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36)
36
에드릭은 고대 석판을 해석하는 일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석판을 들고서 마넬라노와 웃고 있던 로벨을 종종 떠올려왔기 때문이다.
석판을 그렇게나 좋아해서 그놈과도 그렇게 웃었던 로벨이니 자신과 함께 하면 더 좋아할 것이 자명했다.
그런데 고대 석판을 해석하는 일은 기대만큼 재미있진 않았다.
‘……무겁고 손 아파.’
에드릭은 침음을 참으며 저릿해진 두 손을 꽉 쥐었다 폈다.
왼손으론 돌덩이를 쉴 틈 없이 잡고, 오른손으론 만년필을 움직여야 했다. 동작 자체가 쉽긴 해도 일종의 노동 같았다.
고향에서 어머니를 도울 때 종종 이런 기분을 느꼈었다. 그땐 곰인형의 얼굴에 단추로 두 눈을 만드는 소일이었다.
불우한 과거가 떠올랐지만, 에드릭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로벨이 자신보다 더 열심히 집중해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마넬라노는 그가 본 소년 중에 가장 당당했고, 기품이 넘쳤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 낯짝 또한 그가 봤던 소년 중 가장 반반한 편이었다.
‘그런 놈이 로벨에게 시종직을 직접 제안하기까지 했었지…….’
로벨이 그 제안을 거절한 건 기쁘지만, 그것과 별개로 씁쓸함도 들었었다.
아무리 로벨이 자신을 좋아해 준다고 해도 그도 사람인지라 속으로 비교를 했을지도 몰랐다.
같은 귀족이라도 두 사람은 타고난 태생과 기품이 달랐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놈을 따라 한답시고 거울을 보고서 오만한 표정을 지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따라 하는 수준에만 그쳤었다. 분하게도 그놈의 몸에 밴 여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과거의 불미스러운 얘기까지 꺼내긴 싫었다. 아마 듣는 로벨도 구질구질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숨기고 싶었다. 이것은 에드릭 자신도 몰랐던 약점이었다.
그리고 숨기고 싶은 건 하나 더 있었다.
“로벨. 나도 화장실에 갈 거야.”
에드릭은 두 번째 관문을 마치자마자, 이 거짓말부터 뱉었다.
아까 로벨이 화장실을 갔던 사이에 수십 번이나 연습했던 말이라서, 다행히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로벨은 늘 걸음을 포함한 모든 행동이 빠른 편이었다.
그 말을 뱉는 짧은 사이에도 주인의 구두 앞에 바짝 붙어 선 로벨은 웃으며 말을 받아쳤다.
“예, 고생하셨어요. 금방 손 씻을 물을 대령하도록 할게요.”
“그 뜻이 아니야.”
“……?”
오랜 석판 해석 작업 때문에 원래의 색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변한 장갑을 정리하던 로벨이 의아한 눈을 깜빡였다.
에드릭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로벨에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화장실에 갈 거라고.”
“화……장……실이요?”
“어. 화장실.”
혹시 거짓말이 들킬까 봐 더 힘을 주어 강조했다. 지레 찔려서 고개도 크게 끄덕이기까지 했다.
로벨은 눈치도 빠른 편이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틈이 보이면 들킬 것이다.
실제로…… 이제껏 감추고 싶은 몇 가지를 종종 들키곤 했으니까.
로벨은 전혀 예상치 못하겠지만, 그의 앞에선 다른 사람들 앞에서보다 더 조심하는 편이었다. 행동이든, 말투든, 표정이든 그러했다.
그러자 로벨이 세상에 없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그의 거짓말을 알아챈 사람 같았다.
이어서 진심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 뒤따라오자 양심이 콕콕 찔렸다.
하지만 에드릭은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랬다면 이런 거짓말로 핑계 삼지도 않았을 테다.
그는 제 결심에 쐐기를 박듯이 설렁줄을 꽉 잡아당겼다.
그러자 아까부터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크림슨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왔다.
“예, 도련님.”
“밖으로 나갈 거니까 넌 날 부축해. 로벨은 여기 있고.”
“예,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따로 이야기한 것도 없는데 크림슨은 다 알겠다는 듯이 행동했다.
곧장 그의 휠체어 뒤에 서서 손잡이를 잡아버렸다. 로벨이 미처 나설 틈도 없었다.
에드릭은 속으로 안도했다. 둔한 줄로만 알았는데 보기보단 행동이나 눈치가 빠른 놈이었다.
아까 바깥에서 얘기 중인 시종들을 보고서 창문 너머로 ‘올라와.’라고 입 모양으로만 간단히 말했을 뿐인데도 이렇게 찾아오다니.
하지만 에드릭은 칭찬까진 하지 않았다.
크림슨이 지금 당장은 쓸모가 있을지라도 오래 두고 쓸 시종은 아니었다.
종종 쓸데없고 거슬리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아까도 그랬다.
‘…….’
에드릭의 표정이 일순간 싸늘해졌다.
밖에서 크림슨이 로벨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를 떠올리자 다시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이런 놈을 오래 두고 있다간 병이 낫긴커녕 화병만 더 생길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은 내쫓기보단, 유용하게 써먹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에드릭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참고 말했다.
“가자, 크림슨.”
“어, 어, 어! 잠깐!! 잠깐만요!!!”
휠체어 바퀴가 채 한 뼘도 움직이기 전에 로벨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어, 이게 아닌데…….’라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묻어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드릭은 일부러 시선을 로벨의 손에만 박아두었다. 혹여 눈이라도 마주치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아까 잡았던 로벨의 따뜻한 두 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과 불안함이 조금이나마 녹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로벨은 손톱도 신기하게 그 주인을 쏙 빼닮았다.
열 개의 손톱이 모두 시원스러울 정도로 큼직하고 반질거렸다. 정작 손목과 손가락은 가느다란 편인데도.
그 모양 하나하나를 눈에 각인하듯 바라보는데, 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도련님. 방에 가셔서 테라스에 딸린 화장실을 이용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로벨. 너 설마 내 명령에 불복하려는 거야?”
로벨이 자꾸만 말리려 하자 에드릭은 결국 최후의 수단까지 꺼내 들었다.
우습게도 이것은 바로 새벽녘, 로벨이 언질 준 소리였다.
[ 만약 보좌관이나 다른 사람들이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청을 하면 거절하고, 그 후에는 이 말을 하세요. ‘너, 내 명령에 불복하는 거야?’라고요. ] [ ……왜? ] [ 여기서 도련님 명령에 불복할 사람은 세 손가락에 꼽히거든요. ] [ 그건…… 로벨 너랑…… 공작이랑 그 여자야? ] [ 설마, 그럴 리가요. ]재미있는 장난을 들은 것처럼 입꼬리를 당긴 로벨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꼽으며 말했다.
[ 공작님, 공작부인, 그리고 블리반 경이죠. ]이런 얘기를 나눌 때도 두 사람은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에드릭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정말 가장 불복할 수 있는 사람은 빠진 것 같다고…….
어쨌든, 그게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로벨의 반응이 궁금해서 슬쩍 눈을 올렸다.
‘……화내진 않겠지?’
알려준 것을 도리어 받아버린 그는 더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확실히 당황은 한 것 같아도 주인을 원망하거나 화가 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시선을 빠르게 원위치로 고정한 에드릭이 속으로 깊게 안도했다. 로벨이 화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 그, 그럼……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
“야. 넌 도련님 변소까지 따라갈 작정이냐?”
보다 못한 크림슨이 미쳤냐는 듯이 따졌다.
그러자 언제 로벨의 손만 바라봤냐는 듯이, 에드릭이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려 크림슨을 매섭게 쏘아봤다.
“넌 로벨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그 기백에 크림슨의 커다란 덩치가 움찔했다.
에드릭의 표정이 밥을 안 먹겠다고 하거나 물건을 던질 때보다 험악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용병 생활로 잔뼈가 굵어도 귀족을 대할 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아니, 그런데, 내가 로벨에게 뭘 했다고 저러셔?
생각해보니 크림슨은 억울했지만, 꼬리를 내려 사과를 했다.
“흠…… 흠. 죄송합니다.”
“됐어. 나가기나 해. 로벨 너도 비켜.”
혹여 또 발목이 잡힐까 봐 에드릭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로벨도 더 잡진 못했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휠체어가 움직일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에드릭은 일부러 시선을 정면에만 고정했다. 열린 문으로 향하며 로벨을 지나칠 때는 죄책감에 가슴이 또 두근거렸지만, 무릎 위 놓인 손을 꼭 주먹 쥐고서 참았다.
이윽고 크림슨이 미는 휠체어 바퀴는 곧 복도에 당도했다.
그리고 바퀴가 화장실 방향으로 틀어지려는데, 에드릭의 명령이 떨어졌다.
“공작이 있는 곳으로 가.”
* * *
“이번에도 결국 공자께서 해냈습니다.”
보좌관의 목소리에 대견함과 뿌듯함이 흘러넘쳤다.
반면에 공작은 별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창가에 기댄 채 종이 뭉텅이를 천천히 훑어봤다.
서서히 지는 석양이 그의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보좌관은 공자와 닮았으면서도 다른 그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첨언을 했다.
“이제 막 글을 깨우친 것치곤 대단한 성과 아니겠습니까.”
서너 살 아이만도 못한 형편없는 글씨체를 두둔하는 말이었다.
공작은 대답하는 대신 종이를 넘겼다. 긴 손가락 사이로 종이가 머무르는 순간은 길지 않았다.
보좌관은 그걸 보다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군.’
공작은 예로부터 무엇이든 남들에 비해 배우고 익히는 속도가 빠른 수재였다.
그러니 공자도 공작처럼 속독과 속필이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보좌관이 다시금 뿌듯한 미소를 짓는데, 공작도 낮게 웃었다.
“……재미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