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08)
제 333화
94화. 과거의 조각 – 사라(2)
[아쉽게…… 됐군.]테마르의 눈동자가 영기로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사라 또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를 베어야 한다고 말이다.
화르륵, 불을 머금은 칼날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사라의 눈동자에 단단한 투지가 깃들었다. 베기로 한 이상,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고 싶은 것이다.
슬픔에 괴로워하는 것은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이었다.
테마르의 등 뒤에 일렁이는 영기에서 칼날이 쏘아졌다. 사라와 파들러가 검을 휘둘러 그것을 쳐내자, 테마르의 손에 한 자루의 검이 형성되었다.
바리사다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진짜가 아니라 영기로 빚은 모조품이었다.
그 검을 휘두르는 테마르 역시 일행이 알던 그 사람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괴물일 뿐.
테마르의 시커먼 칼날에서 영기 섞인 검기가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위력을 품고 있지만, ‘진짜 테마르’에 비하면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검기였다.
후우웅-!
무라칸이 날개를 펼치자 탑을 가득 채운 테마르의 지독한 영기가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거대한 포식자를 마주하고 굳어버린 짐승처럼.
미친 테마르를 상대하는 건 천 년 전, 완벽한 전성기를 보내던 무라칸이다.
테마르가 온전할 때에도 두 사람의 힘은 막상막하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성을 잃은 테마르가 무라칸의 상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라와 파들러까지 있었다.
화염과 뇌전, 두 가지 속성의 마력이 오러와 섞여 검기가 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검기가 탑을 통째로 갈라버릴 듯 뻗어졌다.
무라칸은 영기로 테마르를 속박했고, 사라와 파들러는 양방향에서 파고들어 테마르를 압박하는 형세가 이어졌다.
콰각, 콱, 크직……!
각자의 기운이 쇠와 뒤섞여 맞부딪치고 있었다. 간신히 뒷걸음질하며 두 사람의 검을 쳐내는 테마르의 모습에, 모두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가 아니었다. 테마르 룬칸델이라는 거인이 가진 힘은.
[미안하다, 테마르.]마지막이라는 듯, 무라칸이 해방된 영기들을 불러 모았다. 사방의 영기가 파도처럼 넘실대며 무라칸을 휘감았다.
동시에 탑 위로 펼쳐진 흑해의 하늘 전체가 영기로 물들었다.
아득히, 저 멀리 보이는 하늘까지도 온통 무라칸의 영역이 된 것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흑해 특유의 독기마저도 그 영기에 묻혀 사라지고 있었다.
하늘의 왕, 그 시절 사람들이 무라칸을 부르던 그 이름에 걸맞은 힘이었다.
[사라, 파들러. 이제 끝을 내야겠다.]그러나 무라칸이 말을 끝낸 순간.
테마르의 바로 앞에 강철로 이루어진 차원문이 열렸다. 그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흐릿한 형상의 한 인간이었다.
그의 흐린 몸에선 찬란한 광휘가 흐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사라와 파들러는 물러나서 경계를 취했고, 무라칸은 공격을 멈췄다.
[운명이라는 것이 때로 참 야박하구나…… 네 신도 그렇고 말이야. 안 그런가? 무라칸.] [……네놈, 여길 어떻게 알고 갑자기 튀어나온 거지?] [알려진, 혹은 지워지거나 변질되지 않은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아. 알잖나?]그와 무라칸은 아는 사이인 듯 보였다. 사라와 파들러도 그를 모르지 않는 눈치였다.
[테마르. 다들 이 가여운 친구를 살리고 싶을 테지?]그가 테마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테마르는 그를 적대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는데, 무라칸의 영기에 짓눌린 여파가 큰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사라와 파들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를 노려보는 무라칸.
[개수작이라니. 유복이 지나쳐 온몸이 짓눌릴 지경인 행운아로서, 불쌍한 고아들에게 선의를 베풀고자 할 뿐.] [집어치우고 꺼져라. 네놈까지 죽이기 전에.]무라칸의 살기가 그에게로 향하자.
사라와 파들러가 무라칸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이야기라도 들어보자는 간절한 눈빛을 한 채.
믿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라면 미쳐버린 테마르를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렇게 날카롭게 굴지 말고, 내 제안을 한 번 들어보게. 내 오랜 벗이여. 이 몸이 모두에게 좋은 미래를 준비해뒀다네.]치이이익-! 프스스스……!
잿빛 구체가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영상이 다시 돌아올 모양새가 아니었다. 첫 번째 무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한 번의 시점 변화 이후 구체가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은 갑자기 끊긴 영상에 짜증이 치솟는 걸 느낄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에 ‘그’를 본 충격에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이 딱 한 번 직접 마주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킨젤로의 단장……!’
분명 그자였다. 흐릿한 몸, 번쩍이며 흐르는 광휘, 말투, 목소리, 강철로 이루어진 차원문까지.
심지어 무라칸을 ‘아는 듯’ 말하는 것도 똑같았다. 꽤나 잘 아는 듯 말이다.
그러나 옛 오테리엄에서 마주친 그날과 달리, 영상 속에선 무라칸 또한 그와 구면인 것처럼 행동했다.
‘대체 뭐야? 무라칸이 그자와 아는 사이라면, 왜 그때는 모르는 척을 한 거지?’
거기까지 떠올린 진은 곧장 생각을 정정해야만 했다.
‘아니, 모르는 척을 한 게 아닐 것이다. 현재의 무라칸은 진짜로 그자가 누구인지를 몰라.’
무라칸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
문득 예비 기수 막바지에 오테리엄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테마르가 폭주한 널 죽이려고 했을 때, 그 친구를 말린 게 바로 나다. 무라칸.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 새끼가 감히 누구 이름을 함부로 팔아대는 것이냐. 보아하니 나이깨나 먹은 마족 같은데, 테마르가 네깟 것과 어울렸을 리 없다. 게다가 폭주라, 어디서 주워들은 건 좀 있는 모양이야? 그날 폭주한 건…….
-[네가 아니라 테마르였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건 둘째 치고, 그날의 싸움을 테마르의 책임으로 기억하고 있다니. 이 사실을 알면 죽은 그 친구가 얼마나 억울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군.]
-……한 번만 더 테마르의 이름을 들먹여봐라. 당장 네놈을 죽이고, 킨젤론지 뭔지 하는 떨거지들도 싹 지옥으로 보내줄 테니.
-[그건 전성기의 네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보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군. 진짜로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이냐? 정말로 네가 아니라 테마르가 폭주를 했다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아니면 네게 유리하도록 기억을 재구성한 건가?]
-닥쳐라……!
킨젤로의 단장과 무라칸이 나눈 대화.
그 대화를 들은 이후 종종 궁금할 때가 있었다. 천 년 전에 무라칸과 테마르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킨젤로의 단장과 무라칸 사이에 정말로 과거가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 말이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영상이 갑작스레 끊겼지만, 정황상 테마르는 그 탑에서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단장의 등장에 사라와 파들러가 보인 반응으로 미루어본 생각이지만,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었다.
영상 속 테마르는 무라칸의 심장을 찔러 파괴할 수 있는 무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사라와 파들러가 없더라도 무라칸 혼자서도 얼마든지 압살할 만큼 망가진 상태였다.
그런 테마르가 전성기의 무라칸을 천 년 동안의 긴 잠에 빠뜨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잠깐 엿봤을 뿐이지만, 진은 영상 속에서 무라칸이 보여준 영기가 얼마나 괴물 같은 것인지를 즉시 알아보았다.
‘영상 속 상황을 보면 킨젤로의 단장이 했던 말과 달리, 폭주한 쪽은 무라칸이 아니라 테마르다. 하지만 그 이후엔 상황이 또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는 일. 영상이 끊겼으니 제대로 확인할 수 없어.’
답답했다.
기록 장치가 훼손되지만 않았다면, 이후의 비사까지 관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더레이 때도 그랬다.
시점이 변경될 때마다 생략되는 빈 과거를 유추하다 보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는 기분이었다.
‘미샤 님은 알고 있겠지? 분명 이 기록 장치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가만. 기록 장치, 기록 장치, 기록…….’
문득.
진의 뇌리에 몇 가지 단어와 이름이 떠올랐다.
기록 마법.
히스터가의 기록 마법. 그리고, 전생의 스승 발레리아 히스터.
그녀는 지금도 히스터가가 잃어버린 옛 마법들을 복원하기 위해 세상을 유랑하고 있을 터였다.
‘왜 스승의 이름을 이제야 떠올린 거지? 스승이라면, 솔더렛이 남긴 기록 장치에 대해서도 뭔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
기록 마법은 히스터가만의 고유한 마법이었다. 명왕족과 솔더렛 역시 비슷한 장치들을 사용하는 게 확인되긴 했으나, 히스터의 그것을 따라올 정도는 아니었다.
기록 마법은 지플이 히스터가를 철저하게 멸문시킨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다. 역사를 뜻대로 주무르려는 그들에게, 히스터가가 가진 기록 마법보다 눈엣가시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발레리아 히스터, 자신의 옛 스승을 찾아야 하는가.
그게 문제였다. 회귀 후 몇 번쯤 그녀를 무척 만나고 싶었으나, 여러 복잡한 이유로 인해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복잡한 이유 중 하나는 명분이었다.
이제 기수가 되었으니 기수령으로 수배를 내려 발레리아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혹은 칠색조에 명령을 내려도 가능한 일.
진은 발레리아가 사용하는 은신처들과 평소 자주 다니는 곳들을 모두 꿰차고 있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여러 가명들까지도 말이다.
그러나 대뜸 찾아가서 혼자만의 재회를 해봐야, 발레리아의 입장에서 진은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그것도 불명한 이유로 자신을 찾아온.
전생엔 깊은 인연을 나눴으나, 현생에서 그들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미샤 님이 아리아 아울하트라는 스승의 가명을 말해준 적이 있으니, 그걸 명분으로 만나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 인해 스승의 삶에 큰 변수가 생길지도 몰라.’
-네가 그림자에게 선택받은 아이라면, 아리아는 역사의 선택을 받은 아이다. 혹 언제든 그 아이와 만나게 된다면, 격려해주도록 해라. 큰 틀에서 보면 네 아군이라 할 수 있으니.
미샤가 처음 티칸을 찾아왔을 때, 떠나기 직전에 했던 말.
당시 미샤는 그 이상 스승에 대해 말하는 걸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이제는 내 신분이 밝혀진 만큼, 함부로 접촉하면 스승 역시 내 적들의 표적이 될 수 있어. 잘 생각해야 한다. 우선 미샤 님을 만나서 넌지시 의견을 여쭤보는 게 좋겠어.’
아직은 발레리아를 확실하게 보호해줄 수 있을 만큼 세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진은 그녀를 만나는 일에 더욱 신중하고 싶었다.
후우우우……!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아공간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벌어진 거대 조개 위에 서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두 개의 사물이었다.
사라의 부러진 검과 새로운 영기 구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