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35)
135
“……딱히 제가 허락 안 해도 말씀하실 것 같은데요.”
“나, 정화 능력이 강해졌어. 그래서 전부터 해주고 싶었는데…….”
마치 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자랑해대는 도련님을 보자 작게 헛웃음이 났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의기양양해하던 도련님이 예고도 없이 불쑥 내 종아리 하나를 잡아 올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너도 예전에 말 안 하고 나 만졌잖아.”
“그때랑 지금은 다르다니까……. 더러워요! 당장 내려놔요!!”
“내가 더럽다고?”
내 다리를 자기 허벅지께까지 쉽게 잡아 올린 도련님이 상처 받은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손을 내리진 않았다.
그 바람에 잡힌 다리의 발목이며 검은 바지 아래 같은 색의 양말까지 훤히 다 드러났다.
나는 다리를 얼른 빼려고 했다. 종일 걷거나 서 있었으니 냄새가 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덫이라도 되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냄새 안 나요?”
“하나도 안 나는데. 너한테선 좋은 냄새만 난다니까.”
어이가 없어서 따지듯이 묻자 도련님이 뻔뻔하게 답했다.
“……미쳤어요?”
“기다려. 그렇게 걱정되면 다른 방법이 있어.”
커다란 손으로 내 발목을 한번 쓸어내리자 시원해지더니 차가운 크림을 바른 것처럼 산뜻하고 촉촉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풍성한 꽃향기가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어찌나 향기로운지 설탕물을 폐부까지 들이부은 것 같았다.
‘……다리가 하나도 안 아프네.’
새로운 구두를 신느라 종일 아팠던 발꿈치와 발가락까지도 모두 피로가 풀리듯 멀쩡해졌다.
‘……이게 정말 디프의 힘이구나.’
신기한 눈으로 내 다리를 내려다보는데, 도련님이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아무 생각 없었다면 그냥 “예.” 하고 답했을 정도로 평범한 목소리였다.
“더 해줄까?”
“싫어요.”
즉답하자 도련님이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봤다.
그래봤자 안 넘어갑니다.
“다들 나 이용하려고 혈안이 되었는데. 너는 왜 안 그래?”
그러고는 도련님이 부탁하듯이 내게 말했다.
“로벨리아 넌 나에 대해선 다 알잖아. 네 멋대로 써먹어도 돼.”
“…….”
“나 좀 이용해줘.”
내가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이런 얘기를 맨정신으로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승낙할 수는 더더욱 없고.
낯이 화끈거릴 정도의 민망함을 참지 못한 나는 고개를 반대로 돌려버렸다.
* * *
덴카르트 공자가 떠난 회담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예의 그 시종과 공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돌아가는 마차에서 히스 레잔다르는 느릿하게 차를 마시며 은발의 시종을 떠올렸다.
블랙마켓에서도 익히 알았지만, 여러모로 도가 지나치고 발칙한 놈이었다.
그것은 공자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었다.
얼마 전, 블랙마켓의 크루즈.
‘저자는 왜 나를 훔쳐보는 거지?’
히스 레잔다르는 배가 기울어진 후, 자신을 향한 묘한 시선을 느꼈다.
다른 이들처럼 적나라하게 호감을 사거나 질시, 적대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호기심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며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보는 시선에 히스 레잔다르의 검붉은 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가뜩이나 배에 소란이 일어 불쾌했는데, 짜증마저 극에 달았다.
‘저따위 것이 나를 저런 눈으로 훔쳐봐.’
차라리 대놓고 봤으면 다른 놈과 같은 취급을 하고 넘어갔을 테다.
하지만 저 시종은 기이한 형태로 날며 시야를 방해하는 벌레처럼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
그의 유일한 수집품인 목각 인형 중 하나처럼 목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저 길고 가녀린 목은 어렵지 않게 부러트릴 수 있었다.
충동을 자제하기 위해 그런 상상을 하는데, 문득 의문이 스쳤다.
‘……배가 기울어졌는데 왜 도망가지 않는 거지?’
다른 자들은 빠져나가려고 아등바등하거나 불안을 호소하는데 저자는 멀쩡했다.
내내 그 곁을 지키듯이 서 있는 호넷의 대상단주를 믿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니면, 저 뒤에서 초조하게 살피는 덴카르트 후계자를 믿는 건가.
덴카르트 후계자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황성에서 마주했던 기운과 같아서 알아챌 수 있었다.
최근 형에게서 레잔다르의 순수 혈통만 누릴 수 있는 눈을 빼앗아버렸기에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을 기이하게 여기는데, 자색 눈동자가 그를 떠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래서 히스 레잔다르도 관심을 거두었다. 저자가 신경을 들쑤시긴 했어도 오늘 일정을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기분은 저택에 돌아간 후에 땅바닥 밑까지 처박혔다.
내 목각 인형.
그가 분신처럼 소지하고 다니던 첫 번째 목각 인형을 떨어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배가 급속도로 기울어졌을 때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걸 되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시간은 반나절 이상이 지났다.
청소부나 선원이 발견했다면 바로 치워버렸을 테다. 누군가 바다로 던져버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낡은 것이니까.
더군다나 레잔다르의 차남이 그런 목각 인형을 찾는다는 소문이 번지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
떨리는 눈꺼풀을 질끈 감은 히스 레잔다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날 방에 있던 모든 물건을 던져 부숴버렸다.
그러고도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 도련님, 블랙마켓에서 보내온 서신입니다. ]집사가 웬 검은 봉투에 든 서신을 가져왔다.
음침한 인상의 집사는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데, 서신은 달랐다.
‘……블랙마켓 상단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데.’
봉투와 그 위에 찍힌 도장은 같지만 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이를테면 평소보다 훨씬 큰 서신의 크기와 다르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집사가 조용히 나가자, 히스 레잔다르는 서신의 봉투를 망설임 없이 뜯었다.
레잔다르의 순혈이 가진 완벽한 적안이 아닌, 흑색 섞인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내 목각 인형?’
그 안의 내용물은 그가 아끼는 목각 인형이 분명했다.
심지어 어릴 때 떨어져 어설프게 붙인 한쪽 팔과 발목이 제대로 달려 있었다.
이런 것을 들고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가문의 웃음거리이므로, 아무에게도 밝히지 못하고 스스로 고쳤던 것이었다.
‘……테루아 제국에서 흔히 쓰는 접착제가 아니군.’
목각 인형을 들어 입매로 가져왔다. 인형에서 그 은발 상인의 기운이 풍겨났다.
들꽃처럼 수수하지만, 확연하게 솟아나는 생명력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덴카르트 공자보다도 강했다.
그 후, 히스 레잔다르는 그 은발 상인을 떠올렸다.
입을 막고 싶다는 불안감은 아니었다.
자신이 목각 인형을 소지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없으니 그놈이 아무리 지껄여도 들을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그놈이 지껄이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믿음?’
스스로에게 의구심을 느낀 히스 레잔다르가 잘 뻗은 눈썹 사이를 모았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느끼지 못한 감정을 얼굴만 아는 상인을 보고서 얻었다는 게 이상했다.
더군다나 상인이란, 자고로 섣불리 신뢰해서는 안 되는 자들 아니던가.
‘…….’
그는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느릿하게 두드렸다.
무의미한 동작만큼이나 가치 없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상관없을 정도로 히스 레잔다르는 생각에 몰두했다.
어떻게 이 목각 인형의 주인이 자신인 줄 알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무슨 의도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았던 것인지…….’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답을 얻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뒷조사를 했으나, 호넷 상단에 그런 자는 없었다.
심지어 상단주가 자리를 비운 탓에 의문은 더 커졌다. 호넷 상단주 이보 마틴으로선 드문 일이었다.
그러길 반복.
“참석하겠다.”
히스 레잔다르는 많은 일정을 미루고, 대상단주 연합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불참할 수 있는 핑계가 무궁무진하지만,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호넷의 상단주나 덴카르트 상단주도 참석할 수 있는 자리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대로 은발 청년과 조우했다.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게, 놈은 자신과 거리를 벌려 벗어났다.
참석한 목적대로 히스 레잔다르는 그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로벨이라.’
이름은 로벨이었다.
날벌레 같은 온갖 귀족들이 귀가 아프게 떠들어대는 탓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에드릭 덴카르트, 이보 마틴 외에도 거물급 인사와 친분이 깊은 사이였다.
‘……마넬라노 스텔까지.’
히스 레잔다르는 대리석 바닥에 안 보이는 거미줄이 쳐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잘못 건드렸다간 제대로 꼬이게 생겼다. 형을 혼수상태로 만들어놓은 노력까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두고만 볼 생각이었다.
작위 세습을 마치고, 미끼를 던져 천천히 유인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오랜만이지, 레잔다르 영식.”
에드릭 덴카르트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