나 원망 따위의 감정도 들지 않았다. 다만, 왜일까. 녀석의 고백이 떠올랐다. 내내 그칠 줄 모르던 내 눈물을 한순간에 멈추게 해버린 지호의 고백이.
‘울지 마요. 다른 새끼 때문에.’
“어째서 넌…….”
너무 놀라서 입도 못 다무는 나를 향해 넌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어버렸다.
“진짜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몇 번 마주친 적도 없다. 해봤자 가끔씩 집에 놀러온 그를 어쩌다 한번 봤을 정도. 심지어 내가 자취를 시작한 이후로는 더 본적이 없었다. 이번에 보게 된 것도 거의 1년하고도 반년만에 본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이 나를 좋아할 이유도, 시간도 없다.
그런데…어째서 자꾸 생각이 나는 걸까. 진심이 아닐 텐데. 아닐 수밖에 없는데. 그저 바보 같이 울고 있는 나를 멈추기 위해서 한번 말해본 것뿐일 텐데…왜 이렇게 생생할까. 너와 눈을 마주쳤을 때의 그 공기, 그 온도, 그 느낌까지도. 왜 이렇게…아까 그 차분히 가라앉아있던 너의 눈이 자꾸 떠오를까.
창 밖에는 쉴 새 없이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왠지 이번 장마가 내겐 유난히 길게 느껴질 것 같다.
* * *
“야야, 누나. 정신 좀 들어?”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어렴풋이 뜬 시야로는 익숙한 내 방 천장이 보이고, 힘겹게 고개를 돌려보면, 걱정스런 얼굴의 재신이가 있다.
“괜찮아? 나 보이긴 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고 싶은데 온몸의 힘이 빠져서 기운이 하나도 없다. 날이 밝은 걸 보니 출근도 해야 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어질어질한 게 정신이 혼미하기만 하다.
“몇…시…….”
“지금 몇시냐고? 네 시야. 오후 네 시.”
아침치고는 너무 환하다 했더니, 오후였던 모양이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직 두 번밖에 나가지 않았는데, 무단결근이다. 출근 생각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지만 온몸이 물에 젖은 솜마냥 축―늘어져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야야, 왜 일어나려고 해! 그냥 누워있어.”
몸을 가누기 버거운 나를 알았는지 백재신은 다급하게 말하며 내 어깨를 가볍게 눌러 침대에 눕혔다. 감기라도 든 것일까. 머릿속이 윙윙―울리고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학교는…….”
“출근? 걱정 마. 내가 태수형한테 연락해놨어.”
다 갈라진 목소리로 띄엄띄엄 내뱉는 내 말을 재신이는 용케 알아들은 듯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재신이가 태수 오빠에게 연락은 해둔 모양이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왠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정말 잘 해내고 싶었는데 초반부터 농땡이를 치는 것마냥 나를 믿고 일자리를 내준 태수 오빠에게 어째 번번이 민폐를 끼치는 것만 같다.
“너…학교는…?”
아직 네 시면 개인연습은커녕, 정규 트레이닝 시간도 끝나지 않았을 시각인데 재신이는 교복 차림이었다.
“야, 지금 학교가 문제냐? 누나, 네가 그 모양인데 내가 어떻게 학교를 가!”
평소엔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동생이었지만, 그래도 핏줄은 같은 핏줄이었나 보다. 걱정스런 얼굴을 애써 숨기려 노력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재신이로 인해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했다.
“누나, 오늘 아침에 응급실 갔다 온 건 아냐? 미쳤어? 어제 그 물에 빠진 생쥐꼴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드는 미친년이 어디 있어?!”
어제 분명 잠깐만 침대에 누웠다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침에 응급실까지 갔다 왔다니…….
생각이 하나도 나질 않는다. 다만, 링겔을 맞은 듯한, 멍 자국이 푸르스름하게 들어있는 왼쪽 손목이 시큰거렸다.
“혜준 오빠는…?”
“뭐? 갑자기 여기서 혜준이 형이 왜 나와? 보고 싶어? 형 불러줘?”
차라리 어제의 일이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아파서 잠깐 환상을 본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환상치고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어제의 일과 나와 혜준 오빠가 끝난 줄도 모르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내게 묻는 재신이로 인해 다시 한 번 잔인한 현실이 각인됐다.
“나 잘래…….”
“아―잠깐만. 자, 여기 이거. 죽 먹고 약도 먹고 자. 죽…어떻게 끓이는 줄 몰라서 엄마한테 전화하긴 했었는데, 아무래도 잘못 끓였나봐. 맛은 없더라.”
“…….”
“엄마 괜히 걱정할까봐 누나 너 아프단 얘긴 안 했어. 그냥 죽 먹고 싶다고 핑계 댔으니까 나중에 엄마 전화 오면 알아서 처신 잘해.”
이래서 사람은 가끔 아플 필요가 있다는 걸까.
그릇에 덜지도 않고 투박한 냄비에 가득 쒀져있는 흰죽. 난생처음 죽을 끓여봤을 재신이는 말없이 자신을 향한 내 시선이 부끄러웠는지 연신 맛은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며 눈을 피했다. 늘 어리고 철이 없는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힘들고 아플 땐 역시 가족밖에 없는 것 같다. 힘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오른손에 애써 숟가락을 쥐고 흰죽을 한입 떠 입안에 넣었다.
“어때? 맛없지…?”
녀석의 말대로 맛은 없었다. 이게 흰죽인지, 덜 지어진 밥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어중간한 맛을 자랑하는 죽이었지만 애써 끓여준 재신의 마음만으로도 나에겐 100점짜리 죽이었다.
“맛있다….”
“진짜? 맛있어?”
“응, 나 이제 괜찮아. 알아서 약 먹고 잘 테니까, 넌 학교 가서 연습 조금이라도 더 하고 와…….”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재신이었다. 가뜩이나 고3이고 대학 입시니, 체전이니, 선발전이니 말도 많은 학굔데 하루라도 연습을 빼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나 때문이라면.
내 말에 재신이는 못마땅한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죽을 먹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녀석은 꼭 약을 먹고 자라며 신신당부를 해놓고 방을 나갔다. 아마 재신의 입장에서도 하루라도 훈련을 빼먹기가 불안하긴 했을 터였다. 재신이 나가자 미처 다 먹지 못한 냄비를 침대 밑으로 내려놨다. 입안이 까끌거리고 써서 입맛이 없었다. 머리맡에 있는 약봉지에 담겨 있는 알약 1회분을 물과 함께 삼키고 나서 다시금 침대에 누웠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질리도록 봤던 장면들. 이별 후에 처량하게 아픈 여자 주인공. 지금 내 모습이 딱 그 꼴이었다. 이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콱―죽어버리면 이혜준은 죄책감에 시달릴까? 나한테 평생 미안해하면서 다른 사람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 할까?
아파서 그런지 내가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듯싶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실없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죽긴 왜 죽어. 훌훌 털고 일어나서 보란 듯이 잘 살아야지. 나 버린 걸 죽도록 후회하도록…더 멋진 남자, 더 좋은 사람 만나서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더 이상 청승떨고 싶지는 않은데 눈물이 나왔다. 옆으로 돌아누운 탓에 베개가 조금씩 젖어들었다. 미련이 남은 건 아닌데, 그냥…그를 좋아했던 시간이 아깝다. 그를 사랑했던 세월이 슬프다.
“으음…….”
꿈을 꿨다.
혜준 오빠와 첫 데이트를 하던 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공주풍 옷을 입고, 발 아픈 구두까지 신고서 종일 걷는데도 아픔 따윈 느껴지지 않았던 그 날. 처음 손을 잡았던 날. 그가 처음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던 날.
“혜준 오빠….”
너무 생생해서 꿈이 아닌 것만 같은 꿈. 꿈인 걸 알면서도 깨기 싫은 그런 꿈. 꿈이 계속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 서서히 잠이 깨고 있는 걸 느끼면서도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군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누군가의 손이 내 이마를 조심스레 스친다. 몸이 불덩이여서 그런지 서늘한 느낌. 눈을 뜨고 싶지 않다. 아직 꿈에서 깨고 싶지가 않다.
“울지 마라…….”
낮고 차분한 목소리.
“다른 새끼 때문에…….”
내 눈가를 어루만지는 누군가의 손의 느낌. 그 느낌이 너무 따뜻해서. 그 서늘한 감촉이 너무 좋아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자꾸만 마음이 아려왔다.
불현듯 달칵―소리와 함께 내 얼굴을 스치던 느낌이 사라졌다.
“원지호.”
한숨이 섞인 재신의 목소리.
내 얼굴을 스치던 손길이 지호였던 걸까. 이게 현실일까. 아니면 내가 꿈속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여기서 뭐해. 나와 봐. 희수 기다리잖아….”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다만, 침대 옆 책상에 붙어있는 의자에서 들리는 삐걱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그 의자에 지호가 앉은 듯했다.
“후우―원지호, 넌 알지? 우리 누나 왜 저러는지.”
“몰라.”
“알잖아, 너.”
“모른다니까.”
그 이후로 한참 동안 이어지는 정적. 이제 거의 잠에서 깼는데도 눈을 뜰 수가 없다. 눈을 뜨면 안 될 것 같다.
“지호야, 제발 접어라….”
피곤이 묻어나는 재신의 나지막한 음성.
“나…너 잃고 싶지 않다, 정말로…….”
왠지 모르게…나도 모르는 사이, 이들 사이에 끼어버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