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
1
“로벨. 어딜 가려고?”
병색이 가신 사내의 목소리는 나른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아, 아하하……. 도련님.”
하필 이 밤중에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을 마주치다니.
나는 억지로 웃는 낯을 꾸미며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에드릭 도련님이 어느덧 내가 있던 층계에 마주 서 있었다.
기척도 없었는데 언제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내 목적을 위해 어서 돌려보내야 했다.
나는 창밖의 보이지 않는 마차를 의식하며 말했다.
“도련님, 일찍 깨셨네요. 여독도 심하실 테니 더 주무셔야 할 텐데.”
밝게 말하려 했지만, 긴장을 증명하듯 내 입에선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당황스러워해도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화를 이어갔다.
“옆에 네가 없어서 잠이 안 와. 알잖아, 나는 네가 안아주지 않으면 잠 못 자는 거.”
“……옛날엔 잠깐 그랬었죠? 불편하셔도 참으세요. 다른 병도 충분히 이겨내셨으니 불면증도 금방 나아지실 겁니다.”
횡설수설하는 위로에 에드릭은 소리 없이 미소만 지었다.
나는 그의 커다란 그림자 속에 갇혀서 의문에 사로잡혔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싫어하던 애가 도대체 뭔 생각으로 이러고 있는 거야?’
옛날에는 까칠했지만 그래도 감정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당최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겠다.
뭐, 이 외에도 그와 내 사이에 크고 작은 변화는 많아졌다.
비슷했던 키가 월등히 어긋나기 시작한 것. 관계가 역전되어 내가 슬슬 말려들기 시작한 것.
지금처럼 내 어깨에 팔을 걸치다가, 투정 부리듯이 어깨에 이마를 비비는 자연스러운 스킨십도 포함이다.
부담스러워서 벗어나고 싶은데 교차한 두 팔이 내 등을 빈틈없이 당겨 안았다……. 숨, 숨 막힌다, 이놈아.
잠시간 그 동작을 반복하던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시선만 쓱 올렸다.
위험한 거리에서 암녹색으로 빛나는 나른한 눈동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누가 이걸 메인수로 봐.’
체구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이건 절대적인 캐붕이다.
그런 나를 겁먹은 토끼 보듯 즐겁게 훑어보던 그가 물었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는데. 어디에 간다고?”
“……산책이요. 달이 참 밝고 예뻐서 후원에서 잠깐 바람이라도 쐬려고요.”
“밤 산책. 좋지.”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그가 나긋하게 웃었다.
“그런 걸 들고?”
그의 내려가는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내 양손에 짐가방이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묵직한 가죽 짐가방이 무려 두 개나……. 아뿔싸.
너무 긴장한 나머지 가방의 존재마저 잊고 있었다.
당황도 잠시, 나는 짐가방을 짜증스럽게 들어 올렸다.
“가는 길인데도 귀찮아 죽겠습니다. 어제 휴가 간 녀석이 빼놓고 간 물건인데 옮겨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누군데 내 허락도 없이 내 시종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까.”
……설마 최근에 복귀한 에드릭이 사용인 이름을 다 알진 않겠지?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짐짓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페드릭이요.”
미안하다, 페드릭…….
나중에 혹시라도 다시 만나면 거하게 쏘마…….
눈물을 머금고 말하는데 에드릭이 내 귀까지 오는 은발을 가만가만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페드릭. 그래. 그런 친구가 있었었지. 나와 이름이 비슷한.”
“……그러네요?”
에드릭, 페드릭.
두 사람의 생김새는 완전히 달라도 이름은 닮긴 했다.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사실이다.
‘근데 도련님이 페드릭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최근에 들어왔는데…….’
그래도 후계자이니 가문에 관심이 커졌나.
처음과 달리 원작도 너무 틀어져서 이젠 뭐가 달라져도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그런 생각에 잠기는데, 전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없어서 내 대용품으로 그놈이라도 챙겨주고 있던 거야?”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당황해서 말을 잃은 사이 그가 내 목깃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나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로벨이 나를 그리워했다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해.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주었지? 핥고. 안고. 만지고. 씻겨주고……. 설마 나에게 했던 것들은 다 한 건가?”
오밤중에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핥은 건 약 뚜껑 핥은 거잖아! 나머진 시종으로서 맡은 임무고!
나는 기겁을 하며 사방을 훑어봤다.
다행히 에드릭 외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게 가장 큰 불행일지도 몰랐다.
“로벨.”
어릴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크고 단단해진 두 손이 내 손등을 불시에 덮었다.
그 바람에 두 개의 짐가방 모두 융단에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악력은 세졌다.
어쩔 수 없이 힘을 풀자 그도 잡아 모은 내 손을 귀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이제 나 말고 다른 놈이 더 좋아졌어?”
“……그럴 리가요. 전 도련님 모시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습니다.”
“그래. 그때 들었지. 내가 네 호흡이라고.”
에드릭이 속삭이듯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상황마저 잊고 감탄할 만큼 아름답고 청초한 미소였다.
이제 다 나아서 앞으론 아니겠지만…… 어쨌든 장단은 맞춰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덕분에 경직되었던 공기가 한결 느슨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제대로 안심을 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나를 좋아하면서 어딜 도망치려고 그래.”
“…….”
“너, 나 없으면 죽는다며.”
어느덧 도련님은 굶주린 포식자의 낯을 하고 있었다
* * *
내 이름은 로벨리아 플로르.
나는 무역이 발달한 중부 상업 도시 벨리칸에서도 손꼽히는 상인 집안의 딸로, 남부럽지 않게 자라났다.
내가 소설에 빙의했다는 사실은 어릴 때 부모님이 읽어주신 동화책을 통해 자연히 알게 되었고.
이 제국의 기둥이라 불리는 주요 가문이나, 지명이 귀에 익었던 탓이다.
‘명문 덴카르트……. 테루아 황실……. 뭐야. 이거 황밤 설정 아니야?’
떨떠름했지만, 경악스럽진 않았다.
K-웹소행 특급 트럭에 치여 죽었던 전생의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난 것부터 이미 모든 것이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관 최강 미남자라는 두 주인공이 잠시 궁금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내겐 이전 생과 달리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들이 있었고, 매일 즐길 것이 넘쳐났으니까.
‘어차피 평생 얼굴도 안 볼 사람들이기도 하고, 뭐.’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예고도 없이 쓰러졌다.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알고 보니 고작 열셋인 내가 희귀병에 걸렸던 것이다.
“저 그럼 다 나으면, 신상 마차 사주시기로 약속하신 거예요? 로베르 오라버니가 쓰는 것보다 두 배는 큰 걸로요!”
하지만 나는 눈물을 훔치는 부모님을 가볍게 위로할 만큼 자신만만했다.
내가 빙의한 소설에는 이 병에 관한 내용도 자주 나왔으니까.
원작은 BL 소설인 .
주인공이자, 메인수는 유서 깊은 공작가의 사생아인 에드릭 덴카르트.
그 아름답지만 예민하고 우울한 병약수가 약을 거부하고 죽으려다가, 황태자의 명으로 약을 먹으며 병세를 회복하고 그와 사랑에 빠지는…….
그러니까, 황태자X에드릭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내 병은 병약수의 병과 일치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어떻게 완쾌했는지 알기에 좌절하지 않았다.
원작에서 본 바로 삼시 세끼 꼬박꼬박 잘 먹고, 식후 30분 땡 맞춰서 약 먹으면 끝이었거든.
희귀병이라 말 그대로 걸리는 사람 수만 적을 뿐, 기본 치료법만 잘 따르면 됐다.
이 세계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불치병은 아니라는 소리.
‘아픈 건 좀 무서운데…… 그래도 간단하고 좋네?’
오히려 내가 주인공인 에드릭보다 빨리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걘 맨날 밥도 안 먹고, 약도 안 먹었으니까.
사망률이 높기야 하다만, 약이나 치료법이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약값 자체가 워낙 비싸기도 했고.
그러나 우리 집안은 앞서 설명했다시피, 꽤나 살 만하다.
비록 귀족가는 아니더라도 대대로 수완 좋은 상인인 부모님은 약값을 충당했고, 수도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의원들이 우리 집에 오갔다.
나는 고양이들과 침대에서 뒹굴며 천국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침대에서 내 의지로 걸어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유인즉슨.
“……내가 먹은 약이 가짜였다고?”
우리가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다.
아무리 유서 깊은 상단 소속이라도 우리 집안은 평민이었다.
대귀족인 주인공이 구할 수 있는 약과 평민이 구할 수 있는 약의 질은 애초에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나중에야 귀족들에게만 유통된다는 그 ‘진짜 약’을 알았을 때, 내 몸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이번 생은 술 한 방울도 입에 못 대고 죽네. 여기 흑맥주 맛이 궁금했는데…….’
그렇게 내 나이 열넷 겨울에 눈을 감았다.
끊임없이 피를 토하는 바람에 유언을 남길 수도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과거로 회귀했다.
“로벨리아, 생일 축하해! ……어머. 너 지금 울고 있니?”
나는 다시 맞이한 열세 번째 생일상 앞에서 바보처럼 질질 짰다.
빙의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회귀의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번만큼은, 기회를 잡고 싶었다.
빙의 전과 달리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들과 행복해지고 싶었다.
“아빠, 나 생일 선물로 약 좀 사줘.”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내가 당신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해주셨다.
내 말에 의아해했던 것도 잠시, 약의 질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전 재산을 미련 없이 털어 ‘진짜 약’을 구해주셨으니까.
약값도 천정부지로 뛰었지만, 약을 수소문하고 구매 자격을 획득하는 데에는 그 이상의 돈이 들었다.
하지만 기어코 구해주셨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행동으로 증명했다.
이전과 달리 형편없이 작아진 침대에서 공부하고, 상단에 도움이 되기 위해 죽도록 애썼다.
특히 고대어, 고대 석판 해석 의뢰가 돈이 많이 되었기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정령의 숨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상단의 번역 의뢰로 접한 고대 석판을 해석하다가 손을 덜덜 떨었다.
그 안에는 ‘디프’ 종족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원작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에드릭의 모계 혈통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던 것으로 보였다.
그 순간,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고야 말았다.
내가 대귀족만 쓴다는 약의 출처를 알았던 밤보다도 묘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고대 석판을 모아 탐구했다.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마지막 석판까지 해독했을 때, 몸은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엉망이 된 후였다.
잡고 있던 석판도 피로 얼룩져서 도저히 읽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안 봐도 무관했다.
다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희귀병에 걸렸으면 약이 있다 해도 주인공과 주인공 주변 인물만 살 수 있다는 거잖아…….’
우리 가족의 눈물겨운 노력이 모두 헛수고였다.
애초에 내가 진짜 약을 먹든 가짜 약을 먹든 죽을 운명이었다는 소리였거든.
‘주인공의 숨결이 닿는 범위 내에 있는 자들만 살 수 있다니…… 뭐 이딴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우리 전 재산을 쏟아부은 약은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를 늦추는 게 고작이었다.
심한 욕을 뱉으며 석판을 집어 던지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눈이 먼저 감겼다.
그것이 내 두 번째 배드 엔딩.
“로벨리아, 생일 축하해!”
그리고 세 번째.
운명처럼 다시 마주한 생일상.
나 때문에 헐값에 급히 처분했던 집에서 화목하게 웃는 가족들…….
“……고마워.”
그 모든 것을 마주한 나는 웃으며 결심했다.
어차피 주인공을 만나는 것 외에 뭘 해도 뒤질 운명이라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상, 잘 차려진 병약수 약상에 숟가락이나 좀 얹어봐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