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07)
제 333화
94화. 과거의 조각 – 사라(1)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구체가 보여주는 영상 속 무라칸은, 진이 ‘알고 있는 무라칸’이 결코 하지 않을 말을 하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무라칸을 노려보는 사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내 그녀의 두 눈에 서슬 퍼런 살기가 맺혔고, 무라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가주를 포기해야 한다…… 그래, 네놈이 그런 말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집행부의 마검사들에게 들었었지. 파들러도 비슷한 말을 했었고.
퉷!
사라가 시커먼 핏덩이를 토하며 뒷말을 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던 거라고 생각했다. 녀석들은 나보다 네놈을 잘 모르니까, 혹은. 다들 지난하게 이어지는 싸움에 너무 지쳐서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만 여겼어…….
사라가 무라칸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런데, 내 귀로 직접 듣게 되는군. 네놈이 가주를 죽이자고 말하는 것을 말이야. 진심이냐? 가주를 없애야 한다고? 네놈은 가주의 수호룡이다!
사라.
대답해, 무라칸.
……주위를 한 번 봐라.
그 말에 사라가 고개를 돌렸다.
사방이 온통 시체였다. 두 사람이 방금까지 혈투를 펼친 흔적이었다. 잘려 떨어진 유해 곳곳에 룬칸델을 상징하는 흑검과 지플의 용 문양이 가득했다.
죽은 마법사들 중 5할 이상은 테마르에게 당해 죽었다. 녀석과 우리가 지원을 오지 않았다면, 분명 전황이 어려웠을 거다. 아마 이번 전투는 지플의 승리로 돌아갔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난 너보다 일찍 전장에 도착했다. 너와 달리 테마르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뜻이지. 그 녀석이 죽인 건, 지플의 마법사들뿐만이 아니야.
설마, 가주가 우리 기사들을 죽였다는 말이냐……?
무라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사라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곤 다시 주위를 살펴 전사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처와 절단면을 유심히 보는 모습이었다. 곧 그녀는 아군 전사자들 중 일부가.
아니, 대다수가 테마르의 검에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검에 당한 자는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라, 녀석은 미쳐가고 있다. 테마르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사람이 아니야.
긴 침묵 끝에 무라칸이 말했다.
아니야, 가주는 미치지 않…….
외면하지 마라. 너 역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헛소리.
언제까지 자신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넌 지난 전투에서도 테마르가 아군을 베는 걸 확인했어. 파들러를 베려다가, 일순 정신을 붙잡아 미수에 그쳤지.
가주도 사람이다. 그날은 연일 이어지는 치열한 싸움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뿐이야.
죽은 기사들을 보고도 계속 외면할 셈이냐?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가주가 이들을 죽인 것엔, 뭔가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무라칸! 우리가 가주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건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하지만 진실을 봐야 해. 그 녀석을 위해서라도.
진실은!
사라가 소리를 질렀다. 악에 받친 듯 들리나 울먹이는 소리였다.
진실은, 가주는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무라칸, 테마르가 그들을 죽인 건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사라.
분명 지플의 마법에 당해 꼭두각시가 된 기사들이었을 거다. 알잖아? 그놈들이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가주를 믿어야 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어쩌면, 첩자였을지도 모른다. 분명, 첩자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테마르가 직접 죽인…….
짝……!
무라칸이 사라의 뺨을 때렸다.
초점을 잃은 사라의 멍한 눈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죽은 기사들을 모독하지 마라. 룬칸델을 위해, 테마르를 위해, 그리고 너와 다른 식솔들을 위해, 세상이 지플의 뜻대로 흘러가는 걸 막기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이다. 십대기사인 네가, 어찌 그들을 욕보인단 말이냐!
사라의 눈동자가 젖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하고 있었으나,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털썩, 주저앉은 사라가 바닥에 놓인 아군의 시체들을 끌어안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모양새였다.
무라칸은 한참 사라를 내려다보다, 가만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대체 무엇이 가주를 그렇게 만들었나. 너는…… 알고 있어. 그렇지? 무엇이 가주를 미치게 하고 있는지. 내게 말해줘.
지지직-!
즈지지직……!
영상을 띄우던 잿빛 구체가 일그러졌다. 동시에 화면이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급격히 반복했다.
때문에 두 사람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었고,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또 이러는군…….”
첫 번째 무덤에서도 한 번 경험한 바 있는 일.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공간이 파괴되어 있으니 분명 기록 장치에도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다시 구체가 멀쩡해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무덤에서 얻은 영기 구슬도 그렇고, 무덤에 배치된 기록 장치들도 그렇고. 전부 온전하지가 않은 느낌이다.’
기록 장치를 보는 것은 꼭 고장 난 태엽 시계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천 년 전의 일을 멀쩡히 보여주다가도 자꾸 중요한 순간에 장치가 어긋나는 것이다.
‘기록 장치에 의하면 무라칸은 테마르가 미쳤다고 판단해서 죽이려고 했군. 실더레이 경이 무라칸을 싫어하는 듯 말했던 이유가 그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미샤를 어서 만나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녀라면 기록 장치에 대해 뭔가 아는 것이 있을 테니 말이다.
즈즉!
잿빛 구체의 영상이 다시 깨끗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첫 번째 무덤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점이 바뀐 모습이었다.
무라칸과 사라는 이제 룬칸델과 지플의 주검이 가득한 어느 전장이 아니라, 마물이 득시글대는 황폐한 풍경 속이었다.
흑해.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저토록 어둡고 황량한 모습을 한 땅은 흑해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흑해에 웬 탑이……?’
흑해가 분명하건만, 무라칸과 사라, 그리고 진이 모르는 한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곳 저 멀리 우뚝 솟은 하나의 탑이 보였다. 지금의 흑해엔 존재하지 않는 탑이었다.
정말로 탑이 있군…… 가주께서 저 안에 계신다는 말이지.
남자가 말했다. 무라칸과 사라는 그를 파들러라고 불렀다.
세 사람은 먼 탑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탑의 꼭대기에서 끊임없이 이글거리는 검은 연기가 솟고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영기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서로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탑에서 솟구치는 영기는 어쩐지 악독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하…….
파들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라칸, 정녕 이것밖엔 방법이 없단 말인가?
무라칸이 대답하지 않자 파들러가 뒷말을 이었다.
난 솔직히 자신이 없네.
테마르는 약해졌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너흴 부른 건 단지…….
그게 아니라, 이게 옳은 일인지를 모르겠다는 말일세. 가주를 우리 손으로 죽여야 한다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가주께나, 우리에게나.
여기까지 와서 머뭇거리지 마라, 파들러. 나라고 녀석을 죽이고 싶을 것 같나?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참담한 심정은. 나도 괴롭단 말이다.
파들러를 돌아본 무라칸의 두 눈동자에 핏발이 서렸다.
이천여 년을 살아오며, 오늘보다 더 끔찍한 날은 없었다. 상상이나 가나? 수호룡으로서 계약자를 죽여야 하는 게 어떤 일인지. 나는 너희 인간들처럼 괴롭다고 자살조차 할 수 없는 몸이지. 마음 같아선, 녀석을 죽인 다음엔 나도.
무라칸이 말을 멈추며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서 있는 흑해의 땅이 진동하고 있었다. 탑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기운이 일대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마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재앙에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는 짐승들처럼, 마물들은 모두 어디론가 도망친 상태였다.
무라칸. 이것 하나는 알아둬라.
사라가 말했다. 무라칸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너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가주는, 아니. 오라버니는…… 널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을 거다.
나도 알고 있다.
오라버니를 위하는 척하지만, 너도, 네 신도. 결국은 자신들에게 가장 이득인 선택을 하는 것일 테지. 빌어먹게도 우린 그 선택을 따라야 할 수밖에 없는 거고.
사라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흑해의 어두운 땅바닥에 그들의 발자국이 남고 있었다.
탑에 가까워질수록 흑해의 풍경이 더 검게 변해갔다. 탑에서 나온 영기는 흑해의 무엇과 비교해도 더 끔찍한 독기를 품고 있었다.
입구 근처에 이르렀을 땐, 셋 다 전력으로 보호막을 펼쳐야만 했다. 무라칸은 본모습으로 변해 자신의 영기를 해방시켰다.
내부는 거대한 공동이었다. 한가운데 나선으로 연결된 계단이 있었고, 일행은 그것을 오르는 동안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윽고 탑의 정상에 다다르자.
일행은 한가운데 서 있는 테마르를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치 역병에 걸린 사람처럼, 테마르의 온몸에 검은 반점이 가득했다. 그는 일행이 온 것을 보고도 미동이 없었다.
오라버니.
테마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내가 왔습니다, 오라버니. 어쩌자고 이 쓸쓸한 곳에서 혼자 계십니까.
사라는 테마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그토록 사랑하는 오라버니가 미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어쩌면 이제라도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사라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예요. 사라. 날 알아보겠어요? 응?
[이리…… 가까이…… 와. 춥, 구나…….]사라가 활짝 웃으며 테마르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무라칸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놔.
함부로 거리를 주면 공격당할 거다.
놓으라고.
젠장, 사라. 제발 말 좀 들어. 테마르의 근처에 소용돌이치는 영기들을 봐! 칼날처럼 튀어나온 것이 보이질 않는단 말이냐? 널 찌르려고 형성해둔 거다, 사라.
파들러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는 처음 테마르를 봤을 때부터 그가 형성한 영기의 암기를 인지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주가 미쳤다는 것을.
파들러가 아는 테마르는, 하나뿐인 동생이 자신을 뒤에서 찌른다 할지라도 반격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라를 현혹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스릉!
파들러가 검을 뽑았다. 뇌기에 물든 칼날이 검집을 빠져나오며 주위를 밝혔다.
십대기사 파들러 룬칸델. 가주께 룬칸델의 이름을 하사받아 지금껏 무한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지금부터 가주를 공격하는 것은, 죽어서까지도 사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테마르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