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28
28화. 서쪽에서 부는 바람은 항상 차다 (12)
처음 흑건적 무리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대익산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둘러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
그는 사실 자유분방한 성격만큼이나 무언가를 책임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편이었다.
정확하게는 ‘얽매인다’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섣불리 자신에게 기대를 던졌다가 실망하거나 만족해하는 모습 등이 너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화련주의 첫 번째 제자라는 자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당초 차기 련주직을 맡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는 편이 옳았다.
그래도 이렇게 남아서 허울 좋은 화랑대주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사부님과 사문에 대한 의무감 때문일 뿐, 그것도 끝나면 말없이 훌쩍 떠날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익산에게 흥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이 의무감을 벗어던지면 세상에는 재미난 것이 많았다.
일탈과 비행이 그러했고, 생사를 건 강자와의 대결도 그러했다. 만약, 이 별 필요 없는 직함도 없었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중원을 떠돌아다니면서 어디선가 비무행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영도와 친해지게 된 계기도 바로 그런 성향 때문이었다.
영도도 자신과 비슷했던 것이다. 비록 사문에 대한 애정이 없는 자신과 다르게 그는 곤륜파에 대한 자긍심이 넘쳐났지만, 강자와의 대결에 열의를 느낀다는 점이 너무나 똑같았다.
그래서 붙은 별호도 독심검효라 하지 않은가.
검을 든 무부라면 검으로 쓰러져야 한다는 생각까지 똑같아 형제처럼 지낼 수 있었다. 거기다 십존인 소유청학의 가르침까지 받았다고 하니, 충분히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도 되었다.
그리고 수 년 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그 독기 가득하던 친구가 이렇게 달라졌을 줄이야.’
간만에 해후한 친구가 확 달라진 모습을 보니 영 어색했다.
그리고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사람 좋아진 인상하며 한껏 해어진 도복 따위를 보고 있노라니, 그나마 남아 있던 투쟁심까지 전부 사라질 것 같았던 것이다.
저런 모습으로 제대로 검이나 들 수 있을까. 든다고 해도 피가 무서워 움츠러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혹시 얼굴만 닮은 다른 사람이거나, 변용공(變容功)을 잘 부리는 누군가가 연기라도 하고 있나 싶기도 했지만…… 또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 친구는 더 이상 나와 검을 견줄 만한 자격이 없군. 실망이야.’
물론, 못 보던 사이에 성취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는지 걸음걸이 하며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배광 등이 제법이긴 했다. 사람들도 놀라긴 했으니.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후기지수의 기준에서나 그럴 뿐, 대익산의 눈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강호의 차기 십존이라고도 불리는 열 명의 기재, 십대무룡(十大武龍) 중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진천검웅(振天劍雄)으로서.
대익산은 영도가 꺾인 검이라고 판단했고.
대신에 흑건적 무리 안쪽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파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저곳에…… 고수가 있다. 이 나를 두근거리게 만들 만한 고수가!’
다들 흑건적의 무리에 정신이 팔린 건지, 아니면 그만큼 눈썰미가 부족한 건지, 저 마차 안에는 대단한 존재가 있는 게 분명했다.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찌릿했다.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픈 마음만 가득했던 그의 마음에 처음으로 불이 붙었다.
삼전승제(三戰勝制)를 제안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일전(一戰)에서 영도를 가볍게 제압하며 몸을 풀고.
이전(二戰)에서 흑신풍사에게 도전해서 전의(戰意)를 최대로 끌어 올린 다음.
마지막 삼전에서 저 미지의 고수와 비무를 겨룰 수 있다면……!
‘충분히 이 먼 곳까지 온 보람이 있겠지.’
애당초 대익산은 흑신풍사에게도 질지 모른다는 가능성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광풍사의 악명이 자자하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십대무룡의 아성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이미 십대무룡이 강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명문 정파의 장문인이나 수장과 비교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찌할 텐가, 영도?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대주!』
『대주, 이렇게 마음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화랑대주! 이게 무슨 짓이오! 그러다 저들을 정말 풀어 주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 일을 어찌 책임지려고!』
순간, 대익산의 귓가로 대원들과 자수백 등의 전음이 빗발쳤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영도를 더 채근할 뿐이었다.
“대답을 주게.”
영도는 아주 잠깐 말없이 입을 꾹 다물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흑신풍사와 도심개 등을 보며 의견을 구하는 것이다. 백화련을 설득하기 위해 나서긴 했다지만, 그는 사실 상행을 대표할 만한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흑신풍사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팔짱을 끼며 코웃음만 칠뿐이었고, 도심개는 뜻대로 하라는 듯이 가만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익산,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영도는 결국 대익산을 돌아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충돌도 피한 채로 설득을 성공하고 싶었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았다.
만약 힘을 써야 한다면 최소한 자신의 선에서 끝내고 싶었다. 당연하지만, 정현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첫 번째 승부는 그럼…….”
“당연한 걸 왜 묻는 것인가? 바로 자네와 나지!”
차아앙!
대익산은 검집에서 검을 천천히 뽑으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뗬다.
영도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 순간, 영도의 검을 본 대익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의 길이가 자신이 쥐고 있는 것보다 현저히 짧았던 것이다. 영도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대익산의 생각과 다르게, 영도가 쥔 건 곤륜파의 장문령, 운룡검이었다. 정현의 손에 두 동강 나며 위쪽은 변상금으로 넘어가고, 나머지 절반만 남았던 검.
그러니 무게도 분명히 확 줄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영도는 오늘따라 손끝에서 느껴지는 검의 무게가 유달리 더 무거운 것 같았다.
십만 명도 넘는 행원들의 향방이 달렸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검을 쥐어 본 것도 그날 이후 처음인 것 같은데. 옳은 결정인지 모르겠군.’
정현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로 쭉 내공도 금제된 데다가, 행원들과 어울리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검을 쥘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심지어 곤륜에서는 틈만 나면 하던 운기행공도 하지 않았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무공 수준이 확 떨어졌을 것이다.
내외일경과 삼화취정을 이루면서 전체적인 기량은 올랐을지 몰라도, 그것과 다르게 검을 쓰는 것은 평소에도 단련해 두지 않으면 감각이 무뎌지는 법이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힘 빼.』
별안간 귓가로 정현의 혜광심어가 꽂혔다.
영도가 허리를 쭈뼛 세웠지만, 그것을 질책하듯 다시 정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린놈이 뭘 그렇게 세상 고달픈 척이야? 손, 어깨, 발, 쓸데없이 들어간 힘들 전부 빼고, 검의 목소리를 들으란 말이야.』
하지만 영도는 도저히 정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잘하던 놈이 갑자기 왜 이래? 그냥 팍! 어? 몰라? 이 쉬운 걸?』
그 순간, 영도는 다시 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쓸데없는 잡념을 비우고, 검 끝에 집중하라는 뜻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숨을 가다듬을수록 무거웠던 검이 점차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바닥으로 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쩌어어엉―!
운룡검이 길게 검명을 터뜨렸다. 탁한 색이었던 검신이 새하얗게 빛나며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다.
웅, 우우웅―
검이 연신 잘게 떨렸다. 영도는 마치 운룡검이 자신에게 반갑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의 검을 바깥으로 밀어내며 영도를 지켜보던 신명자는 기겁하고 말았다.
“요, 용음(龍吟)이라니!”
그 말을 들은 영산과 영천, 그리고 영화도 검을 내리고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대사형이…… 설마 용음을 일으켰단 말씀이십니까?”
“청학 사숙조님도 해내지 못하셨다고 들었던 것을……!”
운룡검에 깃든 용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울음을 토할 때, 곤륜의 기상(氣像)도 하늘을 덮을 것이다.
오랫동안 사문 내에 전해지던 전설이었다.
하지만 소요청학도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한낱 뜬소문으로만 치부되어 버렸던 전설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반쪽짜리가 되어 버린 운룡검이 용음을 토해 낼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경악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숙과 사제들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치 구름을 노니는 용 위에 올라탄 것처럼 기분이 좋구나.”
웅, 우우웅!
“그래. 어디 한번 같이 놀아 보자꾸나.”
영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운룡검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팟!
그리고 거기에 맞춰 대익산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표정은 처음과 달리 미소가 사라지고, 진중하게 변해 있었다. 용음을 토해 낸 순간부터 영도의 기도가 완전히 뒤바뀌어 바짝 긴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부가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십대무룡의 자리는 그렇게 쉽게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랬다면 어찌 차기 십존이라는 말까지 들을까.
그래서 대익산은 오히려 잘되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흑신풍사와 마차 안의 고수에게 다가가기 전에 더 확실하게 몸을 풀 수 있을 테니……!
쐐애액―
오늘날의 진천검웅 대익산을 있게 만든 점창파의 장문 절기, 사일검법(射日劍法)이 쏘아졌다. 이름 그대로, 해를 떨어뜨릴 정도로 검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영도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영도의 운룡검은 그보다 반 박자 늦게 움직였다. 거기서 대익산은 이미 승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쾌검 앞에서 후발선제(後發先制)의 묘리는 통하지 않을 테니.
그게 상식이었다.
분명히 상식이었을 텐데…….
퍼어엉―
이상하게 폭발은 영도의 목이 아닌 대익산의 복부에서 벌어졌다. 운룡검에서 터져 나온 빛무리가 사일검법뿐만 아니라, 단숨에 대익산까지 집어삼킨 것이다. 방출된 검력(劍力)이 회오리쳤다.
그리고 대익산은 실 끊어진 연처럼 단번에 튕겨 나 성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컥!”
“대주!”
“화랑대주!”
성곽 위에서 승부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 경악이 잔뜩 번지고 말았다.
화랑대는 들고 있던 쇠뇌를 내리고 재빨리 성곽 아래로 뛰어내렸다. 흑건적 무리가 밑에 있다는 건 전혀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만큼 대익산의 패배는 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십대무룡이 패배를 하다니!
그것도 그저 그런 패배가 아니었다.
단 일 초.
손을 쓸 새도 없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도 없이.
대익산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있다가, 대원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우웨에엑!”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구역감에 다시 바닥을 부여잡고 피를 한 움큼 토해 내야만 했다.
방금 전에 충돌로 입은 내상이 너무 컸던 것이다. 누가 봐도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음!”
영도는 그런 이를 앞에 두고서도 다음 차례를 외쳤다. 친하게 지냈던 대익산의 상태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검력을 거둬들였으니 며칠 동안 정양한다면 금세 완치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더구나 지금은 집단 간의 향후 향방을 두고 벌어지는 생사투(生死鬪).
안일한 태도는 금물이었다.
아무리 그가 깨달음을 얻으며 성격이 달라졌다고 해도, 이전의 성질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독심검효. 독심을 먹은 검의 효웅으로서의 자세는 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강해진 만큼 강렬한 투기를 뿌려 대는 중이었다.
“안, 돼…… 아직 싸…… 우욱!”
대익산은 그런 영도를 앞에 두고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다시 주저앉아야만 했다. 하체에 힘이 없었다.
영도는 그런 대익산에게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고, 충격에 빠진 성곽을 쭉 둘러보며 다시 한번 더 사자후를 내질렀다.
“다음! 없나?”
“…….”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면서.
자수백은 다시 떨리는 손으로 검병에 손을 가져가야만 했다.
* * *
“마, 말도 안 돼…….”
성곽 위에서 누군가가 내뱉은 혼잣말은 충격이 내려앉은 성곽 위쪽의 상황을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대익산에 이어 자수백, 그리고 청성파 출신의 십조대주까지 연달아 패배한 것이다.
점창, 공동, 청성…… 곤륜이 련 내 다른 형제들의 검을 차례로 꺾은 셈이었으니. 그만큼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단 일초지적이 아니었던가!
그런 형제들의 경악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하아……!”
영도는 길게 날숨을 내뱉었다. 고양된 전의가 천천히 가라앉았지만, 여운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제 좀 볼 만하군.』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에, 영도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뗬다.
그에게는 다른 어떤 백 마디 말보다, 훨씬 더 값진 칭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