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75)
제 333화
114화. 요정의 후예
“아무래도 곧 공간이 무너질 것 같군.”
아공간이 진동하는 걸 느낀 진이 말했다.
“그러네. 네 말대로 부수지 않길 잘했어.”
발레리아가 일어서서 로브를 가볍게 털며 뒷말을 이었다.
“꽤나 흥미진진한 대화였다, 진 룬칸델.”
아공간 안에서 보낸 세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진이 이야기를 하고 발레리아가 듣는 식이었다.
전생의 제자로서, 현생의 동료에게. 그간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했다. 물론 주절주절 의미 없이 인생사를 늘어놓은 게 아니라, 동료로서 서로 알아두면 좋은 정보를 알리기 위한 대화였다.
어린 나이에(실제론 회귀 직후, 태어난 순간부터지만) 그림자의 계약자가 된 일, 생도 시절부터 알게 된 세상의 여러 비밀들, 예비 기수일 때 얻은 것들, 기수가 된 후 겪고 있는 일들, 앞으로의 계획…….
그 모든 일련의 과정 속에 발레리아를 만나게 된 것까지.
발레리아는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진의 이야기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진 룬칸델이라는 인간이 쌓아온 시간의 밀도가 대단히 무겁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직 열아홉밖에 안 된 인간이, 정말 별일을 다 겪어왔군.’
물론 진 역시 이제 겨우 열일곱인 발레리아의 삶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유년기의 짧은 행복이 끝나고, 수행자처럼 고독한 시간만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아공간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 발레리아가 내놓은 한 가지 이야기가 무척 뜨겁게 다가왔다.
“아까 내가 추모하는 것을 알아보았지?”
“그랬지.”
“그건 회색부엉이 용병단, 죽은 내 가족들을 향한 추모였다. 그들이 지플에게 몰살당한 후, 다시는 타인을 곁에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지.”
발레리아가 진과 눈을 맞췄다.
그리곤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네 이야길 듣고 나니 우리가 같이 할 일이 조금 더 명확해진 것 같군.”
진은 그녀가 회색부엉이 용병단에 대해 먼저 말한 것이 내심 놀라웠다.
그리고 발레리아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프스스스…….
아공간의 붕괴가 가속되고 있었다. 검은 꽃가루처럼 휘날리는 영기의 입자가 사방으로 퍼지며 사라져갔다.
그들이 아공간 안에서 보낸 시간은 세 시간 남짓이지만, 바깥은 정오를 향해가고 있었다.
[왔다!] [애들이 돌아왔어요, 쉴라 님!]묘인족 루루와 미루가 가장 먼저 두 사람을 반겼다. 그들은 진이 준 영기 갑옷 망토를 함께 두르고 있었는데, 꼭 거대한 털뭉치처럼 보였다.
콸콸 쏟아지던 장대비가 멎었고, 구름도 걷혀 쨍한 태양이 그들을 비추었다.
[돌아왔느냐.]쉴라가 두 사람의 앞으로 날아오며 말했다.
지쳐 보였다. 온몸에서 요정 특유의 빛이 흐르는데도 어딘지 수척해 보였다. 하루 사이에 동족들에게 배신당하고, 제 손으로 하나뿐인 동생을 죽였으니 당연한 일.
“시간이 이렇게 흐를지 몰랐습니다. 제가 부재한 사이, 추적자가 더 찾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래. 누군가 숲에 접근하는 자들을 가로막고 있다더군.]“누가……?”
[그 사람은 자기를 녹장미 씨라고 했어.] [그래, 녹장미 씨. 그렇게 말하면 네가 알 거라던데.] [우릴 그렇게 쉽게 찾는 인간은 처음 봤어.] [심지어 우린 녹장미 씨가 옆에 다가온 것도 몰랐다니까?]루루와 미루는 추적을 염려해 밤새 숨은 채 숲의 입구들을 살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을 때, 웃고 있는 요나를 보곤 기겁하고 도망치려 했으나. 요나는 묘인들을 무척 귀여워하며 새로 지은 가명을 알려주었다.
‘요나 누님이 날 도왔군.’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대체 누님이 언제부터 날 쫓아왔던 거야……?’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건 곧 요나가 마음을 먹었다면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요나가 그럴 일은 없지만 말이다.
[녹장미 씨랑 어떤 사이야? 아군이지? 아군인 척하는 적은 아니지?]“아주 친해서 다행인 사이입니다. 아군이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루루와 미루. 그들은 요나가 만일 적이라면 진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었다.
‘누님이 정확히 언제부터 내 뒤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완타라모 숲에 나와 기록 마법사가 함께 찾아왔다는 정보가 지플에 전해질 일은 없겠군.’
급하게 숲을 떠날 필요도 없었다. 아공간에 있는 동안, 혹여나 바깥 상황이 좋지 못해 쉴라와 대화를 나누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이 쉴라와 눈을 맞췄다.
“요정족의 후예라는 건 그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었더군요, 쉴라 님. 당신들은 후예가 아니라…….”
[명예를 잃고 마녀에게 저주 받은 요정들에 불과하지.]자조적인 쉴라의 대답.
[우린 끔찍한 존재들이야. 우연히 찾아온 힘없는 인간들을 죽이고, 권력자들과는 가왕주를 거래하고, 우리만의 작은 세상에 고여서 썩어갔지.]그 순간 진은 가왕주의 기록에서 본 마지막 내용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때쯤 요정들은 자신들이 진짜 요정이던 때의 기억 대부분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헬루람의 힘을 빌려 다시 존재하게 된 것일 뿐, ‘자신’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잊은 것은 진짜 요정일 때의 기억뿐만이 아니었다. 쉴, 아니. 쉴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요정들은 헬루람이 자신들에게 해준 일과 말조차 잊어가고 있었다.
지루하기 때문이었다.
달리 목적도, 의미도, 희망도 없이 이어지는 삶은 그야말로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우연히 숲을 찾은 인간들을 죽이며 재미를 찾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직 쉴라만이 그들의 왕으로서 미래를 고민했다.
“……그래도 당신은 솔더렛의 전언을 지켰습니다.”
[내가 지킨 것이 아니라, 네가 찾아온 덕에 지켜진 것이지. 너는 약속된 천 년의 계약자, 따라서 내가 솔더렛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인간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책감을 치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쉴라 님은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진이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 직시하십시오. 쉴라 님은 오래전 실수를 저질렀고, 가혹한 대가를 치렀으며, 그것도 모자라 저주 받았고, 다른 요정들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를 완전히 잃어가는 동안 솔더렛의 전언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진이 말을 끝맺자 쉴라의 날개가 미세하게 떨렸다.
[……고맙구나.]“주제넘은 이야기일 수도 있었습니다. 좋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쉴라의 시선이 발레리아에게 닿았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발레리아가 쉴라의 앞에 섰다. 무언가 직감한 듯한 표정이었다.
[가왕주를 통해 본 기록 속에서 무엇을 느꼈느냐.]천천히,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뜨는 발레리아.
“태초의 숲에 들어서니 이상하게, 괴로울 만큼 그리운 감정이 일어나더군요.”
[그건 너의 영혼이 그곳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제 가문은 1400년대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1799년이죠. 가왕주에 담긴 기록과는 시기상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 내가 남긴 기록은 천 년 전의 것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영혼은 태초의 숲에 뿌리를 두고 있다.]“어떤 연유로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처음으로 히스터라는 성을 쓰는 인간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발레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인간의 이름은 민카 히스터. 내가 배신한 동족들과 너처럼,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독특한 붉은 머리칼을 갖고 있었지.]민카 히스터.
발레리아도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히스터가의 시조이자, 처음으로 ‘전승지’를 남긴 인물이었다.
또한 최초로 기록 마법을 사용한 인간이기도 했다. 히스터가 특유의 기록 마법은 모두 민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시조께서 왜 쉴라 님을 찾아왔습니까?”
[알리기 위해서.]“무엇을?”
[최후의 최후까지 지플에 맞서 싸운 요정들이…… 모두 잊혔다고. 그리고 그들은, 나의 옛 형제들은 완전히 잊히기 전, 존재로서 영원히 소멸하기 전, 단 하나의 불씨를 남겼고…….]쉴라의 몸이 붉은빛으로 변했다. 회한, 슬픔, 울분, 격정적으로 차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녀의 가슴을 찢고 있었다.
[그 불씨가 꺼지지 않고 끝내 발아한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천 년 전, 지플의 역사 조작에 요정들은 세상에서 완전히 잊혔으나.
그들은 최후의 기록 한 가지를 남겼다.
바로 ‘영혼’이라는 형태의 기록을.
태초의 숲에서 살았던 요정들은 그 어떤 존재보다도 자연의 섭리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요정들이 이해한 섭리 한 가지, 순환.
사람도, 짐승도, 수풀도, 심지어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강철마저도. 결국 모든 것은 언젠가 세월에 분해되어 땅으로, 흐르는 강으로, 바람으로 퍼져 세상에 흡수되기 마련이었다.
그것들은 양분이 되고 씨앗에 섞여 다시 생명이 된다.
요정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영혼을 모두 모아 자연으로 흘려보냈다. 언젠가 그 영혼이 다시 어딘가에서 피어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사백 년.
마침내 요정들의 영혼은 사백 년을 돌고 돌아 한 이름을 빚어냈다.
히스터라는 이름을 말이다.
쉴라가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는 동안, 발레리아의 양 뺨으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쉴라는 사랑스러운 조카를 앞에 둔 듯, 그러나 그 조카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듯 함부로 발레리아를 위로하지 못했다.
“시조께서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수많은 물음이 담긴 말이었다.
[내가 평하기엔 부끄러울 만큼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다. 무척 강인했으나 고독해 보였어. 너를 보니, 생각이 나는구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확연하게…….]민카 히스터는 지플이 히스터를 역사에서 지워버렸을 때 함께 사라진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쉴라는 사백 년 전 그가 찾아왔던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희미한 이미지로만 겨우 떠올리고 있었으나, 발레리아가 숲을 찾아온 순간부터 진한 기시감을 느껴왔다.
그리고 이제 막 발레리아에게서 민카의 모습을 본 것이다. 이제야 선명하게 민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민카와 더불어, 르엣 다미로 율. 제 언니의 얼굴도.
발레리아가 가진 옛 요정들의 영혼이 지워진 기억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내게 네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발레리아. 발레리아 히스터.”
[너는 요정의 후예다. 이 완타라모 숲의 망령들이 아니라, 오직 너만이 요정의 존재를 이어받은 단 한 사람이다.]발레리아의 무겁고 오랜 숙제 한 가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