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06)
제 333화
93화. 테마르의 두 번째 무덤(5)
검을 뽑았다.
손끝을 타고 뼈와 장기가 칼날에 걸리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전해졌다.
수호자가 쓰러지자 사방을 불태우던 업화의 불길이 급격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 많던 불이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작고 따뜻한 잔불들이 꽃가루처럼 휘날리는 모습이 이어졌다.
수호자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불꽃도 사라져갔다.
지독한 상처로 얼룩진 몸에서 쉴 새 없이 영기가 흘러내렸다. 호흡이 무척 가빴으나, 곧 끝을 받아들이기로 한 듯 잔잔해졌다.
[사라!]무라칸이 황급히 지상으로 착지하며 인간으로 변신했다.
방금까지 어쩔 수 없이 싸우긴 했으나 무라칸의 마음속에서 사라는 여전히 오랜 벗이자 전우였다.
비록 사라가 아닌, 그녀를 본떠 만든 수호자이긴 하지만. 분명 수호자에겐 진짜 사라 룬칸델의 영혼이 섞여있었다.
그런 수호자의 최후를 지켜보는 건 무라칸에게 무척 잔인한 일이었다. 그 자신이 진, 동료들과 함께 수호자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치른 전투였다 할지라도 말이다.
퀴칸텔도 인간으로 변신하며 무라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 착잡한 표정이었다.
[무라칸…….]“그래, 나다. 무라칸이다. 빌어먹을, 이제 이성이 돌아온 거냐? 이 꼴이 되고 나서야?”
격정이 묻어나 떨리는 목소리. 무라칸이 몸을 숙여 수호자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부서진 몸으로 그토록 대단한 불을 다루던 사람의 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네놈과 솔더렛의 새로운 계약자가…….]그 대목에서 수호자가 잠시 말을 멈췄다.
‘새로운 계약자’라는 표현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테마르는 죽었고, 찬란하던 옛 룬칸델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무라칸은 이제야 뒤늦게 자신을 찾아왔으며, 오랜 싸움 끝의 최후를 지켜주는 사람들은 룬칸델 마검사들이 아니라 방관자였던 은룡과 온통 낯선 얼굴들뿐.
[……다행히 약해진 날 꺾을 정도의 힘은 갖고 있었군.]사라,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천 년 전 테마르는 어떤 최후를 맞이한 거지? 솔더렛이 왜 너흴 무덤의 수호자로 빚어놓은 것이며, 지플은 녀석의 무덤을 뒤져 대체 뭘 얻으려는 거지?
왜 솔더렛은 나나 미샤가 아니라,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남겨둔 거지? 그때, 내가 알지 못하던 일들은 무엇이며 도대체 왜…….
무라칸은 차마 그런 것들을 사라에게 묻지 못했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끝까지 그 시절의 동료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의 내면 깊은 곳을 칼처럼 찌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무라칸은 테마르의 수호룡이 아니었다. 옛 룬칸델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솔더렛의 안배에 따라 진실을 알아가는 일 또한 진의 몫이 된 것이다.
지금의 무라칸에게 주어진 역할은 수호룡으로서 진을 보필하는 일이었다.
“그간…… 혼자, 고생 많았다. 미안하다.”
실더레이 때처럼, 날카로운 대답이 들려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수호자는 무라칸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괴로웠던 만큼 네게도 아픔이 있었을 터, 미안할 것은 없다.]무라칸은 대답하지 않고 사라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런데 퀴칸텔, 네가 이곳을 찾은 건 정말 의외로군. 너와 너의 신은 중립을 지키기로 하지 않았나. 생각이 바뀐 건가?]정신이 돌아왔어도 퀴칸텔에게 가진 배신감은 그대로였다.
“너희 룬칸델이 테마르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여기듯, 나 역시 올타 님의 뜻에 반대할 수 없다.”
[그래, 넌 용이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주. 내 오라버니는 널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잊지 마라.]오라버니라는 말에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사라 룬칸델, 그녀는 테마르의 친동생이었다.
[부디 저 아이가 겪어야 할 싸움에선, 네 잘난 신이 방관하지 않기를 바라지.]퀴칸텔 또한 무라칸처럼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배신감과 별개로, 사라가 정말로 퀴칸텔을 증오하거나 혐오스러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고맙군. 네 덕에, 내 손으로 무라칸과 저 아이를 죽이는 우를 면할 수 있었으니.]그 말대로, 퀴칸텔의 권능이 없었다면 진은 수호자를 베지 못했을 터였다.
수호자가 진과 눈을 맞췄다.
[진 룬칸델.]“예, 사라 경.”
[실로 오랜만의 패배로군. 너무 오래 이어진 옛 싸움에 지쳐, 네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천 년이나 홀로 이곳을 지키셨으니, 그리 나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아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옛 마법사들의 백골들은 이제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업화가 펼쳐졌을 때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진 것이다.
뒤쪽에서 보호막을 치고 있던 동료들이 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무라칸이나 퀴칸텔처럼 사라와 추억이 있지도 않았고, 진처럼 후손으로서의 부채감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쩐지 자신들을 죽이려던 사라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런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왔는지 알 것 같기 때문이었다.
또한 동료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진과 함께 싸우기 위해서는, 전처럼 안일하게 살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구나. 진, 나의 먼 후손아.]“말씀하십시오.”
[지금의 룬칸델은 어떠한가?]“제가 겪지 못한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닐 겁니다.”
[지플은 여전히 세상을 뜻대로 주무르고 있을 테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몸을 빠져나가는 영기 때문에 수호자는 죽음의 한기를 느끼는 중이었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에서 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우리가 네게 큰 짐을 지웠다.]“솔더렛의 계약자가 되고, 선조들의 의지를 전승받는 것은 늘 짐보다는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제로 그랬다.
회귀 전에 겪었던 비참한 인생에 비하면 이번 생은 축복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진은 옛 룬칸델의 의지를 이어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스스로의 의지로 개척해나가고 있을 뿐.
[말을 어여쁘게 하는 재주가 있군. 이리, 더 가까이 와보아라.]수호자는 코앞까지 다가온 진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것이다.
길리가 무라칸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토닥였고 엔야는 퀴칸텔의 손을 잡았다.
[지금부터 십대기사 사라 룬칸델은 테마르 룬칸델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자로서, 진 룬칸델에게 내가 가진 것들을 전승하도록 하겠다.]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수호자의 온몸에 별안간 지금껏 보이지 않던 룬 문자가 드러났다.
‘룬 문자……?’
사라진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도, 구멍 난 가슴 위에도 룬 문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룬 문자들은 사라 룬칸델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룬칸델의 마검 비기를 담은 것이었다.
업화 – 사라 룬칸델
그것은 솔더렛의 안배가 아니라, 수호자가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남기는 유산이었다.
영혼이 빠져나오듯, 사라의 몸에서 흘러나온 룬 문자들이 진에게로 스며들었다. 글자가 새겨질 때마다 사라가 업화를 만들며 얻은 기억들이 진에게로 전송되었다.
과거 오투왕 보라스가 보여준 명왕족 특유의 기억 전송법이나, 히스터가 고유의 전승 마법처럼 말이다.
[이 검을 사용하기에 어울리는 녀석이 찾아오길 기대했었지. 작은 소망 하나는 들어맞은 셈이로군.]수호자의 룬 문자는 지금껏 진이 몸에 새긴 것과 달리, 평소엔 드러나지 않았다. 업화를 펼칠 때만 빛을 발하는 것이다.
“……생각지 못한 큰 선물을 주시는군요.”
사라의 몸이 영기의 입자로 분해되고 있었다. 피를 대신해 흐르던 영기들도 고운 가루가 휘날리듯 하늘로 떠올라, 서서히 진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실더레이 때처럼, 이제 곧 진은 옛 이야기가 담긴 또 다른 아공간으로 진입하게 될 터였다.
“남기실 말은 없으십니까, 사라 경.”
[다들 너무 힘들지는 않았으면 좋겠군.]‘네가’가 아닌 다들.
그 말에 무라칸과 퀴칸텔이 움찔하며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그녀가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원망이라도 하길 바랐다.
하지만 떠나는 마당에, 그녀는 그런 악독한 말을 남기는 대신.
천 년 동안 이어진 고독한 싸움에 대한 짧은 소회를 남겼다.
[드디어…… 오라버니와 동료들에게 갈 수 있겠어.]이윽고 수호자의 몸이 완전히 영기의 입자로 변했다.
진과 동료들이 그녀를 위해 짧게 묵념하자, 영기가 부드럽게 소용돌이치며 작은 소음을 일으켰다.
“내가 잠시 다른 아공간으로 사라질 겁니다. 당황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다들.”
즈즈즉…… 즈즛.
그때처럼, 또 어디선가 먼 목소리가 들려왔다.
……을 멈…… 한다, 사…… 델.
……을 …… 한다, 사…….
잘 들리지는 않지만, 그 목소리는 진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무라칸의 목소리잖아……!’
다른 동료들에겐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홱 고개를 돌려 무라칸을 바라보았으나, 그 역시 자신의 옛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오직 진에게만 들리는 것이다.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와중, 소용돌이치는 영기가 진을 완전히 감싸 안았다.
이윽고 영기의 입자들이 사라지자, 동료들은 진과 사라가 있던 자리를 망연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눈을 뜬 진은 첫 번째 무덤처럼 온통 공허한 어둠을 마주했다.
아공간 속의 아공간.
그러나 첫 번째 무덤에서 겪은 것과 달리, 이번 아공간은 한눈에 보기에도 온전히 보전되지 못한 모습이었다.
어둠 사이사이에 흉측한 균열이 가득했고, 지진이 일어난 듯 아공간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또한 공간이 무너지며 생긴 불길한 노이즈가 쉴 새 없이 고막을 긁어대고 있었다.
사라가 오랜 싸움에 다친 만큼, 그녀가 품고 있던 이 아공간 역시 파괴된 것이다.
진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며 걸음을 옮겼다.
목소리가 나오는 방향으로, 솔더렛이 남긴 기록 장치가 있는 쪽을 찾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잿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구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구체와 가까워질수록 흐릿하던 무라칸의 목소리가 선명해지고 있었다.
녀석을 멈춰야 한다…….
녀석을 멈춰야 한다, 사라 룬칸델.
구체가 보여주고 있는 천 년 전의 한 장면은, 무라칸과 사라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막 전투를 끝낸 사람처럼 핏물을 뒤집어쓴 채였고, 옷과 갑옷 곳곳이 찢어져 있었다.
사라가 무라칸을 노려보았다.
멈춰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설마, 가주를 죽이자는 것이냐? 네놈이, 가주를 포기하자는 말을 해……?
무라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지친 듯 이마를 짚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