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565)
565화 데스티네이션 (5)
역행하기 시작한 시간은 서서히 과거로 돌아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혹시 남작이 앞장을 서주실 수 있겠소?”
제롬이 내게 최선두를 부탁하던 그 시점.
“좋다, 대신 두 번째로 획득한 성과에 한해, 네 개까지 우선권을 줘라.”
“넷이라……. 알겠소. 남작에게라면 그 정도는 전혀 아깝지 않지.”
짧은 협상을 끝마치고 나는 촌장이 사라진 나무 아래로 몸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생각 없이 아래로 내려간다고?
[제가 그 아이에게 보여 주었던 운명이에요. 이 운명선에선 신탁이 없었죠. 그래서 당신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저 아래로 내려가게 됩니다.]‘아…….’
확실히 그리 말하니 납득이 되기는 한다.
제롬에게서 위화감을 느낄 수 있던 건 ‘신탁’의 유무가 컸으니까. 뭔가 일이 터진다는 걸 알았기에 과할 정도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예민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후웅-!
아무튼, 그렇게 내가 나무 아래로 내려간 순간.
돌연 세상이 까맣게 물들며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장면이 변한다.
[시간이 없으니 중요한 것만 짚고 넘어갈게요.]장소는 어느 동굴.
중심부에는 포탈 비석이 자리해 있으며, 나는 그 옆에 기절한 채 잠들어 있다. 그리고 촌장은 그런 내 곁으로 다가와 무언가 알 수 없는 의식을 시작한다.
[저번에 당신이 갔던 그 지하실 아래에 숨겨진 공간이에요. 마을에 내려온 당신은 수백 명의 적들과 오랜 시간 싸우며 지원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이내 힘이 빠지자 결국 붙잡혀 이곳에 오게 됐죠.]시체들이 가득하던 지하실 아래 숨겨진 공간.
‘…설마 이런 장소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그때는 워낙 상황이 긴박했기에 그런 것까지 살펴볼 틈은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지켜보세요. 이제 금방 끝날 테니까.]2배, 3배, 4배.
동영상 재생 속도를 올린 듯 빠르게 흐르는 시간.
머지않아 시간 배율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촌장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가 한창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솨아아아아아아-!
촌장의 몸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내 육신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갔고, 머지않아 촌장이 픽 쓰러졌다.
그리고…….
스윽.
기절해 있던 내가 눈을 뜨며 일어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손을 쥐었다 펴더니 낯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그 순간 장면이 한 번 더 변한다.
장소는 마을이 아니라 미궁의 어둠이 깊게 내려 앉은 섬 중심부. 그곳에서 ‘나’는 제롬 세인트레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약속대로 ‘그것’을 주시오.”
“…….”
“이제 와서 미련이라도 생긴 거요? 그렇다면 얼른 마음을 접길 바라오. 그걸 포기하지 않는다면, 밖에 나가서도 그 몸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테니.”
“확실히… 왕가에는 그럴 만한 힘이 있겠지.”
“그걸 안다면 어서—.”
“그러니 아예 모르게 하는 쪽이 더 좋지 않겠나?”
“뭐? 설마 당신……!”
“죽은 자는 말이 없지.”
대화는 그 부분에서 끝.
다시금 장면이 바뀌었을 때, 눈앞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아아아아악-!”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전장으로 변한 상황.
어느새 사방은 수백의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탐사군은 열심히 항전했지만 점점 수세에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전부 내 몸을 빼앗은 촌장 때문이었다.
“이, 이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남작……! 얀델 남작을 죽여라!”
내 몸을 빼앗은 촌장에게는 지킬 것이 없었다.
괴물들 몇이 죽든 간에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동료를 지키고자 열심히 성장시킨 바바리안 캐릭터는 파괴전차처럼 전장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누가 봐도 이제 승기가 완전히 기울어버린 무렵.
“……으윽!”
탐사군 대원들을 학살하던 내가 돌연 움직임을 멈춘다.
후열의 마도 병단 사이로 난입해 한 마법사의 머리통을 내려찍기 직전이었다.
“레, 이븐…….”
구사일생을 한 동료가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바닥을 짚고 도망친다.
그리고 이를 보며.
콰앙.
‘나’는 툭툭 끊기는 동작으로 망치를 저 멀리 내다던졌다.
방패를 버렸고, 상체를 덮은 갑옷을 풀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근처에서 지켜보던 동료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내게 무기를 겨누었다.
“돌아… 온 거냐?”
전투 중 구금 상태가 풀리며 동료들과 함께 탈출한 아멜리아의 질문.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아주 짧았다.
“에밀리……. 나를… 죽여라…….”
그런 부탁을 들은 동료는 어떠한 대답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어떠한 적을 앞에 두고서도 침착하게 겨눠지던 칼날은 오늘따라 크게 진동했다.
그러던 때였다.
“못하겠다면, 비키시오!”
상황을 인지한 제롬이 칼을 뽑아 들며 다가왔고, 나는 그런 녀석을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당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안 돼……!”
“……녀석의 뜻이다……!”
아멜리아가 입술을 짓물며 에르웬을 억제하는 사이.
서걱-!
이내 오러로 휘감긴 칼날이 내 목을 내리친다.
다만, 한 번에는 잘 들어가지도 않아서 여러 번 거듭해서.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나무에 도끼질을 하듯 수없이 내려치지는 검.
왠지 모르게 적막해진 공터 위로 한 줄기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동료 중 누군가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와 내 몸에 포션을 쏟아붓는다.
당연히 반응은 없다.
포션에는 죽은 캐릭터를 살려내는 기능 따위는 달려 있지 않으니까.
“너……! 너만 아니었으면……!”
“진정해라, 테르시아.”
“지, 지금 당신은 이걸 보고도 그냥 넘어가려—!”
“그리 흥분해서야 적을 제대로 죽이기야 하겠나?”
“…….”
“차분히, 냉정하게 얀델의 복수를 하는 것에만 집중해라.”
클랜 아나바다가 집결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탐사군을 향해 무기를 겨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시오. 우리가 없으면, 저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소?”
제롬은 열심히 설득했지만 통할 리 만무.
그런 와중에 탐사군 내에서도 많은 인원이 진영을 이탈했다.
“남작은… 영웅이었어. 그 마지막에도 우리를 살리려 했다고……!”
“그런 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 꼴이라니… 이게 뭐가 왕실을 위한 거냐!”
“나 멜란드 카이슬란은 내가 믿는 정의를 위해 칼을 뽑아들리다! 나와 뜻이 같다면 내 뒤에 서시오!”
“반역도다! 반역도들을 처죽여라……!”
그렇게 상황이 극에 치달았을 때였다.
[그쪽이 아니라, 저기를 보세요.]이내 여신의 안내대로 시선을 움직였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일절 관심도 주지 않은 채 혼자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미샤……?’
이내 미샤가 내 시신으로 다가가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솨아아아아아아-!
실물은 처음이지만, 내 몸에 갖다대자마자 터져 나온 특유의 이펙트 덕분에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왜 이게 미샤의 손에 들려 있는진 모르겠지만.
‘저건…….’
소생의 돌이다.
***
소생의 돌.
사자 부활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을 지닌 아이템.
터무니 없는 입수 조건을 가진 탓에 나조차 9년 동안 단 한 번밖에 먹어보지 못했던 바로 그것.
‘이게 왜… 얘한테서……?’
처음에는 멍하니 그런 의문을 가졌지만, 출처에 대해서는 금방 답이 나왔다.
‘……이백호.’
이놈이 소생의 돌을 소유했단 것은 제법 알려진 사실이니까.
대체 어떻게 입수를 했는진 모르겠다마는.
아무튼, 내 부활과 동시에 멈춰진 시간 속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결국 나는 죽지는 않는 거군.”
[예, 죽지는 않습니다.]이백호가 어째서 미샤에게 소생의 돌을 줬는가.
그 목적에 대해서는 대강 짚이는 게 있다.
다만, 내 머릿속에 똬리를 튼 여신은 다르다.
“레아틀라스… 당신은 왜 나를 도우려는 거지?”
내 물음에 여신은 짧게 답헀다.
[…그런 결말은 옳지 않으니까요.]과연 운명을 본다는 이 여신은 어떤 결말을 보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못내 궁금해지지만, 의문은 여기서 끝냈다.
힘으로 겁박해서 들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그래, 예를 들자면 지금 이 상황처럼.
번뜩-!
세상이 까맣게 물들고, 다시금 밝아진다.
그리고 나는 아까 보았던 그 동굴 속에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또 뭘 보여 주려는 거지?”
[보여 주려는 게 아니에요. 이게 현재 당신이니까.]……뭐?
대체 무슨 소리인지 얼른 설명해 보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머릿속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자그맣게.
[제가… 시간을 멈추는 능력은 없어서…….]아, 그랬구나.
동영상을 감상하듯 보고 있는 동안에도 현실의 시간은 쭉쭉 흘러가고 있던 거구나.
그래도 사후 조치는 해주려는 것인지, 여신이 내게 대략적인 상황을 알려 줬다.
아주 심플한 상황이었다.
내가 빛을 터트리며 기절하자, 동료들이 크게 당황했고 그때 기습적으로 제압을 했다던가?
그렇게 나는 제롬의 손에 의해 촌장에게 인도됐다.
“그럼 얼른 날 돌려보내줘라! 저 의식이 끝나기 전에 탈출을 해야 할 거 아니냐!”
[돌려보내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눈을 떠도 모든 능력이 봉인된 상태일 거예요.]“……뭐?”
어처구니가 없었다.
쉽게 말해, 무력을 이용한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뜻 아닌가.
“그럼 이 상태로 대체 어쩌라는 거냐?”
날 도와주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이렇게 되면 오히려 더 최악이 아닌가?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희망을 품었다.
그래도 명색이 신 아닌가.
암,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말해봐라.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애써 믿음을 품으며 말투를 공손하게 고쳤다.
하지만…….
[……길을 보여 줄 수 있지만, 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요.]“그러니까… 나한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아무것도 없다 이거냐?”
대답은 한참이나 텀을 둔 뒤에 돌아왔다.
[……전 당신의 여정을 쭉 지켜봐왔어요. 그렇기에 알고 있어요. 당신의 가장 큰 장기는 냉철한 판단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식도, 그 어떤 적을 상대로도 기죽지 않는 용기도 아니에요.]“…….”
[당신이 가진 진짜 힘은 바로 ‘말’이에요.]바바리안의 몸으로 깨어나 말로 해결한 것보다 몸으로 해결한 게 많았던 나로서는 쉽게 공감하지 못할 분석이었다.
그러나 여신이 보기엔 달랐나 보다.
[노련한 탐색꾼은 그날 그 미로 속에서 고결한 마법사와 함께 죽었을 운명이에요. 하지만 결국에는 살아났죠. 당신이 ‘말’로 시간을 벌었기에.]일단 라르카즈의 미로에서 ‘절제된 소망’을 삼키고 용살자놈과 협상을 했던 일을 말하는 듯한데…….
[당신의 말에는 힘이 있어요. 이미 미약하게나마 한 번, 누군가의 운명을 틀어 버렸죠. 그러니까…….]이내 여신이 긴 서론을 끝마치고 내게 TIP을 줬다.
[이번에도 말로… 잘 해결해 보는 건 어떨까요?]어째선지 의문형으로.
***
두근, 두근-!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울림.
그 울림에 새삼 살아 있음을 실감하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깨어났군.”
거, 눈썰미는 쓸데없이 좋아가지고.
하긴 눈알이 저렇게 크니 당연한 일인가?
나는 아예 눈을 뜨고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냥 정신을 잃고 있는 쪽이 훨씬 좋았을 텐데. 나에게도, 자네에게도.”
“일단 발버둥은 쳐봐야 할 거 같아서.”
여신님께서는 ‘말’로 잘 해결해 보라는 무책임한 말을 했지만.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조언대로 난관을 잘 헤쳐가봐야지.
사실 듣자마자 해볼 만한 제안이 떠오르기도 했고.
“……굉장히 침착하군? 무슨 상황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와중일 텐데.”
“글쎄, 지금 사태 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는 건 암만 봐도 네 쪽인 거 같은데?”
내 모든 행동과 반응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촌장이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노려봤다.
놈도 대가리가 있는 만큼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흐른단 걸 인지한 것이다.
따라서 이쯤에서 패 하나를 펼쳤다.
“촌장, 지금이라도 그만둬라. 어차피 내 몸을 빼앗아도 도시로 귀환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뭔가 했더니, 그저 저주하고 싶었을 뿐이었—.”
“저주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다. 실제로 그 장면을 보고 왔으니까.”
두 번째 패를 꺼낼 타이밍이었다.
“레아틀라스가 내게 미래를 보여 줬다.”
촌장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의외로 허무하게 내 말을 믿어줬다.
“빛을 뿜어내며 기절했다더니 과연… 그녀가 개입을 했던 거였나…….”
여러 정황들을 통해 이쪽이 차라리 납득이 된다고 여긴 모양.
오케이, 그럼 시간 낭비는 줄였고.
“말해보게. 날 멈추고 싶은 거라면. 그녀가 자네에게 무엇을 보여 줬나?”
효과적인 협상을 위해 조금은 시나리오 수정을 했다.
“넌 내 몸을 빼앗고서 제롬에게 공격을 당한다. 그리고 패배하지.”
“……내 계산은 완벽하네. 그들에게 질 리가 없건만.”
“그럼 네 계산이 틀린 거겠지. 아니면 그놈들한테 기습을 당하는 것까지는 예상을 못했거나.”
“그놈이… 기습을 했다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촌장의 눈이 번들거렸다.
왠지 기습을 당한다는 경우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거 같았다.
내게 있어서는 호재였다.
고로, 서둘러 말을 이어붙였다.
“촌장, 네가 몸을 빼앗으려는 이유는 알겠다. 근데 꼭 내 몸일 필요가 있는 거냐?”
“그게 확실한 길이니까. 자네는 언젠가 이 계층을 탈출해 도시로 돌아가는 데 성공할 걸세.”
“혹시 그런 내용의 기록석을 본 거냐?”
“……설마 자네가 ‘기록석’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만.”
사실상 긍정을 의미하는 답변.
갑작스레 등장한 떡밥에 생각이 많아지지만, 일단 현 상황을 타개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 거라면 내가 아니라도 된다는 뜻이군.”
“하지만 굳이 모험을 할 이유는 없지. 패한다는 결과를 알았으니 지금이라도 계획을 바꾸면—.”
바꾸기는 뭘 바꿔.
이쯤에서 녀석의 말을 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롬 세인트레드.”
빛의 기사라는 이명을 지닌 이번 탐사군의 사령관.
“놈의 몸은 어떠냐? 나이가 좀 먹긴 했는데, 일단 백작인 데다가 오러까지도 잘 쓰는데. 너도 기사지 않냐?”
심지어 장점은 이게 끝이 아니다.
최대 장점은 따로 있다.
“무엇보다 놈의 몸을 빼앗으면 당장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
촌장의 입장에서 가장 구미가 당길 만한 미끼.
“그놈은 ‘이블루스’의 정수를 갖고 있으니까.”
내 승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