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03)
제 555화
139화. 협박(3)
일행은 조용히 검을 뽑았다. 뿌연 모래바람 때문에 상대가 누구인지 얼른 알아볼 수 없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인영은 전혀 위축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일행을 조금 초조하게 만들었다.
“……지플은 아닌 것 같군. 곧장 신호탄을 쏘지 않는 걸 보니.”
조슈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대로 지플이었다면 인영은 룬칸델들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신호탄부터 쏘았을 터였다.
일행과 인영 사이의 거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오, 그래도 2기수라고 과연 상황 파악 능력이 뛰어나기는 하네요? 그런데 저 사람 등에…… 검인가? 검이라고 하기엔 좀 크지 않나요? 모양도 괴상하고. 세상에 저런 무기를 쓰는 사람이 있다고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누구 이야기였더라?”
무식하게 크고 투박한 형태를 한 검.
“아! 큰언니! 맞아, 우리 큰언니, 백경께서 저런 무기를 사용하시죠?”
검이 아니라 도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은 무기. 그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세상에 루나 룬칸델 단 하나였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진과 무라칸은 얼마 전 흑왕산채에서 루나의 상징과도 같은 도끼검을 장난감처럼 휘두르던 인물을 겪은 적이 있는 것이다.
‘설마……!’
‘망할, 그 미친 용이라고?’
두 사람은 동시에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고, 나머지 룬칸델들은 인영의 정체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루나일 리가 없으니 말이다.
이윽고 일행은 인영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모래바람 속에서조차 빛이 나는 듯 새하얗고 아름다운 얼굴, 도끼검을 메고 있는 게 이상해 보일 만큼 가녀린 체격.
악마룡, 제피린이었다.
“와아, 진 경, 그리고 흑룡 무라칸 님. 이런 우연이?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는걸요!”
제피린의 등장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산드라였다.
“어, 당신 뭐예요. 진 씨랑 친해요?”
“음? 아, 산드라 지플? 친하다면 어쩌려고 물어보시는 건가요?”
“많이 친하면 언니로 모시거나 동생으로 예쁘게 여기려고요.”
무라칸이 산드라의 어깨를 쿡 찔렀다.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명확한 표시에 긴가민가하던 산드라는 적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실수할 뻔했네. 헷갈리게 괜히 친한 척이야, 거지 같은 게.”
“어머, 입이 험하시네. 반 불사 믿고 까불다간 골로 가는 수가 있어요? 생체 골렘 아가씨.”
“하? 내가 먼저 죽나 네가 먼저 뒤지나 한 번 재볼까?”
“귀여우시기는. 생체 골렘이 되면서 머리에도 조금 문제가 생기신 걸까?”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제피린을 보니 진과 무라칸은 힘겹던 그날의 싸움이 떠올랐다.
-킨젤로 단장. 그자의 용이 아닐까 싶은데.
-그 기분 나쁜 새끼? 그럴 수 있다. 검황성 테러 당시 놈이 보여준 권능이 신적이긴 했으니까.
-……무라칸 님, 그리고 12기수. 아무래도 싸움이 길어지면 답이 없을 것 같군요.
-길어지면 답이 없어? 그 정도가 아니야. 저건 절대로 못 이긴다.
헤도를 벗어나자 제피린을 상대하게 될 줄이야, 산 넘어 산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정말 답이 없었겠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진의 품속엔 제피린이 찾아온 목적들이 고이 담겨 있었다.
조슈아와 디푸스, 제인은 여전히 제피린의 정체를 유추하지 못했으나 그녀가 범상치 않다는 건 알아보았다.
무라칸이 다짜고짜 상말을 내뱉으며 싸울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무라칸은 입이 근질거려 미칠 지경이었으나, 지금 제피린과 싸우면 진이 죽을 수 있기에 참고 있는 상태였다.
단지 제피린만 상대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와 전투를 벌이면 필연적으로 지플의 추적대가 참전할 것이고, 그르닐을 포함한 킨젤로의 병력도 쫓아올 수 있었다.
무라칸을 대신해 산드라가 쉴 새 없이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중이기는 했다. 도대체 어디서 익혔는지 저잣거리 뒷골목의 가장 질 나쁜 잡배들도 꺼릴 것 같이 끔찍한 말들이었다.
그리고 진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예상대로다.’
다른 룬칸델들이 무라칸의 태도를 보고 분위기를 읽고 있듯이.
진은 제피린의 행동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2마탑 금고에 있던 함선 설계도와 기계가 킨젤로에게도 정말 중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이미 킨젤로가 투입한 자원과 인력에서 증명된 바였으나, 제피린의 행동을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진이 기억하는 제피린은 문제가 생겼을 때 말을 우선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아무런 전조와 예고 없이 상대를 우선 찌르고 시작하는 게 제피린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간을 좁히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 아무래도 긴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네요. 저 생체 골렘의 꽥꽥대는 목소리도 더는 못 들어주겠고요. 진 경, 금고에서 훔친 물건들을 내놓도록 하세요.”
“거부한다면?”
“당신들은 몰살당하겠죠. 제 손에. 그런 당연한 게 궁금하신가요?”
몰살이라는 단어에 다른 룬칸델들은 또 한 번 치욕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싸운 헤도도, 눈앞의 여인도. 모두 룬칸델을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약하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순혈 룬칸델로 태어나 기수가 된 후 오늘처럼 치욕을, 그것도 연속적인 치욕을 맛본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형제들이 치를 떠는 반면 진은 속으로 짓고 있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거의 이겼다.’
순수 무력은 몰라도 상황과 조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피린은 흑왕산채에서도 날 절대로 죽이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날 죽이면 솔더렛의 계약을 얻는 것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일 테지.’
그렇다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킨젤로가 그사이 어떤 특별한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면, 여전히 제피린은 진을 죽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루테로 마법 연방, 그것도 드락카의 근처였다. 싸움이 시작되고, 킨젤로와 지플이 몰려와 진을 두고 다투는 구도가 될 경우.
어떤 식으로든 진을 취하는 쪽은 킨젤로가 아니라 지플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렇게 되면 물건은 고사하고, 진까지 잃게 되니 킨젤로로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몰살? 너무 쉽게 말하는군, 제피린.”
“못 할 것 같나요?”
“그래.”
“저번에 방심해서 제가 한 방 먹은 걸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구시는 것 같은데, 저 오늘은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거든요.”
무라칸은 당시로서는 제피린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평가했고, 또한 그녀 역시 무라칸처럼 모종의 이유로 제 힘을 다 사용하지 못하는 듯 보였으나.
흑왕산채에서 제피린은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전장을 먼저 떠났었다. 테스의 힘에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입은 타격도 아직 완벽하게 회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속단할 수는 없으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세게 나가도 문제가 없으리라고.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지? 설설 기면서 비위라도 맞춰 달라는 건가?”
“끝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오시겠다? 아, 내가 어지간해서는 당신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믿고 있기 때문이겠네요.”
“잘 알면서 왜 쓸데없는 협박을 하지?”
“어지간해서는, 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살려두더라도 업고 있는 막냇누이나, 형제들, 흑기사는 싹 죽여버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슬프지 않겠어요?”
“그럼 입 아프게 그만 떠들고 해봐, 한번.”
“그래, 진 씨 말대로 해봐! 물지도 못할 거면서 짖지만 말고!”
진과 산드라가 동시에 말하자 제피린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끓어오르는 분노 속에서도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은 경련으로 나타났다.
잠시 살벌한 침묵이 감돌았다.
일행은 제피린이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명령이고 뭐고 그냥 다 죽여버리는 게 어떨까, 그런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빛이로군, 제피린.”
진이 무라칸에게 요나를 넘기며 찬찬히 품속에서 설계도와 기계를 꺼냈다. 그리곤 양손에 하나씩 들고 제피린을 향해 살살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니 겁이 나서 이걸 꺼낼 수밖에 없잖아.”
“……내놓으시죠.”
“아직 이해를 못 한 것 같은데, 어? 어어? 움직이지 마. 계속 우릴 위협하면, 우리와 너희가 그토록 개고생을 해가며 얻은 이 물건들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거든.”
화륵!
설계도를 쥐고 있는 진의 왼손에 별안간 시뻘건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력으로 형성한 불이었다.
제피린은 그대로 석상처럼 굳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룬칸델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대체 어떻게 얻은 물건이란 말인가!
“그만둬!”
“너야말로 어설픈 협박은 그만둬라, 제피린. 오늘 기분이 안 좋다고?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진짜로 이것들을 다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이지. 설계도가 다 타버린 다음엔, 단 1초도 지체하지 않고 기계를 부술 거다.”
화르륵, 흐드드득……!
고작해야 3성 수준의 마력이 담긴 그 불꽃이지만, 그걸 보는 모든 이들의 눈엔 그야말로 재앙처럼 보였다. 물론 산드라는 이번에도 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는 중이었다.
“진, 룬칸델, 네놈……!”
“협박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지, 안 그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주제에 지나치게 건방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제피린.”
“그 물건들이 잘못되면 너흰 다 죽어.”
“알고 있다니까? 난 일종의 도박을 하고 있을 뿐이지. 누구 패가 더 센지 보자고.”
설계도는 당연히 보호 마법 처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껏해야 종이 한 장을 보호하는 마법인 데다, 곳곳에 예민한 룬 문자들이 표기된 만큼 이대로라면 몇 초 안에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될 터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진의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킨젤로와 제피린 역시, 애초에 이들을 찾아올 때부터 모든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진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정확히는 비슈켈과 마르지엘라는 예상했지만 진도 내내 지플과 헤도에게 극한까지 몰렸을 테니 한 번은 방심해주지 않을까, 그런 옅은 기대감으로 제피린을 보낸 것이었다.
아니었다. 이번에도 진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수단을 아낌없이 이용하고 있었다.
“……꺼!”
“그냥은 못 끄지.”
“공격하지 않을 테니 끄라고요, 당장!”
그래, 이제 꺼도 될 것 같다, 막내야. 빨리. 탄다, 타고 있다!
형제들도 제피린과 같은 생각을 했다. 진이 설명하지 않았으나 그들도 이제 흐름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은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하마터면 조슈아도 그 대목에서 불을 끄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걸로도 조금 부족해.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아이, 망할, 빌어먹을, 악마 같은 새끼! 또 뭐가 부족하다는 건데요, 어!?”
진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와 킨젤로는 도박에서 졌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빨리 말해!”
“제피린. 너는 루테로 마법 연방을 떠날 때까지, 지플로부터 룬칸델을 호위한다. 동의하면 불을 꺼주도록 하지.”
제피린은 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미 고개를 마구 끄덕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