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095)
제 1095화
256화. 모르가니엘(4)
닷새.
바깥의 상황을 고려하면 짧은 시간은 아니다. 켈리악과 마신대, 말루기아 같은 존재들이 한꺼번에 활개를 치면 인세 멸망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간이니 말이다.
‘켈리악과 말루기아, 지금은 차라리 그것들이 둘 다 살아 있는 게 다행이로군. 닷새 안에 인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서로 견제를 해야 할 테니.’
부채감에 짓눌려선 안 된다. 그리고 진이 생각하기에 그들은 인세에서 문제를 일으킬 확률보다, 이곳을 찾아올 가능성이 더 높았다. 솔더렛의 안배를 그들이 위험한 패로 인지하고 있다면 말이다.
진은 마음을 다잡으며 시론을 쳐다보았다. 애초에 이번 흑해행에서 연합이 이토록 빠르게 원정대와 합류하고, 모르가니엘을 토벌하기까지 한 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지금 이곳 흑해가 모르가니엘의 죽음에 영향을 받아 변하고 있는 것보다, 네가 인세에 가져온 변화가 더 큰 것 같구나. 함대도 모자라 휴대용 장거리 통신기? 갑자기 늙어버린 기분이로군.”
시론은 진과 연합이 이룩한 인세의 발전에 감탄하고 있었다. 신기하다는 듯이 통신기를 만지작거리는 시론은 평소 진과 형제들이 결코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숙원을 끝마친 사실을 가문에 바로 알릴 수 없는 게 아쉽습니다. 흑해에서 인세로는 통신이 불가능하니까요.”
“헹, 늙은 기분이라고? 나와 비교하면 갓난애나 다름이 없는데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시론.”
“나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지.”
“반, 그대는 연배가 어떻게 되오?”
“알려줄 수 없다. 삼백은 넘었다는 것만 알아두어라.”
무라칸, 반, 시론. 세 사람은 벌써 오랜 친구처럼 서로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연합원들로서는, 특히 룬칸델의 기사들에겐 여러모로 신기한 풍경이었다.
“둘 다 오래 살았군. 하지만, 더 살아야지.”
더 살아야지, 많은 게 담긴 한마디였다.
시론 룬칸델, 그는 마성화를 극복하기 전까지는, 결국 숙명의 끝에 다다르면 흑해에서 죽음을 맞이하리라 직감했었다.
그러나 마성화가 사라진 후부터는 죽음을 아예 상정하지 않았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가문으로 돌아가고, 여생은 속죄하며 보내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룬칸델의 모든 짐을 가문의 일원들, 특히 진이 도맡아왔다는 사실에 대한 속죄. 이를테면 그는 룬칸델을 보다 더 나은 가문으로, 전보다 강하고 단단하되 즐거울 수 있는 가문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지난 어두운 시기의 속죄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그래야지.”
“그래, 마신대와 말루기아만 없으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아, 가네스토도 있었지. 하여간 그 잡것들만 없애면, 이제 우리가 사라지기 전까지 이런 지독한 전쟁은 세상에 없을 거다. 난 딸기파이랑 오순도순 같이 딸기파이도 만들어 먹고 행복하게 살 거다. 어휴, 그땐 저 꼬마 놈 뒷바라지 좀 그만둘 수 있겠지?”
“……잠깐, 무라칸. 길리와 만나는 것인가?”
“아, 넌 몰랐겠군. 큭큭, 전쟁통 속에도 사랑은 피어나는 것이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길리한테 함부로 하면 아주 재미가 없어. 알겠냐? 룬칸델의 법도니 뭐니 그런 소리만 해봐, 그냥 콱.”
“축복하도록 하지.”
한동안 시시콜콜하고 친근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 위에서 아름다운 원시림처럼 변한 흑해의 풍경 속, 하늘을 수놓은 공중요새와 황금함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세상이 끝날 수도 있는, 끔찍한 악몽이 그냥 지나갈 것만 같은 기분.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닷새를 쉬면서 허비할 수는 없었다.
“이만하면 휴식은 충분히 즐긴 것 같군. 이제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
아메리스만 할 일이 있는 게 아니다.
연합은 바뀐 지형을 정찰하고, 모르가니엘이 의도적으로 열어준 길 또한 미리 가보아야 했다.
이곳이 흑해의 가장 깊은 영역이라 할지라도, 갑작스레 적습이 시작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경계를 늦춰선 안 되는 것이다.
“막내, 만약 솔더렛의 안배가 우리에게 정말 득이 된다면. 내 생각에 적들은 이곳을 찾아올 확률이 높다. 켈리악 지플이나 말루기아, 그들이 흑해에 생긴 이만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변화는 무조건 인지할 테니, 그들이 얼마나 회복했는지가 관건입니다.”
창성 다섯에 공중요새 라프라로사와 황금함대까지.
켈리악과 말루기아가 규격을 완전히 벗어난 존재라 할지라도, 부상을 입은 상태로 여길 찾아오는 건 무리수였다.
“또한, 로키아 가네스토도 의식은 해야 합니다. 그자는 안배를 얻는 게 급해 보였으니, 어떤 식으로든 훼방을 하려 할 겁니다.”
“일단 모르가니엘이 연 길을 가보도록 하지. 막내, 병력 지휘는 네가 맡도록 하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는 룬칸델의 가주이지 연합의 수장이 아니다. 지금껏 저들을 이끈 건 네 녀석이니, 이치에 맞는 일일 뿐이다.”
시론이 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미 창성에 닿기 전부터 진은 간접적으로 시론의 인정을 받아왔다. 내계에서 그를 마주친 날에도, 편지를 받은 때에도.
“너를 소가주로 임명한 건, 내가 가문을 이끌며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
그러나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는군요, 아버지.”
“잔인하고 혹독하기만 했던 아비의 치하를 그리 값지게 생각할 것 없다. 앞으로 너의 룬칸델은 내가 이끌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빛날 것이다. 싸움이 다 끝나면, 받쳐주마.”
“으, 내가 눈물 날 것 같네.”
“저도 안 우는데 누님이 울지 마십시오.”
“쳇, 너 잘났다.”
“우리가 목적지를 정찰하는 동안 공중요새 라프라로사는 현 위치에서 대기하고, 함대는 흩어져서 경계 비행을 실시하라.”
창성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샛노란 나무들 사이를 지나자마자 아름다운 오솔길이 나타났다. 떨어지는 잎사귀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춤을 추는 듯했다.
위협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창성들은 속도를 높이지 않고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연신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이전의 흑해처럼 행여 길이 갑작스레 바뀔까 우려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두 시간이 지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무들이 아주 높지 않은 탓에 저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중요새 라프라로사의 모습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또 얼마나 걸었을까.
다섯 사람은 마침내 한 ‘선’ 앞에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칼로 벤 듯 완벽하게 일자로 이어져 영역을 나누고 있는 검은 선이었다.
“여기부터가 진짜로군.”
“흠, 이거 넘어가도 되는 건가? 갑자기 막 다른 지역으로 이동되거나 이쪽 지역하고 단절되는 것 아니야?”
창성에 닿아 통찰력을 얻었다고 한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는 없다. 하물며 이곳은 흑해, 길을 연 건 모르가니엘이었다.
“오러, 마력, 영기. 셋 다 해당되지 않는 기운으로 이루어진 선이군.”
“색깔은 영기랑 유사한데 말이죠, 아버지.”
반과 무라칸, 시론과 루나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진에게 옮겨갔는데, 그는 생각에 잠긴 듯 검은 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기가 아니긴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친숙한데, 무라칸. 넌 별다른 느낌 없어?”
“이 선을 이룬 기운이 친숙하다고?”
“그래. 영기는 아닌데, 영기만큼 편한. 아니, 영기보다도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기운이다.”
“뭐? 그렇다면 뭔가 관련이 있다는 건데, 왜 너한테만 느껴지지? 그보다, 영기보다도 편하다니…… 그게 가능한가?”
보다 더 깊고 진하고, 어두운 기운.
진은 검은 선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이내 진은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은 손에 손가락을 갖다 댔는데, 마치 먹이 번지는 듯이 주먹만 한 어둠의 파장이 번졌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우리에게 해로운 힘은 아닙니다.”
다른 창성들도 똑같이 진처럼 손가락을 대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은 그들의 기운엔 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솔더렛이 꼬마를 위해 준비한 무언가인가? 흠,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점이 좀 섭섭하긴 하군.”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진을 필두로 창성들이 다 함께 한 걸음 선을 넘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뒤를 돌아보니 오색찬란하게 빛나던 모르가니엘의 영역은 장막에 가려진 듯 사라졌고, 선 안쪽은 그저 한밤처럼 어두운 공간이었다.
다만 한 걸음을 다시 뒤로 물러나면, 곧바로 어둠이 사라지며 모르가니엘의 영역이 다시 나타났다.
“일종의 아공간이로군. 더 들어갈 것인지, 일단은 멈출 것인지. 다들 진 형제의 의견을 따르는 게 어떻겠나?”
“이 알 수 없는 힘은 제게 분명 호의적입니다. 안에 안배의 입구 같은 게 있을 테니, 더 진입해서 눈으로 봐두는 게 좋겠습니다.”
“좋아, 가지.”
검은 선을 넘어가면 다른 창성들은 길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겐 그저 어두운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은 마치 대낮의 대로를 거니는 듯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자연스레 창성들이 진을 뒤따르는 형세가 되었는데, 끝에 다다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기가 안배의 입구로군요.”
진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우리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군.”
창성들은 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은 어둡기만 한 입구에 손바닥을 댄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돌연, 진은 흠칫하며 입을 열었다.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안배의 입구에 닿은 진의 손바닥 위로, 밤처럼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