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112)
제 1112화
258화. 전 차원의 포식자(2)
움직일 수가 없다. 마치 막다른 길에서 포식자를 마주한 짐승이라도 된 듯이, 일부 창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얼어붙었다.
켈리악은 산책이라도 하듯 천천히 하늘을 걷고 있었다. 그가 발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사람들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프스스슷, 시이이이……!
처음 제국 땅에 나타난 그날처럼, 그의 힘에 짓눌린 함선들의 동력이 멈추고 있었다. 황금함대를 움직이는 뇌기는 물론이고, 백색함대의 마력도 사그라지는 모습.
다만 그때와 달리 질식할 것처럼 목을 부여잡는 이는 없었다. 그 이유는, 순전히 이 자리에 연합의 모든 창성들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진 존재의 힘이 조금이나마 켈리악의 영향력을 저지한 것이다.
그는 전투조차 멈춘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는 부하들에겐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가 가장 먼저 둘러본 것은 죽은 마신대의 창성들, 그들이 전장에 남긴 흔적들이었다.
켈리악의 눈에는 그들이 최후를 맞이한 모든 순간이 마치 지금껏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듯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느낀 바지만, 이곳 677차원은 참 신기한 땅이지. 우리 쪽에서 오십에 달하는 창성이 죽어가는 동안, 너흰 기껏해야 초인 몇과 먼지 같은 자들을 조금 잃었을 뿐이로군. 반과 시론 룬칸델이 있다지만, 그래도 이건 지나친 결과지 않나.”
파괴된 함대와 죽은 마신대, 봉인된 성수단은 셀 수도 없다.
켈리악은 그 사실에 감탄하고 있었다. 우연과 우연, 집념과 광기와 신념과 긍지, 단지 그것만으로 이런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에.
‘……어쩌면 단지 그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지. 그 수많은 세계가 나를 거부하며 생긴, 일종의 반작용 또한 존재할지도 모르겠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켈리악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저자가 켈리악 지플…… 마신대의 수장인가.’
시론, 그는 그간 말로만 전해 들은 마신대의 수장이 가진 힘을 가만히 가늠하고 있었다. 투신 반조차 혼자서는 꺾을 수 없다 말한 괴물은 과연 어떤 존재인지 궁금한 것이다.
끝없이 광대하다.
그를 파악하고자 정신을 집중해 응시하기 시작하자마자, 시론은 그의 힘을 측정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닿을 수 있었다.
마치 우주가 한 인간의 형태로 지상에 서 있는 느낌.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경외감이 들지 않는다. 긴 세월 고통을 감내하고, 역경을 딛고, 죽음을 극복한 인간 특유의 찬란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맞서다가 한 순간만 실수를 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겨뤄보고 싶은 마음도 솟구치지 않았다.
시론은 평생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적을 고대했었다. 마성화를 극복하기 이전엔 일부 흑해의 왕들이 그럴싸한 상대라 할 수 있었으나, 인세에서는 그러한 적수를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아군인 반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서가 아니다. 시론에게 켈리악은, 결투와 투쟁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대상으로 보였다.
“무슨 짓을 해도 결코 다시는 일굴 수 없는, 병들고 썩은 땅을 마주한 농부의 기분이 이러할 것 같군.”
시론이 켈리악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후후. 싸울 기분조차 나지 않는 불쾌한 상대라는 뜻인가, 살면서 들은 것 중 가장 큰 모욕이로군. 그래, 네가 677차원의 시론 룬칸델이란 말이지…….”
반대로 켈리악은 시론을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연, 그가 지금껏 켈리악이 본 그 누구보다도 강하기 때문이다. 투신 반의 전성기는 그 어느 차원에서도 직접 확인한 적이 없으니, 그가 보기에 시론은 전 차원 최강의 무인임이 분명했다.
심지어 마신대에 복속된 수백 명의 창성 그 누구와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가 매번 복종을 얻어내고 싶던 다른 차원의 시론들과 비교해서도.
“너는 특별하다, 시론.”
“내 보기에 너도 그러한 것 같군. 내가 알던 켈리악 지플과는 전혀 다르구나.”
“이 차원을 마지막으로, 나는 모든 세계의 켈리악 지플을 먹어 치웠다. 동질감을 느끼기엔 부족한 친구들이 많더군. 새삼 너와 내가 조금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어. 그 수많은 세계의 똑같은 사람들 중 가장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가 되었잖나.”
“켈리악 지플, 너는 내 존경을 얻고 싶은가?”
그 말에 켈리악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신대의 창성과 간부들은 시론의 불경한 태도에 이를 악물었다.
켈리악은 그 사실을 알아보고는 한 차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중 가장 분노하고 있던 부하 한 명이 그의 손아귀 앞으로 빨려 들어오듯 날아들어 허공에 고정되었다.
“커헉! 케, 켈리악 경.”
173차원에서 창성에 다다른 키다드 홀, 그는 그 차원의 패자로서 오랜 시간 마신대의 명령을 따른 인물이었다.
“무엇이 너를 그리 분노케 하였더냐, 키다드 홀. 창성임에도 그간 시론의 기운에 짓눌려 적들에게 변변찮은 피해 한 번 주지 못한 놈이…… 내가 오니 꼭 뒷배를 부른 잡배처럼 의기양양하구나.”
“저, 저는 그게 아니라, 컥, 그극.”
“너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름이 없는 인간이다. 창성? 연합을 치러 온 이 수많은 마신대의 창성 전부를 합쳐도, 시론 한 사람의 가치를 따라갈 수 없다.”
“죄송합, 커어억, 그아아악……!”
울컥, 우드득, 그극!
켈리악이 천천히 주먹을 쥐자 키다드의 몸이 종이처럼 구겨지는 모습이 이어졌다. 살갗은 삭은 나무처럼 부스러지고, 뼈는 분해되며 피는 순식간에 말라붙어 사라졌다.
이내 키다드는 한 덩이의 새하얀 마력이 되어 켈리악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고, 그는 사탕이라도 삼키듯 가볍게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래도 한 끼 식사로 쓰기에는 썩 나쁘지 않으니, 우스운 일이지.”
“보기 역하군.”
“의외로군, 시론. 삶의 본질은 결국 먹고 먹히는 것이라는 걸 네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짐승끼리 서로를 잡아먹고, 인간끼리 서로를 짓밟고 죽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네놈은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아, 그렇다고 자연의 재앙에 속하는 느낌 또한 아니지. 너는 그냥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존재다.”
지켜야 할 존재, 베어야 할 존재, 그리고 애초부터 세상에 없어야 할 존재. 시론이 보기에 켈리악은 당연히 마지막이었다.
처음이었다. 흑해의 왕들조차 분류를 하자면 어디까지나 베어 마땅한 존재에 속했으니 말이다.
“그러한가.”
켈리악이 어깨를 으쓱이며 시론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너는 이번에도, 내 사람이 될 생각이 없겠군?”
“다른 세계의 시론 룬칸델들이 단 한 번이라도 네게 복종한 적이 있는가?”
“없다. 애석하게도.”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흑해의 왕들을 없애야 한다는 숙명 하나가 끝났으니, 내게 새로운 숙명이 생겼을 뿐이지. 나는 너를 베어 없앨 것이다, 마신대의 켈리악 지플.”
켈리악은 진심으로 씁쓸한 듯 미간을 좁혔다.
당연하게도, 그에게 시론 룬칸델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그와 비교하면 현격히 떨어지나 이미 수많은 창성을 거느리고 있고, 수많은 신 또한 부리고 있으니까.
다만 이번에도 켈리악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러니 너를 통해 나를 시험하고 싶구나. 과연, 내게는 변치 않는 것을 변하게 만들 힘이 존재하는지. 아직 오르갈까진 무리여도, 너처럼 보잘것없는 인물의 운명이라도 말이다. 없다면, 나는 말루기아를 죽여선 안 된다.
옥타비아를 구한 후 켈리악이 그녀에게 했던 말.
‘어느 차원에서도 결코 변치 않는 것’을 비틀고 싶은 욕망, 어떤 면에서 그건 33번 차원의 켈리악 지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기라 할 수 있었다.
“잘 알겠다…… 괴로운 일이나,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이지. 아직 이 세상에 나를 자극할 만한 요소가 남아 있다는 건. 네가 사라지면 정말 얼마 남지 않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겠어. 이만, 죽어라. 세상을 통틀어 가장 강한 기사여.”
피이이이……!
켈리악의 말이 끝난 순간, 시론은 머릿속을 찢는 듯한 이명에 휩싸이며 눈앞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감각을 마주했다.
찰나의 순간이다.
그러나 충분히 죽을 수 있다.
실로 오랜만에, 시론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적이 공격하는 순간을, 그 궤도와 위력을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방어에만 전념한 것이다.
쩌엉-!
방금의 일격은 시론의 오러가 아니었다면, 바리사다라 할지라도 단숨에 두 동강이 났을 위력이었다. 시론은 일순 시야가 사라졌고 방향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와중에도 정확히 칼날로 켈리악의 공격을 받아냈다.
“큽……!”
다만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 채 다음 일격을 감당해야 했고, 그때도 시야는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버지!”
“시론!”
루나와 반, 그리고 진이 그를 엄호하러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들보다 켈리악의 광선이 더 빨랐고, 시론은 또 순전히 본능에 의지해 방패처럼 검을 들었다. 쩌엉! 또 한 번 굉음이 울렸고 시론은 이번엔 땅으로 처박히며 겨우 자세를 잡았다.
“지난번 제국에서도 그렇고, 과연 부자가 둘 다 어마어마하군. 이번에도 꽤 진심을 담은 공격이었건만, 이렇게 막힐 줄이야. 그냥 회복을 다 끝내고 올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야.”
그렇게 말한 켈리악의 얼굴엔 더 이상 웃음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시론의 무위를 확인하곤 여유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반드시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