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15)
제 555화
142화. 협상들(2)
* * *
조슈아는 추락한 반면, 흑기사 제인을 기리는 의식은 장엄하게 이루어졌다.
하인들은 가슴에 조화를 품은 채 영묘 바깥에서 긴 묵념을 올렸고, 수호기사들은 검을 거꾸로 쥐어 가슴에 댄 채 영묘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다.
로사가 제인의 검은 투구를 영정처럼 들었고, 그 옆엔 무라칸이 서 있었다.
흑기사와 기수들, 원로들, 가문의 문사들과 수호기사들, 유모들이 그 뒤를 따랐다. 모두 검은 정복과 상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호정에 빼곡히 꽂힌 검들을 지나, 안뜰 가장 깊숙한 곳. 영묘는 행렬이 들어서기 전부터 피 냄새와 같은 진한 쇳내를 풍겼다.
흑검의 깃발이 영묘의 찬바람에 천천히 나부꼈다. 그 소리가 내부의 돌들을 타고 번져 꼭 울음처럼 들렸으나 정말로 울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울 자격이 있는 이들은 눈물을 삼켰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감정을 눌렀다. 검은 투구만이 간혹 어둠 속에서 번쩍 빛을 냈다.
이곳은 끝끝내 가문을 수호한 이들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공간.
흑기사들에게 영묘는 순례의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역을 저지르지 않는 한, 그들은 반드시 이곳에 묻히기 마련이니까.
영묘는 깊이 들어설수록 어두워졌다.
그리고 행렬은 점점 작아졌다. 입구에선 문사와 집사를 비롯한 권속들이 걸음을 멈추었고, 중간에선 원로들이 우뚝 섰다.
마지막까지 행렬에 남은 이들은 로사와 흑기사, 그리고 기수들과 무라칸이 전부였다. 끝에 이르러서는 서로의 윤곽만 보였다.
떨그럭…….
로사가 가운데 마련된 석관에 제인의 투구를 내려두었다.
“언젠가 검의 정원이 그 돌멩이 하나까지 남김없이 바스러지고, 바람에 흩어져 세상이 룬칸델이라는 이름마저 잊어버리는 날이 오더라도. 이 충정과 영광은 이곳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무라칸은 영기로 조화를 만들어 제인의 검은 투구 앞에 내려두었다.
“고마웠다, 제인.”
석관이 닫히고, 행렬은 한참 뒤에 영묘를 빠져나왔다. 나갈 때는 들어올 때의 역순으로, 앞쪽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다시 행렬에 합류했다.
이윽고 행렬이 영묘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대기하던 기사들이 검의 정원 곳곳에 조기弔旗를 올렸다.
그렇게 이른 새벽부터 정오까지 이어진 제인의 영혼을 영묘에 안치하는 의식은 끝이 났다.
본래 영묘 안치는 일주일 이상이 소요되나, 로사와 기수들은 가문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 약식으로 진행한 것이다.
고인의 시신이 없다는 것과 얼마 전 큰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 차기 가주였던 조슈아가 수감된 사실 등.
검의 정원엔 그 어느 때보다 뒤숭숭하고 착 가라앉은 기류가 흘렀다.
“착잡하네…….”
“그러게.”
데이토나와 헤이토나. 두 사람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를 피해 바깥채 처마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자연스레 기수들 일부가 그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서나 토나 형제 때문은 아니었다.
그 처마 너머, 조슈아의 독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여인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형제들이 조슈아의 아내로 알고 있는, 일리나 룬칸델이었다.
조슈아의 아내였다고는 하나 아무런 실권이 없고, 가문 내 입지마저 애매해진 그녀는 제인을 기리는 의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굳이 독채 바깥에 나와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가, 이렇게라도 제인을 기리기 위함이 아니라 제발 남편을 참작해달라는 무언의 호소를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심정은 알겠다만, 그냥 안에 있는 게 나았을 텐데.”
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저 모습을 보고도 그냥 두신 건 이유가 있겠지. 내버려둬, 아무 소용도 없고 저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 그만둘 거다.”
디푸스는 로사가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은 이유도 결국 조슈아의 복권에 아주 조금이라도 명분을 만들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두 사람, 뮤와 앤은 무감한 얼굴이었다.
진은 일리나가 아니라 뮤와 앤에게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자신이 아는 뮤와 앤이라면.
당연히 불안한 기색을 신경질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야 했다. 그녀들은 자신과 디푸스처럼 조슈아가 다시 복권되리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어머니가 조슈아가 언젠가 다시 복권되리라는 사실을 알려줬나? 아니, 어머니가 누님들의 도움 따위를 필요로 할 리는 없어.’
이제 와서 뮤와 앤에게 어떤 숨겨진 저력이나 각오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단지 마음을 굳게 먹은 건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건가.’
꼭 뮤와 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란, 뷔고 오라버니. 얘기 좀 해요.”
“우리?”
“예.”
“무슨 얘기?”
“이대로 끝장날 건가요? 하위 기수들도 뭉쳐서 가문 내의 한 세력을 담당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차후 누군가 왕좌를 차지했을 때 숙청당할 일밖에 없지 않겠어요?”
뮤는 진과 디푸스가 듣고 있는데도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이었다.
“뮤, 앤. 누가 너흴 죽인다는 거냐? 남은 상위 기수 중 누가 왕좌를 차지하더라도, 내 보기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막내가 왕좌에 오른다면 우린 그날 목이 떨어질 것 같은데요, 디푸스 오라버니.”
“어, 메리한테 자꾸 삐딱하게 굴다가 맞아 죽을 수는 있겠네. 가문이 이 지경인데 아직도 개인의 생존만 걱정하는 거냐? 너희 자리에서 너희 할 일을 해. 너넨 대체 언제 사람이 될래?”
그 말에 뮤와 앤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되는 건 이제 틀린 것 같네요.”
“란, 뷔고 오라버니는 얘기할 마음이 있다면 언제든 방으로 찾아오세요.”
뮤와 앤이 떠나자 페트로가 진을 찾았다.
“도련님, 가주 대행께서 찾으십니다.”
그러자 디푸스는 올 것이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와라, 진.”
“예, 형님.”
진과 디푸스가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2마탑 금고에서 얻은 함선 설계도 일부와 기계.
아직 진은 그것들을 로사에게 넘기지 않고 있던 것이다.
페트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로사는 중앙 대련장에서 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련장은 진의 가주 선언 이후 아직 복구가 다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가는 길에 비가 그쳤다.
“왔느냐.”
“예, 가주 대행.”
잠시 모자는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간밤에 예언자가 내게 전언을 보내왔다.”
로사는 설계도와 기계가 아니라 그에 대해 먼저 이야길 꺼냈다.
‘전언? 어머니는 예언자와 직접적인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었나.’
-어머니는 결코 예언자의 힘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 조슈아를 끌어내린 건…… 어쩌면 예언자를 향한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와 예언자의 사이가 조슈아만큼 가깝지 않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죠.
-그러니까 네 말은, 어머니는 예언자를 속박하며 차후 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고 조슈아를 복권시킬 생각이시다, 이거냐?
얼마 전 디푸스와 나눈 대화.
그때 진이 짐작한 것처럼 로사는 예언자와 직접적인 소통을 하지 못했다. 한 번도 직접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일리나의 정체도 알지 못했다.
그건 로사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예언자의 권능이 그만큼 뛰어난 것일 뿐.
“무슨 전언이었습니까?”
“자신은 미완의 설계도를 완벽하게 해석하고, 보완해서 함대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건은 아직 넘기지 않았으나, 진은 보고할 때 설계도는 현재 룬칸델의 기술력으로 해독 불가한 암호 마법 처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양산함 설계도가 일반적인 설계도와 달리 누구나 해독하고 복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함께 노획한 ‘기계’는 아예 어떤 물건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아울러 그 기계의 용도 또한 알고 있다고 하였다. 앞으로 있을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물건이라 하더군…….”
“가주 대행.”
“말하라.”
“예언자의 권능이, 무엇을 촉매로 구현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살아 있는 인간.”
그렇게 대답한 로사의 목소리엔 한 치의 가책이나 부끄러움이 스며 있지 않았다.
“이번 임무에서 너희들이 사용한 침투로와 굴들, 그리고 2마탑의 열쇠와 관련 정보는 모두 예언자가 사람을 재료로 사용해 얻은 것이다. 리칼튼의 죄수들이 사용되었지.”
독스가 리칼튼에서 목격한 인간 탑.
예언자가 조슈아의 소타 사막 임무를 위해 재료로 사용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나는 가문의 흑기사 한 사람을 리칼튼으로 보냈다. 그러나 기일이 넘어서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가 직접 그곳을 찾았을 땐 최소 만 단위 이상으로 추정되는 인간들의 뼈만이 남아 있더군. 아마 무고한 자의 뼈도 섞여 있었을 테지.”
진 역시 그곳으로 독스를 보냈고, 아직 그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스가 죽음에 처할 위기에 있던 당시 그를 도운 건 바로 로사가 보낸 흑기사였다.
“흑기사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예언자가 인간을 사용하는 걸 이미 알고 계셨으면서, 왜 리칼튼으로 흑기사를 보내셨습니까? 무엇을 확인하려던 겁니까? 예언자가 흑기사를 해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배제하신 겁니까?”
“내가 너의 모든 의문에 답할 이유는 없다. 그러려고 너를 이 자리에 부른 것도 아니지. 내 판단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를 꺾고 나아가 증명하면 될 일. 너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구나. 내가 추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면, 그건 네가 나를 겁낸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흥분을 가라앉혔다.
로사의 말대로, 그녀는 진의 의문에 반드시 답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지 않았다.
“본래 나는 그것들을 예언자를 통해 사용할 계획이었다.”
조슈아가 각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로사는 고민하지 않고 설계도와 기계를 예언자에게 넘겼을 것이다.
예언자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으나, 그의 모든 행동 원리가 ‘조슈아 룬칸델’을 위한다는 사실은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 절대적인 예언을 한 번이라도 직접 마주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조슈아의 기수 자격을 정지시키며 생각이 바뀌었다. 예언자와의 협상을 유예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네게 예언자보다 뛰어난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아라.”
히스터.
그리고 히스터의 기록 마법.
과거 ‘아리아 아울하트’를 찾으라는 상시 임무가 기수들에게 내려질 때, 조슈아가 예견했듯. 로사는 이미 진이 히스터의 생존자와 접촉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기록 마법이라면, 예언자의 권능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물건들을 활용할 방법이 있으리라는 판단.
그게 로사가 진을 부른 이유였다.
“제가 실패하면, 가주 대행은…… 예언자에게 그것들을 넘기겠다. 이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실패하더라도 그것들이 예언자에게 갈 일은 없을 겁니다. 가주 대행.”
“네가 실패하고도 가문에 물건을 넘기지 않는다면, 힘으로 빼앗을 것이다.”
“가문이 추구하는 것은 패도지, 패륜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힘을 긍정하고 사용하는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 행위입니다. 꼭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어떤 저주 같은 것에.”
“소타 사막에서 적들에 대해 느낀 바가 많을 텐데, 배부른 소리를 하는구나. 잘 들어라, 진 룬칸델. 나의 막내아들아.”
내게는 룬칸델의 생존과 번영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다.
그 무엇도 그 가치를 앞설 수는 없다.
“설령 그것을 실현하는 일에 인간이 억 단위로 죽어 나간다 할지라도, 결국 그 황폐한 투쟁과 싸움에 세상은 멸망하고 그 속에 남은 것은 오직 룬칸델의 일원 몇이 전부가 된다 할지라도.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은 언제나처럼, 어머니를 부수는 일이겠군요.”
“기대하마.”
진이 돌아서서 대련장을 나섰다.
로사는 진이 떠나고도 한참을 혼자 대련장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