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19)
제 333화
98화. 먹이 아니라
론 하이란은 세상에 알려진 10성 기사 중, 비궁주 탈라리스 엔도르마와 더불어 단연 최고라고 칭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마음먹고 베기로 결정했다면, 제아무리 진이라 할지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큼성큼, 론이 진에게 다가가자 단테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단테는 우선 저도 모르게 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조부님, 제 이야길 좀 들어주십시오!”
“듣고 싶지 않다.”
단테는 몇 해 전, 코스모스의 각축장을 다녀와 조부와 했던 약속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조부님. 이번엔 우승하지 못한 데다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습니다.
-그 저열한 대회에서 두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대체 어찌 된 것이냐? 검의 성취가 부족했던 것이냐, 아니면 돈과 놀음에 눈이 먼 고수가 숨어 있던 것이냐?”
-검의 성취가 부족하진 않았으나, 소자의 기백이 부족했습니다. 또한 돈과 놀음에 눈이 먼 고수는 없었으나 마음이 이끌리는 소년을 둘이나 만났습니다.
-허허,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곧장 궁금한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가문을 드나드는 절세미인들에게도 도통 관심을 두지 않는 녀석이…… 그래, 우리 손자의 마음을 흔든 녀석들은 이름이 무엇인고.
-조부님, 송구하게도 이름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또 한 번 더 송구하게도, 감히 조부님께 한 가지 부탁을 올리고 싶습니다.
-이 고얀! 오자마자 이 할아비를 섭섭하게 만드는구나! 그러나 용서해 주겠다. 부탁은 무엇이냐?
-어떤 상황에서라도 딱 한 번, 제가 그들을 살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당시 론은 단테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었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단테의 머릿속에서 온갖 계산이 이뤄졌다. 과연, 이 패를 지금 쓰는 것이 옳은가?
룬칸델과 하이란은 명백한 경쟁 관계였다. 그건 곧 서로를 ‘적’으로 분류한다는 뜻이며, 명분만 있다면 언제든 서로를 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지금 론이 진의 팔을 거두는 건 충분한 명분이 있는 일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변장한 채 하이란의 본성本城에 침입한 것이니까.
‘어쩌면, 조부께서 진짜로 진의 목숨을 거두려고 하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팔 하나만 빼앗겠다는 지금이 아니라, 그때 그 약속을 꺼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뛰어서, 조부와 벗에게 들릴 것 같았다. 선택해야 했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날을 위해 조부에게 받은 패를 아껴두느냐, 지금 당장 벗이 불구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사용하느냐.
한 차례 눈을 질끈 감았다.
단테는 고민을 끝냈다. 차마, 눈앞에서 친구의 팔이 잘리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조부님, 몇 해 전 저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다.
론은 진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단테를 부드럽게 밀친 채 벌써 검을 치켜든 상태였다.
단테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고민하는 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신이 밀쳐진 줄도 몰랐다.
론의 애검이자 하이란 가주를 상징하는 검, ‘라시드’가 어느새 오러로 물들어있었다.
그 광경에 단테는 온몸의 피가 빠르게 식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던지기도 했다. 론이 진을 베는 것을 몸으로라도 막기 위해서.
반면 정작 론을 마주한 진은 차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론이 등장한 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슈아악!
안 돼!
그렇게 소리치려던 단테는 잠시 후, 조부의 검이 진에게 닿기 직전에 멈추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크호하하하!”
돌연 론이 배꼽을 잡으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주 감쪽같이 속았지? 흐하하, 이 할아비의 연기가 어땠더냐? 응? 오랜만에 우리 손자 당황한 얼굴을 보니 아주 그냥, 귀여워서 미칠 것 같구나! 으흐흐.”
“조, 조부님……? 설마, 이게 다 장난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론은 이후로도 한동안 웃겨죽겠다는 듯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네 녀석이 이 조부랑 대화를 하다 말고 별안간 안절부절, 급하게 자리를 뜨려는 기색을 보이기에 무척 궁금했느니라.”
단테는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단테가 알고 있는 론 하이란, 하나뿐인 조부님은 자신의 마음에 상처가 될 일을 이토록 무감하게 행할 인물이 아닌 것이다.
“대체 누가 찾아왔기에 우리 손자가 이럴꼬! 혹, 지난번 연회에서 본 공주인가? 아니면, 너 좋다고 매일같이 지극정성으로 혼자 검황성을 찾아오던 헨서크가의 여식이 드디어 성과를 이룬 것인가 싶었지.”
그 대목에서 진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친. 단테 이 자식, 왜 이렇게 늦나 싶었는데. 론 경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이었단 말이야?’
룬칸델이었다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주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친구가 찾아왔다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럼, 조부님. 조부님께선 소자의 벗을 해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우리 손자가 좋아하는 인물을 내가 왜 별 이유도 없이 다치게 하겠느냐? 물론, 네가 그토록 급히 찾은 인물이 여인이 아니라는 점은 다소 아쉽다만. 네가 종종 말하던 그 친구라는 녀석의 실체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 조부는 매우 기쁘고…….”
털썩!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는 단테.
그 모습에 순식간에 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단테야, 내 손자! 설마 비, 빈혈이 온 것이냐!?”
극도로 허약한 몸을 타고난 단테는 극심한 충격을 받거나, 무리했을 때 빈혈이나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일이 잦았다.
최근엔 거의 없어진 증상이었다.
“죄송합니다, 조부님. 소자가 추태를…….”
“아이고, 아니다. 할아비가 잘못했다. 여봐라! 의료진을 불러라, 어서!”
쩌렁쩌렁한 론의 외침에 순식간에 의료진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단테를 보자마자 능숙하게 환약을 먹이고 들것에 실었다.
“진…… 조금 있다가, 다시 이야기하세.”
진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단테는 의식을 잃었다.
“우리 손자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이냐? 응? 크게 아픈 것이야?”
“그저 빈혈일 뿐입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가주님!”
“불안하구나! 손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목을 칠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가주님! 속히 소가주님의 상태가 호전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의료진이 단테를 데리고 신속하게 자리를 뜨자, 론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손자가 걱정되는 듯 혼자 앓는 소리를 냈다.
응접실엔 진과 론,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론 하이란 경. 룬칸델의 열셋째 자식이자, 열두 번째 기수인 진 룬칸델입니다.”
“네놈 이름은 알고 있다. 변장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론이 천천히 진을 돌아보았다. 단테를 바라볼 때와 달리 인자한 구석이 전혀 없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내가 널 베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느냐?”
론의 물음에 진이 부드럽게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생각하기에, 그리 가벼운 분이 아닐 것 같았습니다.”
“손자가 속상해했을 테지만, 그걸 감수하고도 네놈의 팔 하나를 거둘까 심히 고민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랬다면 검황성에 함부로 찾아온 제가 감당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놀리는 맛이 없는 놈이로고. 시론, 그 친구 젊을 적을 보는 것 같군.”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다. 네 아비는 지금도 그렇지만, 젊은 시절엔 더 보기 싫은 인간이었느니라.”
그렇게 말하는 론의 시선이 탐욕에 젖어있었다.
도자기.
그는 겁주는 듯 말하면서도 진이 들고 있는 도자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네놈 때문에 소중하고 소중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손자가 다칠 뻔하였다. 이를 어찌 책임질 것이냐?”
“외람됩니다만, 그것은 저의 책임이 아닌 듯합니다.”
“그래, 네 책임이 아닐 것이다. 네가 나보다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면 말이다.”
론이 씨익 웃으며 진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그의 손바닥이 닿자마자, 진은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론의 손길에서 뻗어진 무형의 기운과 오러가 진의 장기를 순식간에 진탕시킨 것이다.
‘무슨 역류를…… 마법사들처럼 일으키시려고 하는군.’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인들의 오러 역류는 마법사의 마력 역류에 비해 인위적인 유도가 훨씬 어려웠다.
단순히 상대에게 더 큰 오러를 주입해 역류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정설일 정도로.
그러나 론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있었다.
“어떠냐, 이제 책임감이 좀 생기고 있느냐?”
론의 역류 유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진은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고, 손아귀의 힘이 풀리는 와중에도 도자기를 놓치지 않았다.
“우선…… 단, 테는. 빈혈이, 아닙니다.”
그 말에 론의 눈동자가 커졌다.
진이 단테의 ‘꾀병’을 그 짧은 틈에 눈치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조차 처음엔 긴가민가했던 문제인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는 놀라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먹과 어울리면 먹이 드는 법이지. 지금껏 내 장난에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응수한 적이 없는 녀석이건만, 네놈과 어울렸기 때문인지. 꾀를 얻은 모양이더군.”
론이 진에게서 손을 떼며 말했다.
진은 코와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한 차례 숨을 골랐다.
“단테가 머리를 아주 잘 썼습니다. 빈혈인 척, 제가 론 경과 독대하게 만들어 금화 3억에 대한 판단을 경께 넘겼으니까요.”
“우리 손자는 그리 영악한 녀석이 아니었건만, 네놈이 다 버려 놓았구나. 쯧!”
“오히려 제게 먹 값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라?”
“그 맑기만 했던 단테가 론 경을 속이려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차후 녀석이 하이란의 패권을 쥐게 되었을 때, 비먼트의 모략가들 사이에서 뒤통수만 맞지는 않을 것 같군요.”
진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론은 잠시 할 말을 잊고야 말았다.
“또한, 저는 하이란가와 비먼트의 그 어떤 천재 무인들보다 단테를 많이 자극해왔습니다. 단테가 이룬 성취의 일정 부분엔 저의 노고도 녹아있는 셈입니다.”
“그에 대한 값도 받고 싶다?”
“그렇습니다.”
“크하하…… 먹이 아니라 악惡이었군.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제가 단테를 더욱 악에 물들이기 전에 경께서 저를 베어도, 제가 할 말이 없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말로는 당해낼 수가 없겠구나. 그래, 마음 같아선 네놈의 목을 그냥 치고 싶다만. 손자를 생각해서 그건 면해주도록 하지. 살려주겠다. 그것이 네가 단테를 물들인 것에 대한 값이다.”
“그것으론 부족합니다.”
“그럼,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룬칸델 12기수 따위가 감히 검황성의 주인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은 말이다. 그 도자기도 그냥 두고 가거라.”
론이 미소를 지으며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놈이 최근 수행한 흑기사 암살 임무의 보상으로 받기로 한, 고대 만년철 역시 내게 넘기도록 하라. 살고 싶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