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30)
제 333화
103화. 과거의 기록 – 집사장 르엣 다미로 율(1)
르엣이 꺼낸 영기 구슬은 지금까지 진이 본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은은한 검은빛이 흘렀고, 크기가 더 작았으며, 자세히 들여다보자 구슬 속에 사람과 풍경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훼손되지 않은 상태의 기록 장치라는 것을.
구슬 속에 보이는 풍경은, 그것이 담고 있는 과거의 기록들이었다.
“르엣 님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니,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지플, 그들의 역사 조작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플의 역사 조작에 대해선 들은 바가 많으나, 아직 진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 그중에서도 옛 룬칸델과 관련이 있는 자들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만 보았을 뿐.
그렇기에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생생한데, 정말로 이 공간을 빠져나가면 르엣의 존재를 잊게 될까?
그런 진의 마음을 읽은 듯, 르엣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깃펜을 꺼냈다.
“손을 한 번 줘보세요.”
르엣이 내밀어진 진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잠시 후, 진은 자신의 손바닥에 적힌 그녀의 이름을 보면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르엣 다미로 율.
……엣 다미로 율, ……다미로 율, ……율, …….
‘르엣 님의 이름을 적은 글씨가 지워지고 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지플이 역사 조작 능력을 갖고 있다는 건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체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천 년의 계약자, 진 경께서는 아마 앞서 두 개의 무덤을 다녀오셨을 겁니다. 그곳에서 수호자들을 만나셨을 테죠.]“……예, 실더레이 경과 사라 경을 본뜬 수호자들을 만났습니다.”
[역시나 제 기억 속에서 사라진 분들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분들과 다르게, 영기로 빚어진 수호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경의 기억 속에서도 제가 계속 사라질 거예요.]그녀는 영혼과 영기로 빚은 수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죽음을 맞이한 실더레이나 사라와 달리, 계속해서 역사에서 지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천 년 전의 룬칸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 시절에 대해 남은 기억이 별로 없군요.]요정족에게 주어진 시간이 용과 같다 하나, 세상 그 어떤 존재도.
천 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기억조차 온전치 못한 채 홀로 견디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진은 대답할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슬프게 보실 것 없습니다, 진 경. 나에 대한 역사가 사라진 건, 룬칸델의 일원으로서, 또 세상의 일원으로서 가문과 세계를 수호하다 얻은 영광의 상처일 뿐입니다.]담담하게 말하는 르엣. 그녀는 자신의 룬칸델에 대한 기억을 대부분 잃었으나 맹목적인 애정은 그대로였다.
“……가문을 수호한 대가가 너무 가혹하군요.”
“하지만 그만한 대가가 없었다면, 룬칸델은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졌을 겁니다. 지금의 룬칸델은 어떠한가요?”
“지플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세력입니다.”
그러자 르엣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것 봐요, 가치가 있는 희생이었잖아요!]잔뜩 신이 난 아이처럼, 르엣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말했죠? 테마르, 분명 우리는 가문을 지켜낼 수 있을…….]진과 르엣의 눈빛이 마주쳤다.
르엣은 잠시 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실수했군요. 미안합니다.]“괜찮습니다, 르엣 님.”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진은 이 안쓰러운 요정족이 민망해하는 모습에 자신이 더 착잡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있던 시절의 룬칸델은 역사에서 거의 지워졌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대했던 마검사 가문이 사라진 거예요. 그때 맹약을 맺었으니, 지금의 룬칸델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테죠.]“그렇습니다.”
[하지만 진 경께서는 솔더렛의 계약자이시니, 그때 룬칸델이 받은 저주가 적용되지 않을 겁니다.]화아아…….
진이 손바닥 위에 마력으로 구체를 형성했다. 르엣은 홀린 듯이 그 구체를 한참 바라보았다.
[불빛이로군요, 우리가 살린.]“지금은 제가 룬칸델의 유일한 마검사입니다.”
르엣도 마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영기 구슬에서 기묘한 파장이 일었는데, 진은 이미 과거에 그 마법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기록 마법!?’
르엣이 사용하고 있는 마법은 히스터가의 기록 마법과 매우 흡사한 형태였다.
히스터가가 활동한 것은 1400~1500년 사이. 요정족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멸망했다고 알려졌다.
즈즈즉.
치지짓……!
영기 구슬이 구동하기 시작하며 익숙한 작은 소음을 일으켰다.
설마 요정족과 히스터 사이에 뭔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생각한 찰나, 르엣이 입을 열었다.
[조금 놀라신 것 같군요, 진 경.]“비슷한 마법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건 마법이 아니라, 우리 요정족들만의 특별한 능력입니다. 우리 종족은, 영생에 가까운 생명력을 갖고 태어난 대신…….]위이이-.
영기 구슬의 불안정한 노이즈가 점차 부드러운 소리로 변해갔다.
훼손된 영기 구슬에선 듣지 못한 소리였다.
[기록의 의무를 갖게 되었죠.]세상을 관망하고 기록하는 것.
그게 요정족의 존재 이유였다.
[우린 충분한 힘을 갖고 있음에도, 인세에 관여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폭군이 나타나 세상을 유린할 때도, 인간들의 문화가 옳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때에도. 우린 그저 기록만 했어요. 그게 우리의 역할이니까요.]“그렇다면, 요정족인 르엣 님이 룬칸델에 적을 두게 된 건. 지플이 역사를 조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겠군요.”
진이 맥락을 읽고 대답하자 르엣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그들이 역사를 훼손하지 않았다면, 제가 테마르를 만나고, 룬칸델의 집사장이 될 일은 없었을 겁니다.]르엣 다미로 율, 그녀는 본래 요정족의 가장 고귀한 존재였다.
‘율’이라는 이름은 요정족의 왕에게만 붙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테마르에게 감화되어, 스스로를 룬칸델의 일원으로 여기기 시작했어요. 제 원래 고향인 태초의 숲보다 이제는 이 폭풍성이 더 고향처럼 느껴지는군요. 숲에서 지낸 세월에 비하면,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그저 한낮의 선잠에서 꾼 꿈에 불과한데도…….]이제는 그마저도 기억에서 거의 지워졌으니, 르엣의 상실감이 어떨지 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하, 잊힌 추억을 떠올리려 애쓸 때가 아니로군요.]“르엣 님.”
[말씀하세요.]“혹시, 히스터라는 가문을 알고 계십니까?”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그 가문의 사람들이 르엣 님과 비슷한 능력, 기록 마법을 사용합니다. 때문에 지플에게 멸문을 당해 사라졌지만, 전 히스터의 마지막 생존자를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에게 부탁해 르엣 님의 기억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우리와 비슷한 마법을 쓰는 인간이라…… 하지만, 제 기억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이곳을 벗어날 수 없고, 진 경께서는 이 아공간을 나가면 저에 관한 모든 걸 잊게 됩니다. 따라서 진 경이 그분에게 제 기억을 되찾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그분에게 정말 그런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말이에요.]르엣이 진의 손을 잡아 영기 구슬 위에 얹었다.
[그래도,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건 아닐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이 기록 장치 속에 제 모습도 조금 등장하거든요. 딱 한 번밖에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세히 살펴보시길.]우우웅-!
영기 구슬에서 뻗어지는 마력의 파장이 거세졌다.
동시에 진은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구슬 속에 담긴 기록을 살펴볼 수 있었다.
* * *
사계절 내내 비바람이 몰아치는 곳이지만, 그날은 유난히도 거셌다. 폭풍성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회의실 한쪽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빈 종이가 수만 장이나 쌓여 있었다. 하지만 종이들은 이미 한 번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 모조리 조금씩 구겨져있었다.
슥, 슥, 슥슥…….
집사와 문사들이 쉴 새 없이 새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들은 기록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요정족’이 최근에 겪었던 일들을.
수백 명이 동시에 같은 내용을 다른 문장과 해석으로 적고 있었다.
(797년 3월 3일, 룬칸델이 요정족에 관한 지플의 역사 조작을 기록하다. 797년 3월 4일, 요정족 다섯 사람 쉴 다미로, 베카 티쉬케, 뮬리아스 몬, 트리카 트레도스, 젠 마이누가 요정족들 사이에서 잊히다…….)
(……년, 3월 3일, 룬칸델이 ……에 관한 지플의 ……을 기록하다. ……년 3월 4일, ……다섯 사람 쉴, …….)
집사와 문사들이 기록하는 와중에도 글씨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마치 구멍 난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집사와 문사들은 필사적으로 계속 같은 내용을 적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정족이 완전히 잊혀져버릴 것이란 공포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체 없는 공포가 아니라, 이미 그런 식으로 무언가 지워지는 것을 확인했기에 오는 공포였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요정족이 완전히 사라지면, 언젠가 룬칸델도 이런 식으로 역사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플, 이 미친 자식들, 버젓이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요정족들을, 정말 이런 식으로 지우겠다는 건가……!
십대기사 다이애나가 분통을 터뜨렸다. 회의실에 있는 다른 이들 모두가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다.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는 요정족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걸 막을 수 없다고, 간신히 소멸을 유예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살아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역사에서 지워지면, 그는 처음부터 없던 존재가 된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며, 그 역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지플의 역사 조작 능력은 단순히 ‘진실을 교란하는’ 것을 넘어, 진실을 없애버리는 영역에 닿아있었다.
어찌 그만한 힘을 신이 아닌 인간이 휘두르고 있다는 말인가…… 요정족의 힘이 아니었다면, 놈들의 역사 조작 능력이 이 정도 수준이었다는 걸 알지 못했을 것이오.
십대기사 파들러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요정족의 ‘기록 능력’이 없었다면 룬칸델은 영영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머잖아 요정족이 사라질 것이다.
어느 누구도 룬칸델을 위해, 아니. 세상을 위해 진실을 기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끼익-!
집사장, 르엣 다미로 율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집사장.
다이애나가 목례하자 르엣이 마력을 일으켜 허공에 반투명한 창을 띄웠다.
다들 이걸 보세요, 희망이 있습니다. 제가 발견했습니다, 지플의 역사 조작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르엣이 수척한 얼굴과 대비되는 달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가 띄운 반투명한 창엔,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