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74
74화. 서릿발이 내릴 땐 걸음을 멈춰야 한다 (5)
‘뭐야? 반로환동이 이렇게 쉬운 거였어?’
흑신풍사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 말고 속으로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게다가 딴 놈도 아니고 마후라니……! 이런 미친 것들만 도로 젊어지면 대체 어쩌자는 거야!’
정현이 망량마후를 두고 미친년이니, 정신 나간 것이니, 하고 떠들어 댄다지만.
사실 흑신풍사가 봤을 때는 망량마후나 정현이나 똑같은 부류였다.
자기네들 꼴리는 대로 깽판을 치는 건 물론, 남 부려 먹기를 아주 제 손바닥 뒤집듯이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인성이 참 대단한 어른들인 것이다.
그런 놈들이,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이나 반로환동이라니!
이건 세상이 당장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들릴 정도로 끔찍한 소리였다.
그때.
‘헙!’
흑신풍사는 정현이 영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자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켜고 말았다.
또 저 눈빛이었다.
사람의 머릿속을 샅샅이 파헤쳐 읽는 듯한 눈빛.
흑신풍사는 재빨리 비굴한 미소를 지으면서 양손을 비볐다. 이럴 때는 재빨리 굽히는 게 덜 맞는 지름길이었다.
정현은 그런 흑신풍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녀석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당채영, 아니, 당채영을 닮은 망량마후를 노려보았다.
이럴 줄 알았다는 눈빛. 망량마후가 가진 집착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기 때문에 여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아 이상했었는데, 기어코 쫓아오고 만 것이다.
다만, 자신도 현경에 들어서면서 성공한 반로환동을 그녀가 어떻게 이룬 것인가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세상에는 워낙에 다양한 약과 독이 있고, 만독문은 그 정점에 있는 만큼 무슨 수를 쓴 거겠거니 하고 여겼다.
그가 지닌 타심통으로는 그녀의 의식을 깊게 읽을 수가 없어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정현이 경계하는 것은 단 하나.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풉!”
갑자기 그녀가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싶어 미간에 팬 골이 더 깊어지는데.
“호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어르신, 그동안 겉으로 뵈었던 것과 다르게 너무 진지하시네요.”
“뭐?”
정현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눈살을 더 깊게 찌푸렸다.
그녀는 입가를 가볍게 가리면서 손사래를 쳤다.
“문 내의 상황이 그렇게 복잡해진 마당에, 아무리 큰할머님이시라고 해도 어떻게 여기까지 오실 수 있으시겠어요.”
당채영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 도망쳐 나왔어요. 여러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니 모든 게 다 싫고, 머리도 아프고…… 갑자기 생각도 없던 문주를 하라니 책임지기도 싫고…… 그래서 나왔어요.”
사실 당채영은 만독문에 있는 내내 항상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모든 게 환멸스러웠다. 권력을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친부와 친조부…… 그리고 그동안 존경하던 큰할머니까지 벌이는 여러 짓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거기다 생각에도 없던 문주 자리까지 덜컥 주어지니 모든 게 얼마나 싫던지.
그녀는 지금 그 자리를 받아 봤자, 책임과 의무만 많아질 뿐이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문 내의 일은 권력이 더 공고해진 망량마후와 독왕의 손에서 결정되어질 게 아닌가. 자신은 그저 겉면에 내세운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한평생 무언가에 얽매이는 걸 죽도록 싫어하던 그녀로서는 당연히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그저 웃음 파는 인형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
하지만 도망친다고 한들,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것도 문제였다.
잠적하려 해 봤자 만독문이 나서면 금방 잡힐 건 불 보듯 뻔한 일.
아직 문 내에 남아 있던 소휘천이나 제갈연하에게 부탁해 볼까 싶은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금세 기각했다. 그 두 사람의 속내가 더 음흉한 건 잘 알고 있었으니.
그러다 마지막에 떠올린 사람이 바로 정현이었다.
사실 따지자면 정현은 이번 소란들에 불씨를 던진 장본인이었다.
물론, 문 내의 분란은 그가 아니었어도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고, 그는 자신이 필요한 일만 했을 뿐이라는 건 잘 알았다.
그리고 가문이 자신을 쫓아와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우산이라는 것 역시.
그래서 그녀는 무작정 정현을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중경사살과 만나 손을 봐 주던 차였는데, 정현을 여기서 딱 마주친 것이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은 아닐는지.
그녀는 그런 자신의 생각들을 정현에게 늘어놓았고.
‘이걸 나더러 믿으라고?’
정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논리는 그럴듯하다지만, 저 말을 순진하게 믿을 작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저쪽에서 미리 기다린 게 아니고서야, 이 넓은 성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 건지.
문제는 망량마후라고 딱 단정 내릴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타심통은 표층 의식만 읽을 수 있을 뿐, 깊은 속내까지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만약 당채영으로 변장한 망량마후가 스스로 당채영이라며 표층 의식을 속이는 연습을 한다면 자신도 알아챌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망량마후라면 충분히 가능할 테지.
맥을 짚어서 수준을 확인한다고 해도, 내공 따위야 그냥 숨겨 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너, 나연이 아니라고?”
“네.”
그래.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그래. 그렇다 치고.”
“정말이라니까요.”
“……그럼 왜 하필 나한테 오려고 했던 건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의탁할 곳은 많잖아?”
“어르신이 큰할머님보다 강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잘생겼잖아요.”
“뭐?”
“저 잘생긴 남자 좋아하거든요.”
당당한 태도.
정현은 어이가 없다 못해 이제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내가 너보다 못해도 칠십 년은 더 일찍 태어났다만?”
당채영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도 그게 좀 걸리긴 했는데. 뭐, 어쩌겠어요.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는데. 못생긴 동갑내기 만날 바에는 잘생긴 할아버지 만나는 게 낫죠. 그리고 어르신은 겉보기에 저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걸요. 겉이 중요하지, 속이 중요한가요?”
“…….”
아니, 보통은 정반대 아니냐.
요즘 것들은 다 이런가. 정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이 죄 많은 얼굴이란.’
예나 지금이나, 참 피곤하다 싶었다.
흑신풍사는 뒤에서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하지만 정현은 진지했다. 어떤 이유가 되었건 간에, 이 망량마후인지 당채영인지 모를 괴상한 여인네는 자신을 따라오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히고 있었고, 억지로 떼어 놓는다고 한들 기어코 달라붙을 게 분명했다.
저 광기 어린 집착은 당씨네 일가에 내려오는 병인 거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에이 씨! 몰라. 그냥 피하자.’
팟!
정현은 바로 튀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하니 일단 냅다 줄행랑을 친 것이다.
“으? 으아아! 이 양반이 진짜!”
멀거니 남은 흑신풍사가 괴성을 지르면서 곧바로 따라서 사라졌다.
하지만.
대놓고 소박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당채영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속내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미소였다.
* * *
“안녕하세요.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만독문의 당채영이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역시, 줄행랑을 친다고 해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현이 갈 곳이라고 해 봤자, 결국 흑건적 아니면 무당파가 전부였으니.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것이 아니고서야 종적이 밟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젠장.’
정현은 종잇장처럼 얼굴을 완전히 구기고 말았다.
당채영은 상행을 찾자마자, 앞으로 잘 지내보자며 밝게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행원들은 얼결에 인사를 받으면서도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어 정현을 돌아보았다.
특히 마두들의 표정이 가장 묘했다. 만독문의 새로운 문주가 된다는 사람이 왜 여기 있냐는 얼굴. 몇몇은 ‘또 이 인간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당채영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인사하다 소진과 마주쳤다.
“어머. 네가 어르신이 각별히 아낀다던 그 아이니? 아주 예쁘게 생겼네.”
“아, 안녕하세요.”
소진은 어른들에게 살갑던 평상시와 다르게, 당채영이 인사를 건네자 슬쩍 영화의 뒤편에 숨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네.”
소진은 당채영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당채영이 떠난 뒤, 영화가 살짝 놀란 눈으로 소진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보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왜 그러니? 무슨 일 있어?”
“저 언니……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모르겠어요. 그냥…….”
소진은 자기도 이해 못 하겠다는 듯 횡설수설했지만, 영화는 그녀가 본능적으로 당채영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계속 진아와 엮이지 않도록 유심히 살펴야겠어. 그보다 만통심안으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정말 잔혈독화 맞아?’
영화는 이전에 스치듯이 봤을 때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당채영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만통심안으로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정현을 봤을 때처럼 온통 희뿌연 안개로 뒤덮여 아무것도 잡히질 않았으니.
그리고 그건 영도와 남궁환도 마찬가지였다.
영도는 원래 그녀와 이렇다 할 인연이 없다지만, 당채영과 오랫동안 친분이 있던 남궁환은 이상하게 그녀가 어렵게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전혀 다른 사람을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있었다.
위화감.
“당 누이…… 어쩐지 뭔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듯하오.”
“어머.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이번 변고들로 인해 그동안의 생각들이 많이 바뀌었는데,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음. 그렇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주제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운 내길 바라겠소.”
“감사해요.”
남궁환은 위화감을 지우고, 안타까움에 찬 시선으로 당채영을 바라봤다. 순진한 그의 눈에는 당채영이 참 짧은 시간에 어려운 일에 휩쓸린 여인으로만 비쳤다.
영도는 그녀를 보는 내내 묘한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당채영이 모든 인사를 끝내고, 정현에게 돌아오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장세성 행주셨던가요? 상행의 총책임자님께도 허락을 맡고 왔으니, 이제 저도 동행해도 괜찮겠죠? 그리고 여기, 선물이에요.”
당채영은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정현에게 고운 비단보로 돌돌 말린 무언가를 슬쩍 내밀었다.
정현은 그것을 받고 살짝 비단보를 들췄다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성류검. 원래 그가 중경사살에게서 가져오려 했던 남궁환의 검이었다.
그녀가 이걸 자신이 찾는 줄 어떻게 알고?
“조금 안타까운 건, 녀석들에게서 이것 외에 이렇다 할 다른 재화는 찾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 것들도 이것저것 챙겨 선물로 드렸다면 참 좋았을 텐데.”
당채영은 정말 아쉽다는 듯 손으로 턱을 짚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솔직히 말해. 나연, 맞지?”
“어머. 또 큰할머님을 찾으시네요. 제가 듣기로 어르신은 큰할머님의 구애를 계속 피해 다니셨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부끄러우셔서 그랬던 거고, 원래는 큰할머님께 마음이 있으셨던 건가요?”
당채영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머. 그런 거라면 곤란한데……. 저는 큰할머님과 연적이 되기 두려워서요.”
“…….”
정현은 확신했다.
‘이거, 나연이야.’
반로환동을 했든, 약을 썼든 간에 흐르는 세월을 도로 뒤집어 젊어진 게 분명했다.
‘그냥 확 날려 버려?’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아주 굴뚝같았다. 그녀와 계속 같이 있는 건 정말 염라대왕에게 명줄이라도 잡힌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실제로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는 상대가 남자고 여자고 간에 절대 가리지 않았으니까. 남녀차별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망량마후만은 예외였다. 마음의 빚이 있는 이상, 그는 계속 약자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주 오랜 옛날, 그녀의 친부였던 귀곡자(鬼谷子)는 정현에게 있어 은인인 소중한 분이었다.
끙!
결국 정현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눌러야만 했다.
당채영은 별다른 말 없이 그런 정현의 모습에도 담담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주 따스한 눈빛이었다.
* * *
현 강호에서 가장 강한 이는 누구일까?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주저치 않고 딱 두 사람을 거론할 것이다.
검재와 천마.
이건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은 절대적인 명제요, 진리였다.
그렇다면.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 질문을 받는다면 사람들의 대답은 각자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금을 가졌다는 만금상회(萬金商會)의 주인을 거론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황도의 자금성에 앉아 만인을 다스리는 황제를 지목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일반인들의 시선에서나 그럴 뿐.
강호에 대해 어느 정도 정통한 사람들은 누구도 주저치 않고, 또 다른 한 사람을 추가할 것이다.
신조패왕!
동정호와 장강이라는 중원의 젖줄을 단단히 틀어쥔 채, 여러 지역을 오고 가는 교역들을 직접 통제하면서 상단들은 물론, 무림십주와 제국의 숨통까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유일한 왕.
그의 거처는 일개 왕부보다도 더 화려하고, 창고에는 황제 것보다도 훨씬 많은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절대자조차 사람의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늘그막에 얻은 막내아들에 대한 사랑은 아주 각별할 수밖에 없었고.
“……아들아.”
그런 막내아들이 여러 꽃으로 장식된 관 속에 담겨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을 때.
신조패왕 황보찬윤은 비통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너의 원수는 이 아비가 반드시 갚아 주마. 검재, 그놈의 목을 네 영전에 가져다 놓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