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8)
8
“도련님을 향한 네 마음은…… 자알…… 알겠다…….”
부지런히 짐을 꺼내는데, 뜬금없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형편없는 낯의 림슨 형이 보였다.
아까 헛기침을 그렇게나 하더니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가뜩이나 노안인데 하루 새 몇 년은 더 늙은 얼굴이네……. 저런저런.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묻냐?!”
내 말이 마치기도 무섭게 버럭 소리 지른 림슨 형이 주춤했다.
그는 뒤에서 야영 준비를 하는 기사들을 의식하듯 목소리를 낮춰가며 나를 타박했다.
“네 목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줄 알아? 겁도 없이 그런 소릴 지껄여! 귀족한테 누굴 만나라고…….”
“형, 일단 인상부터 좀 폅시다. 그러다 주름 더 깊어지면 진짜 장가 못 간다?”
내 말에 림슨 형은 속이 터진다는 듯이 주먹으로 제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분노한 곰 같았다.
나는 그 손을 잡아끌어 마차 짐가방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그러자 형이 분풀이라도 하듯 짐가방을 바닥에 하나둘 던졌다.
괜히 걱정했네, 괜히 걱정했어. 역시 기운이 장사야.
옆에서 열심히 짐을 거드는데, 여전히 심란한 그의 표정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위로 삼아 말하자 그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네놈은 그렇게라도 도련님한테 관심을 받고 싶은 거냐?”
“관심이라기보단…….”
일종의 동병상련이죠.
말끝을 흐리며 쓰게 웃었다.
내 병을 치료하겠다는 목적이 가장 크지만,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묘한 감정들이 생겨났다.
그를 보면 내 몸이 성치 못했을 때의 일들이 자연히 떠올랐다.
그러니 뭐랄까.
측은지심이랄까, 동질감이랄까……. 같은 희귀병을 앓았던 자들만의 묘한 끈끈함이 생겼다.
이쪽의 일방적인 감정이지만…….
나는 설명을 바라는 듯한 림슨 형에게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처음엔 솔직히 같이 있기만 해도 다행이겠다 싶었는데요. 이젠 좀 달라졌어요.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도련님이 잘되길 바라요. 뭐…… 그리고 이것저것 눈에 걸리더라고요.”
요새는 같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챙겨주고 싶다는 결심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황태자가 있다 해도 그는 나중에 등장하는 인물이니 혼자 버티기엔 힘들 테니까.
그런데 림슨 형이 내게 상처를 주는, 아주 곤란한 얘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건,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다. 다른 사람을 만나보면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새로운 일을 해도 마음이 바뀔 수 있고…… 일고여덟 번째보단…… 첫 번째로 사는 게 낫지 않겠냐.”
……뭔가 이상한 뉘앙스인데?
어리둥절해하는데 형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진지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
“하인 자리 말고라도 뭐 하고 싶은 거 없냐? 이 형이 직접 알아봐 주마.”
‘하고 싶은 거라…….’
무의식중에 아까 에드릭을 부축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가까워질수록 내게 효능이 크다는 건 대충 예상했는데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 기회가 오면 좋을 텐데…….’
내가 침묵하자 림슨 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뭐. 뭐 있냐? 뭘 하고 싶은데?”
“도련님을 다시 부축하고 싶어요. 아니면 손이라도 제대로 잡아보고 싶네요……. 아, 아니다. 손잡는 건 별 반응이 없었지. 음, 그럼 빨리 막사로 이동하면 좋겠어요. 그래야 도련님을 옮기지.”
“……”
“기사님들은 언제 오려나……. 형. 그때 형이 하겠다고 나서면 안 돼요. 알겠죠?”
“그냥 나가 뒈져라.”
응? 하고 싶은 거 없냐더니 갑자기 또 왜.
대강 짐 정리를 마친 후, 반대편의 기사들을 응시했다.
저들도 얼추 준비를 끝낸 모양이었다.
슬슬 도련님한테 돌아갈까 생각하는데, 손을 털던 림슨 형이 그들을 아니꼽게 흘겨봤다.
“쯧, 저런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챙겨 입으면 움직임이 둔해지는데 왜 저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기사란 놈들은 겉멋만 들어선.”
림슨 형은 용병 시절부터 기사들과 사이가 안 좋다고 하더니, 검은 사슬 기사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소심하긴.
괜한 트집을 잡는 형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그러자 형이 왜, 뭐, 라고 물었다.
“형님. 오다가다 기사님 한 명 좀 눈여겨봐줄 수 있어요?”
대대손손 상인 집안의 딸인 내 안목으로 봤을 때 림슨 형은 누구보다 믿을 만했다.
그래서 림슨 형이 곤란할 정도까지는 아니고, 작게 부탁할 요량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가 가자미눈으로 나를 봤다.
“기사는 왜.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러는 건데.”
“다 그럴 이유가 있죠.”
“그러니까, 묻는 소리 아니냐. 그 이유가 뭐냐고.”
“헤헤.”
림슨 형은 가만히 웃기만 하는 나를 빤히 보다가, 이내 한숨을 흘리며 물었다.
“어떻게 생긴 기사 나으리인데.”
“으음. 그러니까…… 긴 금발에, 키가 기사답게 훤칠하고, 어깨도 넓고, 형만큼 젊고……. 아, 굉장히 잘생겼어요! 눈도 크고, 이목구비도 단정하고, 선한 인상의 미남이에요.”
공작부인의 끄나풀 기사 특징을 하나하나 손꼽으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말을 마치자 림슨 형님은 나를 쓰레기 보듯 노려봤다.
* * *
“단장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검은 사슬의 단장, 블리반은 명상을 마쳤다.
그의 원숙한 눈동자가 저 너머 램프 빛이 번지는 마차 창문에 닿았다.
그 안에 차기 주군이 있다.
차분하게 아름다운 금발이며 고집이 느껴지는 입매가 영락없이 현 주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닮은 것이라곤 그게 전부.
타고난 검사인 주군과 달리 저 아이는 체구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작았으며, 다리를 절기까지 했다.
유년기부터 모두가 주목할 만큼 영특했던 주군과 달리 지식이나 주변머리도 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사치스럽고 난폭하다고 했던가.’
대체로 직접 본 것을 신뢰하는 편이지만, 거슬리는 얘기들이 귀가 아플 정도로 들려서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그 안에는 그와 긴 세월 함께한 집사의 목소리도 있었다.
집사는 저 아이가 상당한 값어치의 약을 밥 먹듯이 깨부순다며 염려했었다.
심지어 그를 위해 애써주는 마님과의 대화조차 거부하는 등 제멋대로 구는 경향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블리반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어떠한 결함이 있다 해도 후계자는 후계자.
덴카르트의 근간을 망치지 않는 이상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그게 진정한 기사이니까.
나무에서 등을 뗀 블리반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공자는 내가 데려오도록 하겠다.”
“예, 단장님.”
마차 앞에 당도하자 부지런히도 짐을 움직이는 뒷모습이 보였다.
차림새를 보니 시종, 그것도 공자만큼이나 빼빼 마른 소년이었다.
잠시 시종을 훑어보던 블리반은 곧 그의 이름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집사가 말했던 로벨이라는 시종이군.’
집사는 떠나기 직전 많은 것을 일러주었으나, 특히 저 소년에 대해 더 강조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소년만큼은 공자가 특별히 생각한다고 했었지.’
실제로 그는 저 아이가 아침에도 공자의 휠체어를 도맡은 것을 목격했다.
어린 나이에도 구김살 없는 미소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아마 짜증 섞인 낯의 공자와 함께 봐서 더 돋보였는지도 몰랐다.
걸음을 멈춰선 그는 시종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 나름의 배려였다.
전장의 훈장이 가득한 자신의 얼굴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는 탓이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문제였다. 그의 건장한 체격과 위압감에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다분했다.
그런데 그때, 시종 로벨이 먼저 몸을 휙 돌렸다. 타고난 기사인 블리반도 흠칫 놀랄 정도로 엄청난 반응 속도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광경이 이어졌다.
그를 발견한 연보라색 눈동자가 잠시 커지더니 이내 기쁘게 휜 것이다.
“오셨습니까, 단장님! 도련님께선 안에 계십니다!!”
“……?”
……왜 이렇게 나를 반기지?
블리반은 드물게 당황하고 말았다. 차라리 소년이 겁을 먹거나 울었으면 더 익숙했을 것이다.
날이 어두웠으나 얼굴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마차 창문을 넘은 램프 불빛에 험악한 얼굴이 훤히 비칠 텐데도 로벨은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도련님 막사가 정해졌군요. 어디인가요?”
질문도 이보다 더 적극적일 수가 없다.
기사 훈련소에서 수년간 훈련을 받아온 신입 단원들조차 처음엔 그에게 말 한마디 붙이는 걸 어려워했건만.
그 순간, 집사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스쳤다.
[ 로벨 군이 도련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대 시간에도 밤잠을 쪼개며 도련님을 찾아가곤 하더군요. 혼이 날 각오를 하고서도 말입니다. ]그 말대로 공자에게 온 마음을 다해 충성을 맹세한 시종이었다.
그러니 단장인 자신에게도 감히 거처의 위치를 캐묻는 것 아닌가.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무거운 침묵에도 로벨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자신의 주군을 딱딱한 마차가 아닌, 모포가 깔린 곳으로 당장 모시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상대의 호흡만으로도 그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블리반은 확신했다.
저건 단순히 꾸며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공자가 생각보다 수하를 괜찮게 다룰 줄 아나?’
블리반의 입매가 미묘하게 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