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37)
37
“……!”
지난 이십여 년간 처음 듣는 소리에 보좌관이 경악하고 말았다.
비록 짧게 지나갔지만, 분명히 서늘한 낯에 띤 미소를 보았다. 그의 결혼식이나 그를 위한 축하연에서조차 볼 수 없던 것이었다.
그런데 기쁨이나 대견함보단 다른 쪽에 가까웠다.
마치 수세에 몰린 적군을 앞에 두고 치기 직전의 잔혹함을 닮아 있었다.
‘그래도 이쯤 했으니 한 번은 불러주겠지.’
보좌관은 속으로 생각했다.
직접 후계자 수업을 하진 않더라도 낡고 오래된 전통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공작에게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연민을 떠나서 공자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명문 덴카르트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케케묵은 전통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종종 생각해왔기에 반갑기도 했다.
‘그나저나 고고학자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재능을 공자가 갖고 있다니…….’
그러나 공작은 쉽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드물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머지않아, 소년이 그를 찾아왔다.
* * *
왜 어머니는 내가 더 자랄수록 저런 쓸쓸한 표정을 지으실까…….
에드릭은 가끔 품었던 의문의 답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머리 색을 포함한 생김새를 제외하고도 부친과 그는 언뜻 우울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감한 분위기가 흡사했다.
그래서 공작과 마주하자 다 자란 자신을 앞에 둔 묘하고도 이상한 감상이 들었다.
하지만 에드릭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니야.’
겉은 어떨지언정 그 속은 엄연히 달랐다.
자신은 자라더라도 로벨에게 그딴 짓을 하진 않을 것이고, 무책임한 짓도 벌이지 않았을 테니까.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이 흉흉해지는 에드릭의 기세에 보좌관은 안절부절못했다.
이전의 소란을 그냥 넘어가 준 것만으로도 전에 없을 관대한 처분이었다. 더는 봐줄 리 없었다.
한편 아들을 앞에 두고도 눈길 한번 안 주던 공작이 읽던 서류를 내려놨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종이 더미를 꺼냈다.
“……!”
그걸 알아본 에드릭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안경 속의 붉은 눈이 종이를 위에서 아래로 슥 훑어보았다.
“다시 봐도 굉장한 필체로군.”
“비꼬지 마. 이제 겨우 한두 달 배운 것치곤 잘한 편이니까.”
에드릭은 기가 죽을 뻔했지만, 로벨의 격려를 떠올리고는 반박했다.
“그리고, 모양보단 내용이 중요하다고 했어.”
“못하는 놈들이 꼭 이렇게 쓸데없이 혀가 긴 법이지.”
“너야말로 나를 가르친 적도 없는 주제에 혀로 나불거리지나 마.”
로벨과 밤새 꾸준히 대화 연습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긴장되었지만, 어제보단 확실히 말문이 열렸다.
공작의 뒤에 선 보좌관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로벨은 공작을 대할 땐 기가 죽는 것보단, 대범한 편이 차라리 낫다고 했었고.
‘그런데…… 딱 한 가지만 고쳤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그게 뭐였지?’
에드릭은 문득 떠오른 사실을 머릿속에서 급히 지웠다.
지금 당장은 부친인지 공작인지 모호한 이 남자를 설득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똑똑히 말했다.
“평가하려면 나를 제대로 가르치고 나서나 해.”
“……이해력도 떨어지고, 참을성도 부족하군. 지금 네게 시키는 것이 내가 단순히 한가해서 노닥거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하니 내 아들이 그렇게 멍청한 놈인가, 하는 뉘앙스로 들렸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에드릭을 이를 사리물었다. 그게 대놓고 모욕하는 것보다 기분이 더 나빴다.
하지만 그는 예전처럼 무턱대고 화를 내진 않았다. 로벨의 멍든 뺨과 망가진 무릎을 떠올린 탓이다.
로벨도 자신을 위해 그렇게 참아주었는데, 그의 고된 노력을 헛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진정한 에드릭은 단호하지만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비겁하게 도망칠까 봐 경고하러 온 거야. 도망치지 말라고.”
“비겁하다는 뜻을 모르나? 내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들기 전에 단어 뜻부터 제대로 익히기나 해. 데니안, 내 아들놈에게 사전이나 하나 사주도록.”
“아니. 난 아주 잘 알아. 너 같은 놈들이 비겁한 거지. 넌…… 비겁해. 어머니를 버리고 갔잖아.”
내내 굳세던 목소리가 떨렸다.
에드릭의 머릿속에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때가 스쳐 지나갔다.
네 다리 중 하나가 썩은 나무 식탁은 늘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머니는 그 식탁이 만든 그늘에서 홀로 숨죽이며 울곤 했다.
에드릭은 그녀가 왜 우는지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이 남자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이 매정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래서 아이를 가졌지만, 그럼에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졌다고 했었다.
어린 에드릭도 그게 거짓말이란 건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수도에서 온 어머니가 웬 반반한 사내에게 버림받았다고 수군거렸다.
작고 협소한 마을이니 그건 그의 귀까지 전해졌다. 심지어 아이들까지 에드릭을 애비가 버리고 간 자식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에드릭은 자신이 버림받은 것보다 어머니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때의 원망이 떠올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쏘아보자, 공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난 네 어머니를 가진 적이 없다.”
“끝까지 비겁한…….”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없었다.
에드릭이 분노로 몸을 떠는데, 그가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오히려 그 맹랑한 여자의 거짓말에 아둔하게 속아 넘어갔지.”
“우리 어머니는 누굴 속일 사람이 아니야!”
공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방 안에 감돌던 공기가 일순간 싸늘해졌다.
에드릭은 이제 더는 공작이 자신을 봐주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분하고 억울해도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에드릭은 로벨을 속여서까지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마지막으로 확답을 받아내야 했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는다고 약속해.”
이처럼 에드릭은 하나 남은 혈연을 쉽게 믿지 않았다.
하다못해 자신의 치료비를 위해 저택에 어렵게 찾아와 구걸하듯 애걸하는 친모 얘기를 들었을 텐데도 그는 끝내 얼굴을 비치지 않았었으니까.
그의 녹색 눈동자엔 불신이 가득 서렸다.
난생처음 받는 모욕에 공작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덴카르트의 주인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 다 지껄였나?”
이번엔 정말 쫓아내기라도 할 모양이다.
어투에서 느껴지는 비인간적인 권태로움에 에드릭은 흠칫했으나,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난 다 말했어. 그러니 너도 확실하게 대답해. 그 전엔 나가지 않을 거야.”
그 결심을 알았는지 공작이 눈썹을 휙 올렸다.
중압감은 더 무거워졌다. 전신이 예리한 날에 베인 듯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에드릭은 눈을 피하지도, 몸을 떨지도 않았다.
“대답해.”
“……이제 네게 남은 시험은 하나다. 거기선 네가 직접 네 가치를 증명해라.”
여기까지였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크림슨이 얼른 다가와 휠체어를 밀고 나갔다.
텅 빈 복도에서 에드릭은 주먹 쥔 손을 풀었다.
땀에 젖은 손바닥에 피가 번져 있었다.
‘……피.’
꽉 쥔 주먹의 손톱이 살갗을 뚫은 것이다. 그는 주머니의 손수건을 꺼내 그것을 닦아내려 했다.
그런데 손이 떨려서 그런지, 주머니에 함께 있던 다른 것까지 빠져나갔다.
그걸 먼저 발견한 사람은 크림슨이었다.
“……사탕 봉지?”
크림슨은 눈을 굴렸다.
바닥에 떨어진 유산지는 그도 아는 것이었다.
로벨이 에드릭과 외출 준비로 바쁠 때, 어떤 시종이 꼭 사 먹으라며 추천했던 것이니까.
그리고 로벨은 그걸 그냥 흘려듣지 않고 사서 시종 방에도 돌렸었다.
역시 도련님께도 사드렸나 보다, 생각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때 먹은 봉지를 왜 지금까지…….’
그것도 청결한 공자라면 저런 걸 아직도 가지고 다닐 리 없었다.
그렇다면 치워야지.
그런 생각으로 크림슨은 저걸 주워 버리겠다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늘 도련님이 입은 바지는 분명히 새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게다가 로벨이 아무리 손끝이 야무져도 쓰레기를 저렇게 만들지 않았다. 유산지는 반으로 곱게 접힌 채로 빳빳했다.
그러다 보니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이거, 어째……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까먹었다기보단, 일부러 보관하고 있던 것 같기도 한데…….
“어서 주워.”
……정말이네?
크림슨은 무척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봉지를 주워 그에게 건넸다.
에드릭은 그걸 두 손으로 받아 꼼꼼히 살폈다.
어째 금붙이며 목발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본 크림슨은 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예전이라면 로벨 놈에게 노력이 성공하여 축하한다고, 귀족의 마음을 얻었으니 한몫 제대로 챙기라며 장난삼아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영 아니었다.
마님은 그렇다 치고, 이 소년은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반푼이 귀족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둘이 마음이 통했다 해도 이게 로벨에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에도 없는 로벨을 걱정하는데, 에드릭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로벨이 있는 데로 돌아가.”
화장실에 간다고 했다가, 공작한테 왔다가…… 결국 화장실은 안 가는군.
요새 들어 그나마 조금은 달라졌나 했더니 여전히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로벨 놈도 참. 왜 이런 소년에게 반해 가지곤…….’
크림슨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며 속으로 한숨을 쉬다가 에드릭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순간, 안구가 화사하게 정화되는 듯한 미모가 눈에 들어왔다. 어째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뭐, 자라나면 크고 탄탄한 기사의 체격을 지닌 공작만큼의 야성미를 가지진 않겠지만, 이쪽도 상당한 미남으로 자라날 것이 분명하다.
‘확실히, 로벨 놈이 외모를 밝히긴 해.’
“예.”
크림슨은 갑갑한 속내를 숨기며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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