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54)
54화 마녀의 숲 (1)
“그럼 저들이 그때 그 약탈자란 뜻인가?”
난쟁이놈의 물음에 로트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로써 상황이 명백해졌다.
3층에서 당당히 약탈을 벌이던 놈들이 공교롭게도 몬스터에게 쫓기다가 우연히 우리 쪽으로 오게 됐다는, 그런 우연은 없을 테니까.
“누군진 몰라도 우리를 콕 짚어 노리고 있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일세. 아마 쫓기는 척하며 우리 사이에 끼어들려는 거겠지.”
내 말에 긍정한 로트밀러가 자신의 의견을 첨부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 그럼 이제 어떡할 건강!”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운 좋게도 로트밀러 덕분에 놈들의 수작을 일찍 알아챌 수 있지 않았나.
“이 기회를 이용하는 편이 좋겠군.”
“이용하다닝?”
미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만, 세세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어느새 저들도 도착한 모양이니까.
“부, 불빛! 불빛이다!”
한 사내의 외침과 동시, 피땀으로 범벅된 세 명의 남녀가 우리 횃불 반경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섰다.
“연기에 자신이 없다면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어라.”
속삭이듯 읊조리며 로트밀러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아저씨랑은 말이 잘 통한다니까.
내심 걱정했던 난쟁이놈도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한 듯하고.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더 가까이 오지 마라.”
뛰어오는 그들을 보며, 나는 즉시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가 길을 가로막았다.
“이, 이보시오! 일행이 전멸했소. 도와주시오! 사례는 할 테니……!”
절박하면서도 다급한 표정.
이 아저씨도 연기 잘하네.
하긴 약탈자면 당연한 건가?
“무기를 내려놔라.”
“하, 하지만 뒤에 몬스터가!”
삼십대 초반의 인간 아저씨가 뒤를 가리켰다.
횃불 반경이 너머에서 그들을 쫓던 오크 무리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취, 취이익!”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자 쉬이 접근치 못하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른다.
그러니 어서 우리들을 들여보내 달라.
그게 저 아저씨가 말하려는 바임은 자명했으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너희들 선택이다. 무기를 내려놓든가, 밖으로 꺼지든가.”
나는 다시 한번 완고하게 말했고, 대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기야 고민이 되겠지.
“…….”
미궁에서 무기란 목숨과 동일하니까.
아마 우리가 눈치를 챈 건 아닐지까지도 속으로 의심하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다.
쟤들이 어떤 선택을 하던 우리가 손해 볼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내려놓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콧수염 아저씨가 무기를 바닥에 떨구자, 다른 두 명도 뒤따라 무기를 버렸다.
‘욕심을 부려 보기로 한 건가.’
그 선택이 흡족스러운 한편,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 정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우리를 노린다니?
짐작 가는 이유조차 없었다.
“좋아, 그럼 그 상태로 천천히 와라. 되도록이면 모두 떨어진 상태로.”
“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우리는 그저 도움을…….”
“도움을 받고 싶다면 시키는 대로 해라.”
“알겠다.”
이후 그들이 지시대로 한 명씩 도착하자, 로트밀러가 다가가 숨긴 무기들의 유무를 확인했다.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어 보이네.”
“그렇군. 무라드, 너는 이들을 감시해라.”
“아, 알겠네!”
난쟁이놈이 바짝 굳은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북한군처럼 팔다리의 열을 맞춰 걸어갔다.
왠지 속에서 한숨이 밀려 나왔으나…….
다행히 놈들의 표정을 보니 그 행동에서 어색한 점을 느끼진 못한 모양.
“취, 취이익…….”
“취익, 취익, 취익-!”
이후 난쟁이놈에게 약탈자 삼인방을 맡긴 채, 오크 쪽을 경계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놈들이 등 돌려 떠났다.
오크 놈들도 이 많은 숫자와 싸우는 건 리스크가 크다고 여긴 것이다.
‘하여간 몬스터 새끼들은 하나같이 영악하다니까.”
뭐, 사람 새끼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여하튼 쓸데없는 전투를 피한 건 우리에게 희소식이라 볼 수 있었다.
새로운 문젯거리가 주어진 와중에, 오크와의 전투까지 신경 쓰려면 영 피곤할 테니까.
“으아, 죽는 줄 알았다…….”
이내 오크 무리가 사라지자, 삼인방 중 홍일점인 여성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만, 뒤늦게 정신이 들었을까?
그녀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더니,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목례했다.
“아! 저는 엘리사라고 해요. 저희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찢어진 상의로 훤히 드러난 가슴골 때문일까?
“크, 크흐흠. 히쿠로드 무라드일세.”
난쟁이놈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순진한 연기를 하는 거 같지는 않았다.
고개는 돌아갔는데 시선은 여전히 한곳을 향하고 있는 걸 보면.
“무라드 씨였군요! 그럼 이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실까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아, 그렇구나!”
엘리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이 내게 다가와 덥석 손을 잡았다.
그리고 또다시 아까처럼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이번에도 가슴골이 강조됐다.
“하아, 진짜 덕분에 살았어요! 여러분을 만나지 못했으면 정말 어떻게 됐을련지…….”
헐떡이는 숨을 토해 내며, 귓구멍을 간질이는 듯한 음성을 면전에 뱉어 준 것은 덤.
이제 보니 삼인방 중 얘만 상의가 유독 많이 찢어져 있던 것도 이를 위해서인 듯한데…….
“비요른! 눈빛이 게슴츠레하당!”
미샤가 나의 진심을 오해하며 중얼거렸다.
다만 굳이 이 자리서 오해를 풀진 않았다.
곧 그럴 기회가 있을 테니까.
“하나씩 이름을 밝혀라.”
일단 놈들에게서 의심을 지우기 위해, 간단히 호구 조사부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스스로를 소개한 것은 리더로 추정되는 콧수염 아저씨였다.
“한스 아르고다.”
뭐?
“…한스라고?”
“흔한 이름이지, 동명이인이라도 있나 보군?”
“아, 음, 뭐… 그런 거다.”
나는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A는 내 방패에 대가리가 찍혀 죽었다.
한스B는 우연히 술자리에서 조언을 얻은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리고 오늘 만난 한스C, 그러니까 여기 이 콧수염 아저씨는 아무래도 A의 수순을 밟게 될 듯하다.
아무튼 얘는 이만하고 다음.
“저는 이리타 테이슨이라고 합니다.”
훤칠한 체격의 금발 창술사, 테이슨.
나이대는 이십대 중반으로 추정되며, 별다른 특징은 못 찾겠다.
굳이 꼽자면, 예의가 발라 보인다는 정도?
“여기까지인가 싶던 상황이었는데, 덕분에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창잽이 테이슨이 허리를 90도로 숙이자, 엘리사가 특유의 천연스러운 말투로 호들갑을 떨어댔다.
“정말이에요!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레아틀라스께서 저희를 보우하신 게 틀림없어요!”
“레아틀라스?”
한 단어에 로트밀러가 흠칫 굳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엘리사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그러니까 엘리사 양은—”
“아, 제가 아직 성을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저는 엘리사 베헨크라고 해요. 보시다시피…….”
엘리사가 말꼬리를 흐리며 자신의 복장을 확인하더니 울상을 지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땀과 흙으로 점철된, 원래는 하얬을 의상.
“…보시다시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레아틀라스 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허!”
“정말로 신관이셨군요.”
난쟁이놈은 그저 짧게 탄성을 토해 낸 반면, 로트밀러는 눈을 감고는 엘리사 앞에서 짧게나마 성호를 그렸다.
와, 이 아저씨 연기 잘하네.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예,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다 된 밥이라 여겼을까?
엘리사 역시 환히 웃으며 그를 마주보며 성호를 그려 주었다. 그리고 이를 끝으로 한순간에 경계심 어린 공기가 옅어졌다.
음, 적어도 저들에겐 그리 보였을 것이다.
‘얘가 진짜 신관일 리 없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으—’
“엘리사 님, 괜찮으시다면 제 상처 좀 봐주시겠습니까?”
뭐?
“죄송해요! 그걸 먼저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설마, 사칭이 아니라 진짜 신관이야?
예상치 못한 전개에 움찔하는 사이, 한스C가 상의를 걷어 찔린 자상을 보여 줬다.
그러자 엘리사가 기도주문을 외우더니,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 손을 상처 부위로 가져다 댔다.
헌데 얼씨구?
솨아아아-
정말로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의심의 눈길로 모든 걸 지켜봤음에도 이견을 낼 수 없는 진짜 신성력이었다.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확신하냐고?
일단 포션이랑은 아무는 소리부터가 달랐을뿐더러, 저기 저 한스C의 표정만 봐도 그렇다.
일말의 고통도 없는 듯 온화하지 않은가.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예상외의 전개였던 건 마찬가지였을까.
잠시 당황했던 로트밀러가 이내 정신을 되찾고는 연신 성호를 그려댔다.
마치 기적을 눈앞에서 목도한 중생과도 같은 반응.
내 눈에는 좀 과해 보이긴 했지만, 사실 세계관 구조상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이종족들이 성지에서 자라듯, 대부분의 인간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신전을 통해 글을 배우고 지식을 쌓아가니까.
신관이란 이름이 지닌 무게부터가 다른 것이다.
“아! 그럼 이제 무기들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엘리사가 천연덕스럽게 물어왔다.
마치 이제서야 무기가 없단 걸 깨달았다는 듯한 말투. 아마 신성력을 보여 준 것도 이를 위한 포석이었겠지.
아까 과감하게 무기를 버린단 선택을 한 것도 바로 이걸 믿어서였을 테고.
하지만 이걸 어쩌나.
“그럴 순 없다.”
“네, 네?”
당황한 듯한 표정의 그녀를 응시하며, 나는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그야 벌써 정체를 알고 있단 걸 밝힐 필요는 없을 테니까.
“네가 진짜 신관이란 건 알겠다. 근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조상신을 믿는 바바리안이다.
딱히 신관들에게 받은 것도 없으니, 이렇게 반응을 해도 이상하진 않다.
이내 엘리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간 출신인 로트밀러와 드왈키를 바라봤다.
어떻게든 도움을 청해 보려는 듯한데…….
나는 완고하게 여지를 거두었다.
“무기를 돌려주는 건, 이들에게 보상금을 받은 뒤에 이들이 떠날 때다.”
“보, 보상금요?”
“뭘 놀라나? 네가 신관이건 뭐건 미궁에 들어온 이상 탐험가다. 관례를 따라야 한다.”
“아, 네에… 그런 관례가 있다고는 들었어요. 그럼… 얼마쯤 드리면 될까요?”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한 뒤에 말했다.
“200만 스톤 정도면 되겠군.”
“…뭐, 뭐요?”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묻는 엘리사.
하지만 나는 떳떳했다.
“무리한 요구는 아닐 텐데?”
암, 이 정도면 양반이지.
심한 놈들은 살려 준 대가로 장비도 싹 털어간다고 들었으니까.
“아까워하지 말고 목숨값이라 생각해라.”
“하지만… 저희는 그렇게 큰돈이 없는걸요?”
그거야 이미 알고 있다.
미궁에 들어오면서 현금을 갖고 다니는 놈들이 어딨겠는가?
예상한 답이 나왔으니 슬슬 다음 수를 둬 볼 차례.
“값을 깎아 달라고는 안 할게요. 적어도 밖에 나가서—”
“안 된다. 나는 동족의 말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 정 돈이 없다면 현물로 지불해라.”
“…현물이요?”
“음, 저 남자가 지닌 갑옷 정도면 될 거 같군.”
검지로 한스C를 가리키자, 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엘리사와 몇 번 눈빛을 주고받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그래 이 정도로 목숨을 건졌다 치면 손해는 아니겠지. 대신 조건이 있다. 우리 피로가 풀릴 때까지 오늘밤 신세를 지겠다.”
“좋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셈은 훤히 보이지만, 뭐 어차피 진짜 지킬 약속도 아닌데 못 할 게 뭔가?
“이리타, 나를 좀 도와주겠나?”
“그러리다.”
옆에 있던 창잽이의 도움을 받아 중갑을 벗은 한스C가 장비를 로트밀러에게 건넸다.
좋아, 일단 한 새끼 갑옷은 벗겼고.
‘일단 이 정도면 뺏을 수 있는 건 전부 뺏고 시작하는 거 같은데…….’
“자, 그럼 대가는 치렀으니 어서 우리 무기를 돌려주겠나?”
나는 더 이상 참지 않고 해맑게 웃었다.
솔직히 이렇게 잘 풀릴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왜 웃는 거지?”
한스C가 날 보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 엘리사를 보던 내 눈빛이 게슴츠레하다던 미샤의 오해를 풀지 않았듯이.
말하지 않아도 곧 알 수 있을 테니까.
“저기 얀델 님? 여기서 더 요구하시면 저희도 곤란—”
“아, 그럴 일은 없다.”
나는 그리 답하며 메이스로 엘리사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퍼억-!
“에, 엘리사 님!!!”
어느 게임이던 힐러 대가리부터 깨부수는 건 국룰인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