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9
9화 은행을 털어라(1)
***
나는 벤치에 가만 앉은 채, 맞은편에 있는 건물을 응시했다.
[스탠다드 어드벤처 시중은행_빅시티점]
오늘의 목표물이었다.
웨스트랜드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 지점을 둔 대형 상업은행. 대륙 외곽에 있는 지점이긴 하나, 분명 어마어마한 양의 현금이 금고에 들어 있을 것이다. 혹은 금이라던가.
“흐음······.”
나는 작전 수행에 앞서, 특수물약의 설명서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봤다.
먼저 투명화.
【히히, 안 보이지롱! 투명화 물약】
– 획득능력 : 투명화.
– 효용 : 자신의 몸과 휴대한 물품을 투명하게 만든다.
– 한계 : 본인 이외의 사람은 투명화 시킬 수 없다.
– 지속시간 : 1시간
– 부작용 : 지속시간이 끝나더라도 특정 부위의 투명화가 한동안 유지될 수 있다.
– 주의사항 : 체력 소모가 극심할 시, 투명화가 갑작스레 풀릴 수 있다.
※ 다른 특수약물과 함께 복용할 경우, 능력이 발휘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부작용 쪽으로 주의가 끌렸다.
“······특정 부위의 투명화가 유지될 수 있다라.”
느낌이 싸했다. 딱 봐도 장난기가 그득한 설정이었으니.
이 모험왕이란 작품엔 이처럼 ‘장난스러운 설정’들이 상당수 들어 있다. 작가의 성향 자체가 그랬다. 본인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설정들은 일단 다 집어넣은 다음, 기회가 될 때마다 실현시키는 것.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땐 분명 흥미를 돋게 하는 것들이었으나, 실제 겪을지도 모르는 입장이 되니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에이, 별 일 없겠지.’
이어 나는 또 하나의 설명서를 펼쳐들었다.
【얍, 가벼워져라! 무게 감소 물약】
– 획득능력 : 무게 감소.
– 효용 : 대상을 지정해 무게를 감소시킨다.
– 한계 : 생명체 지정 불가능. 무게 감소 범위는 50~90%로 무작위로 정해진다.
– 지정 가능 대상 : 3개
– 지속시간 : 1시간
– 부작용 : 무게 변환 시 낮은 확률로 재질이 바뀔 수 있다.
– 주의사항 : 예기치 않게 대상의 무게가 원상복귀 될 수 있다.
※ 다른 특수약물과 함께 복용할 경우, 능력이 발휘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눈길이 간 건 부작용 쪽이었다.
확률적으로 재질이 바뀔 수 있다.
이는 ‘자루에 넣을 때는 금이었던 것이, 후에 다시 열어 보니 나무였다’는 황당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낮은 확률이라고는 하나, 안심하긴 어려웠다. 이 만화에서 확률만큼 작가 편의적인 설정이 없었으니.
실제로 모험왕 커뮤니티엔 이런 말도 있었다.
-확률을 표기한 건 독자들을 기만하기 위한 작가의 술책일 뿐이고, 어차피 모두 발생한다고 보면 됨. 쓰지도 않을 설정을 작가가 괜히 만들 이유가 없으니.
흐음.
“몰라.”
나는 간단하게 정리했다.
훔친 다음 생각하자. 어차피 당장은 걱정해도 별 의미가 없으니.
이어 설명서들을 주머니에 꾸겨 넣은 뒤, 계획 점검에 들어갔다.
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1. 은행에 들어간다.
2. 대충 상황을 보다 투명화 물약을 먹는다.
3. 미리 봐둔 금고에 침입하여 돈을 챙긴다.
4. 튄다.
내가 이렇게 계획 같지도 않은 계획이나 세우며 태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이곳이 만화 속 세상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만화라곤 하지만, 이곳 은행에도 기본적인 경비시스템은 다 갖추어져 있다.
일단 이 은행을 지키고 있는 녀석들이 죄다 나만한 덩치들이다. 개중엔 나보다 힘이 센 녀석도 있을 것이고, 격투에 능한 녀석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경비나 보디가드들에 붙은 설정이 대개 그러한 것들이니.
더욱이 자체 추적 시스템도 있고, 현상금 제도도 있어, 도둑이 쉽사리 침입하지 못한다는 설정이 아니던가. 경계가 그리 호락호락 하진 않을 거라는 얘기였다.
나는 저 은행의 경비시스템을 과소평가 한 게 아니었다. 다만 믿는 구석이 있었을 뿐이지.
곧이어 내 시선이 홀로그램 창 상단에 닿았다.
[챕터 진행구역으로 곧바로 이동 1회권]
-사용하시려면 터치하시기 바랍니다.
일찍이 구비해둔 이동권. 설사 위급상황에 처한다하더라도 이것만 있으면 언제든 쉽게 도망칠 수가 있거든.
이동권을 보니 확실히 마음이 든든해졌다.
“좋아.”
나는 마지막으로 준비물들을 점검했다.
특수물약 두 개, 돈과 귀금속을 담을 자루 다섯 개,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복면 하나와 위협용 칼.
“오케이.”
준비는 끝났다. 이제 시행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 하기만 하면 되는데······.
흐음.
“근데 저거 왜 안 가냐.”
약간 눈에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다.
조금 전부터 은행 입구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던, 웬 피에로 가면을 쓴 꼬맹이 녀석.
저 꼬맹이가 눈에 거슬렸던 이유는 간단했다. 왠지 자꾸만 나를 힐끔거리는 듯했기 때문에.
“······.”
음, 아니다. 착각이었다.
힐끔거리는 듯한 게 아니라, 대놓고 본 것이었던 모양이다.
“······뭐야, 왜 오는 건데.”
그게 아니라면 저렇듯 나를 향해 다가오지도 않았을 테니.
곧이어 내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온 녀석이 나를 아래위로 슥 훑었다.
그러곤,
“언제 시작해?”
다짜고짜 황당한 소리를 내뱉었다.
“뭐?”
“도둑질.”
“······.”
당혹스러웠다. 뭐지 이 꼬맹이?
내가 가만 침묵하자, 녀석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도와줄게. 반반하자.”
“허.”
연이은 황당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대꾸하고 말았다.
“아니 뭔······.”
“혼자선 힘들 걸?”
“······.”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 녀석이 내게 말을 건 것에서부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거 하며, 또 저 도와주겠단 제안까지.
그러나 개중에도 가장 어이가 없었던 건, 은연중 그에 관심을 보이고 있던 내 마음이었다. 어째서 혼자선 안 될 거라 말한 건지, 나도 모르게 그 이유를 궁금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물론,
“뭐래는 거야 꼬맹이가. 형 바쁘니까 저리 가서 놀아.”
공과 사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겐 이 감 좋은 꼬맹이와 놀아줄 시간 따윈 없었으니.
그러나,
“다 봤어.”
“엉?”
이어진 녀석의 말에, 나는 더는 이 꼬맹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특수물약 사는 거.”
“······뭐?”
“투명화 물약 따윌 사는 사람은 정해져 있어. 변태거나, 도둑이거나.”
“······.”
“무게 감소 물약까지 샀으니 후자겠지. 은행 털 생각으로 여기 있는 거 아냐?”
당황스러웠다. 이 꼬맹이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 표정에 담긴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녀석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바보. 특수물약 상점은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냐. 들어갈 때부터 눈여겨보는 인간이 생기고, 뭐라도 사들고 나온다 싶으면 당장 따라 붙기 마련이라고.”
“······그게 너냐.”
“응.”
“······.”
보통 뻔뻔함이 아니었다. 괜스레 저 피에로 가면에 숨겨진 얼굴을 들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나저나 혼자서는 힘들 거라니. 그건 왜 그런 건데.”
“경비들 수가 두 배로 늘었어.”
“그래? 왜?”
“바보. 누구 때문이겠어?”
“뭐? 나 때문에?”
“응.”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나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아마 상점 측에서 주변 은행이랑 금은방 같은 곳에다 연락을 돌렸을 거야. 엄청 수상하게 생긴 주걱턱이 투명화 물약을 사갔다고.”
“허······.”
어이가 없었다. 소중한 고객을 예비 범죄자 취급하다니.
물론 뭐, 맞긴 했지만.
“참나, 오지랖은.”
“원래 그래. 가끔 있는 일이거든. 한 사나흘은 저 상태로 유지될 걸?”
“흐음.”
이쯤 되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줄 건데?”
“반반.”
“알았으니까 얘기해봐.”
“시선 끌기. 금고 내 CCTV도 해결해줄 수 있고. 아, 그리고 경비원 수도 좀 줄여줄게.”
“어떻게?”
“보면 알아.”
“흠······ 근데 그걸로 끝?”
“정보도 줄게. 금고 비밀번호. 어렵게 알아낸 거야.”
순간 당혹감에 벙 찌고 말았다.
“뭐야······ 너도 저기 털 생각이었냐?”
“응.”
“······.”
다시 한 번 황당함이 밀려들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은행을 털기로 마음먹은 날, 또 다른 도둑에게 눈에 띄어 동업을 제안 받는다고? 심지어 그게 꼬맹이고?
‘뭐야, 이 애 등장인물인가?’
그저 배경에 불과한 캐릭터들이 이런 행동까지 한다는 게 의아했다. 은행을 털어먹으려 하는 꼬맹이가 있다고?
나는 다시금 녀석을 찬찬히 훑어봤다.
본 적 없는 피에로 가면. 여덟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키. 앳된 음성······.
딱히 매치되는 캐릭터는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이 가려지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애당초 이만한 꼬맹이가 활약하는 챕터가 드물었으니.
흐음.
그래, 어쩌면 만화이기에 이러한 일들이 일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도둑 꼬맹이들이 판치는 세계. 실제로 이와 비슷한 배경의 도시가 없었던 것도 아니니.
어쨌거나 나로선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금고 비밀번호가 뭔데?”
“기다려.”
곧이어 꼬맹이가 품에서 웬 약병 하나를 꺼내더니, 냅다 들이켰다.
놀랍게도 특수물약이었다.
“약속을 지켜라 얍! 저주 물약이야. 나와의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저주에 걸릴 거야. 그 커다랗고 탐스러운 주걱턱이 두 쪽이 나버릴지도 모를 걸?”
“어······ 그래.”
꼬맹이는 내가 이 턱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손 내밀어봐.”
내가 손을 내밀자마자, 꼬맹이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어 녀석의 손에서 웬 보라색 기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이내 우리의 손을 감쌌다.
“오······.”
신기한 광경이었다.
곧이어 꼬맹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전이 성공한 뒤 반반 하시겠습니까?”
“킥······.”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얘 반반 진짜 좋아하네.
“왜 웃어? 빨리 알겠다고 말해.”
“그래, 알았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보라색 연기가 한 차례 요동쳤다.
“된 거야?”
“아직. 돈을 나눈 다음에 다시 빼앗지 않으시겠습니까?”
“······안 뺏어. 사람을 뭐로 보고.”
솔직히 약간 뜨끔했다. 몇 대 쥐어박고 대충 과자 값만 남겨주려고 했더니.
나는 꼬맹이 쪽을 몰래 힐끔거렸다.
그나저나 이 녀석······ 은행 털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나 털어먹으려고 몰래 미행한 것도 그렇고. 꼬맹이가 무슨 돈 욕심이 이렇게 많아.
“심술궂은 얼굴 저리 치워.”
“······.”
티가 좀 났던 모양이다.
때마침 손을 휘감고 있던 보라색 연기가 모두 사라졌다.
“이제 끝.”
“그래? 별 거 없네.”
“저주에 걸리면 그런 말 안 나올 거야.”
“······어기겠다고 말 한 거 아니라고.”
꼬맹이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1234야.”
“······.”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거······ 맞아?”
“응. 어렵게 알아냈어.”
“······그래.”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하여간에 희한한 작가 같으니라고.
차라리 설정을 해놓지 않았더라면 비밀번호가 저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러 저것으로 해놓은 게 틀림없었다. 말하자면, 이 또한 장난기 그득한 설정의 하나라고나 할까. 어쩌면 모든 은행들의 금고 비밀번호가 저것으로 통일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0000’이라던가.
순간,
‘어? 잠깐. 이거 좋은 일 아닌가?’
산처럼 쌓인 돈다발 위에서 미끄럼틀을 타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좋은데? 한 번 다 털어 봐?
그러고 내가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 즈음,
“5분 뒤에 바로 들어가면 돼.”
꼬맹이가 뒤돌아 선 채 말했다.
“5분?”
“응. 그리고 작업 끝나면 오늘 자정 즈음에 ‘얼간이 녀석들’로 찾아와.”
“얼간이 뭐?”
“얼간이 녀석들. 3번가 뒷골목에 있는 주점 이름이야.”
“오케이.”
“5분이야.”
나는 그러고 뚜벅뚜벅 은행을 향해 걸어가는 꼬맹이를 응시했다. 5분 만에 저 녀석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내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웬 작달만한 인영이 은행 문을 박차고 튀어나옴과 동시에,
“도둑이야! 잡아! 그 노란 악마 녀석이다!”
고함소리와 함께 열댓 명의 경비들이 우르르 쫓아 나왔다.
보아하니 아주 악명이 높은 녀석이었던 모양이다. 다들 죽어라 뒤쫓는 걸 보면.
그리고 또 하나 놀라웠던 건,
“······여자애였네.”
꼬맹이가 피에로 가면 안쪽에다 머리카락을 꽁꽁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허리춤까지 오는 기다랗고 샛노란 머리카락을.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투명화 물약을 마셨다.
입에 머금는 순간, 시큼함이 훅 올라왔다.
“웁스······.”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약마다 맛이 다른가? 꼬맹이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곧이어,
“오호.”
전신에 익숙지 않은 힘이 차올랐다.
그간 이 만화 속 능력들을 어떻게 사용하는 걸까 궁금했었는데, 별 것 없었다. 그냥 온 몸에 힘을 꽉 주니 곧바로 발동이 됐다.
나는 조금씩 흐릿해져가는 손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거 재미있네.”
이어 온 몸이 투명하게 변한 걸 확인한 뒤, 나는 때 아닌 도둑의 난입으로 어수선해진 은행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