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06)
제 222화
67화. 마녀 헬루람의 유산(3)
드르륵, 도르르륵…….
둥근 바위들이 마물의 앞발에 닿아 굴러가고 있었다. 손톱 끝으로 툭툭 밀고 잡아당기길 반복하며 천연덕스럽게 놀다가, 종종 제 몸을 핥기도 하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고양이였다.
거대한 몸집과 시커먼 털 곳곳에 번진 하얀 표범 무늬만이 고양이와 구분되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진은 고양이처럼 생긴 마물에 대해서 들어본 바가 없었다. 세상엔 수많은 마물이 존재하지만, 고양이처럼 생긴 종은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저걸 쓰러뜨리라고……? 마물보다는 영물에 가까워 보이는군.’
아직 마물은 진이 근처에 다가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진은 한동안 편안한 마음으로 마물을 관찰할 수 있었고, 곧 이 숲의 가시나무가 마물의 식량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으적, 으적, 으저적!
마물이 가시나무를 사탕수수처럼 깨먹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곳에 자리 잡은 후, 마물은 벌써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렇게 가시나무를 먹으며 살았다.
가시나무를 많이 먹어 평지가 생기면, 바위를 둥글게 깎아 가지고 놀았다. 다시 그 자리에 가시나무가 자랄 때까지 말이다. 바로 이렇게.
샥! 스사삭!
마물이 가볍게 휘두른 앞발에, 땅에 박힌 바윗덩이가 튀어 올랐다.
바위는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둥글게 깎여 본래의 울퉁불퉁한 형체를 잃었다. 이내 떨어진 바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물이 만족스러운 듯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발톱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바위를 깎을 때 잠시 드러난 발톱을 다시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갈퀴처럼 휜 날카로운 발톱이 바위를 무처럼 썰어대는 걸 보았으니 당연한 일.
들키지 않고 다가갈 수 있을까?
걸음을 떼려는 찰나, 마물이 흠칫하며 주위를 살폈다. 진도 어차피 기습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독기가 너무 짙어 만독주에 더해 오러 보호막을 계속 유지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오러 보호막의 은은한 빛이 마물의 눈동자를 자극한 것이다. 고개를 돌린 마물의 시선이 진을 향했다.
[캬아악!]눈이 마주치자마자 괴성을 지르는 마물. 귀가 멍해질 지경이었지만, 명왕족들의 포효에 비하면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시그문드로 뇌기가 모여들었다. 평식 벼락은 대형 마물을 상대할 때도 훌륭한 검이었다.
‘얼마나 강한 녀석일지 궁금…… 음?’
투다다닥!
돌연 마물이 뒤돌아 더 깊은 숲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서, 진은 잠시 멍하게 마물이 사라진 자리만 쳐다보았다.
‘도망을 쳐? 그 산만한 덩치로 날 무서워한다고?’
싸우기도 전에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지. 이미 한 번 흑기사들을 만났을 테니,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두려워진 건가? 흑기사들은 분명 놈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선에서 처리한 다음, 이 숲을 떠났을 테니.’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보아하니 이 숲에서 혼자 평화롭게 지내는 모양인데, 자신은 난데없이 난입해 마물을 쓰러뜨리는 역할인 것이다.
‘……일단 쫓아가보자.’
어쨌거나 마물을 꺾는 건 아버지와 바네사가 내린 시험이다. 불쌍하다는 이유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녀석이 안쓰럽다는 마음은, 추격을 시작하자마자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크즈즈즉, 쾅!
마물을 따라 깊은 숲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앞발이 날아든 것이다. 마물은 그 거대한 몸집으로 용케 가시나무 틈을 돌아다니며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앞발이 가시나무를 잡초 쓸듯이 쓰러뜨렸고, 그것이 진을 덮쳤다. 진은 황급히 시그문드를 들어 막을 수 있었지만, 몸이 튕겨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웅, 떠오른 진을 노리고 다시 한 번 앞발이 날아왔다.
“큭!”
검으로 막을 수 없어 벼락을 내리쳤다. 쏟아진 뇌전이 마물의 앞발을 튕겨냈고, 진은 가시나무 가득한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추락 직전에 사방으로 검기를 분출했다. 그럼에도 가시나무가 너무 많아 온몸이 찔리고 긁히는 건 피할 수 없었으나, 뮬타의 룬과 흑광갑 덕에 치명상은 면했다.
그리고 만독주 덕에 목숨을 부지했다. 만독주가 없었다면, 숲을 뒤덮고 있는 독기에 가시나무의 맹독이 더해져 곧장 송장이 되었을 터.
시작부터 제대로 당한 셈이다.
일어선 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팔과 다리 곳곳이 찢겨 선혈이 흘렀고, 코트는 넝마가 되었다.
상처 속으로 쉴 새 없이 독이 스며들어 온몸이 불에 타는 것만 같았다. 만독주가 있다고 고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물은 추가 공격을 하지 않고 또다시 더 깊은 숲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
‘그래…… 내가 잠깐 미쳤었군. 마물을 상대로 안쓰럽다고 생각하며 내가 나쁜 놈이 된 기분을 느끼다니. 놈은 날 보자마자 어떻게 죽일지 계획을 다 짠 모양인데 말이야.’
마물은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더 효율적이고 안전한 방법으로 진을 상대하려 한 것일 뿐. 상대의 힘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최선의 대처를 보여준 셈이었다.
반면 진은 마물의 친숙한 생김새에 속아 방심했다.
생각 없이 마물을 뒤쫓다 기습당하고, 내동댕이쳐져 피범벅이 된 꼴사나운 모습을 아무도 본 사람은 없으나,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얀 반점이 있지만 상대가 검은 고양이라는 점에서, 어쩐지 거대한 나비 룬칸델이 떠올랐다는 점도, 그래서 왠지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는 것도 참작의 근거는 되지 못했다.
‘제대로 상대해주마.’
까드득!
이를 악문 진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테스를 소환해 우선 이 빌어먹을 가시나무 숲을 다 태워버리고 시작할 요량이었다. 제까짓 게 도망쳐봐야 숲속, 그리고 나무는 불에 잘 타는 법이다.
그런데 화염계를 열기 위한 소환식을 맺어도, 차원문이 열리질 않았다. 몇 번이고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후, 별게 다 난리로군. 독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고, 마력도 충분해. 설마 이곳도 라프라로사처럼 죽은 세계에 속하는 건가?’
죽은 세계에선 테스를 소환할 수 없다. 라프라로사에서 명왕족 형제들에게 수련 받으며 알게 된 사실.
진은 곧 이 숲도 라프라로사와 마찬가지라고 결론을 내렸다.
테스가 없다고 숲을 불태우지 못하는 건 아니니 상관없었다. 이내 진의 왼손에 새로이 시뻘건 불길이 뭉쳐졌다.
화염옥.
7성의 마력이 담긴 불꽃 구체가 어두운 가시나무 숲을 향해 날아갔다. 구체는 나무에 닿자마자 그물처럼 퍼지며 단숨에 마물이 도망친 안쪽 숲의 초입을 불살랐다.
이어서 파도 바람을 연속으로 영창했다. 생도 시절 메사를 구할 때도 이런 식으로 숲을 불태운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진이 지닌 마력은 비교가 불가했다. 똑같은 파도 바람이어도 바람이 품고 있는 힘이 다르고, 그때와 달리 가시나무를 집어삼키고 있는 불은 7성 화염옥이다.
그야말로 숲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그러고도 만족스럽지 않은 듯, 진은 불타고 있는 가시나무들을 지나쳐 다음 화염옥을 준비했다.
놀랍게도 사방에 퍼진 불길 속에서도 독기는 전혀 연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시나무가 품고 있던 맹독까지 공기 중에 뒤섞여 한층 더 숨이 갑갑해졌다.
전투에 지장이 없지는 않겠으나, 진은 만독주를 가진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할 독기라면 마물에게도 버거우리라 판단했다.
“당장 튀어나오지 않으면 숲 전체를 다 태워버리겠다!”
마물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일단 기운이 담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화염옥을 던지길 세 차례.
결국 마물이 백기를 들었다. 잔뜩 위축된 울음소릴 내며 불길 속을 터덜터덜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하, 요물은 요물이네. 꼭…… 이러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잖아.’
쫑긋 서 있던 두 귀를 늘어뜨리고, 슬픈 듯 눈동자를 찡그리고 있는 놈을 마주하니 또 죄책감이 일었다.
지금 불타고 있는 가시나무는 마물의 집이자 유일한 식량이었다. 진은 불타는 숲을 보며 낑낑대는 마물을 마주하고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으나.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도 놈은 방심하면 제 목을 물어뜯으러 달려들거나, 술수를 부릴 터였다.
“불쌍한 척하지 마라.”
진이 그렇게 말한 순간, 마물의 눈빛이 바뀌었다.
안 통하네.
분명 그런 눈빛이었다. 동시에, 진은 마물의 눈동자에서 마력이 분출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법!?’
마안이었다.
당연히 진은 마물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때문에 마력이 깃든 호박색 눈동자를 피하지 못했다.
옛 어둠계열 마법의 한 갈래 중엔 대상을 미치게 만드는 ‘정신계’ 마법이 많았다. 마물이 펼친 마법은 바로 그런 것이었고, 진은 벌써 환각을 보고 있었다.
온몸이 단검으로 난도질당하는 환각부터 시작해.
전생의 가장 우울했던 시절을 보여주는 환각까지. 단 1초 만에 수십 개의 환각이 진의 뇌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마물은 멍해진 진의 두 눈동자를 보며 씨익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환각에 파묻힌 진은 이런 마물의 가증스러운 미소를 보지 못했다.
이제 마물은 다가가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진을 사정없이 찢어발기고, 보금자리를 불사르고 있는 불길을 제압한 다음, 놈의 시체가 숲의 독기에 썩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면 될 터였다.
[미야아아……!]마물이 낮고 음울한 소리로 울며 걸음을 뗐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물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환각을 아주 싫어하거든.”
마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분명 마안에 완벽히 노출되었던 진이, 어느새 정신을 되찾고 서슬 퍼렇게 살기 어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대사막에서 겪은 세 개의 신기루.
그것들을 극복하고, 라프라로사에 다다라 명왕족의 형제가 되기까지 단련한 믿음. 지금의 진을 만들어준 것은, 재능이 아닌 절대적인 정신력이었다.
세 번째 신기루, 테마르 룬칸델이 서 있던 사막마저 끝내 감내하고 검을 휘두른 진이다. 그런 진에게 마물의 어설픈 정신계 마법이 통할 수는 없었다.
의지로 마물의 환각을 깨뜨린 것이다. 그에겐 숨을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1초. 내가 환각에 빠져 있던 그때 끝장을 냈어야지. 그리고 네놈은, 왠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는 말이야…… 그렇지?”
이번엔 진이 미소를 지었다. 걷던 자세 그대로 멈춰선 마물은 털을 잔뜩 곤두세운 채 눈동자를 굴렸다.
쿵, 쿵쿵……!
불에 휩싸인 가시나무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다시금 시그문드가 푸른 광휘를 발산했다.
명왕검 투신기 3검.
단죄.
고민할 것도 없이, 진은 그 검을 골랐다.
“그런데 난 마물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거든. 뭐라도 소리쳐도 모를 테니, 닥치고 발톱이나 휘둘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